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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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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
Livres des merveilles du monde東方見聞錄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 여행을 다닌 이야기를 기술한 여행기이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정보를 소개해 대항해시대를 연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여행자는 (진위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마르코 폴로이지만 여행기의 저자는 마르코 폴로 본인이 아니다. 마르코 폴로가 1296년경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에서 제노바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있었을 때 같이 갇혀 있던 죄수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기록했다고 한다. 이 책을 쓴 동료 죄수는 ' 루스티첼로 다 피사(Rustichello da Pisa)'라는 사람이었다. 이는 기록으로 확실히 남아있다.
2. 개괄적 내용
처음에는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인 니콜로, 숙부인 마페오가 동쪽으로 여행했다가 서쪽으로 돌아온 후에 마르코 폴로도 이를 따라 여행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서문에 따르면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인들이었고 처음에 무역을 위해 흑해 연안과 볼가강 유역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원나라의 사신을 만나 부하라(현 우즈베키스탄)를 거쳐 베이징까지 함께 이동하게 된다.이들의 두 번째 기행에서는 아들 마르코 폴로가 함께하며 쿠빌라이 칸이 요청했던 로마 교황의 친서를 지참하고 페르시아를 거쳐 다시 베이징까지 이동한다. 17년을 중국에서 보낸 후 이탈리아에 돌아올 때는 배를 타고 해상으로 페르시아까지 이동했다.
책의 후반부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본, 원나라의 수도,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 중국의 동남부, 인도양, 대초원 등을 기술하고 있다.
3. 명칭
한국에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는 일본에서 알려진 이름을 가져온 것이고, 원제목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한다. 중국 역시 이를 받아들여 마르코 폴로 유기(馬可·孛羅遊記)[1]라고 한다.마르코 폴로의 별명이 백만(Milione)이라 이탈리아에서는 ' 백만의 책'(Il Milione)[2]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왜 '백만'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는 확실한 정설이 없고 다음의 견해가 공존한다. 일단 동방견문록 책 머리에 떡하니 "밀리오네라고 불린 마르코 폴로가 구술했다"라고 되어 있어서 본인이 원치 않는 조롱성 명칭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 중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백만이라는 단위를 자주 인용해서. 허풍쟁이였으리라는 관점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다. 밀리오네는 백만장자라는 뜻도 있고 허풍쟁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중의 의미로 별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동방견문록에 백만이라는 단위가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 마르코 폴로가 속한 가문의 일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설명도 있다. 폴로라는 성이 흔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4. 일화
동방견문록은 현대인 기준으로 터무니 없는 내용이 많다. 특히 중국 외의 지방에 대한 내용이 그렇다. "내가 들은 얘기인데, 인도 쪽 어디에는 사람 잡아가는 귀신 같은 괴물새가 산다 카더라, 뭐 또 이상한 동물이 산다 카더라, 또 어떤 거는 내가 직접 봤는데 이러이러한 동물이 있는데 신기하지?" 등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근현대의 사람들은 거짓부렁이라고 비웃었고, 별로 의미있는 증거로도 채록되지 않는다. 다만 일설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협소한 고산지대에서 마르코 폴로 본인이 직접 봤다고 얘기했던 일부 동식물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각수에 대한 이야기는 코뿔소에 대한 이야기라는 해석도 있다. 또는 파미르 고원에 "마르코 폴로 양(羊)"이라는 산양종이 있는데 이 이야기일지도. 물론 확실한 근거는 못된다. 반면 중국에 대한 서술은 현대에 봐도 상당히 정확하다. 특히 그가 '천상의 도시'라고 지칭한 항저우의 경우는 서호 일대의 묘사가 상당히 정확하다.일본을 뜻하는 지팡구[3] 전설 역시 동방견문록에 나온 이야기이다. 단, 일설에 ' 초가집을 보고 금으로 착각했다'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팡구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들은 이야기만 적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그런 착각을 했을 순 있어도 마르코 폴로가 착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가 과장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나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서 약간 과장되게 적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둘 다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폴로는 일본에 대해서 원나라가 함대를 파견해 일본을 정복하고자 한 내용을 중심으로 적었을 뿐이다. 내용 대부분은 원나라 함대가 전쟁을 치르고 패배하고 태풍을 겪은 일에 대한 것이지, 황금에 대한 내용은 스쳐지나갈 뿐이다.
동방견문록을 중요한 원 사료의 하나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동방견문록 군데군데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데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또한 마르코 폴로가 과장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사례와 같이[4] 마르코 폴로의 말을 기록한 저자가 창작해 넣은 부분도 상당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야 떨어질지라도 일반인의 경험담으로 보자면 비교적 객관적이다. 애초에 동방견문록은 국가 기관에서 역사를 저술하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정사류 서적도 아니다. 이런 류의 경험담은 군대 무용담에서 알 수 있듯 부풀려서 말하는 게 보통이다.[5] 유럽의 어느 평범한 보부상의 아들이었던 소년이 며칠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고, 당시 유럽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신기술과 사치품, 희귀동물이 넘쳐흐르던 동방의 대륙을, 그것도 칸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귀족사회에서 견문하였으니, 일부러 부풀릴 생각 없이 설령 자기가 받아들인 감상만 적었다 해도 과장이 되기 쉽다.[6]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다른 대륙은커녕 자기 나라, 자기 동네도 벗어나보지 못한 당대 사람들 읽어보라고 집필한 것치곤 오히려 그런 욕구를 억제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의 인식 수준을 감안한다면, 현대에 보나마나한 거짓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을 당시에는 진실로 믿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7] 마르코 폴로의 별명이 백만인 이유는 자신이 경험한 거대한 제국을 묘사하면서 "백만"이라는 수사를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마르코 폴로의 인식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동방견문록에 등장하는 다양한 설화는 최소한 당시에는 사실로 믿어졌고, 따라서 당시의 기준에서 동방견문록은 사실을 기록한 여행기로 보아야 하며,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5. 진실성 논란
5.1. 다녀온 적이 없다는 주장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실제로 마르코 폴로가 중국까지 진짜로 왔다갔는지 의혹이 제기되어 위서 논란이 있다. 이는 1995년 영국의 중국 역사 전문가인 프랜시스 우드(Frances Wood)가 저서 'Did Marco Polo Go to China?'에서 제기한 의심이다.우드는 원나라의 기록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가 조금도 있지 않을 뿐더러, 게다가 서양인으로서는 충분히 이색적이었을 중국의 문물이나 풍속[8]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을 볼 때, 그냥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 자신이 경험한 일을 적었다기보다는 대충 어디서 주워들은 걸 기록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혹은 대필자가 사실은 원작자인데 자기가 한 일이라고 하면 유명해질 것 같지 않아서 당시 유명했던 폴로 가문의 이름을 빌려서 썼다는 설도 있다.[9]
동방견문록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없었기에 책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사람이 베껴쓰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동방견문록은 나오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순식간에 다른 언어로[10] 번역되어 출간됐는지라 새로 옮겨 쓸 때마다 조금씩 내용이 변질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동방견문록의 원전은 사라지고 다양한 판본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중요한 판본만 100여 종이 넘으며, 이 중에는 포켓북처럼 작은 판본부터 백과사전 크기의 대형 판본도 있다. 다만 14세기에 쓰여진 원전에 가까운 판본이 남아 있는 데다 여러 판본의 대조작업을 통해 원본에 대한 대략적 추증은 가능하다.
우드의 주장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학자답지 않고 빈약하다'고 반박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갔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은 마르코 폴로 생전에도 물론 있었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2011년 8월에 이탈리아 연구자는 마르코 폴로는 흑해보다는 더 동쪽으로 가본 적이 없다는 학설을 다시 내놓았다. 그 근거는 황제의 명을 받아 세계를 여행했다는 마르코 폴로에 대한 기술이 중국 역사서에 전혀 없다는 점, 자신이 참가한 2번에 걸친 몽골군의 일본 침공에 관한 서술도 매우 부정확하다는 점,[11] 몽골 함선에 대한 세부 묘사도 실제와 매우 다르고[12], 또한 중국어라고 기록한 여러 어휘들이 실제로는 페르시아어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걸 보면, 당시 이탈리아 상인들의 안방이었던 흑해 근해에서 페르시아나 타타르인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자기가 가본 것처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일본 원정에 참여했다고 말한 바가 없으니 이 역시 부실한 비판이다. 그는 원나라 원정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서술했다. 고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해서 거짓이라고 볼 이유도 없다. 당시 원나라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군사 원정을 다닐 때 몽골족 본대뿐 아니라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군대와 동행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이를 일일이 기록하지는 않았다.
중국학자 프랜시스 우드(Frances Wood)는 자신의 책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갔었는가?(Did Marco Polo Go To China?)》에서, "동방견문록이 여행기라기보다 정보가 집적된 카드 같고 내용에 일관성이 없어 여행의 단계를 재구성하기 힘들다."고 말하면서 논거를 확장해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 소유의 해외 상관이 있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머물면서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한다. 피에르 바야르 교수도 마르코 폴로가 여행 기간 동안 베네치아 외곽의 은신처에 있었다고 추정 중. 하지만 이들의 의견은 다른 많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재반박된 바 있고 현재는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관련 내용은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 바람.
5.2. 다녀온 것이 맞다는 주장
하지만 그가 실제로 다녀온 것이 맞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많다.-
마르코 폴로의 귀환에 동행했던 중국인 사신에 대한 《영락대전》의 기록
동방견문록 서장 제17장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떠날 때 동행했다는 세 명의 중국인 사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13]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명나라 시대에 편찬된 중국측 사서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의 《참적》(站赤)[14]에 등장한다. # #[15] 이때 동행한 사신의 이름은 이 책에만 등장하는 것이고, 영락대전은 중국에서도 그다지 널리 읽히지 않지만 진서라서 신뢰성이 높다. 또한 당시 그 사신에 대한 기록은 목적지였던 일 칸국의 자료에도 나타난다.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동방견문록에 정확히 언급되었기 때문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다녀왔다는 것만큼은 사실임을 입증한다. 훌라구가 보낸 사신의 이름은 우루라이/울라타이(兀魯鯠, Oulatai), 아비스아/아푸스카(阿必失阿, Apusca), 훠저/코자(火者, Coja)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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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 성벽을 철거한 사실을 기록한 유일한 외국인
동시대를 살던 중국인을 제외하면, 이런 기록을 남긴 사람은 마르코 폴로가 유일하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약탈에 대한 방어 역할이 목적이라 철거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상황인데, 원나라가 이민족 침략 왕조라서 가능한 일이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직접 가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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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도로 규정을 기록
쿠빌라이 칸이 제정한 법률에 의해 만들어진 도로라서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 당시 진나라와 북위의 만리장성은 별로 남은 게 없는 폐허 뿐이었고, 명나라 만리장성은 당연히 건축되지도 않았다. 또한 완전히 폐허는 아니라 해도 남아있는 게 있다 해도 만리장성은 '중화'와 '유목야만'과의 경계선이었고 원나라가 그 경계선을 넘은 침략 왕조인 이상 이를 그리 보여주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전족의 경우는 마르코 폴로가 몽골족이나 북중국의 거란족, 여진족, 서역의 색목인과 주로 접촉하고 한족과 많은 접촉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애당초 '이만큼 이색적인 것을 안 적었을 리 없다'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부분으로, 정말 봤다 해도 기억에 안 남을 수 있고 별 이유 없이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중국에 가보지 않았다'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시 원나라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것도 딱히 이해되지 않을 일은 아니다. 정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굉장한 업적을 쌓거나 혹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역적이 되지 않고서는 매우 힘든 일이다. 마르코 폴로한테야 원나라가 아주 대단했겠지만 원나라에는 색목인 관리가 많았기 때문에 마르코 폴로의 존재가 그리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일개 관리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마냥 상세하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다. 또한 만에 하나 기록에 실렸다고 해도 현재 원나라가 직접 남긴 문서나 기록물은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기에 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17] 그나마 원나라의 기록물을 토대로 명나라가 편찬한 원사가 남아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지만 후대의 기록이기에 어느 정도 생략이 되어있을 수밖에 없다.
2012년 4월에 독일 튀빙겐 대학교(Universitaet Tübingen)의 한스 율리히 보겔(Hans Ulrich Vogel) 중국학 교수는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중국에 갔다는 학설을 다시 내놓았다. # 그 근거로는 당시 원나라의 지폐의 제조과정과 모양, 사용에 관하여 정확한 기록을 썼다는 점, 당시 중국의 소금의 제조방법과 주요 산지를 독자적으로 정확히 기술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5.3. 결론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갔다는 것이 정설이고 그렇지 않다는 의심은 소수 의견 정도로 남아있다. 만일 폴로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 이야기들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른 어딘가에도 기록으로 남아있을 법한데, 마르코 폴로 이전이나 이후 수백 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서양인은 마르코 폴로밖에 없다.
[1]
마르코 폴로는 馬哥·孛羅라고도 한다.
[2]
일종의 의역으로, 축자역을 하자면 (정관사를 '그' 정도로 번역하면) '그 백만'이다. 서구어에서는 명사나 형용사에
정관사를 붙여 대표적인
고유명사를 지칭하는 용법이 있다. 한국어엔 그런 용법이 없으니 별 수 없이 '
책'을 넣을 수밖에 없다.
[3]
일본의 영어식 표기인 Japan 역시 유래는 동일하다. 단, 동방견문록에서 Japan이 유래한 것은 아니다.
[4]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쓴 회사의 경비 사용내역 및 보고서가 회사 밖으로 빠져나가 내용이 변형되었고, 대히트를 기록하지만 당시엔 출판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였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이 되었다.
[5]
사피엔스의 저자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박사과정 연구 분야가 이러한 류의 회고담이다. 구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시기의 군인 회고록을 주제로 하였고 국내에도 박사논문이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분야가 약간 다르지만 군인 회고록에서도 진실만을 위주로 적은 것은 거의 없으며 과장된 것이 대부분이다.
[6]
배고픈 상태에서 밥을 먹으면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려면 다른 사람의 설명과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데, 애초에 당시 중국에 가본 사람 자체가 거의 없으니 그런 작업은 아주 어렵다.
[7]
멀리 갈 것 없이 60년대~90년대 초만 해도 초능력, 마술 등을 진짜로 믿었던 사람, 심지어 정부기관들이 많았다.
[8]
예:
만리장성,
전족
[9]
실제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이미 죽은 사람이 책을 썼다든가, 한 사람이 도저히 남길 수 없는 분량의 업적을 달성한다든가, 가공의 인물이 남긴 책이 존재하는 등의 일들이 있다. 특히
연금술 관련 서적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쓴 책도 있다.
[10]
이 중에는 이탈리아 다른 지역의 방언으로 번역된 것도 있다.
[11]
원에서 일본을 침공하려면 반드시 고려를 거쳐야 하는데, 고려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오기가 힘들다.
[12]
동방견문록에는 돛대가 5개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발굴된 배의 돛대는 3개.
[13]
이탈리아어,
영어 "E’mandò tre ambasciadori al Grande Kane - uno de li quali avea nome Oularai, l’altro Pusciai, l’atro Coia" 부분이다.
[14]
역참을 뜻하는 몽골식 표현이다. 몽골어에서 잠(jam)은 길을 뜻하는 말이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관리를 잠치(jamchi)라고 하였는데, 이를 한문 기록에서 站赤이라고 적은 것이다.
# 한국 한자음은 '참적'이나, 몽골식 표현이기에 '참치'라고도 읽는다.
# 특히 몽골 관직명 중에서 '-치'를 한자로 '赤'으로 적은 게 상당수 존재한다. (
원 간섭기
고려의
필도치(必闍赤)의 예)
[15]
영락대전 권19418, 站字 - 站赤三. 최하단부에 兀魯䚟阿必失呵火者가 등장한다.
[16]
여담으로 "화자"는
고자의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17]
원나라
법전인
지정조격조차도 중국 내에서는 실전되었지만 한국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