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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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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طالبان[1] | Tali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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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문장
[2]أشهد أن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وأشهد أن محمدا رسول الله
하느님 이외의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
<colbgcolor=#000><colcolor=#fff> 활동 지역
[[아프가니스탄|]][[틀:국기|]][[틀:국기|]] (집권 국가)[3]

[[파키스탄|]][[틀:국기|]][[틀:국기|]]
결성 1994년 (민병대)
1996년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성격 민병대, 정치 단체, 종교 단체(1994~2021)
군사정부(2021~)
이념 이슬람주의
파슈툰왈리[4]
종교 내셔널리즘
아프가니스탄인 민족주의[5]
반동주의
지하디즘
종교 이슬람 ( 데오반드파)[6]
수장 모하마드 오마르 (1994년~2013년, 병사)
모하마드 만수르 (2015년~2016년, 전사)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 (2016년~현재)
주요 참전 아프가니스탄 내전 (1992년~1996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2021년)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명칭3. 성향4. 역사5. 지도부
5.1. 최고지도자5.2. 부지도자5.3. 기타 인물
6. 조직 구성
6.1. 아프가니스탄계 탈레반6.2. 파키스탄계 탈레반
7. 사건 사고
7.1. 1996년~2001년
7.1.1. 잔혹한 학정
7.1.1.1. 동물원에서의 기행7.1.1.2. 문화재 파괴
7.2. 2007년, 2008년7.3. 2009년7.4. 2010년7.5. 2011년7.6. 2012년7.7. 2013년7.8. 2014년7.9. 2015년7.10. 2016년7.11. 2017년7.12. 2018년7.13. 2019년7.14. 2020년7.15. 2021년7.16. 2022년7.17. 2023년7.18. 2024년
8. 탈레반이 승리한 이유
8.1. 듀랜드 라인에 따른 지리적 특수성8.2. 경제기반 황폐화에 따른 아편의 고착화
8.2.1. 탈레반의 아편에 대한 정책 변화
8.3. 무장의 현대화8.4. 미군의 무능함과 오판8.5.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승리
9. 반탈레반 저항군10. 평가
10.1. 비판10.2. 탈레반은 과장되었다?
11. 대외적 성향12. 전망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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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Taliban-in-Afghanistan.jpg 파일:941508_338886_2343.jpg
<rowcolor=#000,#fff> 일반적인 탈레반 전투원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대통령궁을 점령한 탈레반 전투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점령한 방법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테러 단체.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이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단일 여당이자 집권 세력이 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정규군, 즉 사실상의 아프가니스탄군이 되었다.[7] 병력 규모는 60,000에서 70,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2. 명칭

어원은 파슈토어학생들이라는 의미로, 아랍어 어원의 단어 탈리브(طالب)의 주격 복수 형태다.[8]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탈레반 조직은 파키스탄 북부 및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슈툰족 거주 지역에 산재한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9]의 교육 체계를 이수한 신학생들이 내전으로 인해 막장 상황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을 무력으로 종식시키고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을 위해 결성한 단체였고 이들이 자기들의 단체 이름을 '학생들'이라는 의미인 '탈레반'으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3. 성향

대체적으로 파슈툰족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이슬람 이전부터 있어 왔던 파슈툰족 전통 교리인 파슈툰왈리(پښتونولي‎, Pashtunwali)와 자기들이 해석한 이슬람 율법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다.

초기에는 비교적 상식적인 이슬람 율법 적용과 엄정한 규율, 파슈툰족 내에서 팽배한 하자라족 혐오 감정을 등에 업고 오랜 전쟁과 기존 정부의 무능에 지친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아 빠르게 성장했지만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빠르게 변해가더니 순식간에 반인륜적 집단으로 돌변했다.

공식적으로는 이슬람 수니파 하나피파에 속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이비 종교라고 보면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하나피파는 기원이 되는 아부 하니파부터 " 여성 환자가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는 중 신체 일부를 노출해도 상관없다"는 율법 해석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은 "여성은 의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도 안 된다"는 사이비 파트와를 내렸으며 파슈툰족의 관습법을 기록한 파슈툰왈리에는 '여성의 명예를 수호하고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여자를 죽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를 보면 참지 말고 적극적으로 저지하라'는 구절이 있다. 탈레반은 이 구절을 앞서는 것으로 판단해 파슈툰족 여자와 다른 부족의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불의로 여겨 여성을 죽이는 이른바 명예살인을 통해 이를 막는다.

축구를 강경히 탄압하였는데, 예전에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을 때 축구를 금지하고 축구장을 처형 장소로 썼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저항할 정도다. #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은 본부가 카타르에 망명하기도 하였다. 2024년 현재는 축구 탄압을 멈추어서, 최상위 축구 리그인 아프가니스탄 챔피언스 리그를 비롯하여 지역별 디비전 리그가 진행되고 있고, 아프간 축협도 카불로 돌아와 행정을 수행하고 있다. 그나마 축구 탄압을 멈춘 것도 남자 한정이며, 여성은 축구 포함 스포츠를 하는 것은 현재도 엄두를 내지 못한다.

4. 역사

탈레반의 사상적 기원은 인도 출신의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신학에서 출발한다.[10] 자세한 내용은 자마아티 이슬라미 문서 참조.
마우두디는 여성이 시장이나 대학, 극장이나 식당에 오가며 남성 무슬림 눈에 보이는 것이 도덕적 타락을 조장한다고 생각했었지요. 또한 예술, 문학, 음악, 영화, 춤, 화장은 부도덕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이르판 아흐마드

마우두디는 "여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집 밖으로 외출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가 히잡으로 가리지 못한 손이나 얼굴 혹은 눈 등이 부도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눈만 내놓고 다 가리는 니캅마저도 아불 알라 마우두디에 의하면 부도덕한 복장에 해당하며, 그가 허용한 유일한 여성 복식이 바로 부르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주장을 내세운 아불 알라 마우두디 자신은 뉴욕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같은 맥락에서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여성의 참정권이나 정치 참여를 "이슬람적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마우두디는 인구성장이나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부정의와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는 신경을 덜 썼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은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없으며, 단순히 샤리아 질서의 부재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자 서구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와 사회가 완전히 이슬람화 된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다 사라질 것이며, 따라서 무슬림들은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슬람 신정국가를 세우고 관리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우두디와 자마아티 이슬라미 / 레자 나스르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사상을 계승한 파키스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군부의 어용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의 지원에 힘입어 탄생한[11] 탈레반은 모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내전 중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무자헤딘 출신과 마드라사에서 근본주의 신학을 주입받은 전쟁고아들, 그 중에서도 남부 파슈툰족 출신들이 모여서 결성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많은 지방 군벌 출신으로 보이지만 이들은 처음에는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군벌 집단의 만행을 제지하고 이후 하자라족 완전 박멸을 주장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12]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전국에 난립하는 군벌들을 하나하나 제압하면서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종식시키고 1996년 9월에는 수도 카불에 입성해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90%[13]를 통치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선포하면서 정권을 수립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전세계, 심지어 이슬람권 국가들마저 경악할 초강경 샤리아에 기반한 공포정치를 펼쳤다.

2001년 9월 11일에는 9.11 테러를 일으킨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의 인도를 요구한 미국의 요청을 거부하다가 결국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해 미군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에게 축출당해 아프가니스탄 남부나 서쪽 파키스탄과의 국경지대로 도망갔고 일반 아프간인들에게 한 동안 백안시당하는 신세였다.

2003년은 탈레반에게는 천운의 기회였는데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의 주력이 이라크에 집중되어 한 숨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부동맹 출신의 하미드 내각은 성향 가릴것 없이 근본적으로 이 집단 저 집단을 끌어모았기 때문에 따로국밥이었으며 미국과 서방국가들로부터 1년에 수백억 달러라는 가히 어마어마한 거금을 지원받고도 태반을 횡령 및 착복으로 날리는 극도로 부패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14] 탈레반은 반사이익을 얻어 다시 세를 불려갈 수 있었다.

이라크 내전 이전까지는 알카에다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위험한 테러 단체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이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와 그들의 하수인을 자처하면서 준동하기 시작한 보코 하람에 의해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그들이 몰락하고 나서도 무차별 테러 공격으로 수많은 사상자들을 내 악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5. 지도부

파일:탈레반 지도부.jpg
2021년 탈레반의 카불 점령 직후 지도부 #

5.1. 최고지도자

호칭으로는 신자들의 총사령관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인 아미르 알무미닌(أمير المؤمنين / ʾAmīr al-Muʾminīn)[15]법과 교리에 정통한 사람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아랍어 물라(ملا / Mullā, 영어로 Mullah)를 차용하여 쓴다.

5.2. 부지도자

  • 모하마드 야쿠브 : 탈레반 창설자, 탈레반 군사 작전 총괄

5.3. 기타 인물

  • 압둘 하킴 : 사법부 총괄

6. 조직 구성

6.1. 아프가니스탄계 탈레반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해 무력을 사용하여 극단적인 신정일치 종교 사회를 창조하려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경전[16]을 현실정치에 적용한다면서도 막상 쿠란의 뜻 자체를 비윤리적으로 써먹고 온갖 비도덕하고 비인간적인 만행을 일삼는 것이 이들의 실상이다. 후술할 2001년 <한겨레21> 바미안 석불 관련 기사에서 나오듯 최고성직자의 교령은 절대권을 지닌 터라 불가역적이고 탈레반 집권기에 단 한 번도 번복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일부는 쿠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1999년 한겨레신문 정문태 기자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문화장관 아미르 칸 무타키를 만났을 때 반지성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정 기자가 쿠란을 공부하여 "너희들이 해석하는 쿠란은 일반적 쿠란 해석과 다르다. 원래 쿠란에도 없는 행위를 만들어서 정당화하는데, 이건 범죄자들이 쿠란을 조작하는 거랑 차이가 뭐냐?"라고 반박하니 결국 말이 막힌 문화장관은 " 무슬림도 아니면서!" 라고 버럭거리고 말문을 막고 나가라고 했다.[17] 정 기자도 책자에서 "그놈을 만나 이야기해보니, 제대로 미친 광신도였다"고 혐오감을 감추지 않고 비난했는데 무슬림 지인들에게 이 일을 말하자 그들도 "탈레반이 그만큼 미친 놈들이다"라고 이해해 줬을 지경이라고 했을 정도다.

덕분에 주류 이슬람 세력에게도 반쯤 이단시당하며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정권 구성을 추구하는 이들의 사상은 태반이 왕정인 아랍 이슬람 국가들에게 외면당했고 이란은 시아파가 국교였기 때문에 수니파 꼴통인 이들을 멀리했다. 단순히 소원한 관계가 아닌 말 그대로 적대 관계로 이란은 아프간 전쟁 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묵사발내는 꼴을 보고서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람보 3에서 나오는 무자헤딘들처럼 탈레반이 소련과 싸운 독립투사라는 잘못된 인식이 대한민국에서 횡행한 바 없지 않으며 탈레반에 참여한 개인으로만 보면 무자헤딘 활동을 했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탈레반 자체는 무자헤딘 연립정부 결성 이후 파키스탄 부족 지역에서부터 세를 확장하기 시작한 신생 조직이다. 사용하는 무기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미국이 지원해 준 미군의 제식병기들로 미국으로서는 자기들이 준 무기 가지고 자기들이 당한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1994년 내전에 빠진 무자헤딘 연립 정권을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1996년 수도 카불까지 장악하는 등 아프간 영토의 80%를 수중에 넣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으나 어디까지나 파슈툰족이 주류를 차지하는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제압했을 뿐 우즈베크인 타지크인이 주류를 이루는 북부 일부는 끝내 점령하지 못했으며 이렇게 소수민족들이 무장한 세력을 통틀어 북부동맹이라고 불렀다. 2001년 당시 유엔 의석은 여전히 북부동맹 정부가 가지고 있었지만 탈레반 정권은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대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9.11 테러 직후 단교당했다.

6.2. 파키스탄계 탈레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7.1. 1996년~2001년

7.1.1. 잔혹한 학정

샤리아는 정치나 정당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음식, 의복, 신발, 무기만 줍니다. 우리는 1400년 전 선지자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19] 지하드는 우리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선지자 시대를 재현하고 싶고, 지난 14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원했던 것만을 실현하고 있습니다.[20]
탈레반 대변인이 2000년에 남긴 발언. 그리고 진짜로 아프가니스탄의 문명 수준을 1400년 전 수준으로 퇴보시켰다.

탈레반은 집권 직후 공산주의에 지친 이슬람주의자들과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민주 캄푸치아의 사이에 있는 수준의 극악한 학정을 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수니파 이슬람 중에서도 데오반드파 이외의 모든 종교/종파를 탄압하고 후술할 폭정을 저지르며 세계적으로 비판받았다. 이들은 북부 지역에 파슈툰족이 지배하는 국가를 재건하고 하나피즘 이슬람 법학파와 최고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의 종교적 지도에 따라 이슬람법의 엄격한 해석과 함께 법과 질서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이슬람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권선징악부(파슈토어로 د فضیلت تبلیغاتو او د معاونیت مخنیوي وزارت)라는 일종의 종교경찰청을 두었으며 해당 부서 조직들은 길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붙잡아서 쿠란이나 하디스 관련한 질문을 한 뒤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회초리로 손이나 발을 때리고 다녔다. 쿠란에 나오는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금하라 الأمر بالمَعْرُوف والنَهي عن المُنْكَر“라는 말을 실천시키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부서인데 탈레반은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한다”는 명분으로 (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의 전통적인 마드라사에서 어린이들을 교육시킬 때 사용하던 방법이었던) 구타 체벌을 일반인 성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였다.[21] 즉,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스파르타식 근본주의 신학교로 개조하려고 했다.

하디스 해설집에는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금할 때 칼을 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는데 탈레반은 이를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해서 칼 대신 몽둥이와 채찍, 그리고 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르지 않는 국민들을 마구 처벌하였다. 대도시 시내 곳곳에 저격수들을 배치하여 시위를 벌이는 사람 혹은 풍기문란범들을 즉결처형하던 것도 바로 해당 부서로, 아픈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어가던 아이 엄마를 “남자 없이 혼자 외출하는 음란한 여자”라며 저격수가 총살한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대중 매체, 비이슬람 종교, 대중문화, 가치관, 인권, 복식 등 모든 자유를 모조리 금지했는데 노래, , 카드놀이, 체스, 영화 감상, 화장품, 장신구 착용, 그림 그리는 것까지 모두 금지되었다. 영화나 그림은 '형상을 묘사한 것이니 우상숭배'라는 논리[22]를 폈는데 심지어 아랍어로 그림처럼 그리는 대중문화인 핫(Hat)조차도 금지했다. 천여 년 동안 이슬람권에서 인정받아 오던 핫을 금지하면서 대대로 핫을 그리고 새기던 장인들은 격분했지만 이들도 따르지 않으면 구타 및 구금, 사형을 당했다.

서구식 학교 도서관, 극장, 박물관 등을 모조리 폐쇄하고 텔레비전과 영화필름 및 문화유산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남김없이 부수고 파괴했으며 CD와 카세트 테이프 등은 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렀고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음악가들과 시인들, 예술가들을 모조리 탄압하고 구타하고 처형했다. 이들이 무슨 록 음악 같은 걸 하는 것도 아니고 중세 이슬람 시기부터 번성했던 시문학이나 전통 음악들을 하고 이어나가는 문화유산 전수자들이자 장인들인데도 탈레반에게는 이들마저 때려죽여야 할 타락한 놈들로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이미 고인인 가수들의 무덤에 가서 총을 난사하는 짓도 저질렀다. 절도범들은 전통적 이슬람 형벌에 따라 손목을 잘랐고 재범일 경우 발목을 잘랐다.

여성의 근로권, 복장 자유권 등 모든 기본적 권리를 박탈하고 의료, 교육, 법률의 권리마저 빼앗았다. 여성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면 여성 변호사만을 선임할 수 있지만 여성에 대한 교육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여성 변호사가 있을 수가 없고 여성의 몸은 여성만이 진료할 수 있는데 여성 의사가 있을 수 없는 식이었다.[23] 심지어 남녀 공학 학교를 공격하기도 했다.

세속주의를 추구한 군주정 시대와 공산주의 시절의 영향으로 카불에는 교육받은 여대생만 8천명이 있었고 아프간의 의사들의 40%, 공무원들의 50%, 교사의 70% 가량이 여성이었는데 탈레반들은 이들의 일과 학업을 모조리 강제 중단시키고 집에만 있기를 총칼로 강요했다.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은 모조리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24]

그뿐만이 아니라 부르카를 여성들에게 무조건 강제로 입게 하고 안 입으면 사형시킨 것도 모자라 여성 혼자 밖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했다. 남자 가족과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돌아다니는 여자는 부르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길거리에서 구타하는 게 일상이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묘사에 따르면 운이 정말 좋으면 "왜 남자 없이 다니느냐"라고 점잖게 꾸짖는 정도고 일상적인 것이 걷어차이고 욕설을 듣는 것이었다고 한다. 수도 카불에서는 통제가 더 심해서 집안의 갓난아기가 아파서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 여성을 보고 탈레반들이 수상하게 여기고 저격해서 살해하는 경우마저 보고되었다. 여성이 매니큐어를 칠하다 걸리면 손가락을 잘랐다. 남자들에게도 아프간 이슬람식 전통 복장과 터번을 강요했으며 수염을 기르게 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말을 걸거나 웃어도 처벌받기 일쑤였다. 전후 과부가 많던 상황에서 과부들의 경제활동을 사실상 봉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언론 탄압도 극악하기 짝이 없었는데 탈레반의 명령으로 모든 TV 방송국은 완전히 폐쇄되었고[25] 카불의 TV 방송국은 군 막사로 개조되었으며 TV를 가진 것이 적발되면 벌금, 태형, 투옥을 당했다. 공영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 카불'은 '샤리아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탈레반의 통제 하에 24시간 쿠란 성전가[26], 교리에 대한 설명과 탈레반 정권에 대한 선전, 극히 검열된 뉴스만 방송하면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 신문은 인쇄된다고 할지라도 논평, 사진, 독자의 투고를 싣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언론인들은 외국 언론과 함께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27] 2000년에 탈레반 정부는 '이슬람의 적들'이 생산한 정보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영자 신문인 The Islamic Emirate를 창간했다. 물론 인터넷도 '음란하고 부도덕하며 반 이슬람적인 자료를 방송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와 인터넷전화를 통해 파키스탄과 연락하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28] 정작 탈레반은 1998년부터 공식 사이트를 운영했다.

그래서 미군 카불에 들어서고 ISAF연합군이 치안 활동을 시작했을 때 시민들은 탈레반이 카불을 지배한 1996년부터 몰래 숨겨둔 인도 드라마, 인도 영화( 발리우드) 및 이란 영화 녹화본과 주변 나라들인 인도, 파키스탄 연예인 사진을 다시 팔았다. 아프간도 인도 문화권이라 인도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고 이웃나라 이란 영화도 인기를 끌었는데 탈레반이 영화 자체를 못 보게 했기 때문이다.[29]

연좌제는 기본이었고 아프간 국민들의 탈출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았으며 탈출하다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가했다. 탈출에 성공해도 탈레반 정부가 정보원들을 망명지로 보내거나 망명지 내 대사관 직원들로 하여금 망명자를 살해하거나 체포해 송환한 다음 엄벌을 가했다. 거기다 국민들의 해외여행도 금지시켜 메카행 비자 신청을 할 수 없어서 국민들은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인 메카 성지순례를 할 수 없게 된다. 물론 고위직이야 메카 순례도 하기는 했지만.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은 단연코 전 세계 최하위를 달렸고 법률도 완벽히 마비되어 이슬람 샤리아의 전통적인 형벌들이 법률을 대신했다. 심지어 아이들이 하늘에 연을 날리는 것조차도 '알라의 하늘을 더럽힌다'며 처벌 대상이었다고 하며 연날리기하다가 걸려서 맞아 죽은 아이들까지 실제로 있었다. 현대적인 치약의 사용을 금지했는데 무함마드는 7세기에 현대식 치약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나무뿌리로 양치를 했기 때문에 치약은 비이슬람적이라는 이유였다.[30] 실상은 치약조차 제대로 공급이 안 돼서 불만이 나오자 내린 조치다. 탈레반은 ' 발전소가 없어서 전기가 부족하다'는 불평이 나오자 " 선풍기는 사탄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는 파트와도 발표했는데 나중에 탈레반 정권이 전복되고 나서 보니 탈레반 주요 인사들 집에는 에어컨 하이파이 스테레오 시스템이 있었고 모하마드 오마르 집 마당 축사에는 선풍기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인터뷰에서 북부동맹 병사가 "오마르가 국민들을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 라고 말하며 분노하는 모습이 잡혔다.

남성들은 수염을 자르지 말아야 했고 면도하는 이들을 수염이 날 때까지 감옥에 가두거나 공개 처형할 정도였다. 최소한 턱 밑으로 주먹 한 줌 정도는 긴 수염이 되어야 처벌을 면했다. 몽골계 인종인 튀르크 하자라인 키르기즈인 남성들은 몽골계 혈통상 인도아리아계 파슈툰인이나 타지크인들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못 길러서 이들만 어느 정도 예외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물론 키르기즈나 하자라, 우즈벡, 투르크멘 등 튀르크계 차별은 여전했기 때문에 결국 튀르크계 종족들이 일심단결해서 북부동맹을 구성하고 페르시아인 혈통의 타지크인들을 끌여들였는데 타지크인들도 파슈툰인에 차별받는 처지였다.

그때그때 자기들 배알 꼴리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서 축구 경기장에 몰아넣고 처형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허용되는 스포츠가 권투였는데 문제는 탈레반의 강압으로 권투 선수들이 면도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얼굴에 난 상처로 채점하는 데 지장이 된다고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OCA)가 이걸 받아주지 않자 아시안 게임도 불참했다.

다른 스포츠는 경기는커녕 선수들의 생존도 어려워 죄다 망명하거나 살해당했다.[31]

여성 선수는 탈레반에서 금지 정책을 내려 이보다 더 심했기 때문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는 탈레반의 여성 탄압을 구실로 올림픽 참가를 금지시켰다.

축구는 예외적으로 허용했는데 축구 선수에게 긴바지를 입히고 턱수염을 기르게 하는 것은 기본에 축구 경기장 자체를 처형장으로 사용하고 경기가 있는 날에도 축구 경기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처형했다. 오히려 사람이 많을 때 처형 장면을 공개함으로써 공포정치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크다.

나체의 인간이 그려져 있는 의학 교과서는 음란물이라고 의학 교과서를 모아서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탈레반 아래에서 공부한 의사들이 책 없이 학교 교수의 기억력과 구전에 의지해서 공부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힌두교도들은 인식표를 차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과거에 중용되었던 타지크인, 우즈벡인, 하자라인 공무원들은 모조리 파슈툰인으로 대체되었고, 모든 장관들은 이슬람 성직자들로 임명되었다.

무고한 비파슈툰인들을 미국과 협력했다며 학살해 놓고서는 '이슬람을 수호했다'며 자화자찬해서 자기네 사이트에 동영상까지 올렸는데 이는 현재진행형 악습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문학작품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등장한 탈레반은 플라밍고 그리기를 좋아하는 화가에게 플라밍고의 다리가 음란하다고 "플라밍고에게 옷을 입혀 점잖게 만들던가 죽던가를 택일하라"라고 고문하기까지도 했다.

극단주의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더 극단적인 사례로는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가 벌어져서 지식인 계층이 전멸한 후 초등학교에서 과학실험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32] 탈레반보다 온건한 편인 개신교 극단주의 성향의 미국인 목사이자 정치인인 앤소니 컴스탁도 이랬는데 컴스탁 덕분에 19세기 미국에서 해부학 그림을 음란하다고 우편으로 보내는 게 금지되었고 대학에서조차 의학 서적을 금지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러다보니 시사 만화로 알몸인 아기를 낳은 임신부도 음란하다고 고소하는 컴스탁이라고 신랄하게 까며 비판하는 만화까지 나올 지경까지 갔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이나 조지 버나드 쇼, 헨리 제임스 같은 내로라하는 당대 미국 문인들에게 미친 원숭이라느니, 진화가 덜 된 종교쟁이라고 갖은 쌍욕을 먹으며 크게 비난받았다.

이슬람이 가장 패권주의적이고 억압적인 모습을 보였던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그리스 식민 통치 시기의 인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는 그리스인들이 꽤나 우대받았는데 2등 신민으로 인정받아 식민지 총독 및 고위대신으로 임명되면서 비무슬림/비튀르크인 중에서 가장 대접이 좋았다. 이슬람을 믿던 아랍인들조차도 비튀르크인이라 3등 신민으로 취급되어 그리스인들보다 밑이었다. 오스만은 심지어 정교회 최고 수장도 그리스인들에게 맡겼고 동방 정교회라는 이름도 그리스 정교로 묶어 버렸다. 이에 불가리아 세르비아 같은 다른 정교회 국가들은 반발했고 독립 후에 발칸 전쟁 및 여러 갈등도 벌어졌지만 이는 이전부터 서로 사이가 나빴던 점도 작용했다. 오스만의 힘이 약해지면서 19세기 그리스 독립이 이뤄질 때 상당수 그리스인들도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라틴인들의 로마 제국도 그리스인들이 주축을 이루던 제국으로 변모했는데 오스만 제국도 시간만 지나면 그리스인의 제국으로 동화 못 할 게 없을 텐데 섣불리 독립이라니?"라고 했을 정도다. 이처럼 관대한 편이었지만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에소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롯하여 아시리아인 대학살, 아랍 무슬림 학살이 벌어졌다. 사실 이는 학살 주체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라서는 아니고 근대화와 개혁에도 수세로 돌아서자 내부의 적이 있다면서 소수민족들을 그 원흉으로 지목하며 학살했던 것이었다 더구나 그리스인-오스만리(서부 튀르크인)은 이미 섞일 만큼 피가 섞인지라 유전자가 비슷해져서 생김새도, 먹는 음식도 의상도 똑같아져 구분이 안 됐기 때문에 튀르크인임에도 기독교도면 그리스인, 그리스계 부계 혈통을 지녔음에도 이슬람이면 튀르크인으로 나뉘어 일방적으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으며 대개 기독교도 튀르크인이 그리스인으로 분류되어 생판 처음 보는 땅으로 강제이주해야 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런 탈레반 정권 하에서도 순기능은 있었다. 마약 사용자와 거래자, 아편 재배자 모두를 엄격히 처벌하면서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악명 높은 아편 생산량은 이전 대비 99% 감소했고, 바차 바지라는 소년 성노예 풍습 역시 엄격히 금지되었다.
7.1.1.1. 동물원에서의 기행
관련 서적의 증언에 따르면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던 1995년에 일어났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도 있다. 어떤 탈레반 대원이 카불 동물원에 쳐들어가서 우리에 뛰어들어 곰의 코를 잘라버렸다고 하는데 곰은 수염이 짧기 때문에 형벌을 집행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또다른 탈레반 대원은 너무나 자신감에 도취되어 사자 우리에 뛰어들어서 "나는 사자다!" 라고 외치다가 사자에게 물려죽었다고 한다. 탈레반은 이 사자에게 수류탄을 던져 눈을 멀게 했고 코 잘린 곰, 눈먼 사자, 늑대 2마리가 당시 카불 동물원에 남아 있던 유일한 동물들이었다고 한다. 즉, 대놓고 동물 학대를 저지르는 잔혹함을 보였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전 세계의 공분을 샀다.[33]


이 다큐멘터리는 BBC에서 2018년 카불의 불안한 치안 상황을 취재한 영상인데 13분 17초경에 위 서술에 나왔던, 탈레반 대원을 물어죽이고 수류탄에 눈이 멀었던 사자 이야기가 등장한다. 1995년에 탈레반 대원을 잡아먹었던 해당 사자가 영웅처럼 재건된 카불 동물원 안에 동상까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7.1.1.2. 문화재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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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9일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였다. 이교도 잔재 청산이 명분이었는데 이는 엄연한 문화재 반달리즘이다.

사실 탈레반이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같은 와하브파 수니파 국가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면서도 이슬람 기준으로 소위 '완벽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는 인정 못 받는 이유가 바미안 석불 파괴인데 이슬람 이전 문물은 존중해 주는 쿠란의 교리[34]를 우상 파괴 제한 교리를 앞세워 명백하게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간에도 불교 문화가 스쳐지나간 흔적으로 암벽에 조각한 석불들이 남아 있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했는데 이 불상들을 탈레반이 죄다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는 장면을 CNN에서 포착했다. 동굴 내 불화도 전부 화염방사기로 반달해 버리는 것은 물론 아프가니스탄 박물관에 있는 유적들을 도끼로 박살내서 사막에 갖다버렸는데 당시 박물관 직원들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문맹이 많았던 탈레반 대원들이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바미안 석불은 1998년 바미안 지역 점령 시부터 로켓포로 소석불을 파괴하는 등 단계적으로 파괴했고 탈레반 측은 2001년 폭파 순간까지도 언론사 기자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았다.

물론 이전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게 탈레반의 실상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전 세계가 탈레반의 실상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사실 잘 보면 폭파되기 전의 사진에서도 얼굴이 이미 반쯤 날아가 있는데 이미 몽골 제국 시절 칭기즈 칸의 군대가 석불의 안면부 및 팔을 태웠고 무굴 제국의 이슬람 광신도 황제로 유명한 아우랑제브의 군대는 다리 부분을 깨뜨렸는데 몇 번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팔, 다리, 머리가 없어졌다.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면 가즈니 왕조 튀르크인 정복자 무함마드도 이를 날려 버리려고 했다.[35]

다시 말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탈레반은 이교도 탄압에 열성적이었던 무굴 제국 아우랑제브 황제도 부수지 못한 석불을 날려 버리는 대단한 위업을 달성했다. 여기에 사암 석불 특성상 지진 및 누수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훼손되었으며 1940년대 및 1960년대에 프랑스와 인도 유적보수단이 각각 시멘트로 보수공사하려다 더 훼손시켰고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내전 때마다 석불 권역을 군사기지로 썼다. #

탈레반 정권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영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비롯한 몇몇 대형 박물관은 돈을 주고 사겠다고 애원했지만 소용 없었다.

세계불교도연맹이나 티베트 망명정부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물론 태국이나 스리랑카 같은 불교 국가들은 일제히 비난 성명을 냈으며 불교 전통이 깊은 일본에서도 "석불을 파괴하지 마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슬람 국가들도 파괴하지 말 것을 탄원했고 후원자인 파키스탄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이란마저도 "제발 이슬람 이미지 그만 말아 먹으라" 라고 했지만 쇠 귀에 경 읽기였다. 결국 이란 정부는 공식적으로 "탈레반은 사이비 종교[36]이다"라고 선포했다. 사실 이란에도 쿠샨 왕조 시절 불교 흔적들과 페르시아 시절 조로아스터교 흔적이 많고 지금도 중부의 야즈드에는 조로아스터교가 남아 있으며 야즈드 조로아스터교도나 북부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들은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하고 나서도 전혀 박해받지 않았다. 사실 조로아스터교 박해를 안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이란의 민족정체성이자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겨지는 페르시아 제국을 부정하는 행보를 보인다면서 민족주의 문제를 제대로 긁힌 이란 국민들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바람에 그 서슬 퍼렇던 호메이니도 다급하게 '페르시아 제국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하고 꼬리를 내려야 했으며 아예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란의 상류층을 차지하기까지 했다.[37]

실제로 이란과 아프간은 탈레반이 무너지는 2001년 이전까지 적대 관계를 유지했고 이후에도 사이가 좋지 않다.

폭파 후 중국과 일본은 공식 성명을 통해서 이를 규탄했고 유네스코 유럽연합도 비난했지만 탈레반은 "돌과 바위 좀 부쉈는데 왜들 저리 호들갑이지?", "내정간섭 좀 그만하자"라고 뻔뻔스럽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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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은 파괴된 현장에 기자들을 불러놓고 자랑했다. 그런데 돌상 파편 조각을 해외 불상 수집가들이 돈 주고 산다니까 몰래 빼돌려 일부를 팔아 버린 탈레반도 있었다.

모하마드 오마르에 의하면 "사실 어차피 아프가니스탄에 불교도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니 처음부터 파괴할 생각은 없었는데, 서양인들이 민중보다 석불에 더 신경쓰는 것 같아서 파괴했다"고 했는데 사실 아프가니스탄에도 극소수 힌두교도, 시크교도가 엄연히 남아 있었고[38] 그들은 노란색 터번을 쓰라고 강요당하며 차별받았다. 그래서 인도로 도망가거나 한 사람도 많았다. 시아파 무슬림도 차별받던 건 마찬가지라 수니파 파슈툰인들의 터번과 다른 색상과 모양의 터번을 강요당하고 북부 일대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억눌렸다. 몽골계 유목민족 하자라족이 대개 시아파인지라 아리아계 백인종인 파슈툰인과는 인종 차이까지 더해져 더욱 차별받았다.

바미안 석불이 너무 유명해서 그렇지, 탈레반이 파괴한 유물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카불 박물관에 불상 유적들을 도끼로 때려부순 후 사막에 갖다버리거나 동굴의 불화 유적들을 화염방사기로 파괴하는 행동을 반복하였는데 석굴 벽화를 제외하고 탈레반이 직접 도끼와 망치로 때려부순 것으로 확인된 유물만 2,100여 점이다. # 이 때 탈레반 내부에서도 개념이 있는 사람들은 '이건 역사에 죄를 짓는 미친 짓이야'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그들의 주장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이들의 문화재 파괴 행위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에서 떠돌아다니는 국보급 유물도 상당한데 대표족인 사례가 신라 금관과 유사한 양식성으로 주목된 틸랴테페 금관을 비롯한 고대 아프가니스탄 유물들로 수십 개 국가를 떠돌고 있는데 2016년에는 한국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었고 현재는 경북 경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된다. #

7.2. 2007년, 2008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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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교회 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이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인지도를 얻었음과 동시에 여권법에 따른 여행금지국가 목록을 개설한 원흉이 되었다.

1년 뒤인 2008년 8월 27일,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일본인이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 결국 목숨을 잃었다. #, #

7.3. 2009년

파일:attachment/tailbaan_parkistani_HQ_attack.jpg

심지어 2009년 10월 11일에는 파키스탄 육군 사령부를 공격하였다. 단 수십 명의 공격으로 사령부는 쑥대밭이 되었다.

2009년 12월 30일에는 자폭테러로 CIA 요원 7명을 죽였다. 기사

7.4. 2010년

2010년 1월 1일에는 파키스탄 북서부의 배구장에서 자폭테러를 일으켜 80여명이 사망했다. 기사

2010년 2월 20일에는 아프간 연합군의 헬만드 주 공세 8일 만에 본부로 추정되는 기지를 점령했다고 한다. 기사

2010년 3월 26일에는 파키스탄군이 탈레반 반군 24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기사

2010년 4월 3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독일군이 아프간군을 탈레반으로 착각하여 차량에 총격을 가해 아프간 군인 6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기사

2010년 4월 5일에는 페샤와르에 있는 미국 영사관이 집중 공격을 받아 경호원과 테러범 등 적어도 7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기사

2010년 4월 12일에는 아프간 주둔 나토군이 오인사격을 하여 아프간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기사

2010년 5월 19일에는 탈레반이 카불 소재의 바그람 공군기지를 공격했는데 탈레반 대원 7명이 사망했고 ISAF 소속 외국군 5명이 사망했다. 기사

2010년 6월 30일에는 탈레반이 나토군 기지를 습격했는데 탈레반 대원 8명이 사망하고 나토군 2명이 부상을 당했다. 기사

7.5. 2011년

2011년 5월 22일에 해군기지인 메흐란을 공격하여 파키스탄 해군에 다수의 인명 피해를 내게 하고 P-3 오라이언 대잠초계기 1대 완전 전소, 1대를 대파시켰다.

2011년 12월 5일자 소식으로는 파키스탄 탈레반이 미군의 무인기 공습과 파키스탄 정부군의 공세로 100개 파벌로 쪼개졌으며 자금도 고갈되는 중이라고 한다. 다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세력이 여전하다.

그 와중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땅굴 탈옥 사건이 일어나 미군과 아프간군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2011년 5월 2일에 미군이 오랜 세월 동안 추적해 왔던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 넵튠 스피어 작전으로 미군에 의해 사살당했다.

7.6. 2012년

2012년 10월 탈레반 지배하에서 억압받던 아동 인권, 여성의 교육권 수호를 주장하던 14살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39]에게 총격을 가해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뜨렸다. 기사 이것은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시위 행동을 겸한 보복이었지만 큰 실책이었는데 되려 전세계가 이 행위에 공분했고 아랍권과 이슬람 세계에서조차 분노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유사프자이는 영국에서 치료받고 생명을 건졌으며 2014년 세계 최연소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수상과 동시에 각종 극단주의 단체에서 테러 예고를 하면서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과 친척 일부[40]도 탈레반을 강력하게 비난했으며 아버지가 경영하던 학교에 테러를 감행하던 터에 그녀의 식구들도 위험했다.

그래서 말랄라와 온 식구와 친척 몇몇[41]도 탈레반 몰래 영국에 이민한 후 말랄라 펀드를 만들어 이슬람 여성교육 확대 및 교육제한 철폐 운동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관찰자인 외부에서와 다르게 탈레반을 대하고 살아야 하는 서북부 파키스탄 현지에서 유사프자이에 대한 평가는 갈리는데 '괜한 뻘짓으로 공동체에 화를 불러왔다'는 비난과 '용감한 행동이었다'라는 칭찬을 동시에 받는다. 현지에서는 전자가 더 우세하다. 그 이유는 말랄라가 살던 지역이 바로 전술할 스와트 주로, 원래 다른 지역에 비해 좀 더 보수적이거니와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7.7. 2013년

2013년 6월 22일에는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 산 베이스 캠프에 총격을 가하여 외국인 9명을 비롯한 등산객들이 목숨을 잃었다. 탈레반 왈, 미군 무인 폭격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서 수행했다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는 점에서 옳지 못한 행위이다. 당시 아시아 산악연맹의 이인정 회장이 파키스탄 정부에 항의하면서 "이런 테러에 대하여 파키스탄 정부 책임이 크다"며 "국제산악연맹과 손잡고 테러위험국가로 파키스탄 등정을 금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을 정도였다. 이에 파키스탄 장관이 애원하면서 중무장 호위 병력을 낭가파르바트 곳곳에 두고 등산객 안전에 만전을 가하기로 했다.

7.8. 2014년

2014년 6월 8일, 대담하게도 테러범 10명이 파키스탄의 대도시인 카라치 진나 공항에 폭탄 테러와 로켓, 수류탄 등을 동원하여 테러를 감행해 총 28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탈레반은 미국의 드론 공격과 카라치 공항이 미군의 군수물자를 공급, 관리하는 물류기지의 역할을 하기에 해당 테러를 자행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기사

2014년 9월, 탈레반 대변인이 트위터를 하다가 실수로 위치정보를 노출했는데 아프간이 아니라 파키스탄 남동부에 있었다. 기사

2014년 10월, 파키스탄계 탈레반 조직 다수가 ISIL에 충성을 맹세하고 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약 1,500명의 병력이 이미 시리아-이라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2월, 파키스탄 페샤와르 주 초등학교에 이들이 들어와 총격전과 학살극을 벌여 어른 및 아이들이 140여명 이상이 죽거나 다치는 참극이 벌어졌다. 피해자의 대다수가 10살 초반 아이들이라 여론이 분노했고 탈레반도 부랴부랴 "아이들을 제외한 테러를 가하려고 했다"(...)고 변명이나 찌질거렸는데 이건 뭐 총알이나 폭탄이 어른들만 맞게 할 수 있다고 알라에게 빌었다고 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들이 테러를 자행한 곳이 파키스탄군에 부속된 군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인 점을 볼 때 그들의 변명과는 달리 고의성이 다분하다.[42] 결국 이 사건 이후 파키스탄 탈레반은 "앞으로도 파키스탄군이 계속 우리들의 여자와 어린이를 공격한다면, 우리도 공격 대상을 구별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

2014년에도 계속해서 테러를 일으켰으며 2015년 2월에는 아프간 동부 로가르 주 풀리알람의 경찰서에 자폭 테러를 가해 10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부상당했다.

파일:afghanistan election photo.jpg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는 위의 사진처럼 손가락에 잉크를 묻혀서 후보자를 찍는 형식인데 탈레반은 이것을 악용하여 2014년 대통령 선거에 투표한 자들을 색출해냈고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기사

7.9. 2015년

2015년 2월 13일에는 페샤와르의 이슬람 시아파 모스크를 공격해 20명을 죽이고 50명을 부상시켰다.[43]

2015년 3월에도 펀자브 주 라호르 지방의 가톨릭 성당 개신교 예배당에 연쇄 폭탄 테러를 저질러 90명을 죽였고 자신들이 이 공격을 주도했다며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집행하는 활동을 계속하겠다"라고 밝혀 분노한 기독교인 수천명이 폭력적으로 반발 시위까지 벌여 대는 참극이 발생했다. 기사

2015년 5월 13일에는 파키스탄의 대도시 카라치에서 탈레반들이 오토바이를 나눠 타고 일반 버스를 강제로 세우게 한 뒤, 버스를 둘러싸고 무차별 총기난사를 자행해 무고한 민간인 43명이 학살당하고 13명이 부상당했다. 정황상 시아파 예배를 드리러 사원으로 가는 버스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민간인과 타 종교, 타 종파에 대한 악랄한 공격이 멈추지 않아 국제사회의 공분과 우려를 샀다. 기사

2015년 4월 20일에는 탈레반과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하늘 아래 2명의 칼리프가 있을 수 없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지하드를 선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6월 22일, 수도 카불로 침공하여 아프가니스탄 의회 의사당을 공격했다. 의회 건물 주변에서 6차례 폭발이 발생했으며,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트위터에 "탈레반 조직원 여럿이 의회 건물에 들어가 전투가 진행 중"이라는 글을 올렸다.

탈레반 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프간 정부에 따르면 2년 전인 2013년에 파키스탄 카라치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결국 탈레반이 오마르의 사망 사실을 시인했으며 새 지도자로 2인자이던 아흐타르 만수르를 추대했다.

그러나 오마르의 아들인 야쿠브 오마르가 반발하면서 야쿠브 지지파와 만수르 지지파가 격렬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2015년 9월 28일, 탈레반이 미군 침공 이후 14년 만에 아프가니스탄 북부 주요 도시를 장악했다. 공격 개시 12시간만에 학교와 병원, 법원 등을 장악하고 교도소 내 탈레반 수감자들을 석방시키는 불법행위를 지속했다.

10월 1일, 아프간 정부가 쿤두즈를 탈환했다고 밝혔으나 탈레반은 부인하는 등 혼전의 양상을 거듭했다.

7.10. 2016년

2016년, 파키스탄 탈레반이 부활절을 맞아 어린이 공원에 몰려 축하하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을 목표로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이 끔찍한 공격으로 최소 72명 사망에 300여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들 중에는 특히 여성 어린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파키스탄 탈레반에서 분리되어 나간 강경파 조직인 '자마툴 아흐랄'이 벌인 짓이라고 한다.

2016년 3월 28일에는 아프간 국회의사당에 탈레반이 로켓포 공격을 가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2014년에 취임한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에 강경대응 천명 및 파키스탄도 강경대응에 동참할 것을 발표했다. # 2016년 5월 21일에 탈레반 지도자였던 만수르가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하면서 아프간전 개입 및 확대를 시작했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만수르의 사망은 아프간에 평화를 찾아오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

쿤두즈 장악에 이어 2016년 9월 7일에 아프간 남부의 타린코트을 장악하려고 공세를 넓혀갔다. # 하지만 2016년 10월 4일에 아프간 정부는 "나토군의 도움을 받아 탈레반을 몰아내고 쿤두즈를 다시 탈환했다"고 밝혔다. #

2016년에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은 9월과 10월에 2차례 만났고 10월 18일에 카타르에서 비밀리에 평화협상을 재개했다. # 하지만 탈레반측은 아프간 정부와 평화협상을 비공개 진행했다는 것을 10월 19일에 부인했다. #

2016년 11월 30일에 탈레반이 아프간 정부에 '국가 인프라를 보호하겠다'는 주장을 했으나 아프간 정부는 이를 의심했다. #

7.11. 2017년

2017년 4월 18일 파키스탄 탈레반의 대변인 에사눌라 에산이 파키스탄 정부군에 투항했다. #

2017년 파키스탄 탈레반 대원 3명이 파키스탄 페샤와르의 농업 교육기관에 총격테러를 가해 학생 12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당했으며 탈레반 대원 3명은 출동한 파키스탄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모두 사살되었다. #

7.12. 2018년

2018년 2월 12일 파키스탄 탈레반의 2인자 칼리드 마수드가 미군의 무인기 공격에 사살되었다. #

2018년 미국 정부는 파키스탄 탈레반 수장에 대해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

2018년 2월 21일 아프간 국방부는 "아프간 서부 파라주에 있던 탈레반 은신처를 공습하여 탈레반 사령관 2명을 포함한 32명의 반군을 사살했고, 17명을 부상 입혔으며, 그들의 폭탄 수송 차량 2대를 파괴했다"라고 발표했다. #

2018년 2월 28일에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을 합법단체로 인정(!)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

2018년 3월 4일 미국 국무부는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간의 새 평화협상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

2018년 아프가니스탄 정보요원 4명이 동료 16명을 죽이고 탈레반 세력에 합류했다고 한다. 기사

2018년 6월 15일, "파키스탄 탈레반의 수장 물라 파즈룰라가 미군의 드론 공격에 사살되었다"라고 아프간 국방부가 발표했다. #

7.13. 2019년

2019년 6월 24일에 "아프간의 탈레반은 아프간 언론들이 우리에 대한 정부의 반아프간 선동보도를 중단하지 않으면,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공격을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탈레반을 캠프 데이빗으로 초청해서 평화 협상을 하려던 계획이 불발되었는데 탈레반이 미군 병사와 민간인들이 희생된 자살 폭탄 테러가 자신들의 행동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며 탈레반을 미국 영내로 데려오려는 데 반발한 의원들도 있었다.

2019년 미 법무부가 중국 회사인 화웨이가 탈레반에게 2000년부터 통신기술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

7.14. 2020년

2020년 1월 27일, 전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어지럽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자제하긴커녕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수송기를 격추시켜 탑승자가 전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2020년 2월 29일 1주일간의 휴전을 거쳐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BBC 기사

다만 4월 포로 협상이 결렬되고 6월부터 다시 아프간군과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의 10대 소녀가 부모를 살해한 탈레반 무장대원들 2명을 사살해 SNS에서 영웅으로 떠오르며 환영을 받았다. #

8월 22일 파키스탄 정부는 탈레반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

7.15.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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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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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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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 2024년

  • 야외에서의 여성들의 발성을 금지하여 논란이 된다. 기사1 기사2

8. 탈레반이 승리한 이유

결론적으로 탈레반은 초기에는 후퇴했지만 최소한의 군사력은 지켜내 미군의 공세도 버텨내고 아프가니스탄을 재점령한 저력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탈레반의 아프간 재점령에 군사적으로는 탈레반을 오합지졸로 과소평가했다는 의견도 나오며 탈레반을 몰아내고 건국한 아프가니스탄 세속주의 정부는 너무 무능하고 부패하여 미국과 동맹국이 지원한 예산과 물자를 횡령하고 업무조차 하지 않아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여 미국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너무 길어진 통에 2010년부터 탈레반 거점을 뿌리뽑기 위한 NATO군 미군이 집중 공격을 했지만 실패했으며 오히려 CIA가 탈레반 잡겠다고 날린 미사일이 며칠마다 오폭하였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미군에 비협조적인 마을 사람들로부터 민심이 나락을 찍는 바람에 수복된 마을 주민들이 탈레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탈레반 깃발을 걸어두는 등 미친 상황만 벌어졌다. 결국 아프간 정부에 의해 점령된 지 며칠 후에야 원래대로 깃발을 고쳤다.

게다가 탈레반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정권 탈취 이전에 양귀비를 재배하면 처형했던 것과 달리 정권 탈취 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양귀비를 재배하여 뒷세계의 공급원으로 활동하면서 최소한의 자금 유지가 가능하였다. 그렇다고 미국이 양귀비 밭을 전부 태우자니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정부에서도 경제를 위해 양귀비 재배를 권장하던 편이었고 양귀비꽃이 생필품화되다 보니 멋대로 태워 버렸다가는 민심이반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탈레반과 협조했다는 정황증거가 있어야 불태웠다. 이렇게 자금줄이 안 없어지다 보니 무장할 여력을 남겨놨고 2010년대 후반에는 일개 테러단체가 첨단 장비를 장착한 특수부대 레드그룹을 운용할 정도가 되었으며 개개인 병력도 현대화되었다. 더욱이 비리로 찌든 아프간 공화국군이 졸전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미군에게 지원받은 장비들을 파괴도 안 한 채 도망가서 탈레반이 노획하다 보니 사실상 미국이 탈레반군을 의도치 않게 현대화시켜 준 꼴이 되어 버린 셈이다.

아시아에선 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남아시아 지역이나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남부 등 무슬림 지역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44] 아예 파슈툰족이 대다수라 무정부나 다름없는 통제불능 파키스탄 서쪽 국경에는 탈레반 세력이 정부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지역도 많아 아직도 파키스탄 정부군과 탈레반 간의 전투와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 중이다.

일본에서 활동한 적이 있고 일본인 탈레반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미국과 일본이 협정을 맺어서 무차별적으로 단속해 2008년에는 대규모 검거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때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튄 탈레반들이 붙어 있다시피한 이웃 대한민국에 잠입해 탈레반 세력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정황이나 언급이 나왔고 실제로 2008년 탈레반과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에 자금을 지원하던 파키스탄인이자 친탈레반 인사가 잡혔다. 2008년 검거 탈레반이 한국에서 일본산 마약 재료를 수입하여 헤로인을 제조하려다가 걸려서 검거되기도 했다.

2008년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탈레반 조직원들이 잡힌 건 2010년~ 2012년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로 대한민국에 입국해 3~40여 명으로 구성된 탈레반 세력을 구축하던 것이 국정원에 의해 적발되어 정보를 넘겨받은 경찰청에 의해 체포되었다. 2010년 검거 / 2012년 검거 / 2012년 검거2

물론 한국 특성상 무슬림이 적고 광신 무슬림은 더 적어서 남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탈레반 세력급의 규모는 아니고[45] 옴진리교식의 테러 조직을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어쨌든 경찰청 수사국과 지방경찰청 외사수사대에 의해 전원 적발된 이들은 100% 경찰에 검거되어 구속된 뒤 추방당했다. 국내 탈레반 조직화 체포 관련 기사

홍콩에서도 2002년 조직원 일부가 홍콩 경찰에 적발된 적이 있어[46]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거대 무슬림 벨트가 포함된 동남아시아에도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사실 동남아시아에는 이미 인도계 무슬림이 상당수인 싱가포르도 있고 대놓고 이슬람을 믿는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말레이시아나 남부 필리핀 등도 있어서 얼마든지 탈레반이나 ISIL 등이 급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실존했던 만크 각국 경찰당국이 이들의 씨앗을 잘라버렸다.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일본인 1명까지 살해한 적이 있다.

여하튼 미국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탈레반을 박멸할 기회는 있었으나 사담 후세인을 없애기 위한 반 사담 세력의 대량살상무기 허위사실 유포로 인해 미국이 아프간을 평정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병력을 이라크 전쟁으로 빼돌린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로 빗나가면서 북부동맹 외의 부족들의 협력으로 탈레반은 완벽하게 부활했다. 오죽하면 이라크 한 언론이 '탈레반은 이라크인들이 대신 죽어나가고 미군을 죽여가며 미국의 돈을 날리게 한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 희생 덕분에 네놈들이 부활했다'라고 아주 차디차게 미국과 탈레반을 비아냥거리는 컬럼을 싣기도 했다.

이런 막장짓에 대한 응보를 그나마 받은 것도 하필이면 데리고 있던 오사마 빈 라덴 9.11 테러로 미국의 정면공격을 받을 짓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의 목표도 사실 빈 라덴의 신병을 확보하고 알카에다를 박살내는 게 1차였는데 하필 탈레반은 이들을 보호해주면서 뻐팅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드로 박살났다.

한때 아프가니스탄의 거의 전역을 장악했으나 미국의 공격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게다가 아프간인들도 탈레반의 미친 폭정과 학살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을 반기지 않더라도 최소한 탈레반을 어떻게든 해주길 바라며 협력을 요청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 지역의 전쟁이란 게 원래 겨울이 되면 다들 무기 숨기고 적당히 집에 가서 민간인 노릇하다가 싸울 때가 오면 알아서 다시 모여 무기 들고 무자헤딘 노릇을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완벽히 적과 아군을 구분 짓기도 힘들고 공격할 목표도 마땅치 않았으며 공격이 어려운 산악지대에 은거하고 있어서 미군의 공격으로도 뿌리 뽑지는 못했다. 한편 탈레반한테는 천만다행으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정말 뜬금없이 이라크 전쟁을 감행[47]하면서 미군의 전력이 분산된 것도 탈레반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큰 이유다.

아울러 탈레반은 폭정으로 민심이 자신들에게 떠나 버리고 미국 및 북부동맹에 참패하면서 정권을 상실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통제 지역에서 이슬람 율법을 보다 부드럽게(?) 적용하는 편이라고 한다. 전쟁 전에는 부르카 안 쓰고 나오는 여성은 즉각 처형이었지만 이후에는 그냥 경고 한 번 하고 넘어가 준다거나... 하긴 전쟁 중에 저런 막장짓 하면 조직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이전보다는 덜해졌다는 것이지 잔혹행위는 여전히 저지르고 있다. 일례로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버린 적이 있다.

젊은이들의 연애 문제를 해결해주는 탈레반 연애센터를 설립해서 젊은이들의 사랑 고민을 무력으로 해결해 준다고 한다. 어떤 연인은 여자 쪽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는데 탈레반이 그 부모에게 찾아가서 협박하자 바로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기사

8.1. 듀랜드 라인에 따른 지리적 특수성

아프가니스탄은 지형의 대부분이 산맥에 해안조차 접하지 않은 완전한 내륙국이지만 사실 완전히 산맥밖에 없는 내륙국은 국가의 생존에도 불리하기에 흔한 편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이렇게 된 사유는 제국주의 시절 그레이트 게임에 따라 당시 친영파였던 압둘 라흐만 칸 군주와 듀랜드 라인을 체결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조약 끝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나누어지고 말았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산맥밖에 없는 해괴망칙한 내륙국이 되었다.

이렇게 완벽한 산악 내륙국이 되자 아프가니스탄은 말 그대로 대륙 위의 섬이 되고 말았다. 주요 지상 교역로에서 소외되고 해안과 접촉하지도 않기 때문에 교통 인프라를 설치하고 유지할 여력이 없어졌다. 구성원들은 외부과 교류할 이유도 방법도 이를 통한 이득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각 부족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 고립된 상태였고 그 결과 부족이 지역 내 유력자에게 친화적이면 적대시하지 않고 그 반대라면 힘든 식으로 생활해 왔다.

이 경향이 오래 이어지다 보니 제3세력 입장에선 상상을 초월하는 국력을 억지로 우겨박지 않는 이상 각 부족들을 중장기적으로 묶는게 불가능해졌다. 결국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고작 40년도 되지 않아서 분쇄되고 말았고 냉전 시기 동안 공산주의&권위주의&지역군벌 등등을 통한 수십년에 거친 갈등 끝에 갈려나간 뒤 남은 유력 세력은 외세와 경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구심점=탈레반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미국은 장차 자신들이 아프간에서 발을 빼고 아프간은 아프간인들이 알아서 하라는 정책을 펴려고 했는데 이건 베트남 전쟁 때 시행했다가 통렬하게 실패한 바로 그 전략이다. 게다가 아프간 정부의 부정부패는 남베트남과 비슷한 수준으로 심각했는데 정부 관리들과 군벌들의 이권 쟁탈로 미국의 지원비가 극소수 부유층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고[48]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군이 월급이나 사기의 문제로 되려 적수인 탈레반보다 열악하게 살았기 때문에 거꾸로 탈레반에 들어가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이 나오는 막장 사태가 벌어졌다. 당장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 되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지역 부족들의 입장을 보자면 미국은 우리와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데 이국에서 온 이상한 짓만 하는 대부족이며 탈레반과 같은 지역 군벌들은 그래도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지역 부족이 되는 셈이다. 이런 '해외부족'에 권력을 유지하는 기존 정부군과 경찰은 지역 부족들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니 엄청난 부정부패에 빠질 수 밖에 없었고 검문소 등지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부패행각이 이어졌다. 때문에 탈레반을 적대시하기는커녕 좋게 보는 사람도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오히려 미군이 탈레반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욱 피폐해졌다고 생각할 정도다. 이런 인식은 탈레반의 구성원인 파슈툰 부족들 사이에서 강하다.

결국 이런 시궁창스러운 현실이 탈레반 돈주머니까지 채우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예전의 소련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강대국이 겪던 딜레마를 다시 한 번 겪고 말았다.

8.2. 경제기반 황폐화에 따른 아편의 고착화

아프가니스탄은 영토 대부분이 산악지대라 환경이 지나칠 정도로 척박하고 낙후된 교통망 때문에 제대로 된 1차 산업조차 불가능하다. 기껏해 봐야 지역 부족들이 자급할 수준 정도나 산출될 뿐이며 설령 기적이 생겨 밀과 같은 통상 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해 봐야 바깥으로 내다팔아서 외부와 교류하는 건 매우 어렵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 처한 아프가니스탄 부족들에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식물이 있는데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험준한 환경에서도 비교적 잘 자랄 뿐더러 씨앗은 빵이나 빵가루 같은 먹을 것이나 식용유로 쓸 수 있으며 남은 줄기는 말려서 땔감으로 쓰고 타다 남은 재는 모았다가 기름과 여러 가지를 섞어서 비누로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이 식물의 아름다운 의 열매는 다 익어서 씨가 나오기 전에 표면에 상처를 내면 즙이 나오는데 이 즙의 가공품은 엄청나게 강력한 진통제로서 민간요법으로 탁월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조금만 바깥에 내다 팔아도 손쉽게 돈을 얻을 수 있다. 중간부터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사람을 알겠지만 아프간인들을 위해 신이 내린 듯한 작물의 이름은 바로 양귀비꽃이고 즙의 가공품은 바로 아편이다.

이런 사유로 인해 아프간인의 상당수는 양귀비꽃 재배로 자금을 모으는데[49] 이걸 막고자 제시한 방법인 재배는 워낙 수익이 나지 않고[50] 재배도 쉬운 양귀비꽃에 비해 은 재배가 까다로워서 민중들에게 무시당했을 정도다.[51] 그렇다고 무작정 양귀비밭을 불태웠더니 탈레반 지지만 늘어난 점도 미군과 중앙정부의 고민이다. 심지어 미군이 양귀비를 일단 구입한 뒤 전부 불태워 없애버리는 작전까지 한 적이 있지만 마약 재배를 권장한다는 비난을 받고 그만뒀으며 이후에도 마약 재배는 계속되고 있다. 물론 아프간에서 마약 중독자가 급증하면서 아프간인들도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것도 먹고 사는 게 가능해야 해결될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도 카르자이의 형제들이나 친척들이나 반 탈레반 군벌들까지도 상당수가 아편 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면서 탈레반 제거랍시고 미국 및 국제사회에 돈을 요구하는 이중적 모순 속에서 아편을 없앤다는 건 불가능하다.

8.2.1. 탈레반의 아편에 대한 정책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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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탈레반 장악 혹은 활동지역 아프가니스탄 양귀비꽃 재배 현항
탈레반이 마약사업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탈레반 정권 붕괴 후의 일이고 1차 탈레반 집권기에는 마약업자의 손을 자르는 등 초강경책을 펼쳐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약사업은 거의 근절되었다. 이때의 탈레반은 정말 순수 근본주의 꼴통이라서 마약을 금지했다. 문제는 9.11 테러 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탈레반이 붕괴하면서 그나마 존재하던 행정력이 막장이 되자 농민들이 먹고 살기위해 너도나도 양귀비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북부동맹을 비롯한 군벌들 및 탈레반까지 마약산업에 뛰어들어 막장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심지어 CIA도 마약 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있으며 관련 이야기가 미국 드라마에서도 등장할 정도다.

탈레반이 마약을 금지하던 1차 집권기와 달리 마약 사업에 뛰어든 것은 우선 자금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이유이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2001년까지의 탈레반과 2002년 이후의 탈레반의 인적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2001년까지의 탈레반은 그야말로 근본주의에 물든 광신도들이었다면 2002년 이후의 탈레반은 사실상 아프간 군벌들의 연합체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에는 적대시했던 북부동맹 군벌들도 탈레반에 있을 정도다. 이 군벌들 중에는 탈레반 등장 이전 부터 마약 사업을 해 온 부류도 있고 따라서 탈레반도 이들의 영향 아래 자연스럽게 마약 사업을 하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남부 지역은 양귀비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과거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탈레반의 묵인 하에 수많은 농가가 양귀비를 재배하고 있다. 문제는 탈레반이 이 양귀비로 아편을 제조하여 전쟁자금을 충당한다는 것인데 이는 탈레반이 세계최강인 미군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던 주된 이유다. 영문기사

이 때문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군경과 합동으로 양귀비꽃 재배를 단속하고 보상금을 주고 전량 폐기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미 아편으로 돈을 만져본 주민들인 만큼 효과가 크지는 않다고 한다. 단속 현장 아프가니스탄의 양귀비 재배량은 조금씩의 변동은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증가하는 추세다. 그래프

이런 식으로 생산된 아편이 전쟁자금 충당을 넘어서 수많은 부수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
이미 자국민 수백만을 아편 중독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은 마약을 금지하고 있다.

이 아편은 아프간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자료 정말 다른 의미의 테러다. 미국에는 마약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으며 이걸 구매할 만한 소득 수준은 있는 황금 마약 시장이 따로 없고 DEA를 비롯한 국내 수사 기관들은 마약과의 전쟁을 벌여 가며 온갖 인종차별 혐의를 비롯한 공무집행 잡음을 일으키면서까지도 국내의 사설 감옥에 사람들을 마구 때려 넣는 반면 막상 CIA를 비롯한 대외 정부 부처는 오히려 저런 국제 마약상들이 군벌들과 결탁하여 신나게 장사할 여건을 만들어 주는 자승자박적인 멍청한 짓거리를 했는데 이 짓거리도 10년 넘게 한 결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증발해 버린 정부에 대한 신뢰, 갈수록 분열되어 가는 사회, 갈수록 더 심해지는 주 정부들과 공공기관들의 재정 결핍, 방향성 없는 대외 정책 같은 문제들이 상징하는 2010년대 미국의 허울만 좋은 세계 패권 아래 있는 쇠퇴해가는 암울한 패권국가의 사회상을 만들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52] 게다가 아프간에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나마 미군은 마약상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지 이 짓거리를 처음 하기 시작한 베트남 전쟁 당시 동남아 골든 트라이앵글이나 80년대 레이건 집권기를 이란-콘트라 사건이 대표하는 중남미에서 내정 간섭할 때는 정직하게 CIA가 나서서 마약 군벌들에게 돈과 훈련 장소, 군수 물자를 퍼주고 있었다.

이렇듯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에서도 금지하는 마약을 팔아가며 군자금을 모은 끝에 결국 정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집권하자 다시 과거처럼 마약을 때려잡아 생산량의 95%가량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 거의 유일하게 상식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지만,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양귀비 재배 농가들은 토사구팽 당한 셈.

8.3. 무장의 현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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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게릴라 전술의 창시자인 마오쩌둥은 게릴라전의 승리 전략은 해방구 주변의 강력한 지지 및 적에게 보급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탈레반은 이를 그대로 원용했다. 얼마 전까지 정부군이 사용하던 무기를 탈레반이 사용할 정도로 정말 노획만으로 군대가 유지되는 군사조직이 탄생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사실상 보급선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한 산악 내륙국인 아프가니스탄에 쇼 미 더 머니를 치는 수준의 보급물자를 쏟아부은 미국과 이를 한참 초월하는 아프간 정규군의 부정부패와 졸전 때문이었다.

전술한 대로 아프가니스탄은 완전한 산악 내륙국으로 극단적으로 제한된 교통망 및 빈약한 사회인프라로 인해 영토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탈레반이 그나마 2000년대 초반까지 아프가니스단 전역을 장악했던 것도 군사력 이외에도 이슬람이라는 지역 특화적이며 종교적인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전 영토를 이슬람 색을 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하나의 중앙정부로 묶어두고 싶었고 이를 위해 다른 국가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들 수준의 보급을 공중투하하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미국이 2003년부터 2016년까지 험비 2만 2,174대, 소총 35만 8,530정, 기관총 6만 4,000정, 유탄발사기 2만 5,327정을 아프간군에 제공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새 아프간 전략을 발표한 2017년에만 M16 소총 2만정을 지원했고 2018년에는 M4 카빈 3,598정이 추가됐으며 2021년엔 기동타격차량(MSFV) 31대도 제공했다. 그런데 미군이 철수할 시점에 이 보급물자는 회수되는 대신 운송비 문제로 무기대여법마냥 그대로 이라크 정부에 인수되었고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이렇게 버려진 장비를 재인수해서 자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하겠지만 애초에 미군이 파병되고 떠난 아프가니스탄은 베트남 전쟁 이상으로 이상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아프간에서는 정부군에게 주고 갔더니 정부군이 전투만 했다 하면 연전연패 하면서 노획당하거나 관리 소홀 및 부패한 관리에 의해서 탈레반의 손으로 들어갔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렇게 떨어진 콩고물 같은 수준의 군사물자를 먹어봐야 노획이 다 그렇듯 재대로 된 보급물자로 비축할 수 없었겠지만 미군이 남긴 천문학적인 군사물자는 탈레반 엘리트병사 모두를 무장시키고도 남을 수준이었고 부패하고 무능력한 아프간 정규군을 압살하기엔 차고 남았다. 아프간에서 무기 공급 책임자로 근무했던 공화당 소속 짐 뱅크스 하원 의원은 "미군이 떠난 아프간에서 탈레반이 장악한 군사 무기가 620억 파운드(약 99조 4,362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들어 빠르게 탈레반 세력의 현대화가 이뤄지는 바람에 중국제나 노획한 미국제 군장과 무기, 야간투시경을 사용하는 탈레반 병력이 아프간 정규군을 상대한다고 한다. 때문에 무장을 잘 갖춘 자칭 특수부대 '레드 그룹'[53]는 장비와 전술이 비교적 선진적이다. #, #, #, #, #, #[54] 굳이 자칭 특수부대가 아니더라도 일반 보병들도 레일에 조준경이 달린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021년 정부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항복하면서 노획한 험비 L-ATV같은 소형전술차량 7만 5,000여대 M1117 장갑차, 대공포, M16 소총, M4 카빈, M24 저격 소총등 총기류 60만 자루, 야간투시경, 방탄복, 생체인식 장치 1만 6,000개, 무전기 등 통신 장비 16만 2,643개, 최점단 감시 무기 1만 6,191개 등의 최첨단 장비[55]도 상당수라빠르게 현대화하고 있다. # #

흔히 노획 하면 운용이나 유지 못한다는 구시대적 인식도 많지만 노획이 가능하다는 것은 포로로 잡힌 운용병이나 유지보수 관련 인력도 장비 운용이 가능하며 인터넷이 가능하기 때문에 군사기밀로 분류된 게 아닌 인터넷 공개 자료 범위에서 유사한 방법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완전히 유지 못한다는 생각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생각이다.

상술한 대로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에서 탈레반은 미군의 장비를 바탕으로 미군에게 훈련받은 정부군[56]을 그야말로 압살했고 상당수의 장비들과 차량, 장갑차들을 얻게 되면서 사실상 정규군 수준의 무장을 갖춘 군벌이 되었다. 심지어 정규군과 연줄이 있지 않은 이상 웬만한 군벌들은 하기 힘들다는 장비 일원화 과정오 거친 것으로 보인다.[57] 정예부대들은 주요 시설 경호 등에 투입된 상태라고 한다.

정작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장면을 민간인들이 촬영한 것을 보면 현대적인 첨단 장구류를 입은 병사들보다는 흔히 알려진 '중동 반군, 민병대'스럽게 차려입고 다니는 사진이 더욱 많다. 다만 군대란 조직은 정예나 숙련병에게 보급을 몰아주는 방식이 기본적이라 안 보여도 이상하진 않다. 민간인 지역에 투입되는 만큼 민심을 고려해 '거부감이 적은' 옷을 입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걸 신경쓰는 단체는 아니다 보니 그럴 확률은 낮다. 해당 인물들은 탈레반의 주력부대 소속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민간인이었던 사람들이 가담한 민병대 수준의 인원들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장의 질이 들쭉날쭉한 건 그리 이상한 게 아니다. 본래 반군과 게릴라 세력의 무서운점 은 누구나 반군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2021년 8월 22일 정형화된 무장을 갖춘 탈레반 부대가 남부 시내를 행진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단순 홍보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미군과 장기전을 치르기 이전과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라는 점은 틀림없다. 집권한 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 변화를 보인 것은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탈레반이 이럴 것이라고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것은 금물이지만. 2021년은 탈레반 정권의 극초반, 즉 과도기라고 볼 수 있었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과정에서 미군이 아프간에 지원한 다수의 험비를 비롯한 UH-60 블랙 호크, MD-530F 무장헬기, 브라질제 A-29 경공격기 등 장비들이 고스란히 탈레반 손에 들어왔으며 아프간 정부를 전복시킨 탈레반은 아프간 공군의 회전익 전력을 흡수해 공군을 창설해 버렸다. # 영상 속 헬기는 Mi-17이다. 다만 상당수의 조종사들은 자기 기체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탈출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맨몸으로 저항전선에 합류했고 부품 수급은 사실상 불가능한지라 오래 쓰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도 북부동맹이 일부 공군기를 노획해 운용하긴 했으나 유지를 못 해 금방 고철로 팔아 넘겼다. 24일 미 국방부는 브리핑에서 미군 철수 시 수송기에 실을 수 없는 장비와 무기는 파괴하거나 폐기하는 등 적절하게 조처를 하겠다고 언급했다.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주 카불 미 대사관은 탈레반 점령 후 CH-46E 시나이트 헬기 7대를 불능화했고 대사관 부지에 배치한 로켓·고사포·박격포 방어시스템인 C-RAM도 사용 못하도록 망가트렸다.

이것과는 별개로 시리아 내전에서 이슬람주의 반군과 테러리스트도 마찬가지로 장비가 진보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에서 올라온 신형 무인 장갑차의 실전 영상에 포착된 반군들이 상당한 중무장을 하고 있다. #

2023년에 공개된 영상을 보면 아프간군 및 미군이 버리고 간 장비를 대거 노획하여 험비를 순찰차로 쓰는 모습이 보인다. 특수부대의 훈련 영상에서 카불 진입 당시 2000년대 특수부대 장비에서 현대 선진국 특수부대에 맞먹는 장비를 장착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정부군 코만도가 판자시르로 후퇴하면서 놓고 간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 #

8.4. 미군의 무능함과 오판

즉 일종의 게릴라전 특징이었으나, 미군은 첨단 정보 정찰 및 감시 자산과 정밀타격 무기들을 동원하여 기선 제압작전(surge military operation)으로 탈레반 반군을 제압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는 것이다.

넷째, 군사 전문가들은 미군 군사 지휘관들이 아프간 전쟁에서 이론과 현실 간 차이를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도로, 고속도로 그리고 기지건설 등으로 도시화된 아프간 주(州) 지역에서의 전투 승리와 질서 유지에 만족하고 이를 아프간 전쟁 종식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오판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지난 8월 20일 『뉴욕타임스』는 그동안 탈레반 반군은 미군이 건설한 도로와 고속도로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였다면서, 미군은 공중전력을 동원하여 지방도로와 산악지대 촌(村)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탈레반 반군을 격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보도하면서, 특히 탈레반 반군이 차단한 도로와 고속도로는 현지에서 작전하는 미군과 나토 다국적군에 대한 군수지원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도하였다.

즉 탈레반 반군이 있다고 믿었던 산악과 지방 촌(村) 지역은 민병대가 야간 군사작전으로 미군을 괴롭혔고, 탈레반 반군은 도로와 고속도로 그리고 미군 합동기지를 공격하는 데 주력하였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 모비 메디어 그룹 사드 모르세니 박사는 미군과 나토 다국적군이 장악한 거점(outpost)과 검문소(checkpoint)가 아프간 군사작전에 있어 너무나 형식적 역할만을 하였다며, 이를 지원하는 재정 지원(monies)과 군사작전(military operation)이 각각 따로 놀았다고 비난하였다.
<<출처>>한국군사문제연구원[58] 뉴스레터 2021.8.23 제1067호 ###

탈레반의 승리는 미군의 무능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탈레반에 대한 오판도 원인이었다.

뉴욕타임즈에서는 미군 지휘부에서 자신들이 탈레반 반군을 제압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탁상공론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일부 성과에 만족하며 이를 아프간 전쟁 승리로 가는 방법으로 오판했다고 평가했다.

8.5.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승리

미군과 ISAF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후 거리낌이 없어진 탈레반은 파죽지세로 오합지졸의 정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순식간에 수도 카불까지 위협했다.

결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공식적으로 탈레반에 항복 선언을 하였다. 가니 대통령은 전격 사퇴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과도정부 체제로 전환되어 탈레반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기로 합의하였다. 우선 가니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직은 내무장관이 승계하기로 하였고 내각도 기존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료와 탈레반이 반반으로 구성할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정부군이 완패하여 해산된 상황에서 탈레반이 완전히 정권을 손에 넣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로써 탈레반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최종 승자가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의 유일한 공식 집권세력으로서 다시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이 다시금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미국과 ISAF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실상 패전하고 완전히 발을 뺀 상황에서 아프간 정부군까지 완패하고 정부가 전복되었으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대적할 세력은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탈레반에 의해 가장 크게 휘둘리고 있는 이웃나라 파키스탄,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 타지키스탄 등이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이 붙잡혀 참살당하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의 상황에 비하면 탈레반이 비교적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획득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이전의 순도 100%에 가까운 광신도들은 진작에 호라산 이슬람 국가로 이적하거나 미군, 아프간 정부군, 기타 서방국가 군대들과 20년 간의 전쟁을 벌이면서 씨가 말랐으며 군벌에 가까운 행태가 된 데다 아무래도 탈레반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점이 있고[59] 탈레반도 타국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정식 합법정부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9. 반탈레반 저항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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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당시 탈레반은 자신들도 2번 놀랐는데 첫 번째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용장으로 알려진 헤라트의 이스마일 칸이 너무 무력하게 항복하여 자신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적은 피해로 일찍 카불을 함락한 것이고[60] 2번째는 아흐마드 마수드가 판지시르에서 반 탈레반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아흐마드 마수드는 탈레반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반대해 온 온건파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아들로, 아버지의 고향인 판지시르에서 탈레반에 대한 저항을 선포했으며 이에 코만도 여단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군 잔존병력과 반탈레반 민병대는 물론이고 암룰라 살레를 비롯한 마수드의 전우들이 판지시르의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에 합류하였다. 더불어 타지키스탄 인도가 지원해주기로 했다. 우즈베키스탄으로 후퇴했던 압둘 라시드 도스툼이 사병을 이끌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했다.

탈레반은 카불 무혈 점령을 명분삼아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으나 문제가 생겼다. 탈레반은 카불 점령은 "이슬람권 최초로 미국에 대한 승전", "카불 무혈 점령과 사면령" 등의 문구로 포장하며 이슬람권에 자신들의 입지와 명분을 전달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자신들이 예상보다도 더 빨리 카불을 점령한 결과 새로 내각과 정부를 구성하는 데 제대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 거기다 탈레반의 탄압에 의료인, 공무원, 은행가, 기술자 등 국가와 사회인프라에 필요한 전문가들이 모두 숨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국가시스템 붕괴가 우려된다. 대다수가 문맹이고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한 탈레반은 식량부족과 의료시스템 붕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을 무찌른 무자헤딘 명장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아들이 등장하여 이들과 대적하면서 집권 명분의 일정 부분 이상 상실했다. 만약 탈레반이 판지시르에서 학살을 벌이고 아흐마드 마수드와 암룰라 살레를 사살, 처형할 경우 카불 무혈 점령을 통해 얻은 긍정적인 이미지나 명분도 날아간다. 아무것도 없이 사실상 반서방 명분만으로 전쟁을 벌인 탈레반 입장에서는 명분을 잃는 것이 큰 손실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가 미군과 영국군이 자국민의 안전한 철수를 담보로 더 이상 현지 반 탈레반 저항 세력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만큼 탈레반은 판지시르의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기도 애매해졌다.

국민저항전선의 총사령관인 아흐마드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인구가 2번째로 많은 민족인 타지크인으로 아버지는 타지크인들, 아니 아프가니스탄 전체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만약 탈레반이 아흐마드 마수드를 처단하고 격하할 경우 아편 재배 문제로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들겨 본 후 탈레반에 합류했던 타지크인 군벌들도 불만을 품을 것이 뻔하며 혹여나 진압 과정에서 탈레반과 국민 저항 전선 사이에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다시 말해서 아프간의 험악한 지형으로 인한 어려움은 새로 합법적인 집권 세력으로 오르려는 탈레반한테도 적용된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실세인 타지크인들이 탈레반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을 경우 아프가니스탄 중부와 북부의 여러 튀르크계 소수민족 및 시아파들도 탈레반에 대한 신뢰를 잃고 협조를 거부하게 된다. 탈레반 입장에서는 국민 저항 전선의 다당제 민주주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를 무시하고 아흐마드 마수드를 처단한 뒤 사실상 반쪽짜리 정부를 운용하는 길이라는 2가지 갈림길에 섰다.

2021년 9월 중순 기준으로 일단 탈레반은 판지시르를 점거하고 초토화시키면서 저항의 기세를 꺽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민 저항 전선이 지속적인 빨치산 투쟁에 나설 것임을 표명해 온전한 승리라고 보기에는 미묘하다. 거기에 탈레반 내부에서 엉망인 나라꼴로 인한 책임소재와 논공행상 문제가 대두되면서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10월이 되면서 상황은 반전되어서 저항군의 계속되는 저항으로 탈레반은 판지시르에서 철수하여 10월 19일에 판지시르의 중심지인 바라자크가 다시 저항군에게 점령되어 탈레반의 저항군 토벌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판지시르를 중심으로 아프가니스탄 각 지역에서 저항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10. 평가

파일:Taliban sharia police.jpg
  • 아편을 재배하다 적발된 농부를 위협하는 탈레반(2001년 사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도 부족, 종파간의 연립과 갈등 관계가 종횡으로 얽혀 이들에 대한 태도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알카에다 9.11 테러로 인해 발발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년간 미국과 맞섰다는 사실 때문에 알카에다를 탈레반의 하위 조직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지도자를 지닌 독립된 세력이다. 양측의 연관 관계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 항목 참조.

이슬람에 대한 무지로 인해 9.11 테러 이후 이슬람에 관한 인식의 대표성을 알카에다와 이들, 그리고 2013년부터 떠오른 테러 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게 부여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지만 사실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차별받으며 울분이 싹튼 인도 무슬림들과 일부 아랍인들을 제외하면 주류 이슬람권에서도 타도해야 마땅할 적, 사이코 이단 테러리스트 단체로 여기는 일이 잦다.

애초에 탈레반은 아랍인과는 인종적 관련이 없고 아랍인이 아닌 아리아계 백인종, 정확히는 인도-이란계인 파슈툰족이 주도하는 극단주의 조직이며 이는 하우사족이 만든 나이지리아 보코 하람도 마찬가지다. 혹시나 파슈툰족이 아랍인인 줄 알고 착각해 아랍인에게 탈레반 드립 치는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것이다. 아랍인들 중에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탈레반과 사고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랍인과 파슈툰족은 민족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유념하자. 파슈툰족은 오히려 인도인 중에서 북인도인과 더 혈통적으로 가깝다. 인도에서도 카슈미르 지역에 파슈툰인들이 살 정도다.

일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를 이념으로 내밀고 있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되는 헤로인을 잡고 있는 마약 카르텔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슬람주의를 따르는 것을 보면[61] 범죄단체, 즉 조직폭력배의 성격과 극단주의 교단의 성격을 같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전신이던 유일신과 성전도 마찬가지로 요르단인 폭력전과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사우디아라비아 조폭들과 이라크 북부 토착 조폭들을 이슬람의 이름으로 긁어모아 만든 일개 갱스터에 불과했다. 알자르카위의 고국인 요르단 경찰은 이들을 단순 조폭으로 보았다.

한국 대학생이 이란 테헤란 대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한국 학생들이 한 "탈레반을 뭐라고 생각해요?" 라는 질문에 다들 " 비행기로 들이박고 애꿎은 민간인을 죽이는 테러리스트들이죠.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영웅이라고 할 줄 알았어요? 우리도 미국이 죽어라 싫지만 정 그러자면 어디 백악관이나 들이박던지 할 것이지[62] 세계무역센터 부시가 있답니까? 하여튼 그런 놈들 때문에 이슬람이 탈레반으로 몰리는 것 같더군요"라면서 심한 불쾌감을 표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란인의 비판은 1) 시아파로써 수니파인 탈레반을 교리상의 이유로 더 증오한다는 점 2) 탈레반이 1998년 마자르이샤리프를 점령하자 다짜고짜 거기 있던 이란 영사관을 습격해 외교관과 직원 등 11명을 참수한 원한이 있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물론 이슬람에서조차 탈레반이 손절 대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탈레반을 이슬람권 주류에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교리 해석 때문에 그렇다기보다는[63] 아랍인들이 역사적으로 파슈툰족을 한 수 아래로 보는 인종주의적인 이유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파슈툰인은 물론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출신 무슬림들은 대부분 현대에도 중동 아라비아반도의 석유 졸부 국가들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곤 하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무시는 현재진행형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튀르크계 군벌도 탈레반과 원수지간이며 튀르키예가 튀르크계 군벌을 지지하는 것도 있고 탈레반들 대다수가 파슈툰족이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튀르크인이나 몽골계 민족이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탈레반과 사이가 나쁘다.

이란 이슬람 근본주의는 탈레반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과 비슷하지만 종파가 달라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단 취급한다. 애초에 이란도 아프가니스탄을 잘못 집적거렸다가 나라가 망한 적이 있었다.[64] 이란은 탈레반 1차 집권기 내내 탈레반이 시아파 12이맘파를 박해하는 것을 보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과 서로 으르렁거리던 관계였으며 다른 적국인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두들겨 패는 것도 사실상 묵인했고 탈레반의 적대 세력인 튀르크계 북부동맹을 지원하기도 했다.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을 제일 때려잡고 싶어하던 나라 중 하나가 바로 이란과 리비아였다. 이란은 아예 빈 라덴을 공개처형해 버릴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빈 라덴과 알카에다, 그리고 탈레반을 극혐했으며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토벌의 가장 많은 지분도 이란군이 차지했다.

우습게도 후술할 탈레반의 비정상적인 정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 중동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 혹은 극단적 반미를 표방하는 세력으로부터 영웅시되는 견해가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10년이 넘는 장기전이 진행되면서 아랍권의 현실과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조금이나마 세계적으로 고양되어 비아랍권에서 이런 인식은 다행히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 있다.

2000년대 한국에서도 이들을 독립운동가로 여기는 경우가 꽤 많이 보였는데 물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에 활동했던 무자헤딘은 아프간판 독립군이라고 해도 합당하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했던 무자헤딘도 물론 집단들에 따라 성격이 달랐는데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 등 온건한 지도층이 이끄는 조직도 있었고 굴부딘 헤크마티야르와 같이 과격 이슬람주의를 내건 집단들도 있었다. 결국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소련의 후원을 받던 친소 독재정권이 붕괴되자 서로 성향이 다른 무자헤딘 파벌들끼리 내전, 분열을 일으켜 탈레반이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데 있어 이들도 실책이 존재하지만 탈레반은 소련이 이미 물러간 뒤에 결성되었다. 애초에 탈레반과 소련은 지구상에 함께 존속한 적이 없다. 소련은 1989년 아프간 철군 이후 탈레반이 결성되기 이전인 1991년 12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10.1. 비판

파일:Bibi_Aisha_Time.jpg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2010년 8월 9일 타임 주간지 커버[65]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 어찌 지하드인가?
무자헤딘 사령관 아흐마드 샤 마수드, 탈레반의 막장 행각을 개탄하며 한 말
Medieval, obscurantist savages.
중세적이고, 반계몽적 미개인들.
조지 갤러웨이, 영국의 전 정치인, 방송인, 작가.[66]

탈레반의 극단적인 율법 해석은 현대 사회의 윤리적 사회상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무슬림들 스스로도 동의한다. # ## 탈레반 치하의 여성인권 문제도 심각하다. 이슬람 여성의 저서 <My Forbidden Face>에 의하면 1차 탈레반 집권기에 율법 지침의 미준수를 구실삼아 수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한 뒤 살해당하고 그 시체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는 증언이 나오며 몰래 학교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역시나 강간하고 살해했다고 한다. 지하드를 통해 얻은 불신자 및 이교도 성노예들을 제외하고 무슬림 남성이 무슬림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그 여성이 어떤 신분, 어떤 상황이건 간에 샤리아 율법상 무조건 범죄인데 이러한 범죄를 합리화하는 대다수 탈레반들의 논리는 탈레반이 강요하는 극단적 해석을 따르지 않는 무슬림들은 무슬림이 아니므로 불신자이니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서구식 교육을 받지 말라는 7세기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여성 무슬림들도 무슬림이 아닌 불신자라고 주장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조차 지하드 알 니카라는 논리를 만들어 사실상의 매춘을 강요했을지언정 여성 무슬림을 대놓고 성노예라고 선언하는 비윤리적 행위는 하지 않았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제 할례를 시컀는데 할례 방법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방법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 문서에서는 단순히 서술했지만 그 저서의 내용에는 더 잔인하고 잔악하며 극악무도한 도저히 나무위키에 상세히 서술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살해당한 여성들이 수도 없이 많다. 아프가니스탄계 작가가 쓴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어보면 삶이 제한투성이임을 알 수 있다.

남성 의사가 여성 환자를 치료할 수 없게 해 버렸기 때문에 아픈 여자는 시름시름 앓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서 몇 가지 제한 조건을 둬서 치료를 허용하게 함으로써 최악의 사태를 피하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할 머리가 있었으면 탈레반이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교리에 없는 것은 그냥 임의로 해석해서 더 시대와 동떨어진 개념을 만들어낸다. 미군의 무인 감시 카메라의 영상은 탈레반 '전사' 들이 수간 행위를 저지르는 장면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으며 자카트를 20~30%로 강요하였다. 이러한 범죄 행위는 이슬람 율법에 없으니까 오히려 더 성행한다.[67]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탈레반이 했던 만큼 통제가 안 된다고 미국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 도널드 럼스펠드 등을 위시한 작전 실패로 인해 미군은 작전 지역에 치안이나 민생 업무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대가로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후 이라크에서까지 치안불안 무법지대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고착 상태로 접어든 후 한국 언론사에서는 미군정을 비난하고 탈레반 정권 시기의 안정적인 통치를 옹호하는 뉴스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미군의 한심한 전후처리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억압과 폭력을 통하여 수치상으로만 안정화되어 있는 범죄율이나 사회 안정은 그리 큰 의미가 없으며 안정적으로 보이는 사회 내부에서는 이들에 의해 위에 나열된 지옥 같은 삶 그 자체가 벌어지고 있었다. 탈레반을 사악한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아프간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좀 폭력적이지만 아름다운 독립군 식으로 미화하는 인사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한국 언론의 반 탈레반 논조 과하다) 이미 전술했듯 이들은 전통이고 뭐고 없는 악당일 뿐이다. 특히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고 강간하거나 그저 자신들과 싸우는 국가의 주민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린이들을 끔찍하게 살해한다는 점에서 이미 인간이길 포기했다.

그러나 아직도 잘못된 정보를 취하거나 반미에 심취한 사람들에 한해서 은근슬쩍 탈레반이 벌이는 만행과 비행이 미군의 심리전이니 가려서 들어야 한다거나 '오폭이나 해대면서 아프간에서 미움 받고 있는 미군이나 탈레반이나 도긴개긴이다' 식의 양비론을 몰고 가면서 반미여론에 편승해 은근히 탈레반을 사악한 미군보다는 낫지~ 식으로 필요악 정도를 내세우는 등 탈레반을 편드는 주장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이들이 이용하는 자료는 미군이 애용하는 드론 공격의 사망자 대부분(90%)은 무고한 아프간 국민이라는 자료인데 일부에서 이를 과장이라고 분석도 있으나 과장이 있었을지언정 탈레반을 공격하면서 무고한 드론 피해자가 상당히 많이 생기는 것은 이미 전직 드론 파일럿들의 증언으로 상당히 드러났으며 이는 고스란히 아프간 국민의 반미 감정으로 연결된다.[68] 이런 아프간인들의 반미 감정 때문에 미군의 막강한 전력에도 전과를 내지 못했으며 아무리 탈레반이 악당들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간인들이 미군에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물론 미군이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라도 미군 공격 이전이나 이후나 아프간의 극단주의 막장 상황은 다를 바 없는 것을 보면 탈레반은 미군 침공과는 관계없이 설립 당시나 지금이나 시대착오적인 막장 광신도 집단이 맞다. 다만 미국이 정말 아프간 국민들을 이들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다면 좀 더 조심스러운 작전을 펼쳤어야 했는데도 미군이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단 이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미군의 오폭이 계속된 건 맞으며 뚜렷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전란에만 휩싸이게 하는 데다 막장 병사들이 사고 치고 돌아다니는 판이니 아프간 주민들 측에서도 반미 감정이 굉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미군은 단체로 맛이 간 집단은 아니다. 당장 탈레반이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덜해 보이는 것이지 1차 집권 및 재집권 후 그들의 끔찍한 행태를 떠올려 보자.

이와 관련해 "탈레반의 성장세를 단순히 총칼의 위협에 의해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미국이 배포하는 선전으로 판단하는 관점일 뿐이다."라는 식의 탈레반 옹호론도 존재한다. 즉, 아프가니스탄 주민들 중 자발적으로 탈레반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탈레반이 아무리 흉악하다고 한들 그들은 민심을 얻기 위한 절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아편이다. 척박한 아프가니스탄 산악 지대에서는 농사를 짓는 것보다 아편( 양귀비꽃) 농사를 짓는 것이 소득이 4~6배 정도 많은데 미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대놓고 아편을 재배하기는 힘든 일이고 그렇다고 아편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아직 트랙터 같은 현대적인 농기구가 보급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농촌 주민들 입장에서는 자급자족조차 힘들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모두 탈레반을 지지한다'는 주장도 타당한 주장은 아니다. 더욱이 이것을 미국의 선전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모든 원흉은 미국"이라는 반미적인 관점일 뿐이다. 전술했듯 아프가니스탄 사람이라고 무조건 탈레반에 환장하고 지지하는 건 아니다. 사실 이는 전술한 "탈레반이 반미 영웅이다"라고 조작질하는 입장과 차이가 없다.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종족(宗族)과 복잡한 역사 속에 각 부족 갈등도 큰 국가이며 탈레반의 기반인 파슈툰족에 대한 적대적인 부족도 기본적으로 다수다. 더욱이 미군 철수 후 이슬람 공화국이 무너지고 탈레반 정권이 수도인 카불을 장악한 이상 아프간 국민들이 부활한 탈레반을 겉으로라도 지지해야 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10.2. 탈레반은 과장되었다?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탈레반의 행동이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사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서구 언론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인데 물론 어느 뉴스든 100% 신뢰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동시에 아예 언론을 신뢰할 수 없다고 보긴 어렵다. 이라크 전쟁 같은 경우는 확실히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유효하긴 했으나 아프간 전쟁은 어디까지나 그나마 나았을 뿐이었다.[69] 모든 탈레반이 나쁘지 않다고도 하는데 물론 상대적으로 개념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부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모든 탈레반이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탈레반의 만행이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거치면서 90년대의 극렬 광신도들은 대거 전사하거나 영향력을 잃고 어떤 동기건 단지 미국이 싫거나 생계를 보장해 준다는 보상에 혹해 가담한 세력이 전쟁 중에 늘어나긴 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친 카타르 파벌이 부상하는 등 탈레반의 만행이 잠시만이라도 중화되는 듯한 모습도 보여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중도파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 본진인 칸다하르에 남겨졌고 칸다하르 바깥의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는 과격파는 첫 집권 당시에 비교해도 나아진 것이 없다. 중도파와 파키스탄은 항복한 북부동맹 정부 군인들과 관료들을 용서하고 필요하다면 탈레반을 위해 활용할 것을 주장한 반면 주도권을 장악한 과격파는 숙청과 학살을 하고 있다.

11. 대외적 성향

배외주의, 반미, 반유대주의 # 성향을 띄는 등 대부분의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다만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마약 수출 및 여성 인권탄압에 따라 아프간을 제재하면서 경제난 타개를 위해 중국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도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위구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프간과의 관계 강화에 나서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아프가니스탄 관계 문서 참조. 그러나 중국은 세속 국가이며 반종교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종교근본주의 성향의 탈레반과는 거리가 꽤나 먼 편이고 탈레반의 친중 움직임에 IS가 반발해 아프간에서 중국인을 겨냥한 테러를 벌인다. #

12. 전망

결과적으로 탈레반은 20년에 걸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계 최강국 미국을 상대로 최종 승자가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의 집권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탈레반은 확장주의적인 성향은 없기 때문에 9.11 테러처럼 서방을 자극할 만한 외부적인 도발을 벌이기보다는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만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1차 집권기보다 훨씬 온건해진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며,[70] 여성인권을 존중하겠다는 발표와는 달리 직장인 여성들을 해고시키거나 남성들은 청바지와 츄리닝을 입었다고 서양 문물에 세뇌당했다고 매질을 당했고 많은 수의 전문가와 기술자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경제는 붕괴되고 의료 체계는 마비되었으며 행정체계도 붕괴되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해외 원조 및 수출도 모두 끊겨서 대규모 식량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탈레반 대원 중에는 문맹이거나 교육 수준이 미흡한 사람들이 많으며 그나마 교육받은 사람들도 이슬람 신학 정도만 교육받았다.

이전과는 달리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강력한 후견세력을 둘 수도 없는 처지라[71] 정부군이 완전히 해산되고 정부가 전복된 마당에 북부동맹과 같은 반탈레반 세력이 탈레반에 제대로 맞서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탈레반은 이전처럼 정부 요인들을 잔혹하게 처형시키고 막무가내로 정권을 가져오지 않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이양받았다. 이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정식 집권세력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된다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축출될 날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미국과 국제안보지원군은 결국 참담하게 실패하여 막대한 손실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어느 하나 제대로 손 쓸 수도 없는 파탄국가라는 사실을 깨닫고 철수했고 러시아도 이미 소련 시절에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에 탈레반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탈레반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있는 강대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인데 중국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분리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의 발흥을 경계하여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레반도 20년간 미국과 치고박으면서 하도 쥐어터진지라 당분간 어그로를 끌지 않고 조용히 지낼 가능성이 높고 일단 탈레반은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입장[72]이라서 탈레반과 중국이 무력 충돌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73]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프간계 탈레반의 경우이고 파키스탄계 탈레반은 친중 성향을 보이는 파키스탄 정부와 대립하면서 매우 강한 반중 성향을 보여 파키스탄 내부에서 중국인을 노린 다수의 테러를 벌이는 만큼 지속적으로 파키스탄계 탈레반과 중국 정부의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소련과 미국이 천문학적인 손실만 입고 물러난 데다 아프가니스탄 내부에 탈레반에 맞설만한 세력도 변변찮은 상황에서 중국도 탈레반이 직접적으로 중국 내부에서 깽판치지 않는 이상 직접 무력개입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결국 이전처럼 폭주하여 강대국들의 어그로를 끌지 않는 이상 탈레반의 미래는 밝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탈레반의 폭정에 다시금 시달리게 될 아프간 민중들의 미래와 탈레반에 의한 지속적인 테러와 사보타주에 시달리고 있는 인접국 파키스탄의 미래는 암담해졌는데 현재도 실시간으로 탈레반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로서 골치가 아픈 상황이다. 거기에 유럽 난민 사태로 이골이 난 유럽 국가들이 난민 수용에 부정적인 상황이고 다만 인근 국가들에 지원해 주겠다는데 그 인근 국가들 중 하나가 이런 상황이라 아프간 민중들에게는 큰 도움이 못 될 전망이다. #

아프가니스탄이 국제지원이 끊겼고 전쟁으로 인하여 식량 생산 능력이 감소하여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는데도 탈레반 정권은 뚜렷한 대책을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으며 급기야 견디다 못해 자신들과 싸웠던 미국과 국제안보지원군 참여국을 포함한 서방권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프간 세속정부가 무너진 이상 미국이나 서구에서 아프간을 지원해 줄 이유가 없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의 관심과 지원이 우크라이나로 쏠리면서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도와줄 나라는 전혀 없다.

이는 서방세계에 있어서 우크라이나의 중요성이 아프가니스탄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NATO와 러시아의 완충지대이기 때문에 먹히는 즉시 NATO에 속한 발트 3국과 폴란드도 위협당하므로 말 그대로 우크라이나 뒤의 유럽이 러시아와 전면전을 치를 위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방은 우크라니아를 러시아가 완전히 차지하게 둘 수 없다. 게다가 전세계가 우크라이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보여준 무능과 달리 지원받은 만큼 러시아랑 잘 싸우며 큰 체급 차이에서도 열심히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1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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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최고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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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오마르 만수르 아훈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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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2001
초대
오마르
2021 ~
<rowcolor=#ffffff> 권한대행
아훈드자다
두라니 왕조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아프가니스탄 왕국 ·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


[1] 파슈토어, ṭālibān [2] 아랍어, ašhadu ʾan lā ʾilāha ʾilla -llāhu, wa-ʾašhadu ʾanna muḥammadan rasūlu -llāh [3] 집권 기간: 1996년~2001년, 2021년~현재. [4] 파슈툰인 관습법이자 생활양식 규범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농촌 지역과 파키스탄의 파슈툰인 공동체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다만 이 규범이 무함마드 굴랍이라는 파슈툰인으로 하여금 미국 군인을 구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중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5] 파슈툰왈리와 파슈툰족 우월주의 성향을 기반으로 한다. 탈레반 자체가 종교적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아프간인들이 자국 땅을 외세로부터 쟁취하기 위한 내셔널리즘 단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탈레반 자체가 파슈툰왈리와 파슈툰 공동체에 기초해 있으나 서구에서는 일반적으로 파슈툰 민족주의가 아닌 아프간 민족주의로 분류되는 듯하다. # [6] 남아시아의 수니파 중 살라프파의 영향을 받아 반 수피 성향을 가지게 된 신학사조. 원래는 온건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극단주의화되었다. 반대로 남아시아 수니파 중 수피파에 호의적인 경우는 바렐위파(Barelvi)라고 한다. [7] 물론 국제사회에서는 여전히 테러단체다. [8] 관련 글. [9] 원래 마드라사는 아랍어로 학교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비롯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전파하는 극보수 신학교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오죽하면 지하디스트 및 살라프파, 와하브파, 이슬람 극단주의자 양성소라고 불릴 지경이다. 마드라사의 학비는 이슬람 기금으로 지원되며 후술할 말랄라 유사프자이 같은 인물에 대해서 '서구의 스파이'라는 식의 가짜 뉴스를 뿌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온상지다. [10]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근본주의 신학은 사이드 쿠틉 이슬람주의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므로, 탈레반도 사이드 쿠틉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11]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 분쟁으로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아 왔는데 파키스탄 정보부인 ISI는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파키스탄이 통제할 수 있는 정부를 세우고자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나 잘랄룻딘 하카니 등을 지원해 오다가 90년대부터는 탈레반을 지원하였다. 물론 이는 결과적으론 파키스탄 서북부에서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이 준동하는 결과로 이어져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12] 로힝야족 박멸을 주장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미얀마 군부 독재자들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13] 북동부는 비파슈툰계 반탈레반 군벌들이 모여 만들어진 북부동맹이 통치하며 탈레반에 저항하고 있었다. [14] 아프간인들도 저 돈의 반이라도 제대로 썼으면 우리나라가 중진국은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다. [15] 칼리프의 별칭이기도 했으며 모로코 국왕과 소코토( 나이지리아의 토후국)의 술탄이 지금까지도 이 호칭을 적법하게 사용 중이다. [16] 쿠란, 샤리아 [17] 사실은 통역사가 꽤 순화하면서 통역한 탓에 그나마 나가라고 한 것이다. 통역사가 나중에 정 기자에게 "당신, 나까지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당신이 하던 말 그대로 통역했다면, 우리 둘 다 곱게 못 죽었다고요!"라고 했을 정도다. [18] 제작은 강경란과 정문태 PD가 이끄는 FNS가 맡았는데,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아프간 내전 당사자들을 인터뷰했다. [19]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선풍기는 사탄의 물건이라고 쓰지 말라며 정작 자신들은 집에 에어컨을 설치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20] 이와 비슷하게 북한에서도 외국 대중문화 탄압을 '인민대중 자신의 요구'라고 합리화하는 중이다. [21] 원론적으로는 하디스에서 구타를 금지하지만 과거에는 어린이들을 교육할 때 강제로 때려서 외우게 시키는 일이 워낙 보편적이다 보니 마드라사에서만큼은 전통적인 관습으로 굳어졌다. 여담으로 19세기/20세기 초반에 살라프파들이 그나마 잘했던 점/인기를 끌었던 이유 하나가 바로 이슬람 신학교에서 구타와 체벌을 상당부분 근절했던 데 있었다. 그만큼 마드라사의 체벌 남용 문제가 심각했다. [22]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에 만연한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인 와하브파 교리의 일부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그래서 바레인에 가서 몰래 극장 다녀오는 사우디인이 그렇게 많았다. [23] 여성차별로 악명높은 사우디아라비아도 여성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 조선시대 의녀처럼) 여성들이 의사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24] 정의길 저, <이슬람 전사의 탄생>, 259p. [25] 이때 극소수의 부유층은 몰래 개인용 위성 안테나를 설치해 위성 프로그램을 시청해야 했다. [26] 탈레반의 성전가 중에선 사실상 국가인 이 곳은 용감한 자들의 고향이라네!가 가장 유명하다. [27] 다만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극히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러시아, 체코, 세르비아만 카불에 뉴스 지국을 두던 판이었다. [28] 다만 탈레반 집권 시점인 1996년에는 선진국에서도 인터넷이 태동기나 다를 바 없던 데다가 아프가니스탄은 극빈국이여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던 사람이 사실상 0%었기에 북한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의 인터넷 금지 조치에 별다른 반향과 국제적인 비판은 없었다. 참고자료 아프가니스탄에서 인터넷은 2002년에 허용되었으나 2022년 기준으로도 인터넷 사용률은 고작 22.9%라 인터넷 사용률이 0%대인 북한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인터넷 사용률이 가장 낮은 나라로 남아 있다. [29]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는 영화에 적대적이라 사우디아라비아 2019년 이전까지 극장이 없어서 사우디인들은 영화를 보고 싶으면 이웃나라 바레인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곤 했다. [30] 정의길, <이슬람 전사의 탄생>. [31] 물론 망명한 사람들도 조국에서 보낸 정보원들이나 망명지 내 대사관 직원들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체포되어 조국으로 송환된 후 엄벌받은 경우가 있다. [32] 물론 세월이 지난 후에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33] 정의길 저, <이슬람 전사의 탄생>, 259p. [34] 정확히는 "우상 파괴는 축복이 따르는 행위이지만, 우상 파괴를 통해 비무슬림들을 흥분하게 하면 안 된다"고 나와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여성의 나체를 조각한 조형물들도 쿠란에 언급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증거자료라는 이유로 무함마드의 교우들이 주가 되었던 이집트 정복군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35] 가즈니 왕국은 인도를 정복한 첫 이슬람 국가로, 이때부터 힌두교 이슬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36] 사실 이란은 시아파가 주류라 수니파도 이단 취급하기는 하지만 사이비 종교 취급까지는 아니며 오히려 수니파에게 차별받는 게 시아파라 미러링에 가깝다. 그러나 탈레반이나 훗날 등장하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대놓고 이란 신정체계도 부정하는 관계로 체제 유지를 위해 사이비 종교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한 예로 오사마 빈 라덴이 죽기 전 사실 미국보단 이란과 리비아가 더 잡고 싶어했는데 이란은 아예 빈 라덴을 공개처형하려고까지 했을 정도였다. [37]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안드릭 테이무리안이 아르메니아인이다. ~안으로 끝나는 성씨가 아르메니아어 성씨로 러시아어의 ~프/ ~바, 폴란드어의 ~스키/~스카, 루마니아어의 ~스쿠에 해당한다. [38] 오늘날 인도의 아프가니스탄계 인도인 중 적지 않은 수가 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한 힌두교도의 후손이다. 근세에서 근대에는 인도인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무역을 하면서 러시아와도 교역하던 상황이라 아프가니스탄에 체류하던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 자이나교도 인구가 적지는 않았다. [39] 그녀의 아버지가 진보적이고 개념적인 교육자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과거엔 이슬람 근본주의자였는데 나중에 온건 무슬림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남녀 공학 고등학교 교장이었는데 사비로 학교를 열고 여자들에게도 아무런 제한 없이 교육을 하고자 했으며 말랄라가 태어나자 아들들과 똑같이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파키스탄 여러 주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족보에 안 올리는 게 허다한 걸 생각하면 아들딸 구별 없이 대한 거다.) 탈레반에게 말랄라가 총에 맞을 때도 울면서도 "자랑스러운 내 딸, 용감하구나"라며 격려하고 찬양했기 때문에 탈레반에게 살인 협박을 받았을 정도다. [40] 결국 이들도 탈레반 테러를 걱정해 탈레반 몰래 영국으로 같이 이민 갔다. [41] 숙부 한 사람은 "말랄라가 받은 노벨평화상을 자랑해야 하는데, 탈레반이라는 쓰레기는 자랑거리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알라의 이름을 왜곡하여 총 들이대고 어린아이를 쏘는 거나 자랑하며 횡포 부린다"고 인터뷰했는데,얼마 뒤 집 앞에 칼로 "죽고 싶냐?"라는 글귀가 섬뜩하게 새겨졌다고 한다. 결국 다른 식구와 같이 이민 가야 했다고 한다. [42] 사살된 6명의 테러리스트는 특별한 요구도, 주장도 하지 않았으며 피해자들을 인질로 잡으려는 시도도 없었다고 한다. [43] 수니파에서 시아파를 공격하는 이유는 수니파만이 진리라고 보는 극단주의자들인 탈레반의 입장에선 시아파는 모조리 도륙하고 박멸해야 할 이단들이기 때문이다. ISIL이 이라크에서 시아파 모스크를 폭파하고 다닌 것과 같은 이유다. [44] 다만 이쪽은 탈레반보단 알카에다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게 정확하며 그 규모도 상대적으로는 작다. [45]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행위를 반공개적으로 시도했다간 세력 구축은커녕 바로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다. [46] 뜬금없이 왜 홍콩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홍콩도 싱가포르보단 덜하지만 홍콩에 거주하는 인도계 홍콩인은 무려 19세기에 영국 해군을 따라 들어왔고 이들 중에는 무슬림 세포이들이 많았으며 육체노동자로 노동비자로 들어온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들도 장난 아니게 많다. 주로 홍콩섬보다는 구룡반도에 많이 보이며 구룡반도의 중심지인 침사추이에는 재홍콩 남아시아 무슬림이나 인도계 홍콩인들을 위한 커다란 모스크도 있을 정도다. 홍콩 전 지역에 걸쳐 아파트 등에 입주한 자질구레한 마스지드도 많은데 그만큼 홍콩에 남아시아인이 많다는 얘기다. 홍콩에 사는 파키스탄인들은 주로 트럭 운전이나 배달대행 등을 맡아서 트럭에 대문짝만 하게 이슬람 신앙고백문인 샤하다를 붙이거나 이슬람 염주를 붙인 차량도 많다. [47] 이는 사담 후세인을 퇴진시키려는 목적으로 허위성 정보를 퍼뜨린 망명자들의 발언도 컸다. [48] 아프간에 쏟아부은 자금이 아프간인 수백만명을 먹여살리고도 남는 수준이지만 그 돈이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 [49]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침공하기 이전에는 아편 재배를 철저히 단속하여 사실상 아프간 내의 마약 생산을 파괴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것도 탈레반종교적인 사유로. [50] 양귀비꽃 재배로 버는 돈의 1/5도 안 된다고 한다. 국제 곡물 가격 상승에도 결국 중간업자들, 해외 선진국들 일부만 이득을 차지했기 때문에... [51] 정확히는 사막화까지 진행되어버린 아프가니스탄의 환경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절대적 기준에서 볼 때 밀은 주요 작물들 중 재배가 그렇게 까다로운 편은 아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환경은 그만큼 농경에 부적합하다. [52] 미국의 휘청거림을 틈타 중국 러시아는 약진하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 미국의 패권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물론 미국도 바보는 아니라 열심히 중국을 경제적으로 때려잡으려 하고 있다. [53] 이 부대는 2018년 탈레반이 IS를 대상으로한 다르자브 전투에도 투입되어 IS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발생케 하기도 했다. [54] 사실 테러단체들이 이렇게 현대화에 전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투 방식의 변화에 있다. 폭탄 테러를 통해 민간인 대량 살상을 저질러도 각 정부가 겁먹고 물러서긴커녕 오히려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보복만 더 심해진 데다 서방 정보기관들의 역량도 발전하면서 직접적인 테러의 비용은 높아지는 반면 성공률은 떨어져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워졌으며 미국을 위시한 서방이 중국 문제를 더 신경 쓰게 되면서 중동 개입은 크게 줄어들었고 개입이 줄어든 중동 지역으로 테러 단체들이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닥치고 폭탄 조끼 메고 민간인 밀집지역으로 돌진하는 자폭 테러리스트보다는 중동 정부군 혹은 기타 군벌들과 맞서 싸울 전투병이 더 필요해졌으며 미군이 전투병 육성에는 현대화된 장비로 무장한 병력을 꾸준한 훈련시키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다는 걸 실전으로 몸소 가르쳐 줬기 때문이다. [55] 아프간 정부군은 전차가 없었다. 모든 전쟁사에서 주의해야 하는 오류다. 전쟁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행위는 간단하게 설명되는 수준으로 고착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군과 다른 연합군들은 다수의 전차를 아프간 전장에 투입했고 여기서 효과를 발휘한 사례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산악지형이라 전차가 별 쓸모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캐나다군은 레오파르트 1, 2 주력전차를 전개한 적이 있다.) 설령 산악지대라고 하더라도 공세적인 측면에서 전차의 효용성은 부정할 수 없다. 장갑차보다 더 튼튼하고 더 화력이 강한 만큼 아군 보병이나 다른 주력 부대들에게 공세 우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만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 ‘전차지원이 가능한가, 효율적인가’를 따져야지 '아프간에서 전차는 고철덩어리 수준으로 쓸모가 없다.'는 결론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56] 비록 고질적인 부정부패로 인해 훈련도와 사기가 최악이다. [57] 일반적인 군벌들은 장비를 여기저기서 밀수하다 보니 한 부대 내의 보병들도 다른 총기를 들고 다니는 경우도 허다하다. [58] 국방부 산하 비영리법인. [59] 아프간 민중들은 탈레반의 온갖 방해 공작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50%를 상회하는 높은 투표율을 보여주었다. 탈레반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는 방증이다. [60]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너무 빨리 무너져서 탈레반조차도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 [61] 탈레반의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은 사이드 쿠틉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62] 그런데 9.11 테러 당시 승객들의 저항으로 인해 중도 추락해 버려 유일하게 건물에 충돌하지 않았던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최종 목표는 실제로 백악관 혹은 국회의사당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3] 사실 애초에 와하브파를 비롯한 아랍권 이슬람 극단주의는 탈레반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 그 아랍인들이 더 무시무시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를 만들었다. [64] 근세 이란의 전성기를 이끈 사파비 제국 호타키 왕조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였다. [65] 해당 인물은 비비 아이샤(Bibi Aisha)로, 탈레반이 자행하는 강제결혼을 피하려다 사령관 명령에 의해 코와 귀가 절단되었다. 이후 외신에 보도되어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알리는 데 공헌했고 미국으로 망명 후 수술을 하여 코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66] 그는 극단적인 발언으로 인해 영국 노동당 영국 정계에서 축출당했을 만큼의 강경한 좌익 성향 인사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결국 '미국이 더 나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이 선은 아니다' 소리가 나올 만큼 탈레반은 역사적인 미국의 다른 적들에 비해 세계적 지지나 공감 등을 전혀 받지 못한다. [67]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로 자선을 위해 자신의 1년 수입중 최소 1/40을 내는 개념이다. 세금 내고 나서 남은 수입의 2.5%를 자선하는 거니까 극빈곤층이 아닌 한 그렇게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다. 물론 각자 형편에 따라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경우 안 내도 되고 자카트를 내는 대상에게 직접 주어도 무방하다. 단, 자카트를 받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때문에 이슬람권 여행 중에 갑자기 대박을 맞는 여행자들도 드물게 있다. 이처럼 원래의 자카트는 사회안전망 형성을 위한 복지 비용이지만 정통 칼리프 시대부터 재산세로 변화했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시대에는 기부할 때 사다카(기부)나 자카트라는 용어를 혼용했지만 정통 칼리프 시대 이후에는 자카트를 재산세로, 기부하는 행위는 사다카로 인식하게 되었다. 여행자가 기부를 받은 것도 자카트보다는 사다카에 가깝다. 탈레반에서 20 ~ 30%를 징수하겠다는 것은 원래의 자카트 세율보다 훨씬 높으며 규정에도 어긋난다. 자카트를 빙자해서 중산층과 부유층, 북부 동맹계 인사들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강탈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68]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사. 전직 드론 조종사들의 증언. # [69] 사실 이라크 전쟁뿐만 아니라 아프간 전쟁에서의 미국의 참전 논리도 이러한 비판에 자유롭다고 보긴 힘든데 무슨 명분을 내세우든 결국 미국이 하는 짓은 엄연한 주권국가에 대한 무력 침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은 이라크 전쟁과 달리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분명한 내정간섭 및 침공이었으나 정작 탈레반 축출 당시만 하더라도 별 말이 없었다. 이는 알카에다라는 명분이 있기도 했지만 미군의 침공을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탈레반이 국제적으로 심각한 질타를 받던 상태였던 점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70] 쉽게 말해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보다 약간 더한 수준일 정도다. [71] 물론 현재는 와칸 회랑을 두고 중국이 예의주시하며 아프가니스탄의 후견세력으로 자처할 수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위구르에 대한 간섭을 일절 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한다. 탈레반에서도 내부 권력문제로 인한 내전 등 불안요소가 재발생하면 미국이나 러시아가 아닌 국경을 맞댄 중국이 위협을 느끼고 아프가니스탄의 정세에 개입할 수가 있다. [72] 어디까지나 미국과의 전쟁 상황 때문에 중국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고 당장 정상국가화를 위해서는 누구라도 손을 잡아서 외교를 복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이 거슬리지만 제 코가 석자라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것에 가깝다. 중국이 위구르 이슈로 탈레반을 경계하는 것은 차차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 정권으로 안정화된다면 탈레반 자체는 쇄국정책으로 외국에 대해서 신경 끄겠다는 입장이지만 내부의 과격파 극단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위구르로 시선을 돌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내에 안주하려는 탈레반을 떠나 ISIL 혹은 알카에다 등의 테러단체로 건너가서 중국을 괴롭힐 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프간이 요람의 역할을 할 것이라 예상한다는 것이다. [73] 그나마 변수라면 탈레반의 자금줄 아편 수출이 있다. 중국은 아편전쟁 때문에 청나라 말기 이래로 마약류에 대해 깊은 PTSD를 갖고 있어서 마약 범죄에 대해서는 대단히 강경한 정책을 관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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