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9:00:31

아프가니스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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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국의 무덤'3. 고대 (기원전 22세기 ~ 기원후 3세기)
3.1. 헬레니즘 제국 지배 이전3.2. 헬레니즘 제국의 지배3.3. 기마 유목민 스키타이의 정착3.4. 토하라인의 정착
4. 중세 초 (4세기 ~ 7세기)5. 이슬람의 도래 (7세기 ~ 13세기)
5.1.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7세기 ~ 9세기)5.2. 타지크-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9세기 ~ 13세기)
6. 몽골- 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 (13세기 ~ 16세기)
6.1. 카르트 왕조6.2. 티무르 제국6.3. 무굴 제국의 카불리스탄 지배
7. 파슈툰인의 발흥 (16세기 ~ 1823)
7.1. 파슈툰인의 인도 수르 제국7.2. 사파비 왕조의 헤라트 지배7.3. 호타키 왕조7.4. 아프샤르 왕조의 지배7.5. 두라니 왕조
8. 바라크자이 왕조 (1823 ~ 1973)
8.1. 아프가니스탄 토후국 (1823 ~ 1926)
8.1.1.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8.2. 아프가니스탄 왕국 (1926 ~ 1973)
9. 현대 (1973 ~ 현재)
9.1.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1973 ~ 1978)9.2.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1978 ~ 1992)
9.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9.2.2. 나지불라 정권과 무자헤딘의 내전
9.3.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1992 ~ 1996)9.4.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1996 ~ 2001)9.5.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2001 ~ 2021)9.6. 탈레반 과도정부 시기 (2021 ~ 현재)
10. 문헌
10.1. 전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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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e0116729_5020bb3e9f6b8.jpg
다민족국가 아프가니스탄 역사를 다루는 문서.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왕조와 국가들에 대해서는 개별 문서들에 충실히 설명된 경우가 많으므로 본 문서는 근대사 항목까지는 아프가니스탄의 종교 변천 및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민족들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현대 아프가니스탄은 군주제(1919–1973), 공화제(1973–1978), 공산주의(1978–1992), 공화제(1992–1996), 탈레반 신정제(1996–2001, 2021–), 이슬람 공화제(2001–2021)를 채택한 국가이다. 다양한 정치체제를 근 30년간 경험한 셈이다.

2. '제국의 무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국의 무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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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이 국력만 믿고 여기를 쳤다가 좋은 꼴 본 일이 거의 없다. 쿠샨 왕조,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티무르 제국 정도가 대부분의 영토를 직접 지배했지만 이런 왕조들은 애당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왕조이므로 논외고, 이 땅을 직접 지배한 '외세'는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제국 몽골 제국뿐이지만 이들도 오래 지배하지는 못했다. 헬레니즘 제국 내에서는 아프간 산지 내 주둔한 그리스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독립해 버렸고, 몽골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를 정복하는 것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 세력은 나중에 멸망 후 차가타이 칸국 출신의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제국으로 대체된다.

2.1. 몽골 제국

사실 그 몽골조차 기병이 기동하기 어려운 지형을 벗삼은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아프간 전토를 완전히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고, 점과 선을 중심으로 각 지역민을 간접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프간의 지리적 환경과도 연관이 깊은데 나라 전체가 거대한 산지인 데다 그 험준함도 무시무시한 수준이라 점령군이 적은 비용으로 장기적인 주둔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나오는 문제점으로 현대에서 과학 기술을 믿고 쳐들어 온 소련도 결국 산세의 험난함으로 버티며 기습을 하는 게릴라들의 저항에 질려버려 떠나버렸다. 다만 뒤이어 나올 열강들에 비해 몽골은 그나마 장악력이 좋은 편이어서 일 칸국이 멸망하는 14세기 초까지 약 100여년을 지배했다.

2.2. 영국

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4500명의 영-인도군 병력은 12000명의 민간인과 함께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후퇴하려다가 포로로 잡히거나 자살하거나 전멸, 의사 1명만 간신히 살아왔다. 나중에 다시 쳐들어간 영국은 이기긴 했지만 절대로 직접 가서 주둔하고 지배하지 않고 전투만 이긴 뒤 물러나서 허수아비 왕조를 조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1]

2.3. 소련

그러나 이와 달리 직접 지배하려 든 소련은 고작 주요 도시들과 도로들만 통제하고 오랜 개입 끝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여러 내부 문제까지 겹치며 아예 체제가 붕괴했다.

2.4. 미국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탈레반과의 전면전은 역시 손쉽게 승리했으나 영국과는 달리 이곳을 점령하려 들었으므로 피해가 막심해지고 있다. 또한 잡으려던 알 카에다도 못 잡고 탈레반은 다시 강성해지는 등 지금도 엿먹고 있다. 그나마 미국은 2011년 5월 2일, 10년 만에 오사마 빈 라덴을 죽이는 데 성공했으나 정작 파키스탄에서 해냈을 뿐이며 여전히 탈레반 세력은 건재하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영국은 2014년 12월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든 전투병력을 철수시키고 있다. 결국 이라크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국은 공연히 10년 이상 막대한 전비[2]를 퍼부어 국고에 구멍나게 만들고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엄청나게 일으켰을 뿐, 탈레반 제거나 민주주의의 정착 같은 목표의 달성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나마 빈 라덴을 잡아 체면치레에는 성공했지만 그마저도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파키스탄에서 해냈기에 이러자면 뭐하러 여기로 와 전쟁하느냐 볼멘 소리가 많았다.

결국 미군은 완전철수와 같이 전쟁 종결을 선포하면서 이웃한 주변 중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늬들도 결국 소련 시절때 우리랑 똑같았다는 비웃음을 받으며 물러나야 했다. 베트남 전쟁 때처럼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으나 그들도 결사적으로 항전을 외치진 못했다. 들이는 돈 대비 아무것도 얻은 게 없으니...

3. 고대 (기원전 22세기 ~ 기원후 3세기)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경로였던 터라 여러 민족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이 말은 이 지역의 주민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복자의 군대들과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든가, 아니면 자기들이 정복을 하든가'라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페르시아계, 그리스계 왕조와 북인도계 왕조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이슬람 도래 이전에는 불교가 매우 흥했던 지역으로[3] 중국이 불교화하는데 이 지역 출신 승려들이 많이 공헌하였으며, 이슬람 시대 이후에는 이 지역의 불교 대학 시스템이 이슬람 사회에 도입되어 이슬람 대학교(마드라사) 시스템에 큰 영향을 주었다.

3.1. 헬레니즘 제국 지배 이전

고대 이 지역의 역사는 그리스인의 유입 이전에는 역사 기록이 부족하여 베다 편찬 시기를 통해 추정하거나 고고학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대 역사를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캅카스 지역에서 발흥한 인도유럽어족 계열 아리아인이 기원전 2200년경부터 1700년경까지 고대 박트리아에 유입되어 청동기 문화를 전파하였다. 초창기 박트리아 지방은 안드로노보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박트리아 지방에 정착한 아리아 유목민은 인더스 문명을 침공하여 멸망시킨 후 이후 천여 년 동안의 확장 과정에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Aryan Migration, 1700~700 BC) 이들은 인도아리아인[4][5]의 기원이 된다.

기원전 700년경부터 기원전 550년경 박트리아는 소아시아에서 이란 고원에 걸친 메디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박트리아의 자리아스파라는 도시에서 자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가 출현했는데 그가 설파한 종교 교리는 이후 고대 페르시아의 국교 조로아스터교가 되었다.[6]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마를 데바(Deva)라고 칭했는데 반해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서는 신을 데와(Deva)라고 칭했다. 서로 연관이 있되 적대하는 사이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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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 왕국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발흥으로 멸망하고, 다리우스 1세가 박트리아 지역을 접수하였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은 기원전 500년대부터 330년대까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는동안 사트라프라고 불리는 총독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아리아(Aria) 주, 박트리아(Bactria) 주, 아라코시아(Arachosia) 주로 나뉘어졌다.

3.2. 헬레니즘 제국의 지배

이 지역은 과거 페르시아 인도 문화권 지역의 경계 지역인 박트리아로 불렸다. 고대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 과정에서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제국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 역사도 그리스어로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방에 그리스인 군인들을 정착 주둔시키기 위해 오늘날의 헤라트, 칸다하르, 베그람, 후잔트(타지키스탄) 등의 기원이 되는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의 내전 과정에서 셀레우코스 1세가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장악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설했으며, 이 지역에 주둔한 그리스인 군인과 그 후손들은 향수병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마우리아 왕조를 세우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인더스 강 유역을 탈환하고, 이후 그의 손자 아소카 대왕이 힌두쿠시를 넘어 박트리아 상당 지역을 정복하였다. 아소카 왕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라그만 주에 아람어로 자신의 정복 사업을 기록하는 석조 기록을 세기고 칸다하르에는 그리스어로 자신의 정복 사업을 기록하는 석조 기록을 세겨놓아, 마우리아 왕조의 아프간 정복 증거를 남겼다. 자라투스트라의 고향 자리아스파는 아소카 왕의 불교 전파 이후 자리아스파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 바할리카의 이름을 따서 발흐 시로 개명한다.

파일:SeleucidMap.jpg

기원전 3세기 카스피해 일대에 스키타이계 유목민 다하이족이 남하하여 셀레우코스 제국 영토의 동부를 공격하고, 파르티아를 건국하면서 박트리아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분리되었다. 박트리아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자체적인 독립 왕국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리스 박트리아인들은 쇠퇴기에 접어든 마우리아 제국을 공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식으로 통치자의 초상과 연도가 그려진 주화를 제조하는데, 이는 후대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이후 인도 여러 왕조에 주화 주조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계 주민들 이외에도 박트리아 토착민들이 그리스 알파벳으로 박트리아어를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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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F6B3555-0A03-40FB-9DE7-B13111FCCB76.jpg 파일:Ai_Khanoum_Portrait_of_a_man,_found_in_the_administrative_palace.jpg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의 그리스인들은 대개 박트리아 현지인들로부터 조로아스터교 풍습과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 말기부터 번영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 하눔 유적은 중앙아시아의 그리스 문화와 간다라 불교 미술의 과도기를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문헌에 기록된 유크라티데이아(Εὐκρατίδεια)로 추정되는 아이 하눔은 아고라와 6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 헤라클레스 조각상과 제우스 신전, 그리고 거대한 그리스식 야외 체육관을 완비하고 있었다. 궁전 유적 마당에서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 108개 그리고 궁전 실내에는 도리아 양식의 기둥 90여개가 발견되었다.

과거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이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위치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를 계승한 인도-그리스 왕국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 중심지였고, 인도 문화와 더 밀접하게 연관을 가졌다. 인도 그리스 왕국의 메난드로스 왕은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여기에 자극받은 인도-그리스인들은 불교로 개종하고 간다라 불교 미술 형성에 직접 기여하였다. 브라만교 사제들은 요바나인(인도-그리스인)들이 브라흐민을 존중하지 않고 베다에 입각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북서부에서 이주한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그리스인들에게 수드라 카스트를 부여했는데, 이에 반발한 인도-그리스인들은 대거 불교로 개종하였다. 인도 그리스 왕국의 멸망 이후에도 그리스인들은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여러 왕조에서 주화를 주조하고 그리스 조각상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불상을 주조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스어가 사용된 주화는 심지어 서기 9세기 무렵까지 주조되었다.

3.3. 기마 유목민 스키타이의 정착

둔황 서쪽 지역에서 지내고 있는 토하라인들이 흉노 연맹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가 서쪽으로 도망쳤다. 사카족들은 이렇게 밀려오는 토하라인들의 침입에 못 이겨 박트리아로 이동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정복했다. 이렇게 박트리아에 정착한 사카족을 인도-스키타이라고 한다.[8]

그리스인들의 뒤를 이어 인도 북부에 침입, 정착한 샤카족들은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비롯해 인도-그리스인들보다 더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통일된 세력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이후 토하라인들이 아스윈에 밀려나 이주하는 과정에서 다시 박트리아 일대를 정복하고, 파르티아의 제후 중 한 명인 곤도파레스가 사카스탄의 인도-스키타이인들을 정복하면서 인도-파르티아 왕국으로 흡수당했다. 이후 토하라인들이 쿠샨 왕조를 세워 이들을 정복, 흡수하는 과정을 통해 인도-스키타이, 인도-파르티아 세력은 인도인에 동화, 흡수되었다.[9]

중국에서 기마 유목민의 영향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 스키타이인들과 인도 파르티아인 및 이들을 흡수하는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인도인들도 승마에 편한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안장, 고삐, 단추 달린 외투, 장화가 서서히 도입되고 우수한 기병 육성이 가능해지면서 이후 인도에서는 고대 전차의 운용은 점차 도태되었다.

3.4. 토하라인의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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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연맹과 오손에게 밀려난 토하라인의 5개의 일족이 박트리아에 정착하는데, 이를 계기로 박트리아는 중세 초기에 토하라인의 땅이라는 뜻의 토하리스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쿠샨 족의 왕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토하리스탄의 다섯 부족을 통합하고 인도로 진출하여 제국을 세우는데 이를 쿠샨 왕조라고 부른다. 한편 마우리아 왕조가 기원전 2세기 중엽 붕괴되면서 북인도 지역은 여러 소국들이 할거하는 형태가 계속되었다. 쿠샨 왕조는 이러한 소국들을 통합한 후 동서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다. 쿠샨 왕조는 영토를 남쪽으로도 확장하여 인더스 강 입구에 이르렀고, 로마와 무역하던 부유한 해상 무역 도시들을 장악했다. 이 해상 무역 도시들이 쿠샨 왕조에 막대한 이익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쿠샨 왕조는 무역을 통한 세수 증대를 목적으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해안 지방, 인도 북부를 아우르는 도로망을 건설하고 안전하게 관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호라산, 트란스옥시아나와 인도 북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였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트란스옥시아나 남부의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같은 도시들이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인도 문화를 받아들이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파일:Buddhism_in_inner_Asia.jpg

쿠샨 왕조는 불교가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브라만교에서는 외부인이 브라만교로 유입될 경우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인도 입장에서는 외부세력인 그리스인들과 인도-스키타이인들, 쿠샨의 토하라인들이 불교로 개종하면서, 중앙아시아로 불교가 급속히 전파되었다.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로마 제국의 경제력이 절정이 달하면서 인도산 수입품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다.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는 구자라트와 신드 지역의 항구도시들은 인도양과 홍해를 항해하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무역상인들을 통해 물산을 수출하고 구매 대금으로 로마 은화를 받으며 부흥했다. 무역으로 쌓인 부는 다시 도회지 상인들이 주로 믿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특히 발흐의 불교 순례지 나우바하르에는 많은 무역상들의 시주가 쌓이고 승단이 생기면서 초기 형태의 대학 기관이 설립되기도 했다.[10]

토하리스탄에서는 불교의 새로운 종파가 번성하는데, 바로 대승불교이다.[11] 오늘날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교 국가이지만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아직 불교 유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4. 중세 초 (4세기 ~ 7세기)

카피사 왕국[12]에는 곡식과 보리가 잘 자라며 과실나무가 많고 또 좋은 품질의 말과 울금향이 난다. 다른 여러 나라들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이 나라에 모여 있으며 기후는 바람이 차고 사람들의 혼인은 상스럽고 난잡하다. 문자는 토하리스탄과 거의 똑같지만 풍속이나 언어는 조금 다르다. 고운 면직물로 만든 옷이나 가죽옷을 입는다. 금전과 은전, 그리고 작은 동전의 화폐를 사용하는데 규격과 모양은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다. 이곳 왕은 크샤트리아인데 지략이 있고 성격은 용맹하여 주변 나라들의 변경을 위협하여 10여 개국을 다스린다.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며 삼보를 공경한다. 해마다 1장 8척의 은불상을 만들며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 두루 베풀고, 의지할 곳 없는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지혜롭게 보시한다. 사찰은 백여 곳이 있고 승도는 6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다. 이교도를 믿는 사람은 천여 명이 되는데 온몸을 완전히 벌거벗은 자들( 자이나교 공의파 신도)도 있고, 몸에 회반죽을 바르거나 해골을 이어서 머리장식으로 만들어 쓴 ( 슈와 숭배자) 사람들도 있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건타라국(健馱邏國)[13] 가니슈카 대제의 위력이 막강하였고, 그에 의해 불교가 두루 퍼졌는데, 오랑캐들은 왕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인질을 보내서 볼모로 잡혀 있게 하였다. 이 때의 습관으로 카피사의 왕 역시 여름에는 카피사에 머무르다 겨울이 되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대당서역기 / 현장

쿠샨 왕조가 붕괴된 후 토하리스탄 일대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 치세 때부터 페르시아에서는 오늘날 파슈툰족의 기원이 되는 산악 민족들을 아브간(Abgân)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국명의 기원이 되었다. 서기 5세기 무렵 백흉노 이른바 에프탈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이 발흥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를 근거지로 둔 에프탈족은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토하라계 혈통의 유목민으로 추정된다. 트란속시아나부터 인더스 강 일대까지 장악했던 에프탈인들은 이전의 유목 왕조들과 다르게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고 소그드인들로부터 체계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등 중앙집권을 추구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458년 페로즈 1세가 사산 왕조의 왕위에 오르도록 도운 후에 484년 헤라트 전투에서 페로즈 1세를 전사시키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부 호라산 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서기 557년 돌궐과 페르시아 연합군이 부하라 근교에서 에프탈족 대군을 포위 공격해 섬멸하면서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해진다. 에프탈족이 사산 왕조와의 전면전에 국력을 소모하는 사이에 서돌궐 제국이 에프탈족의 중앙아시아 영토를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에프탈 왕국은 여러 소국으로 쪼개지며 멸망하였다.

오늘날의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지역으로 이동한 에프탈인들은 인도에서 "후나스Hunas"나 "투르슈카스Turushkas"라고 칭해졌으며, 인도를 여행한 중국인, 한국인 승려들은 이들의 왕 미히라쿨라가 불교 승려들을 학살하고 여러 사찰을 파괴하여 불교의 교세가 많이 꺾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트라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미히라쿨라 왕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시알코트에 해당하는 사갈라를 근거지로 하여, 520년 신드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의 불교 사원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한다. 중국인 승려 현장 법사는 카슈미르 간다라 지방을 정복하고 승승장구하던 미히라쿨라 왕이 굽타 왕조의 저항에 막히면서 인도 아대륙 정복에는 실패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히라쿨라 사후 신드, 간다라, 카슈미르에 있던 에프탈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불교로 개종하고 인도인들과 동화되었다. 현장 법사로부터 한 세기 이후 간다라 지방을 방문한 혜초는 이 지역에 다시 불교가 부흥하였다는 사실을 전했으며 특히 우디아나(오늘날의 파키스탄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스와트 지구)의 경우 일반인보다도 불교 승려가 더 많으며 재를 올려 공양하는 일이 매일의 일상사가 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슬람 도래 이전 토하리스탄 일대에는 불교&힌두교로 개종한 에프탈족의 후예 카불 샤히 왕조 (Kabul Shahi, 565~879)가 들어섰다. 중심지는 카불을 중심으로 한 카불리스탄이었으며, 호라산의 자불리스탄 및 간다라 일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카불 샤히 왕조는 아랍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정복으로 쇠퇴 후 북인도의 라자스탄으로 남하하여 힌두 샤히 왕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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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미안 석불[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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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에게 파괴된 후의 모습

신라의 고승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에는 이슬람화 직전 및 직후의 아프가니스탄 사회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아프가니스탄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서부( 카이베르파크툰크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파슈툰인 거주 지역에 해당하는 간다라와 관련하여 이 지역이 이슬람화기 이전 관련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다시 카슈미르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한 달을 가면 간다라에 이른다. 이 나라 왕과 군사는 모두 돌궐인[15]이고 토착인은 소그드인들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브라흐민들도 있다. 이 나라는 옛날에 계빈 왕의 치하에 있었는데 돌궐 왕 아야가 한 부락의 군대를 이끌고 그 카피사(오늘날의 파르완 근교를 중심으로 한 왕국) 왕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다가 돌궐 병력이 강해지자 왕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가 됨으로서 이 나라는 돌궐 패왕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패왕은 이 나라 북쪽의 산속에 살고 있는데, 그 산은 민둥산으로 풀이나 나무라고는 없다.[16]

의상이나 풍속, 언어, 절기는 사뭇 별나다. 옷은 가죽 외투와 모직 웃옷, 가죽신, 바지[17]를 입는다. 땅은 보리와 밀을 재배하기 적합하고 기장이나 조, 벼는 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보릿가루와 빵을 많이 먹는다. 카슈미르와 대발률(발티스탄), 소발률(길기트)와 다르게 포도를 재배하지는 않고 대신 사탕수수가 있다. 이 나라의 돌궐 왕은 코끼리 다섯 마리를 가지고 있다. 또 그가 가지고 있는 양과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낙타와 노새, 당나귀 따위도 대단히 많다. 이나라 땅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험악하고 강도들이 득실거린다. 또 북쪽으로 가도 악업을 일삼는 자들이 많으며 시장과 가계에서는 도살하는 일이 너무나 흔하다.

이 나라 왕은 돌궐인이지만 삼보를 매우 경신하고 왕과 왕비, 왕자, 수령들은 저마다 절을 지어 삼보를 공양한다. 이 나라 왕은 해마다 두 차례씩 애용하는 물건과 처, 코끼리, 말 등을 시주한다. 단 처와 코끼리만은 승려들더러 가격을 매기게 하고서는 값을 치르고 도로 찾아온다. 그 밖의 낙타와 말, 금과 은, 의복, 가구는 승려들로 하여금 매각하게 해서 그들 스스로가 이익을 나누어 생활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이 왕이 여타 북쪽의 다른 돌궐 왕들과 같지 않은 점이다. 이 나라에서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설일체유부)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 간다라 편, 왕오천축국전
그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불리스탄이라고 부른다. 토착인은 소그드인과 같으며 왕과 군사는 돌궐(에프탈)인이다. 이들은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고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법이 행해진다. 의상과 풍속, 물산은 간다라 지방과 비슷하고 언어는 각기 다르다.
- 자불리스탄 편, 왕오천축국전 / 혜초
바미안에서 스무 날을 가면 토하리스탄에 이른다. 왕이 사는 도읍은 발흐인데, 지금은 아랍 군대에게 점령되어 왕은 할 수 없이 동쪽으로 한 달 걸리는 바다흐샨에 가서 살고 있다.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며, 가죽 외투와 모직 옷을 입는다. 위로 국왕에서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죽 외투를 겉옷으로 입는다. 이 땅에는 낙타, 노새, 양, 말, 모직 천, 포도가 많으며 빵만 즐겨 먹는다. 추운 고장이라서 겨울에는 서리와 눈이 내린다. 국왕과 수령 및 백성들은 삼보를 매우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고기와 부추, 파 등을 먹으며 외도는 섬기지 않는다. 이 땅에는 산이 많다.
- 토하리스탄 편, 왕오천축국전

5. 이슬람의 도래 (7세기 ~ 13세기)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한 정통 칼리파 시대 아랍 무슬림들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전역을 정복하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아프가니스탄 서부 호라산 지역도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초창기 아랍인들은 아프간 산악 지대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 치세 서기 9세기에 카불이 정복되었다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화는 최종적으로 튀르크계 가즈나 왕조에 의해 완료된다.

이슬람이 도래한 후 이슬람 제국인 가즈니 칸국, 델리 술탄 왕조 등의 지배를 받았으나, 칭기즈 칸의 침공으로 몽골 제국, 일 칸국의 지배를 받는다.

5.1.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7세기 ~ 9세기)

서아시아의 이슬람이 정복 및 상업 활동을 통해 퍼지면서 호라산 일대는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 호라산의 불교 사회 지도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 지역의 불교 신자들은 급속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물론 이들은 아무 저항 없이 개종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랍 군대는 불교 도시 발흐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었고, 이후에도 현지인들이 계속 봉기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739년 발흐의 총독 나스르는 인두세를 피할 목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배교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사면하였으며, 체납된 세금을 모두 무효화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우마이야 칼리프는 해당 조치에 불만을 품었지만, 나스르 총독의 혜안 덕분에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아랍인들에 대한 반란을 멈추게 되었다.

아랍인들의 정복과 현지인들의 반란이 이어지면서 발흐 구시가지가 파괴되었다. 아랍인들은 발흐를 오고가는 소그드인 무역상들이 시주를 하던 불교 대학 나우바하라를 무슬림들의 도시로 개조하는데, 당시 신도시 건설을 주도한 세력은 나우바하라를 운영하던 현지 유력자 가문이자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바르마크 가문이었다. 불교의 출가자(승려)와 재가자 시스템이 이슬람 사회에 도입됨으로써 본격적인 형태의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 시스템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18] 실제로 이슬람 신학이 발달한 지역 부하라, 발흐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 도시들은 이전에 불교 대학으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호라산에 진출한 아랍인들은 개종한 호라산 현지인들과 급속히 동화되었으며, 광산 운영 및 중앙아시아 소그드인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했으나, 근거지를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에 둔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이에 호라산을 근거지로 둔 아바스 가문과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하심 가문이 손을 잡았다. 아바스 가문은 튀르크계 유목민과 계속 전투를 벌이며 국경을 확장해왔던 터라 노련한 정예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하심 가문은 정통성을 이용해 무슬림 세계에서 동조자들을 확보하였다. 압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킨 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는 압바스 칼리프국을 건설한다.

압바스 왕조는 자신들의 근거지 호라산 일대를 지원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는 이슬람 제국 무역과 학문의 중심지로 거듭났다.[19] 나우바하라 출신 바르마크 가문은 압바스 5대 칼리파 때까지 재상직을 배출하며 권세를 누렸다. 바르마크 가문은 산스크리트어 번역가들을 후원하였다. 압바스 칼리프조 시절 산스크리트어 문헌의 아랍어 번역의 거의 대부분은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발흐 출신의 바르마크 가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바르마크 가문의 고향이던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일대가 번영을 누렸음은 물론이다.

5.2. 타지크-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9세기 ~ 13세기)

전성기를 누리던 압바스 왕조가 제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사후 분열되고 힘이 약해지자 정교한 관료제가 흔들리게 되고, 이를 틈타 페르시아인들이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 반독립적인 나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명 "호라산의 진주"라고 불리던 동서 무역의 중심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순니 이슬람-페르시아( 타지크) 문화가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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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 왕조

하룬 알 라시드와 페르시아인 부인의 아들 알 마문은 타지크인 군벌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배다른 형 알 아민을 무찌르고 칼리파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장수 타히르가 호라산 지역에서 독립 군벌 왕조 타히르 왕조를 세우는 것을 묵과할 수 밖에 없었다. 압바스 칼리프국 동부 영내에서 사실상 반독립 상태의 왕국으로 존속하였는데, 타히르는 명목상 알 마문에게 충성하였지만 중앙 정부로 세금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당시 타히르 왕조는 발루치스탄 일대의 반정부 극단주의자들인 카와리지파들이 압바스 칼리프국의 본국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압바스 칼리파들은 이 지역을 따로 수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타히르 왕조는 영내 카와리지파들을 제어하기 위해 사실상 세계 최초로 지방 농촌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의무교육 제도도 시행해보는 등등 별별 조치를 취했지만, 카와리지파들의 전횡을 막을 수 없었다. 카와리지파들과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손을 잡고 대대적으로 반 아랍 봉기를 일으키는데 이들의 칼날은 아랍인에 앞서 페르시아계 순니 무슬림 타히르 왕조로 향했다. 이들의 무리는 지도자가 구리 세공인(사파르)이었다는 이유로 사파르 왕조라고 불렸다. 사파르 왕조는 타히르 왕조의 주요 무역 거점 헤라트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수도 니샤푸르를 점령하여 타히르 왕조를 최종적으로 멸망시켰다. 사파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 거의 전역을 최초로 정복한 이슬람 왕조이지만, 군사력 외에 기반이 취약하여 창건자 1세대 이후 금방 붕괴되었다. 사파르 왕조는 무슬림들의 왕조였으나 정확히 말하자면 순니파 이슬람은 아니었고 카와리지파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뭉친 군벌 세력이었다. 이들은 당시 불교를 믿던 카불 바미안을 정복하였으나 이들이 잠시 정복했다고 해당 지역의 종교 지형이 바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알 사파르(구리세공인)라고 불린 야쿱 이븐 라이스는 삼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차남은 노새몰이꾼이었고 삼남은 목수였다. 전통적인 조로아스터교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근본도 없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카와리지파들과 빈민들은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위대한 군벌이 되자 환호하였다 전해진다. 사파르의 군대는 바그다드 성문 앞에 다다라서 칼리파에게 바미안에서 가져온 조그만 불상과 힌두교 신상을 보내는 기행을 벌였는데, 정확한 의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사파르와 친분이 있던 시인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사파르 군대의 사기를 북돋운 것을 보면 그의 군대를 이끈 동력은 바로 현지 부족들의 반아랍 감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신들은 결코 우리의 선행에 적절한 사의를 표하지 않았다.
히자즈[20]에 있는 당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도마뱀이나 먹고 염소나 기르라.

소그드계 후손으로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만 가문[21]이 사파르 반란군을 진압하고 그 대가로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어냈다. 사만 왕조는 순니 이슬람-페르시아 문화를 중앙아시아에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으며, 행정 용어에서도 아랍어가 밀려나고 페르시아어가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만 왕조에서 사용하던 중세 페르시아어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다리어와 오늘날의 타지키스탄의 국어 타지크어의 직계 기원에 해당한다. 다리어와 타지크어는 사실상 같은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아프간 산악 민족 상당수가 불교와 힌두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도 이 무렵이다.

타히르 왕조와 사만 왕조 시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타 이슬람권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철학을 아랍어로 번역한 것에 바탕을 둔 이슬람 사변철학이 유행하였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대에서 태어난 학자인 아부 술라이만 알 시지스타니는 "종교와 철학은 완전히 분리된 영역에 속하며 사실상 상호 양립이 불가능하다."(그러므로 종교계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을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중세 유럽의 철학자 오컴의 윌리엄의 견해와 유사한 것이었다. 발흐 출신 의사이자 철학자, 신학자였던 아부 자이드 알 발히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무타질라 학파와 순니파의 신학을 절충한 형태의 쿠란 주해서를 저술하였으며, 의사로서 심리치료 관련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아부 자이드는 우울증, 공격성, 걱정과 분노 등등 심리적 이상 상태를 몸 안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몸 밖에서 기인한 것인지의 여부에 따라 두 가지 하위 범주로 분류했다. 그는 신경증 정신병을 구분한 뒤 신경증의 경우 긍정적 사고와 일종의 대화 요법을 통해 치료할 것을 제안하였고, 우울증은 대화나 긍정적 사고 권장으로는 해결이 안 되니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만 왕조의 튀르크계 지방 군벌 정권으로 시작했던 가즈니 왕조는 사만 왕조가 카라한 칸국의 공격으로 쇠퇴하자 아프가니스탄 가즈나를 근거지로 술탄 마흐무드 치세에 북인도를 여러 차례 침략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오늘날 북인도와 파키스탄 일대의 여러 힌두 사원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술탄 마흐무드는 카불 샤히의 잔존 세력이던 자불리스탄의 아프간 불교도 귀족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며, 자신의 치세에 카불 샤히의 후신 국가 힌두 샤히와 계속 전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힌두 샤히를 멸망시키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가즈나 왕조 시대를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기원한 불교 & 힌두교 왕조들은 모두 이슬람 왕조에 흡수되며 멸망하였다.

가즈니 왕조는 호라산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다른 튀르크계 왕조와 격돌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서 발흥한 오우즈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이 가즈니 왕조와 전쟁을 벌여 1040년 헤라트를 점령하였다. 1175년에는 가즈니 왕조에 정복되었던 타지크계 고르 왕조가 세력을 키워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헤라트를 정복하였다. 당시 헤라트는 동방의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로 무스타우피의 기록에 따르면 359개의 마드라사와 6천여 개의 목욕탕, 1만 2천여 개의 상점들이 가득했으며 특히 금속 제품 가공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당시에도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있었다 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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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 왕조는 타지크계 왕조이지만 오늘날의 파슈툰족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왕조이기도 하다.[23] 9세기 말 창건된 고르 왕조는 가즈나 왕조 술탄 마흐무드의 침략 이후 1011년 불교에서 순니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아부 알리 이븐 무함마드라는 무슬림 왕이 통치하게 되었다 한다. 이후 힘을 키운 고르 왕조는 1186년 역으로 가즈나 왕조의 수도 라호르를 정복하여 신종을 받아냈다. 구르 왕조는 사만 왕조에 이어 페르시아 문학을 부흥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후 고르 왕조는 호라산 대부분 지역에서 벵골에 이르기까지 북인도 전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고르 왕조는 이후 호라산 동부의 교역도시 헤라트로 천도하였으며, 페르시아-타지크 문화를 흡수하였다. 고르 왕조는 짧은 전성기를 마감한 채 호라산 일대의 영토는 호라즘 제국에, 그리고 북인도 영토는 노예 왕조에 정복당하며 1215년 멸망하였다.

6. 몽골- 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 (13세기 ~ 16세기)

1220년, 칭기즈 칸이 이끈 몽골 제국 호라즘 제국을 침공하며 상황이 급변한다. 다수의 도시가 몽골에 의해 초토화되고 술탄인 무함마드 2세마저 사망하자 아프가니스탄이 몽골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질 뻔 한 것이다. 이에 호라즘 왕조 무함마드 2세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된 아들 잘랄 웃 딘이 바미안에서 자리를 잡고 항전하고, 1221년 파르완 전투로 몽골이 첫 패배를 당하고, 1222년 칭기즈 칸 손자 무투겐이 바미안 포위 도중 전사하는 등 나름의 선전을 하며 제국의 무덤이란 악명에 걸맞게 몽골이 여러차레 쓴 맛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일시적 상승세는 거기까지였고, 분노에 찬 칭기즈 칸이 바미안을 불바다로 만들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초토화 시켰으며, 이후 페샤와르와 가즈니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곳곳을 차례로 점령해 잘랄 웃 딘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나마 몽골이 핵심 인물이었던 잘랄 웃 딘을 인더스강에서 놓치고, 칭기즈 칸 본인도 차기 칸 계승 문제와 금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몽골고원으로 돌아가면서 호라즘이 잠시 한숨을 돌리기도 했으나, 오고타이 칸의 재침공으로 호라즘의 잔당이 완전히 쓸려나가며 결국 1231년 잘랄 웃 딘 마저 사망해 아프가닌스탄 전역이 몽골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며 호라즘 왕조는 멸망한다.[24]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호라즘 제국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몽골군에게 직접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상자는 대부분 도회지 주민이었다. 도시민들 중 생존자들은 대개 피난민이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유명 도시 주민 상당수가 인도나 혹은 멀리 아나톨리아까지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헤라트에서는 거주민 중 16명만 남고 모조리 살해당했는데 이 와중에 헤라트의 도서관 역시 무사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전쟁으로 인한 기아나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많았음은 물론이다. 몽골군들은 호라즘 제국에 복수하는 과정에서 농업용수나 식수를 공급하는 저수지나 관개수로까지 모조리 남김없이 파괴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이 파견한 다루가치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부서진 관개 시설들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퍼졌을 당시 인구 손실은 전체 인구의 1/3~2/3였는데, 몽골 제국의 침략을 당한 아프가니스탄 서부와 북부의 인구 손실률 역시 여기에 못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로 몽골군이 점령지 중 거점도시나 요충지에 주둔하며 지역민들과 혼혈을 이룬 게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몽골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골인(Moghol)이라고 한다. 몽골인의 약탈 이후 사막화가 심해진 아프가니스탄 서부에는 타지크인 농민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유목을 하면서 아이마크인(Aimaqs)이 되었다. 이걸 봐도 알 수 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단일 국가, 외세 지배보단 지방 각 부족 국가나 부족들로 나누어진 작은 나라들이 이 나라 오랜 역사를 차지한다.

6.1. 카르트 왕조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몽골계 후신국인 일 칸국의 지배를 받다가 [25] 쇠약해진 일 칸국의 상황을 틈타 고르 왕조의 후신인 타지크계 카르트 왕조가 일 칸국의 몽골계 잔당들을 무찌르고, 니샤푸르, 메르브 및 발흐, 카불, 헤라트를 장악하였다. 전임 고르 왕조와 마찬가지로 카르트 왕조에서도 파슈툰족들이 폐쇄적인 산악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페르시아-이슬람 문화를 수용하였다.
우리는 과거 대도시였던 카불을 여행했다. 카불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프간족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지를 장악한 강성한 산악 민족이었다. 산악지대에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관습법을 지켰으며 그들은 이 법이 예언자 술레이만이 자신들에게 직접 전수해 준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곳 사람들이 믿는 전설에 의하면 술레이만은 이 산에 올라가 인도 땅을 굽어보니 온통 암흑천지인지라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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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바투타 여행기, 1333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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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파슈툰족의 직계 조상이 되는 아프간족 중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거부했던 이들은 이후 이스마일파로 개종한 후 슈그니족, 와키인, 사리콜인 같은 파미르족이 되었다.

6.2. 티무르 제국

일 칸국이 무너진 후에는 차가타이계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티무르의 후계자인 무굴 제국은 아예 여기서 일어났으며 무굴의 제1도시는 수도였던 아그라, 제2도시는 현재 파키스탄의 라호르 그리고 제3도시가 이곳의 헤라트였다. 그러다가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이 쇠약해지면서 페르시아의 전투기계인 나디르 샤가 쳐들어와 다시 이란에 편입되어 버린다. 현재의 아프간은 이란 치하의 영주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여 시작된 곳이다.

14세기 말 북쪽에서 내려온 티무르는 카르트 왕조를 큰 저항 없이 정복한 이후 티무르 제국에 호라산 지방을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천산 산맥 일대의 키르기스인과 오늘날의 우즈베크인의 조상이 되는 차가타이어파[26] 튀르크족이 남하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하였다.

1405년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과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둘로 쪼개졌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티무르의 후계자 중 천재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울루그 베그(Ulugh Beg 1394~1449)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의 철학과 과학의 중심지로 부흥하였다. 울루그 베그는 음악가, 시인들을 후원하였으며 거대한 천문대를 건설하고 직접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또한 부하라에서 수피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달래기 위해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마드라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울루그 벡이 건설한 마드라사들은 전통적인 종교 교육보다는 과학과 수학 교육이 중심이 되는 형태의 마드라사였고, 주입식 교육 대신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처럼 세미나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1449년 울루그 벡이 사망하자마자 보수 율법학자들은 그동안 과학과 수학 위주로 치우쳐 있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기즈다반의 마드라사 교수들을 대대적으로 추방하고 보수적인 형태의 마드라사로 복구시켰다.

오늘날에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티무르 제국의 남부 영토는 헤라트가 중심 도시였다. 울루그 벡과는 다르게 매우 엄격한 무슬림이었던 통치자 샤 루흐(Shah Rukh 1377~1447; 제위 1405~1447)의 영향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피즘에 입각한 상당히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문화가 확립되어갔다고 한다. 인도의 수피들이 힌두교와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파슈툰족 수피들은 근본주의를 추구하게 되면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주류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샤 루흐의 제국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만큼 근본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샤 루흐의 부인이었던 고하르샤드(Goharshad)는 헤라트 시에 소녀들을 따로 교육할 마드라사들과 무살라들을 여러 곳 건설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티무르 제국하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사본삽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슬람이 도래하면서 위축되었던 아프가니스탄의 벽화는 샤 루흐의 치세 들어 다시 예전 수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외에도 당시 화가들은 화면을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장면 하나하나를 독립된 작품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삽화를 그렸으며, 그림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구도가 더 중시되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에서는 인간의 형상 묘사를 금지하지만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샤 루흐의 벽화 후원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는 후대 무굴 제국 궁정 세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27] 서예와 필사법도 발달했는데 데쿠파즈 기법이 널리 유행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 우즈베크인의 형성에 영향을 준 부하라 칸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샤이바니 칸은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16세기 초 발흐와 헤라트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상당 지역을 점령하였고, 티무르 치세에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차가타이어파 튀르크족은 우즈베크 부족 연맹에 합류하였다. 우즈베크인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 정도를 구성하며 해외에서 우즈베크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나라도 바로 우즈베크인 380만여 명이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이다.

6.3. 무굴 제국의 카불리스탄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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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5대손이자 시르다리야 강 상류 출신 토호였던 바부르 우즈베크 칸국의 샤이바니 칸과의 전투에서 두 차례에 걸쳐 패배한 이후 부하들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 산지로 도주하였다. 1504년 카불을 점령하여 근거지를 마련한 바부르는 우즈베크 칸국과 바로 맞서 싸우는 대신 먼저 부유한 북인도 지방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부유한 북인도에서 풍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충성스런 전사들을 더 많이 확보해 우즈베크 칸과 다시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다.

모험가 기질이 강했던 바부르는 아프간족이 다스리던 델리 로디 왕조를 공격하였다. 로디 왕조는 힌두교도 신민들을 지나치게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델리 시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하여 민심이 이반하고 있었던 것. 1526년 바부르는 델리 근처에서 벌어진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왕조 군대에게 대승을 거둔 후 델리 아그라 지역을 접수하였다. 이렇게 무굴 제국이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북인도 내 다른 파슈툰계 왕조 및 힌두 라지푸트계 왕조들과 싸우며 1529년 우타르 프라데시, 비하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바부르는 사후 자신이 좋아하던 도시인 카불[28]에 매장되었고, 무굴 제국의 카불리스탄 통치는 18세기 나디르 샤의 침략 전까지 계속되었다.

7. 파슈툰인의 발흥 (16세기 ~ 1823)

아프가니스탄 내 주요 거점 도시들은 우즈베크 계열의 칸국들 및, 무굴 제국 혹은 사파비 왕조의 통제를 받았으나 이들 역시 점과 선 형태의 통치 형태만 유지할 뿐 아프간 산악 지대의 파슈툰족을 완전히 다스리지는 못하였다. 근세에는 많은 아프간인들이 북인도 일대로 남하하여 델리 술탄국을 계승하는 여러 왕조들을 건설하였고 아프간 왕조들은 이후 팽창하는 무굴 제국에 차례로 흡수되었다. 당시 인도인들은[29] 파슈툰족들을 파탄인(Pathans)이라고 칭했으며 상당수의 이웃 민족들은 이들을 에프탈족이라는 뜻의 압달(Abdal)이라고 칭했다. 근세 동안 아프간 내 여러 산악 부족들은 외세에 침입에 맞서 함께 투쟁하며 파슈툰족으로서의 통일된 정체성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7.1. 파슈툰인의 인도 수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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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슈툰계 수르 왕조(Sur Empire, 1539∼1555)의 시르 샤는 군사와 내치 모두 유능했던 명군[30]이었으나, 그의 사후 수르 제국은 금방 몰락해버리고 대신 무굴 제국이 수르 제국의 통화 체계와 우편 체계를 비롯한 내치 시스템을 상당 부분 계승한다. 이는 무굴 제국 2대 황제 후마윤의 치세 말부터 6대 황제 아우랑제브 치세 초까지 이루는 무굴 제국의 성세에 이바지했음은 물론이다.

7.2. 사파비 왕조의 헤라트 지배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킨 우즈베크족들은 여세를 몰아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1507년 헤라트[31]를 점령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이스마일 1세가 이끄는 이란 시아파 사파비 왕조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스마일 1세 사후 우즈베크인들이 헤라트 순니파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 다시 도시를 탈환하였으나 도시는 1528년 타흐마스프 1세의 사파비 군대에게 다시 점령당했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아바스 1세는 헤라트에서 총독 역할을 수행하던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다. 사파비 왕조 지배 시기 타지크계 아이마크인과 산악 민족 파슈툰인은 사파비 제국의 강제 개종 시도에도 순니파 이슬람을 유지했지만 도회지에 살던 하자라족은 쉬아 12이맘파로 개종하였다.

7.3. 호타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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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 사파비 제국은 조지아 카르틀리 출신 봉신인 기오르기 11세[32](구르긴 칸)을 칸다하르 일대 총독으로 파견했다. 기오르기 11세는 잔학무도한 성격으로 악명 높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사파비 제국 동부의 반항적인 파슈툰족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총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기오르기는 칸다하르 내 반항적인 파슈툰 부족민들을 감금하거나 처형하기를 즐겼는데 이 과정에서 칸다하르의 유력자 가문 구성원 중 한 사람이었던 미르와이스 호타크가 이스파한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미르와이스는 사파비 샤가 관용을 과시하기 위해 방면되었지만, 이스파한을 오고 가는 과정에서 다른 순니파 율법학자들의 자극을 받아 고향에서 봉기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르와이스 호타크는 먼저 기오르기 11세를 성 밖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연회를 베푸는 과정에서 끔살한 뒤 잽싸게 칸다하르를 장악하고, 다시 칸다하르를 탈환하기 위해 출동안 조지아계 사파비 군대를 격퇴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사파비 제국은 키질바시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맘루크로 이루어진 병력을 파병하였으나 파슈툰인들은 이들을 모조리 격퇴하고 파병된 전력 중 겨우 700여 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파슈툰인들은 미르와이스 호타크의 지도하에서 사파비 제국군을 무찌르고 독립을 쟁취한 상황이었으나, 미르와이스가 1715년 자연사하자 일부 파슈툰인들이 다시 사파비 제국에 신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미르와이스의 아들 마흐무드 호타크는 친사파비파로 의심되던 삼촌 압둘 아지즈 호타크를 제거하고 자신이 직접 파슈툰인들의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사파비 왕조가 다른 나라들과 전쟁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마흐무드는 페르시아 내 순니파들과 조로아스터교 신도의 협조를 얻어 1721년 사파비 왕조의 동부 영토를 점령하고, 이듬해 3월 이스파한 근방 굴른바드에서 프랑스인 포병 장교를 대동한 사파비 제국의 4만 2천 대군과 격돌하였다. 호타키 군대는 수가 1만여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거의 기병이었고 대포 100여 대를 낙타 등에 실어 운반하여 기동력이 훨씬 우월하였다. 굴른바드 전투는 마흐무드의 전술과 호타키 군대의 기동력에 힘입어 아프간 측의 대승으로 끝났다. 굴른바드 전투 대승의 여새를 몰아 마흐무드는 사파비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샤한샤로 등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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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무드 호타크는 1725년 암살당하고 대신 그의 친척 아슈라프 호타크와 후세인 호타크가 각각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맡았다. 아슈라프 호타크는 1727년 오스만 제국과도 한 차례 싸워서 승리했다. 이후 하마단 조약을 통해 정전 협정을 하는 과정에서 호타키 왕조는 당시 순니파 이슬람의 종주국으로 인정받던 오스만 제국에게 이란 서부 영토를 떼어주고, 대신 오스만 제국 술탄으로부터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공인받으며 권위를 더했다. 그러나 과거 파슈툰인들은 사파비 제국 시절 이란 12이맘파에게 순니파라는 이유로 박해받았던 경험 때문에, 시아파를 혐오했다. 호타키 왕조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과의 타협점을 찾는데는 실패했으며, 시아파 성직자들이 이란 각지에서 폭동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7.4. 아프샤르 왕조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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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두라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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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urrani_Empire_1747_1862_AD.png
  • 두라니 왕조 (Durrani, 1747 ~ 1826)

18세기 이란에서 반란을 일으켜 독립에 성공한 자체적인 왕조인 두라니 왕조가 세워지나 내분으로 멸망하고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때 인도 대륙을 식민지로 삼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도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끝에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대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영향을 받으며 서구화 및 근대화된다.

아프간의 자체적인 첫 통일 국가로 파슈툰인 역사상 최전성기에 해당하는 시대이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부족은 이전까지 압달리, 압달리 아프간족이라고 불렸으나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이름을 따서 두라니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시 두라니 왕조는 준가르 칸국을 점령하고 신장 지역을 정복한 중국 청나라와 사절을 교환하고, 인도 무굴 제국을 위협하던 신흥 강자 마라타 동맹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이며,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큰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두라니 왕조는 아프가니스탄 내 다른 민족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으며[33] 장기 지속하지는 못하고 내분으로 멸망하였다.

8. 바라크자이 왕조 (1823 ~ 1973)

8.1. 아프가니스탄 토후국 (1823 ~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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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러시아 제국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대영제국 히바 칸국 코칸트 칸국, 부하라 칸국을 복속시키며 남하하던 러시아 세력에게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로인해 미리 아프간을 자신의 구역으로 삼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유럽 국가들 중 러시아가 아프간과 수교하고 외교관 파견한것은 최초였으며 영국이 지속적으로 견제했으나 아프간 왕국은 러시아가 선수쳤다는 이유로 쳐내버렸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은 1차 세계 대전때 중립을 선포하였으며 독일이 아프가니스탄더러 영국령 인도를 치기 위해 꼬드겨서 군수물자들을 지원했지만 중립이라는 이유로 역으로 아프간은 독일이 지원했던 군수물자들을 먹튀하였다고 한다.

8.1.1.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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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80px-Flag_of_Afghanistan_(1880–1901).svg.png 파일:external/www.worldstatesmen.org/af-1901.gif
1880년부터 1901년까지 쓴 영국 치하의 국기 1901년부터 1919년 독립까지 쓴 영국 치하의 국기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가 되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 영국의 완충지가 되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지만, 세 차례에 걸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영국군은 오랫동안 고전하였다. 결국 제3차 영아전쟁 끝에 1919년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성립시키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다.[34]

아프가니스탄은 간다막 조약으로 외교권을 대영제국에 양도한 1879년부터 1919년 독립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써 외교권을 제한받고 많은 이권을 침탈당하였다. 또한 이때 영국은 ' 듀런드 라인'이라는 선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 사이의 국경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이 되었으며 이 듀런드 라인으로 인하여 아프간 족의 영토 및 인구 절반이 졸지에 파키스탄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8.2. 아프가니스탄 왕국 (1926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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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1931-1973).svg
1931년부터 1973년까지 쓴 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
흑-적-록의 전통색을 사용하게 된 건 1928년부터다.

아프가니스탄은 왕국으로써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냉전 시절까지도 왕국을 유지했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아프가니스탄은 안정기를 맞았다. 70년대 초반까지의 아프가니스탄과 한국의 1인당 GDP를 비교해 보면, 1965년까지는 한국이 앞서다가 1966~67년 아프가니스탄이 한국을 근소하게 추월했다. 그러나 1968년 한국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추월한 이래 두 나라 사이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국왕 아마눌라 칸은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이내 반란으로 축출되었다. 타지크족 출신의 하비불라 칼라카니가 카불을 점령하고 잠시 아프가니스탄의 왕을 칭했으나 그의 영향력은 카불 인근에 미치는 데 그쳤고, 아마눌라의 사촌인 나디르 샤 왕자가 이를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나디르 샤가 암살당한 후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왕위에 올라 40년간 왕국을 다스렸으며, 1930~40년대 일련의 반란들이 진압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비교적 안정기를 맞았다.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EzkKtBRPpP9GGify.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eoPmsWqTOFJl44y9.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NjWMG3DXSVQKOP0P.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ffPoAT3Smnt0guXZ.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GspDNV9ihPxcI3n2.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S2YeEzpwTRh4d6BD.jpg
파일:/pds/201301/12/90/f0243590_50f112f414bbe.jpg 파일:external/02varvara.files.wordpress.com/01-paghman-gardens-before-1967-e1279737587994.jpg
위 사진은 과거 아프가니스탄이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지만 실제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했던 사람 말에 따르면 당시(1950~60년대)에도 마찬가지로 전통 복식 착용이 대세였으며 아직 인구의 90% 정도가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 1967년 기사를 보면 1958년 경에 히잡 의무 착용이 폐지되고 1965년 여성 참정권이 주어졌으며, 1950년대 말과 비교해도 10년 사이에 인식 변화가 크다고 전하고 있다. # 또한 위 사진은 아프가니스탄 개방 구역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서방을 향한 선전 목적으로 이 구역만 특별히 전통을 따르지 않는 복식과 생활 양식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세속 문물들이 엘리트 청년층에서만 유행했다는 의견도 있다.

1947년 파키스탄이 독립하자 1893년 그어졌던 듀랜드 라인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이 인도에게 독립한 것처럼 파키스탄 서북부의 파슈툰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도 어디에 귀속될지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파키스탄은 이를 거부했다. 1953년 총리로 임명된 왕의 사촌 모하마드 다우드 칸은 내부적으로는 여성 권리를 보장하고 헬만드 강에 관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펴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파슈툰족의 통일을 지지하며 파키스탄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친미 성향의 파키스탄에 대립적으로 급격히 친소 성향으로 기울었다. 파키스탄과의 관계 악화는 무력 충돌과 국교 단절로 이어졌고, 결국 경제 위기가 닥치자 1963년 다우드 칸 총리는 해임되었다.

다우드 칸 총리 해임 이후 자히르 샤는 1964년 새로운 헌법을 도입해 입헌군주제와 보통선거를 도입하였으며, 이제 왕족이 총리직을 맡는 것은 금지되어 다우드 칸은 권력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초 기근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1973년 자히르 샤 국왕이 해외순방을 하던 도중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히르 샤 국왕을 몰아냈다. 다우드 칸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35] 그리고 여기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왕 이름 생몰 재위 기간
1 모하마드 나디르 샤 1883년 4월 9일 ~ 1933년 11월 8일
향년 50세
1929년 10월 15일 ~ 1933년 11월 8일
4년 24일(암살)
2 모하마드 자히르 샤 1914년 10월 15일 ~ 2007년 7월 23일
향년 92세
1933년 11월 8일 ~ 1973년 7월 17일
39년 9개월 9일(쿠데타로 폐위)

9. 현대 (1973 ~ 현재)

9.1.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1973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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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가니스탄 공화국 국기(1974-1978).svg
1974년부터 78년까지 쓴 공화국 시대의 국기.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쿠데타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포한 다우드 칸은 새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보수적인 이슬람교의 영향력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 사회를 바꾸고자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외교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친소련 정책을 펼쳤던 다우드 칸 대통령은 정작 자국 내에 있던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을 탄압하였다. 더욱이 다우드 칸은 공산주의자들 이외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내의 불만을 키웠다.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관저에서 잠자고 있던 다우드 칸 대통령과 영부인 자미나 베굼 등 일가족들을 끌어내고 소총으로 사살하였다. 그리고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영부인 내외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은 다우드 칸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사직했다고 거짓 발표를 내보냈고[38]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공산정권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 이름 생몰년 임기
1 모하마드 다우드 칸 1909년 7월 18일 ~ 1978년 4월 28일
향년 68세(암살)
1973년 7월 17일 ~ 1978년 4월 28일
4년 9개월 11일

9.2.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1978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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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국기(1978–1980).svg 파일: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국기(1980–1987).svg 파일: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국기(1987–1992).svg
1978년부터 80년까지 국기. 1980년부터 87년까지 국기. 1987년부터 92년 멸망까지 쓴 국기.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주의 체제를 심기 위한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민주당의 급진적 공산화 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발을 키웠고 특히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나날히 커져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소위 ' 무자헤딘(مجاهدين)'이라는 이름의 이슬람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히딘 간 충돌로 나라 전역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 역시 이미 권력을 잡기 전인 60년대부터 할크(خلق‎)와 파르참(پرچم‎)의 두 파벌로 분열되어 매우 취약했다. 이듬해인 1979년 당내 권력 투쟁에서 하피줄라 아민이 타라키를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아민은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 세력, 당내 정파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민의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불안정성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로 인해 아프간 공산 정권은 붕괴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상에 인접국이었던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이 이 지역에서 쌓아온 소련의 영향력 상실과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 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판단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개입 가능성을 슬슬 보이기 시작했고 1979년 12월 27일 소련은 육,공군 전체 병력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시키고 아민 대통령을 사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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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하피줄라 아민 바브라크 카르말 하지 모하마드 참카니
<rowcolor=#ffc224> 제5대
모하마드 나지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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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직책 이름 생몰년 재임 기간
권한대행 (대령) 압둘 카디르 1944년 ~ 2014년 4월 22일
향년 69~70세
1978년 4월 28일 ~ 4월 30일
2일
1 국가평의회 의장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1917년 7월 14일 ~ 1979년 10월 8일
향년 62세(암살)
1978년 4월 30일 ~ 1979년 9월 14일
1년 4개월 14일
2 국가평의회 의장 하피줄라 아민 1929년 8월 1일 ~ 1979년 12월 27일
향년 50세(암살)
1979년 9월 14일 ~ 1979년 12월 27일
3개월 13일
3 국가평의회 의장 바브라크 카르말 1929년 1월 6일 ~ 1996년 12월 3일
향년 67세
1979년 12월 27일 ~ 1986년 11월 24일
6년 10개월 28일
4 국가평의회 의장 하지 모하마드 참카니 1947년 ~ 2012년
향년 64~65세
1986년 11월 24일 ~ 1987년 9월 30일
9개월 6일
5 국가평의회 의장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 1947년 8월 6일 ~ 1996년 9월 28일
향년 49세(암살)
1987년 9월 30일 ~ 1987년 11월 30일(국가평의회 의장)
1987년 11월 30일 ~ 1992년 4월 16일(대통령)
총 4년 6개월 17일

9.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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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민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해 체코슬로바키아 영사로 밀려나다시피한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인접한 소련 내 공화국들의 정치적 혼란을 우려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 개입을 하였고,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과 소련군의 전쟁터가 되었다. 무자헤딘은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공격하였고,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과 게릴라전 형태의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소련은 막대한 양의 돈을 전비로 쏟아붓고 병력을 추가 증파하였지만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고 1985년에 접어들면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개입 중단을 고심할 무렵,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 내부에서도 카르말이 물러나고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대통령이 되는 권력교체가 일어났다. 한편 대통령이 된 모하마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을 비롯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정 수립 등의 유화 정책을 제시했지만 무자헤딘은 이런 나지불라의 제안에 반발하여 결국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했다. 한편 이때 소련은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철수를 시작했고 이듬해인 1989년 마지막 주둔 소련군 병력마저도 철수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9.2.2. 나지불라 정권과 무자헤딘의 내전

소련이 퇴각한 이후 이슬람 반정 세력인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부를 공격하였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 간의 유혈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소련의 꾸준한 무기 지원과 주둔 소련군이 두고 간 전투기와 전차, 장갑차, 헬리콥터 같은 화력 강한 무기들로 무장한 나지불라 정부군이 우세했었고 강력한 정면전 구사로 무자헤딘 세력에 어느 정도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전면전에서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워낙 열세였던 무자헤딘들은 다시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저항했고 정부군은 무자헤딘의 게릴라 전 공격에 수도 카불과 일부 평야 지대만을 장악한 채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게릴라전을 펼치는 무자헤딘에게 밀리다시피했다. 더욱이 무자헤딘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시작된 정부군의 공군 폭격으로 애꿏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 산촌 마을에 대한 약탈과 강간, 방화 등을 일삼으면서 나지불라 정부는 국민들의 민심마저 잃고 말았다.[39] 결국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지불라 정부군은 패퇴에 패퇴를 반복했다. 한편 정부군 내에서도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늘어났으며, 더욱이 1990년에 정부군의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면서 나지불라는 쿠데타를 모의했던 정부군 장성들을 모두 숙청했는데 문제는 숙청한 장성들 대부분이 소련-아프간 전과 내전에서 무자헤딘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한 실전 경험력이 풍부한 인재들이었고, 이들의 부재로 말미암아 정부군 전력이 약화되는 악영향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91년에는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게 되고 나지불라는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40] 그리고 1990년에 있었던 정부군 장성들을 겨냥한 나지불라의 숙청으로 벌어진 정부군의 전력 약화와 소련 붕괴를 기점으로 무자헤딘은 1991년 연말과 1992년 초에 카불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의 국토 전역을 장악하였다.

1992년 4월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지이자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한 대대적인 무력 공세 작전에 돌입하였고, 치열한 전투끝에 마침내 4월 16일 정부군의 방어선을 뚫어 카불 도심지 진입에 성공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나지불라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남아있던 나지불라 정부군의 군인과 정부 측 정치인들이 무자헤딘 측의 거센 시가전 공세에 대거 항복하거나 국외로 망명하면서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었다. 한편 나지불라 정권의 몰락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부르하누딘 라바니,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 이스마일 칸 등 무자헤딘 출신 인사들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동년 무자헤딘 세력들을 중심으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정권이 수립된다.

9.3.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1992 ~ 1996)[41]

파일: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국기(1992-1996).svg
무자헤딘의 국기.
UN에 의해 2001년 탈레반 패망 때까지 정식 국기로 인정되었다. 현 이슬람 공화국의 국기는 2002년을 기해 바뀐 것으로 이후로는 국장 도안만 조금씩 바뀌었다.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국을 장악하다시피한 무자헤딘도 각기 다른 여러 무장 군벌 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같이 몇몇 걸출한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군 철수 후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 내전 와중 서로 다른 파벌들을 통합시켜 단일 조직체로 만들려는 노력을 했지만 거의 실패했고, 결국 나지불라 붕괴 후 무자헤딘들끼리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서로 전투를 벌이면서 무자헤딘은 혼란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내분으로 찢겨지고 말았고 그 가운데 악명 높은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 탈레반이 등장하였다.

이런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몰라 모하마드 오마르가 여러 이슬람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탈레반이라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조직을 결성하였고 탈레반은 내부 분열로 약화되다시피 한 무자헤딘 세력들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탈레반 나지불라 정권 붕괴 후 군벌 세력들의 횡포와 약탈에 지치다시피한 아프간 일반 민중들의 지지까지 얻어내어 그 영향력을 부풀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탈레반은 수도 카불에 입성하면서 이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탈레반 1996년 들어 수도 카불에 입성하였고, 내전의 혼란에 지친 주민들 역시 초기에는 탈레반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이 집권한 뒤로는 전후 과부들이 많은 현실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여성의 사회 활동과 텔레비전과 영화 상영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남성이라도 면도나 축구를 하면 최고 사형까지 시켜버리는 극도로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는 등 시급한 전후복구보다 문화탄압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이며, 민심이 이반되어 많은 국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였지만 탈레반은 이를 공포정치와 유혈진압으로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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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부르하누딘 라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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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이름 생몰년 재임기간
1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1925년[42] 4월 21일 ~ 2019년 2월 11일
향년 93세
1992년 4월 28일 ~ 1992년 6월 28일
2개월
2
망명정부
부르하누딘 라바니 1940년 9월 20일 ~ 2011년 9월 20일
향년 71세(암살)
1992년 6월 28일 ~ 1996년 9월 27일(대통령)
1996년 9월 27일 ~ 2001년 12월 22일(망명 정부)
총 9년 5개월 24일
권한대행 하미드 카르자이 1957년 12월 24일 ~
현재 [age(1957-12-24)]세
2001년 12월 22일 ~ 2002년 7월 13일
6개월 21일

9.4.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1996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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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탈레반 정권의 국기. 매우 심플하다. 그나마도 1996년도에는 1년간 오로지 흰색 깃발이었다.
국가원수 직책 이름 생몰년 재임 기간
아프가니스탄 최고평의회 수좌 모하마드 오마르 1960년 ~ 2013년 4월 23일
향년 52~53세
1996년 9월 27일[43] ~ 2001년 11월 13일
5년 1개월 17일

9.5.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2001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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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기.svg 파일: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장.svg
2013년에 만들어진 국기 국장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지만 정권을 잃고 쫓겨난 탈레반 세력들이 미군과 친미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상대로 게릴라 전쟁에 돌입하면서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군과 미군, 탈레반 세력 사이에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토후국 시절보단 나았지만 여전히 리비아, 시리아처럼 막장이었다. 이 와중에 2021년 미군이 철수해버리자 때를 노린 탈레반은 아프간의 주도들을 점령하며 공세를 벌이다가 끝내 2021년 8월 15일 아프간 정부가 함락당하고 탈레반 과도정부가 수립된다.

파일: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장.svg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
(2001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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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권한대행
두라니 왕조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아프가니스탄 왕국 ·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 }}}}}}}}}
대통령 이름 생몰년 재임 기간
1 하미드 카르자이 1957년 12월 24일 ~
현재 [age(1957-12-24)]세
2002년 7월 13일 ~ 2004년 12월 7일(임시정부)
2004년 12월 7일 ~ 2009년 9월 28일(초선)
2009년 9월 29일 ~ 2014년 9월 28일
총 12년 2개월 25일
2 아슈라프 가니 1949년 5월 19일 ~
현재 [age(1949-05-19)]세
2014년 9월 29일 ~ 2019년 9월 28일(초선)
2019년 9월 29일 ~ 2021년 8월 15일(재선, 중도 추방)
6년 10개월 17일
권한대행 암룰라 살레 1972년 10월 15일 ~
현재 [age(1972-10-15)]세
2021년 8월 15일 ~ 현재

9.6. 탈레반 과도정부 시기 (2021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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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2021년 8월 15일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에게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항복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사라지는 것이 확정되었다. #
최고지도자 이름 생몰년 집권 기간
1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 1961년 ~
현재 [age(1961-12-31)] ~ [age(1961-01-01)]세
2021년 8월 15일 ~ 현재

10. 문헌

10.1. 전근대사

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 타밈 안사리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The Cambridge History of India / E.J. Rapson
인도 불교의 역사 / 에티엔 라모트
왕오천축국전 / 혜초 저, 정수일

[1] 을사조약처럼 외교권만 강탈하였다. [2] 미국이 전쟁비용과 재건비용 등을 포함하여 아프간에 쓴 돈은 무려 2653조, 서유럽 재건 계획인 마셜 플랜으로 과거 유럽을 지원한 돈을 현재 가치 기준으로 따졌을 경우에도 17배라고 한다. [3] 우즈베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즈(Termez)에 이 당시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4] 이란인과 인도인의 공통조상이던 아리아인은 원래 코카서스 근처에 기원한 인도유럽어족 유목민으로, 동진하기 시작하여 이란 고원 쪽으로 내려가 이란 남서부 엘람인들을 정복한 이들은 메디아인의 기원이 되고, 그보다 더 동쪽으로 간 이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인도아리아인이 되었다. [5] 인도아리아인 브라흐민의 발흥지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사라스와트 강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내 헬만드 강에 비정된다. [6] 자리아스파는 이후 불교 전파 이후 자리아스파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 바할리카의 이름을 따서 발흐 시로 개명한다. [7] 다만 왕을 뜻하는 라자(Raja), 땅을 뜻하는 스탄(~Sthan) 같은 어휘는 서로 비슷했다. [8] 사마천의 기록에 나오는 월지는 고대 중국어로 토하라인에 해당하며,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일대에 거주하던 오손은 아스윈(Asvin; 기마전사)이라 불리던 사카족의 일파였다. 고대와 중세 타림 분지 서부의 호탄 왕국 역시 사카족 계열 왕국이다. [9] 크샤트리야 계급에 흡수되었다. [10] 나우바하르 대학은 호라산의 이슬람화 이후 마드라사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슬람권 신학 학교인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 불교 대학 건축 구조 및 교육 시스템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게 된다. [11] 부파 불교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방식은 인도인들에게는 익숙할 지 몰라도, 그리스인이나 토하라, 스키타이, 파르티아인들에게는 지나치게 생소한 문화였다. 대승 불교는 출가자와 재가자에 대한 엄격한 구분 계율을 완화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에게도 불교가 보다 빠른 속도로 보급될 수 있었다. [12] 고대 아프가니스탄 카피사, 파르완 주를 중심으로 한 왕국 [13] 여기서는 쿠샨 왕조를 의미한다 [14] 파괴되기 전에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조금씩 부서져 왔다. [15] 오늘날 파슈툰인 두라니족의 기원이 된 에프탈족 혹은 길자이족의 기원이 된 할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라니족은 근세/근대까지 압달/압달리라고 불렸는데 이는 에프탈에서 기원한 말이다. [16] 같은 책의 계빈국전에는 "계빈국(카피사 왕국) 왕은 여름에는 카피사에 머무르며 서늘한 곳을 따라 지내고 겨울에는 간다다로 가서 따뜻한 곳을 따라 산다. 간다라는 눈이 없고 따뜻하며 춥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피사는 겨울에 눈이 쌓여서 춥다. 카피사 사람들도 산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산에 초목이 별로 없어서 마치 불에 그을린 산 같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17] 혜초가 여행을 다닌 지역에는 인도 중부와 남부도 포함되어 있는데 당시 유목민 전통이 없던 지역 주민들은 바지를 입지 않았다. [18] 이슬람 역사 초창기 아라비아 반도 메카 메디나에는 종교 생활과 일상 생활이 일치하는 것이 당연시되어서 따로 마스지드와 분리된 형태의 마드라사가 들어설 이유가 적었다. 이를테면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도 전업 성직자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양을 치고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무슬림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뿌리내린 이후에야 전업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마드라사 시스템이 보급되었다. [19] 압바스 칼리프들은 우마이야 칼리프들과는 반대로 예루살렘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20]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반도 서부 사막지대 [21] 지방 민심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사산 왕조의 귀족 가문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나 사만 왕조가 주조한 금화나 은화 및 가계도를 보면 불교를 믿던 소그드인 조상을 둔 것이 확실하다. [22] 여담으로 같은 아프간 중세 도시 발흐에는 중세에도 유대인 공동체가 번성했었다. [23] 19세기에는 고르 왕조가 파슈툰계 왕조라는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이후 학자들이 고르 왕조 당시의 문학 작품 연구 결과 파슈토어는 고르 왕조 당시에는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24] 다만 점령은 성공했으나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각 지역 곳곳에 완전한 행정력을 뻗치진 못했다.몽골의 아프가니스탄 지배는 거점도시(점)와 각 선을 중심으로 한 간접지배로 이뤄졌다. [25] 학자에 따라선 13세기 후반에 등장한 할지 왕조가 아프가니스탄 남동부에 영향을 끼쳤다 보기도 한다. [26] 카를룩 카라한 칸국의 후예 [27] 다만 이슬람권 특유의 그림 경시 문화의 한계로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처럼 그림에 광학이나 기하학이나 삼각법 등을 응용하는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28]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인 그에게 인도는 너무 덥고 습했다. [29] 펀자브 일대 포함 [30] 중세 인도에서 한동안 잊혔던 체계적인 은화 주조 시스템을 재도입시켰는데, 그가 만든 통화 체계가 오늘날 인도 루피 방글라데시 타카의 직계 기원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31] 티무르 제국 시절 페르시아어 문학 작품들이 헤라트에서 차가타이어(중세 우즈베크어)로 번역되었던 만큼 우즈베크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도시였다. [32] გიორგი XI, (Giorgi XI); 사파비 왕조 군인 상당수가 조지아에서 납치한 노예 및 사파비 왕조에 투항한 조지아 토호들로 구성되었다. [33] 아프가니스탄 내 하자라족, 누리스탄인, 우즈베크인 등은 후대 바라크자이 왕조 대에나 파슈툰인 정권에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34]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에서 왓슨이 홈즈와 만나기 전 바로 영-아 전쟁에 참전했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의 지팡이는 그 공로로 여왕이 하사한 것. BBC에서 셜록 홈즈를 재해석한 드라마 셜록을 만들었는데, 이때도 왓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상이군인으로 나온다. 이쪽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200년 가까운 갭이 있는데도 똑같은 설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데서 이 나라가 겪은 막장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35] 자히르 샤 국왕은 이탈리아에서 긴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탈레반이 축출된 2002년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와 국부 칭호를 받았다. 2007년 사망. [36] 사실상 2021년 오늘까지 탈레반과의 내전은 이어져 오고 있다. [37] 압둘라 압둘라 전 장관과 공동 정부 [38] 실제로 인민민주당 정권이 집권하던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까지 아프간 국민들중에는 다우드 칸 대통령이 건강상 사직했으면 사직 후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왜 TV에서 본인은 고사하고, 아내와 자식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냐며 이러한 인민민주당 측의 거짓 발표에 의아해하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39] 그렇다고 나지불라 정권이 아프간 국내에서 지지 세력이 없는 소련의 괴뢰정권 취급을 받으며 무자헤딘과 불리하게 전쟁을 벌였던 것만도 아니었다. 1989년 잘랄라바드에서 무자헤딘을 상대로 일으킨 전투에서 정부군이 아프간 주둔 소련군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승리하기도 했었고, 내전 중 무자헤딘이 자행한 전쟁범죄로 가족이 죽었거나 그들의 악행에 치를 떨던 시골 지역의 주민들까지 정부군 지지 세력으로까지 포섭하여 정권을 유지했을 정도였다. [40] 나지불라는 소련이 몰락한 상황 속에서도 탈냉전 당시 아시아 지역에 남아있었던 중국이나 북한 등 여타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의 군사 지원을 얻어보려고 친중국 노선을 자처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41] 망명정부까지 포함하면 2002년까지이다. [42] 영어 위키백과에는 1926년생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영어 위키백과만 1926년생이라 나와있고 한국어 위키백과를 포함한 거의 모든 위키백과나 수많은 지식정보 사이트에서 1925년생으로 표기했기에 1925년생으로 서술한다. [43] 탈레반 수장으로서는 1994년부터 2013년 사망할 때까지 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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