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왕조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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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B31> 역사 | 역사 |
정치 | 왕중왕 | 틀:역대 사산 제국 샤한샤 | 틀:역대 사산 제국 이집트 총독 | |
도성 · 궁궐 | 이스타크르 | 크테시폰 | |
행정구역 | 비샤푸르 | 군데샤푸르 | |
사법 · 치안 | 불사 부대 | 사트라프 | 마르즈반 | |
언어 | 페르시아어· 다리어 | |
문화 | 타케 보스탄 | 팔라비 문자 | |
종교 · 신화 | 조로아스터 교 | 마즈다크교 | 마니교 | }}}}}}}}}}}}}}} |
이란국 𐭠𐭩𐭥𐭠𐭭𐭱𐭲𐭥𐭩 에런샤흐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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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B31> 왕기[1] | 센무르브[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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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 강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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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로 2세 시대 최대 강역[3][4] | |||||
224년 ~ 651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파르티아 | 정통 칼리파 시대 | ||||
[[다부이 왕조| 다부이 왕조 ]][[카린반드 왕조| 카린반드 왕조 ]][[바반드 왕조| 바반드 왕조 ]][[바두스판 왕조| 바두스판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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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11594> 위치 |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유럽 일부 | ||||
수도 | 크테시폰 | ||||
정치체제 | 봉건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중왕[5] | ||||
주요 황제 |
아르다시르 1세 샤푸르 1세 샤푸르 2세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 호스로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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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중세
페르시아어 (공용어) 그 외 다수[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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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조로아스터교 (국교) 그 외 다수[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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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3,500,000 km2 (5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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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는 224년부터 651년까지 약 400여 년간 존속했던 이란의 제국과 그 지배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 1세가 건국한 직후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를 멸망시켜 서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고, 수백 년 동안 지중해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과 함께 서반구를 양분하는 강대국으로 군림했으나 7세기 초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아랍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멸망했다.사산 왕조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를 자처한 동시에 자신들을 이란인(Ērān)으로 명명하여 이란 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슬람교의 도래 이후 아랍인에서 튀르크인, 몽골인 등 수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어 이란 일대를 지배했지만, 이란인들은 거꾸로 이민족 지배자들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키며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해 냈다. 그러므로 그 정체성의 근간인 사산 왕조는 이란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페르시아인/이란인들은 이란 본토 바깥의 여러 제국들에서도 학자, 관료, 문필가, 지식인 계급으로 중용되었고, 페르시아 문화는 전근대 서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페르시아 문화의 기반도 대부분 사산 왕조 시대에 형성된 것이므로, 사산 왕조의 역사는 해당 지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참고 자료로서 중요하다.
2. 국호
페르시아인들이 사산 왕조의 주도 세력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이름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이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연달아 나오기 때문에 세계사를 처음 접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헷갈리기 쉽다. 심지어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수도마저 같기에 어떤 나라와 교역했는가로 구분해야 한다.사산 왕조란 말 그대로 제국의 황실인 사산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산 가문의 이름 유래는 아르다시르 1세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영어로 쓸 때는 보통 Sassanids, Sassanid Empire라고 쓰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페르시아어 ساسانیان(sāsānīyān, 서서니연) 표기에 더 가까운 Sasanians, Sasanian Empire라는 표기를 더 선호한다.
사산 왕조 당대에 쓰인 국호는 Ērānšahr(에런샤흐르)였는데, 이것이 훗날 이슬람 시대에 이란 땅(Irān-zamin), 이란(Iran)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 국호 이란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다. Ērānšahr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 이란인(Ērān)의 국가/영토/영역(šahr)'이라는 뜻이며, 샤푸르 1세 시대 페르시아어/파르티아어/그리스어 3중으로 새겨진 Ka'ba-ye Zartosht 명문에서 처음 등장한다. 해당 명문에서 페르시아어 Ērānšahr에 대응하는 파르티아어 단어는 aryānxšahr, 그리스어 단어는 ΑΡΙΑΝΩΝ ΕΘΝΟΥC(Arianōn ethnos)이므로 당시에는 Ērān이 아리아인이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사산 왕조의 사산은 Sassanid 혹은 Sasanian을 음역한 것이다. 오히려 중국 및 한자 문화권에선 사산(Sassan)이 아닌 파르스를 음차한 波斯國(파사국)이라고 불렀다. 신라 승려 혜초의 여행기 《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파사국이 등장한다.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사산 왕조/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사회
4.1. 정치
사산 왕조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산 왕조 이전 이란을 지배했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통치 체제를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아르사케스 왕조는 흔히 봉건제로 알려진 중세 서유럽 국가들과 유사한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의 왕조와 국호 아래에 있지만 실상은 반독립적인 영주들이 제국 각지에 독자적인 영지와 세력을 구축하고 할거하는 것이다. 아르사케스 가문은 명목상 제국 전체의 지배자이지만 실질적으로 제국 전체의 말단 영지들까지 속속들이 통제할 수는 없었고, 가장 강력하고 유서깊으며 권위있는 가문으로서 다른 귀족 가문들의 지지와 복종을 받아내어 통치권을 유지했다.
중앙 정부가 지방 세력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그들과 적당히 타협하여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전근대 국가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군주가 아무리 막강한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거대한 관료제를 운용한다 해도 전근대 기술 수준의 한계 때문에 국가의 최말단 지방까지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사케스 제국은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지방 분권화가 심한 편이었다. 당장 사산 왕조의 발상지인 파르스 지역부터가 중앙정부의 관료가 아닌 번왕이 통치하는 지역이었고, 제국 내에 그런 번왕 혹은 속국 왕조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귀족들 역시 자기 영지에서 왕과 다름없는 권한을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와의 전쟁에 연달아 패배하여 아르사케스 황실의 권위와 실력이 점점 실추되었고, 급기야 파르스 번왕 지위를 찬탈한 사산 가문이 불과 10년 만에 아르사케스 황실의 중앙군과 정면대결을 벌여 격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산 왕조는 아르사케스 왕조의 이러한 통치로 이란이 분열되고 약해졌다고 주장하며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다. 아르다시르 1세 시대부터 이미 속국 왕조들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황족들을 분봉왕으로 앉혀 지방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또 황제를 정점으로 대규모 관료 조직을 구축하고,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교리와 경전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사제 집단 역시 정부의 중앙집권화에 동원하였다. 이런 일련의 정책들의 구체적 적용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사료 부족으로 알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사산 왕조는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에 비해 큰 차이가 없는 영역과 자원을 가지고서도 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세적이고 대등한 대결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강한 중앙정부' 모델은 수백년 동안 중앙과 지방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정면 충돌하는 일이었으며, 황실이 가진 군사력도 한계가 있었기에 이들을 모조리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사산 왕조의 국가적 역량은 황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사산 왕조의 역사가 상당 부분 황제와 귀족들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의 개혁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귀족들에게 제거당하는 상황에서 강한 중앙정부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므로, 귀족들의 힘을 줄이고 그만큼 중앙정부를 강화시키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마침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위기와 마즈다크교의 준동이 개혁을 위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했고,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개혁의 핵심은 조세 방식, 그중 특히 지세에 관한 것이었다. 기존 방식은 매년 정부의 징세관들이 각 지역에 파견되어 소출을 파악하고 현물로 거두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세금을 거두기 전에는 예산을 함부로 편성할 수 없었고, 대귀족들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 황제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거나 고위관료로 복무하는 대신 독자적인 조세 권한을 가지는 등 비효율과 착취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일반 평민들은 이에 더해 화폐로 인두세까지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마즈다크교가 선동한 대규모 폭동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쫓겨났고, 오랜 기근과 약탈로 농토가 황폐해져 조세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할 필요성이 생겼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휘하의 관료들은 매년 수확량을 확인하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대신 명시적인 토지 대장을 만들어 소유주, 지목, 생산량 등을 기록한 뒤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액수의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대귀족들의 면세 세습 토지가 늘어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정부의 조세 수입을 늘리며, 그 양을 예측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재정의 효율성을 늘리겠다는 취지였다. 세금을 정액화함으로써 발생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판관(주로 지역 사제) 주재 하에 지목, 생산량 등을 조정할 수 있게 했고, 인두세의 대상 역시 20세 이상 50세 이하로 제한되었다. 이 개혁이 과연 봉건 대귀족들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후대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정복했을 때 발견한 엄청난 양의 화폐를 보면 최소한 "국가 재정의 효율화"라는 목표는 달성된 것이 확실하다.[8]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데흐건'(Dehgan 혹은 Deqhan) 계급의 대두이다. 데흐건은 소규모 토지 보유자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급귀족 분류였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조세 개혁과 토지대장 작성으로 많은 평민 혹은 하급귀족 토지 보유자들이 생겨났고, 중앙정부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은 이들은 지방 향촌에서 정부의 행정 집행(주로 징세)을 직접 담당하거나 보조하면서 새로운 계급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봉건귀족들과 달리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통제를 대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데흐건의 대두는 단기적으로 중앙정부의 강화에 기여했다. 단 정부의 적절한 관리가 없을 경우 그대로 지역에 뿌리를 내린 데흐건들이 사실상 봉건귀족들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실제로 사산 왕조 말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데흐건들은 이란의 황실과 정부, 대귀족 세력들이 아랍인들의 공세에 모두 무너져 사라진 뒤에도 아랍 정부 치하에서 지역의 관리자로써 상당수 잔존할 수 있었다.
4.2. 종교
사산 왕조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으며 왕조 초창기에는 조로아스터교 대사제 카르티르(Kartir)가 막강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향촌에서 토지 대장을 관리하거나 재판권을 가지는 등 조로아스터교 사제 집단과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인들의 민족 종교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산 왕조 당국은 비 이란계 피지배 민족들에게 조로아스터교를 포교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사산 왕조의 수도권이자 인구 밀집 지역인 아소리스탄(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인구 상당수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비 이란계 민족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이란 당국은 이들이 같은 기독교 세력인 로마 제국과 내통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고, 기독교도 주민들과 조로아스터교도 주민들 사이에 종교 문제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여러 차례 기독교 박해와 학살이 일어났지만, 이미 인구 상당수가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죽이거나 추방하면 이란 입장에서는 국력에 심각한 타격이 되므로 그 규모는 제한적이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의 박해에도 이란 내의 기독교도 인구는 크게 줄지 않았고, 역으로 동쪽으로 점점 교세를 확장하여 이란과 교역하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도 네스토리우스파가 퍼지게 되었다. 이란 내 주류 종파인 네스토리우스파가 로마 제국 내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자 이란 측의 의심도 줄어들었다.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후궁들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을 후원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장수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가 에프탈의 카간을 전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들은 그 이후 다른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에 비해 더 좋은 처우를 받았던 듯 하다.
제국의 동부에서는 인도계와 중앙아시아계를 중심으로 불교도 널리 유행했다. 다만 이전 파르티아와 다르게 사산 왕조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적극 탄압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불교 교세는 고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 한다. 그래도 파르티아 시기에 불교가 유행했던 덕분에 마니교에 불교 교리와 수행 방법의 많은 부분이 도입되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모후 슈샨두흐트가 유대인이었던 영향으로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이스파한에 대규모 유대인 거주지를 신축하기도 했다.
왕조 초창기에는 조로아스터교의 변종 분파인 마니교가 창시되어 상당히 교세를 떨치기도 했다. 샤푸르 1세가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를 직접 만나 우호적으로 대할 정도였다. 그러나 샤푸르 1세 사후 권세를 휘둘렀던 대사제 카르티르를 중심으로 조로아스터교 세력들의 반발이 심해졌고, 결국 대대적인 탄압을 당해 지하로 숨어들거나 국외로 도피하여 명맥을 이어나갔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갈라져나온 종교 중에서 마니교 다음으로 유행했던 종교로는 마즈다크교가 있다. 마즈다크교는 마니교와 유사하지만 대신 마니교의 염세주의와는 다른 쾌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이 외에도 마즈다크교는 원시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분파로 모든 재산을 평등하게 나눌 것을 주장하는데, 바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마즈다크의 의견을 중용한 카바드 1세가 귀족들과 마기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동양의 춘대추납과 비슷한 형태의 복지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마즈다크교는 결혼 대신에 남녀가 서로의 짝을 공유할 것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가치관을 두었다 하는데, 마즈다크가 정확히 이런 가르침을 전파했다기보다는 마즈다크교가 도시 빈민 계급에게 인기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 생긴 이미지로 보인다. 마즈다크교 신도 상당수는 도시 빈민들이었고 이들은 페르시아 귀족들의 하렘에서 여자들을 납치하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4.3. 인구 분포
문서 최상단의 지도에 나와 있듯이 사산 왕조의 평상시 영역은 현대 이란+이라크 국경에서 동-서로 조금 늘어난 수준이다. 수도인 크테시폰이 영역의 서쪽 끝부분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사산 왕조 인구의 상당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자원을 확보 가능한 이란 남서부~남부(후제스탄, 파르스, 케르만), 북서부~북동부(하메단, 레이, 호라산, 마잔다란)의 산간 및 고원 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막 혹은 건조기후대이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거의 없다. 따라서 당시 이란의 국력은 상당 부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왔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통합된 로마 제국은 물론이요 동로마 제국만 따져도 인구와 경제력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고대 국가의 인구는 매우 부실한 기반을 가지고 추론할 수밖에 없으므로 정확한 숫자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기록이 많이 남은 편인 중세 말~근세 기준으로 비교해도 사산 왕조의 영역과 동로마 제국 영역의 인구 차이는 매우 컸다.[9]게다가 이란은 주적인 로마 이외에도 영토 정반대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으로 강력한 유목민 세력이 수 차례 침공해 오는 이중전선 상태에 있었고, 북서쪽 코카서스 지역이나 남쪽 아라비아 지역에서도 외침이 이어졌다. 따라서 사산 왕조는 더 부유하고 강력한 적국과 인접한 곳에 수도와 인구, 농업 생산력 등 모든 것이 몰려 있으면서 다른 지역들까지 전부 방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려면 유사시 위험 지역에서 빠르게 병력을 동원해야 했는데, 고대의 행정·교통·통신 기술 수준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군인 귀족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병력 양성을 맡기는 봉건제 뿐이었다. 이 때문에 사산 왕조는 황실을 좌지우지하는 대귀족들의 병폐에 시달리면서도 군대의 핵심을 담당하는 이들을 완전히 축출할 수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사산 왕조의 멸망 역시 카바드 1세 이후 시작된 황실의 중앙집권적 개혁과 이에 반발하는 대귀족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거의 같은 지정학적 조건에 처해 있었던 아르사케스 제국이 1세기 동안 수도가 3번 약탈당하는 굴욕적인 전적을 보이다 멸망한 것이나, 먼 훗날 동로마-사산 구도를 거의 그대로 재연한 오스만-사파비 제국 간 충돌에서 사파비 제국이 메소포타미아와 아제르바이잔을 수시로 빼앗기며 열세였던 것에 비하면 사산 왕조는 멸망 전까지 400년 동안 로마를 상대로 호각 이상의 전적을 보이며 선전했다. 이 점에서는 취약한 기반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제국을 경영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 7 - 사산 왕조 말기 주요 도시와 지역들을 표시한 백지도. 제국의 인구 분포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출처: Touraj Daryaee 역, 《Šahrestānīhā-ī Ērānšahr》, P. 107[10]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르다시르 1세, 샤푸르 1세, 샤푸르 2세,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 등 도시 조영 사업에 힘썼던 황제들은 거의 대부분 메소포타미아와 그 인근 지역에 도시를 만들었다. 위 지도에서 황제 이름이 들어간 도시들이 그것들이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물을 이용하기 위한 운하와 관개 시스템 구축 사업 역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파괴한 지 100여 년 뒤에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번영할 때까지 이어져서, 당시 바그다드는 수많은 운하와 도랑, 거대한 농경지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카나트(Qanat)라는 지하 관개 수로를 이용해 최대한 넓은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4.4. 민족 구성
사산 왕조의 주도 종족은 페르시아인이었다. 사산 왕조는 파르스의 토착 귀족인 사산 가문이 파르티아의 파르스 번왕 지위를 찬탈하면서 시작된 왕조이고, 파르스 번왕은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직후 셀레우코스 제국에 복속되어 자치권을 가지고 파르스 지역을 다스리던 페르시아인 통치자인 프라타라카(frataraka)들이 왕을 칭하면서 시작된 왕조이다. 따라서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부터 사산 왕조 건국까지 약 500년 동안 파르스는 비록 다른 제국들에 복속된 속국 상태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왕국으로 존속했고, 이를 통해 페르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이들이 사용한 중세 페르시아어(Middle Persian) 역시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고대 페르시아어(Old Persian)에서 곧바로 이어진 언어이며, 이것이 다시 현대 이란의 공용어인 현대 페르시아어(New Persian)로 이어진다.사산 왕조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 왕릉 단지와 암벽 부조(현재의 Naqsh-e Rostam) 바로 옆에 자신들의 부조를 새겼고, 그 명문 양식과 왕관 장식 등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것을 답습하였다. 따라서 사산 왕조가 아케메네스 왕조 계승 의식을 가졌고 그 유적의 명문 내용까지 알고 있었음은 명확하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아나톨리아·트라키아·이집트 일대까지 지배했다는 것, 마지막 군주 이름이 다라(야바우쉬)였다는 것, 서방에서 침입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까지도 확실히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역사를 얼마나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사산 왕조 시대에 많은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다시 이슬람 시대에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이슬람 문화 황금기 형성에 기여했기 때문에 이 때 고대 그리스 사료들을 접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사산 왕조 말기의 역사 서사시를 그대로 이어받은 이슬람 이후 이란 신화와 서사시들에서는 피슈더드 왕조, 카이 왕조 등의 신화적 왕조들에서 바로 아르사케스 왕조, 사산 왕조로 이어지는 형태만 남았다.
사산 왕조는 아르사케스 왕조의 통치가 이란을 약화, 분열시켰다고 주장하며 시종일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조 말기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에 따른 종교적 이유로 아르사케스 왕조의 역사 연대를 절반으로 축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르티아계 귀족들은 아르사케스 가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별다른 저항 없이 승자인 사산 가문 편에 가담하여 기득권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사산 왕조 초기에 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각종 명문들을 페르시아어와 파르티아어 2중으로 새겼고, 지배계급을 가리킬 때 '페르시아인과 파르티아인(pars ud pahlaw)'이라는 표현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과 파르티아인들 사이의 타자 의식과 경쟁 의식은 사산 왕조 말기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대놓고 왕조에 반기를 들었던 바흐람 추빈, 샤흐르바라즈 같은 장군들이 옛 파르티아 지역에 거점을 둔 파르티아계 귀족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사산 왕조 중기~말기 대귀족들과 황제들 사이의 대결을 페르시아계와 파르티아계의 주도권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파르티아어 및 관련 기록이 사산 왕조 초기(3세기) 이후 급격히 사라지고, 페르시아계인 사산 왕조가 멸망한 뒤에도 파르티아어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점을 볼 때 언어 및 문화의 측면에서는 대다수의 파르티아인들이 사산 왕조 당대에 페르시아인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인과 파르티아인 이외에도 수많은 이란계 종족들이 이란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 대부분이 제국의 공용어인 페르시아어를 받아들이며 점차 페르시아화되었지만, 왕래가 어려운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몇몇 이란계 소수민족들은 동화되지 않고 사산 왕조 멸망 이후까지 잔존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쿠르드인이다.
물론 사산 왕조에 이란계 종족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샤푸르 1세 이후 모든 사산 왕조 황제들은 공식 칭호로 "이란인과 비이란인의 왕중왕"(Shahanshah-e Eran ud Aneran)을 쓰며 모든 종족을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주창했다. 제국의 중심지 아소리스탄(메소포타미아)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의 요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종족들이 대규모 인구 집단을 이루고 있었고, 기독교를 믿는 칼데아인과 아시리아인이 가장 많았다. 이 지역에서는 오히려 페르시아인과 파르티아인 귀족, 사제, 군인, 관료 등 이란계 지배층이 소수 인구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짐작케 하는 것이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화(聖火)인 Adur Gushnasp, Adur Burzen-Mehr, Adur Farnbag의 위치인데, 이들은 각각 메디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지역에 있고 정작 인구 밀집 지역인 수도권에는 없었다. 그 외의 비 이란계 소수민족 및 외국인 집단으로 아랍인, 유대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온 시리아~아나톨리아 일대의 로마인, 인도인, 키다라인, 에프탈인, 튀르크인 등이 있었다.
4.5. 사회 계급
사산 왕조 치하 이란의 사회 계급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첫째 전사(Arteshtaran), 둘째 사제(Mobadan), 셋째 관료(Dabiran), 넷째 평민(Vasteryoshan-Hootkheshan)이다. 여기서 관료는 빠지기도 하므로, 실질적으로 전사 - 사제 - 평민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중세 유럽의 3신분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사산 왕조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각 신분 사이의 경계는 매우 엄격했다.전사 계급은 곧 귀족이다. 귀족들 중 가장 높은 것은 물론 황제와 그 직계 자손인 황족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각 지역에 분봉된 분봉왕들(vassal kings; Shahrdaran)이 있고, 또 그 다음에는 소위 '일곱 가문'으로 알려진 대귀족들(Vaspuhragan)[11]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란 7대 가문 문서 참조.
대개 이 귀족들의 본거지는 과거 파르티아계나 샤카계 유목민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했던 메디아, 호라산, 시스탄 지역에 있었으며 분봉왕들의 영지는 시스탄, 쿠샨, 아파르샤흐르, 메르브, 케르만 등 제국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황실과 정부의 근거지는 수도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한 아수리스탄에서 후제스탄, 파르스에 이르는 영역이었다. 이들 밑에는 중상급 귀족(Vuzurgan)들과 관료들이 있었고, 그 밑에는 중하급 귀족(Azadan)이 있었다.
성직자들의 계급과 위계에 대한 것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최고 사제의 직함으로 추정되는 Mobadan Mobad 등이 있지만, 조로아스터교 교회 체계는 사산 왕조 성립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다. 다만 사제 집단, 특히 고위 사제들은 귀족들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굉장히 높았기에 매우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사산조는 교육, 결혼, 예배 의식의 참여, 축제와 애도식 등 사회의 모든 일이 종교의 규례와 종교적 전통에 따라 진행되다보니 종교의 영향력이 높을수밖에 없었다.
셋째 신분인 관료는 귀족 가문이나 사제가 아닌 하급 공무원을 의미하며 굳이 따지자면 중인 혹은 부르주아쯤 되는 포지션이다.
평민 계급은 귀족과 성직자들을 제외한 농민, 상인, 수공업자 등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층 민중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생활상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물론 평민들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에 비해 삶이 어려웠다. 다만 대다수의 인구는 농민이었을 것이고, 오늘날 전해지는 사산 왕조 시대 유물들의 높은 수준을 볼 때 공예품이나 사치품을 생산하는 장인의 수도 많았을 것이다. 실크로드 무역이 물론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지만, 지중해처럼 일찍부터 대규모 해상 무역이 발달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크테시폰 등 극소수 대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상이었을 것이다. 평민 외에 노예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중요성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 군사
서아시아를 몇 백년 지배했고, 로마 제국과 건곤일척이었던 패권국답게 충분히 강력했다. 사산 왕조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기병 중심이었던 파르티아 군대의 양식을 계승했으므로 파르티아 군대와 유사했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적지 않았다. 우선 군대의 핵심이 카타프락토이, 혹은 클리바나리로 대표되는 중장기병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봉건 귀족과 그 가신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파르티아와 같다. 그러나 사산 왕조는 단순히 중장기병 - 경장기병으로만 구성되었던 파르티아에 비해 더욱 다양한 병종을 동원하였다. 또 완전한 기병 중심의 봉건제 군대였던 파르티아에 비해 좀더 중앙집권화된 군사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제국 최고의 전성기인 호스로 1세 시대의 군제개혁으로 정점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7세기 초 로마와의 과도한 전쟁으로 군사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아랍 군대에게 무너지긴 했지만, 사산 왕조 군대는 수백년간 서방의 거대한 로마 제국과 동방의 위협적인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중동의 지배자로 군림한 제국 국력의 핵심이었다.
5.1. 지휘 계통과 편제
기본적으로 군의 통수권은 "이란 총사령관"인 에란 스파보드(Eran Spahbod)가 가지고 그 휘하의 장군인 스파보드(Spahbod)들을 지휘했으며, 군정 및 평화 협상을 포함해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황제가 대귀족 중 한 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총사령관 대신 황제가 직접 나서 전쟁을 지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이러던 것이 호스로 1세 시대의 군제개혁 결과 총사령관직은 없어지고, 대신 제국을 4분하여 각 영역을 담당하는 지방 사령관직을 신설했다. 이는 각각 남동/남(Nemroz), 북동/동(Xwarasan), 남서/서(Xwarwaran), 북서/북(Adurbadagan)으로 나뉜다.[12] 일반적으로 귀족(Vuzurgan, Azadan)이나 분봉왕들의 영지를 제외한 지역들은 중앙정부의 관리가 행정을 맡았지만, 일부 변경 지역에는 군사/행정의 전권을 위임받아 사실상 분봉왕과 다름없는 권한을 가진 총독들을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를 마르즈반(Marzban)이라고 했다. 아르메니아가 대표적인 지역으로, 상황에 따라 페르시아인 마르즈반들과 아르메니아인 분봉왕들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제국 동부 지역에 임명되는 카나란(Kanarang)이라는 직책도 있었는데, 특정 지역에 임명된다는 것을 빼면 마르즈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산 왕조 군대의 정확한 편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파흘라비어 단어 중에 상/하위 부대에 관한 용어[13]나 천인대장(Hazarmard) 같은 용어들이 있는 것을 볼 때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갖추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도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사용했으므로 그것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사산 왕조 말기를 다룬 기록에서 황제의 군단(Gund-i Shahanshah)이나 황금 창병대 같은 부대 이름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워낙 단편적인 기록들이라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사산 왕조 군대가 과연 중앙집권화된 상비군을 갖추었는가도 어려운 문제이다. 아르다시르 1세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상비군을 창설"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반대로 5~6세기 기록에는 "페르시아에는 동로마와 같은 상비군은 전혀 없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군대의 주력이 중장기병이었고, 이들은 양성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 봉건 귀족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들은 전쟁시 샤한샤를 위해 싸우는 대신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배/세습할 수 있는 독자적 영지를 갖추고 있는 봉건 계급이었다.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 시대에 비해 훨씬 강력한 중앙정부와 관료체제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군사력의 주축이 소수의 봉건귀족 기병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역할 역시 주요 대귀족들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서돌궐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장군 바흐람 추빈은 호라산의 파르티아계 대귀족인 메흐란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상비군 비슷한 것이 아예 없었다고도 보기 어렵다. 사산 제국 시대에는 로마와의 국경이 이미 수백년 동안 고착되어 강력한 요새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전쟁 시 공성과 수성이 매우 중요해졌다. 따라서 요새를 지키려면 상당한 규모의 수비대가 있어야 하는데, 소수의 봉건 귀족들이 그 같은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또 사산제국은 파르티아에 비해 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세적이었고[14], 수년 이상 걸리는 전쟁도 소화해 낼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파르티아에 비해서는 훨씬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근위대 비슷한 것으로 자예단(Zhayedan 혹은 Zhavedan)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낮으며 정식 기록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근위대는 푸쉬티그반이나 기안 아비스파르로 대표되는 1,000명의 중장 기병대였다( 불사 부대 문서 참조).
대체적으로 봉건 귀족이 군사력의 주축이었던 것이 기존의 추세라면,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시대의 개혁으로 인해 그 추세에 변화가 일게 되었다. 앞서 누차 설명한 대로, 이 시대 개혁의 목표는 중앙집권의 강화였다. 군 지휘체계에서 단일 총사령관직을 없애고 4곳의 지방 사령관직으로 나눈 것 역시 황제 이외의 인물에 지나치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스로 1세가 군사 부문의 개혁에서 역점을 둔 것은 독자 영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무장하는 군사력을 황실과 관료제가 봉급과 장비를 통제할 수 있는 상비군 성격의 군사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개혁을 통해 육성한 데흐건 계급이 행정적 측면에서는 황실의 지방 통제의 최말단이 되고, 군사적으로는 중앙정부 직속 군사력의 중핵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목표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달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분석하는 바가 다르지만, 최소한 개혁 이전에 비해서 군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5.2. 병과
이란 군대의 주력이 중장기병이었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사산 왕조의 중장기병들은 시대에 따른 갑옷, 투구, 무기, 마구나 기타 장비들의 변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시대의 중장기병 형태를 그대로 계승했다. 근거리에서는 양손으로 잡는 장창을 사용해 돌격하고, 원거리에서는 활을 이용한 견제를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칼과 도끼, 메이스, 단검, 투창, 다트 등 다양한 보조 무기를 사용했다. 마갑을 갖춘 카타프락토이들이 가장 유명하고 중요하지만 그 수는 적었고, 아마 마갑 없이 기수만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Kaveh Farrokh 박사는 그의 책 《Sassanian Elite Cavalry》에서 시대에 따른 기병 무장 양식의 차이에 주목하여 사산 왕조 시대 중장기병들은 크게 3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우선 왕조 초기에는 로마와 주로 대립하면서 비싸고 불편한 파르티아식 판갑옷 대신 사슬갑옷을 도입했고, 마갑도 없거나 천으로 된 것들이 주류였다.
이것이 점차 중장화되어, 4세기경에 이르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묘사대로 "눈구멍과 콧구멍을 제외한 전신을 철갑으로 가린" 식의 초중장기병이 나타났다.
그러나 4~5세기 이후 다수의 경장 궁기병을 운용하는 에프탈, 튀르크 등의 유목민들이 남하해 오자 소수의 둔중한 중장기병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무장을 좀 더 가볍게 하고, 대신 숫자를 늘린 중장기병 운용이 나타났다. 거기다 본디 방패 없이 긴 창으로 무장했으나 창의 길이를 줄이는 대신 방패를 추가로 드는 방식으로 갑옷을 줄여서 생긴 방호력의 공백을 매우고자 했으며 또 칼의 패용법이나 활의 종류, 등자의 사용 등에서 스텝 유목민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웃인 로마 제국처럼 사산 왕조도 근위대가 존재했다. 아케메네스 조의 근위대였던 불사 부대의 인상이 강해 사산 제국의 근위대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불멸의 기병대를 의미하는 사바라니 저위던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 사바라니 저위던의 실존 여부는 불분명하고, 기록상 나온 근위대의 이름은 푸쉬티그반(Pushtigban)과 그 예하 부대인 기안-아비스파르(Gyan-Avspar)였다. 이들은 전원 중장기병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바란'(기병) 중에서도 1,000명의 최정예 병사들만을 차출해 구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기안-아비스파르는 그 1,000명의 푸쉬티그반 병사 중에서도 더욱 최정예만을 골라 구성되었는데, 이름의 뜻[15]에 걸맞은 열성적인 전투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들의 전투력은 고르고 고른 정예병인 만큼 엄청났다고 하는데 야사에 따르면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동방 원정 당시 무방비상태였던 율리아누스를 죽인 게 푸쉬티그반 소속의 중장기병이었다고 한다.
파르티아군과 맞붙는 초창기 사산 왕조 군대를 묘사한 암벽 부조. 당시 귀족들의 기마 전투 양식을 잘 보여 준다. |
이란 서부 케르만샤 주의 타케 보스탄에 남아있는 사산 왕조 후기의 부조. 완전무장한 당시 중장기병의 형태를 알 수 있다. |
경무장 궁기병 역시 중요한 전력으로 활용되었으나[16], 정주 문명의 역사가 오래된 사산 제국은 더 이상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카르헤 전투 시절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처럼 대규모의 경무장 궁기병을 자체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워졌다.[17] 따라서 이란 본토의 군대는 거의 소수 귀족 전사 계급의 중장기병에 집중되었고, 경기병 전력은 주로 동맹, 속국 동원, 용병의 형태로 보충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로 샤푸르 2세가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유목민 집단인 히온인(Xionites)의 왕 그룸바테스와 전쟁을 벌여 그를 복속시킨 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동원한 경우가 있다.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낙타 기병을 동원한 경우가 있지만, 사산 제국의 경우 낙타가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와 반대로 사산 제국의 가장 큰 적이던 동로마는 낙타 기병대를 운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가 중장기병을 보조하기 위해 다수의 경무장 궁기병을 동원했다면, 사산 왕조는 기병의 부족을 만회하거나 보조하기 위해 다수의 보병을 동원했다. 보병의 지휘관은 파야간 사라르(Payyagan Salar)로 불렸다. 보병은 다시 궁병과 창병, 기타 용병들로 나뉜다. 대다수의 창병들은 임시로 징집된 농민이나 하층민으로써, 가죽 모자나 조잡한 투구, 고리버들이나 나무, 가죽 따위로 만든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 외에는 별다른 방어구가 없었다. 이들은 주로 진지 수비나 공사, 기병대의 보조나 시중, 전장 정리 등 각종 잡일에 동원되었다. 물론 필요할 경우 전면전에 나서기도 했지만 화살받이 이상의 역할이 기대되지는 않았다. 단 공성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보병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대오를 갖추어 이동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보병들도 어느 정도의 훈련은 받은 것 같다. 궁병들의 경우 최소한 활은 쏠 줄 알아야 하니 창병들보다는 취급이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탁티카》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궁병들은 활의 정확한 조준보다는 빠른 연사능력을 더 중시했다.
로마와 비슷한 중장보병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란 역시 근접전을 위한 보병들을 자주 동원했지만, 이는 상술한 경무장 궁기병들과 마찬가지로 농민 징집병이나 용병 혹은 소수민족, 동맹국, 속국 병력들이었다. 주로 데일람(카스피 해 연안의 이란 북부 산악지역), 쿠르드, 소그드, 아르메니아, 아랍 등에서 보병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중 특히 데일람 병사들이 투창과 칼을 잘 쓰기로 유명했으며 이후 이슬람 시대에도 용병으로 활약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철갑을 입은 기병과 보병"이라거나 "보병들은 검투사(murmillo)들처럼 차려입었고..." 등 보병들이 갑옷을 입고 있는 듯한 묘사들이 있는데, 더 이상의 정보가 없어서 이 병사들의 정확한 정체나 성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른 기록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성벽 위에 늘어서 있었다는 묘사도 있으나, 사실 사산조에서는 중무장 궁병에 대한 기록들이 자주 보이고(당연하겠지만 기병과는 별개다.) 거기다 고대~중세 시절은 개인이 직접 장비를 구비해야 했기에 개인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갑옷을 입은 보병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당장 이웃에 있던 중보병 강국인 로마도 무장은 대체적으로 병사의 자비로 구했다.) 즉, 엄청 중무장을 했다고 무조건 이를 보병이 아닌 기병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더 말이 안된다.
상술했다시피 수백년 동안 고착된 로마-이란 간 국경지대에는 강력한 요새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거점 도시들도 성벽으로 방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전쟁시 공성전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사산 왕조는 로마 못지않은 다양한 공성 무기와 공성 기술을 발전시켰다. 공성전에 별 관심이 없던 파르티아와 달리 당장 시조인 아르다시르 1세부터 로마식 공성 장비를 도입했다는 설명이 있다. 공성 무기를 이용한 공격 외에도 대규모의 땅굴 파기 혹은 토산 쌓기도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대규모로 징집된 보병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산 왕조 군대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으로는 코끼리를 전쟁에 적극 동원했다는 점이 있다.[18] 파르티아는 물론 사산 왕조 전과 후를 통틀어 이란 지역의 국가이면서 전투 코끼리를 적극적으로 동원한 나라는 셀레우코스 왕조밖에 없다. 이란 지역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기 때문에 코끼리들은 대부분 인도에서 수입되었으며, 위에 나무로 된 망루를 올리고 2~3명의 궁병이 탔다. 셀레우코스 시대와 달리 코끼리에 따로 갑옷을 입히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코끼리에 갑옷을 입혔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산조를 끝으로 중동에서는 더이상 전투 코끼리가 동원되지 않았다.
해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란이 당시 이란 본토와 페르시아 만을 끼고 마주보는 아라비아 반도 북부를 지배했고, 6세기경에는 아라비아 남부의 예멘까지 정복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해군 활동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양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일단 알려진 바에 따른다면 사산 제국의 해군 사령관은 나브베드(Navbed)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로 죄수들을 해군에 채용해 생각만큼 해군력은 강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반면 제국 서부의 경우 지중해로 가는 길이 동로마에 의해 완전히 막혀 있었기 때문에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을 건너다니는 배들 말고는 해군 비슷한 게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7세기 초 동로마를 완전히 코너로 몰아넣었을 때,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해 임시로 배를 만들었지만 동로마 해군의 공격에 패하면서 상륙에 실패하게 된다.
그밖에 사산 왕조 군사들의 복식을 현대에 와서 재현하거나 복원한 그림들을 보고 싶다면, 밑의 링크를 참조할 것.
6. 역대 샤한샤
재미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6, 7, 8, 10대 샤한샤의 행적은 조선 6~9대 왕의 행적과 유사하다는 점이 있다. 또 하나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인 호르미즈드라는 이름을 가진 샤한샤는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점인데, 재위 기간이 짧거나 무능하거나 최후가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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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가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아르다시르 1세 | 샤푸르 1세 | 호르미즈드 1세 | 바흐람 1세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바흐람 2세 | 바흐람 3세 | 나르세스 1세 | 호르미즈드 2세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아두르 나르세 | 샤푸르 2세 | 아르다시르 2세 | 샤푸르 3세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바흐람 4세 | 야즈데게르드 1세 | 샤푸르 4세 | 호스로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바흐람 5세 | 야즈데게르드 2세 | 호르미즈드 3세 | 페로즈 1세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발라시 | 카바드 1세 | 자마습 | 카바드 1세 | |
사산 왕가 | 메흐란 왕가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호스로 1세 | 호르미즈드 4세 | 호스로 2세 | 바흐람 추빈 | |
사산 왕가 | 이스파부단 왕가 | 사산 왕가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호스로 2세 | 비스탐 | 카바드 2세 | 아르다시르 3세 | |
메흐란 왕가 | 사산 왕가 | 메흐란 왕가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샤흐르바라즈 | 호스로 3세 | 푸란도흐트 | 샤푸르 샤흐르바라즈 | |
사산 왕가 | 이스파부단 왕가 | 사산 왕가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페로즈 2세 | 아자르미도흐트 | 파루크 호르미즈드 | 호르미즈드 6세 | |
사산 왕가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호스로 4세 | 파루카자드 호스로 5세 | 푸란도흐트 | 야즈데게르드 3세 | |
비정통 | 비정통 | 비정통 | 비정통 | |
페로즈 3세 | 나르세 | 바흐람 7세 | 호스로 6세 | |
페르시스:
아케메네스 ·
페르시스 이란: 아케메네스 · 셀레우코스 · 파르티아 |
}}}}}}}}}}}} |
순서 | 샤한샤 | 재위 기간(년) |
초대 | 아르다시르 1세 | 224 - 242 |
제2대 | 샤푸르 1세 | 240 - 270 |
제3대 | 호르미즈드 1세 | 270 - 271 |
제4대 | 바흐람 1세 | 271 - 274 |
제5대 | 바흐람 2세 | 274 - 293 |
제6대 | 바흐람 3세 | 293 |
제7대 | 나르세스 1세 | 293 - 303 |
제8대 | 호르미즈드 2세 | 303 - 309 |
제9대 | 아두르 나르세 | 309 |
제10대 | 샤푸르 2세 | 309 - 379 |
제11대 | 아르다시르 2세 | 379 - 383 |
제12대 | 샤푸르 3세 | 383 - 388 |
제13대 | 바흐람 4세 | 388 - 399 |
제14대 | 야즈데게르드 1세 | 399 - 420 |
제15대 | 샤푸르 4세 | 420 |
제16대 | 호스로 | 420 |
제17대 | 바흐람 5세 | 420 - 438 |
제18대 | 야즈데게르드 2세 | 438 - 457 |
제19대 | 호르미즈드 3세 | 457 - 459 |
제20대 | 페로즈 1세 | 457 - 484 |
제21대 | 발라시 | 484 - 488 |
제22대 | 카바드 1세 | 488 - 496 |
제23대 | 자마습 | 496 - 498 |
제24대 | 카바드 1세(복위) | 498 - 531 |
제25대 | 호스로 1세 | 531 - 579 |
제26대 | 호르미즈드 4세 | 579 - 590 |
제27대 | 호스로 2세 | 590 |
제28대 | 바흐람 추빈 | 590 - 591 |
제29대 | 호스로 2세(복위) | 591 - 628 |
제30대 | 비스탐 | 591 - 595 |
제31대 | 카바드 2세 | 628 |
제32대 | 아르다시르 3세 | 628 - 630 |
제33대 | 샤흐르바라즈 | 630 |
제34대 | 호스로 3세 | 630 |
제35대 | 푸란도흐트 | 630 |
제36대 | 샤푸르 샤흐르바라즈 | 630 |
제37대 | 페로즈 2세 | 630 |
제38대 | 아자르미도흐트 | 630 - 631 |
제39대 | 파루크 호르미즈드 | 630 - 631 |
제40대 | 호르미즈드 6세 | 630 - 631 |
제41대 | 호스로 4세 | 631 |
제42대 | 파루카자드 호스로 5세 | 631 |
제43대 | 푸란도흐트(복위) | 631 - 632 |
제44대 | 야즈데게르드 3세 | 632 - 651 |
사산 공위시대 때의 샤햔샤들은 재위 기간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 제국 곳곳에서 각자 제위를 참칭한 이들이라서 그렇다.
7. 언어별 명칭
언어별 명칭 | ||
중세 페르시아어 | 𐭠𐭩𐭥𐭠𐭭𐭱𐭲𐭥𐭩 (Ērānšahr) | |
페르시아어 |
ایرانشهر / شاهنشاهی ساسانی (Shâhanshâhi-ye Sâsâni / Irânshahr) |
|
영어 | Sasanian Empire | |
한자 | 波斯國 (파사국)[19] |
8. 대중 매체에서
- 로마: 토탈 워 - 바바리안 인베이젼에서 기본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한다. 세력 지도자는 샤푸르 2세이다.[20]
- 토탈 워: 아틸라에서 기본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한다. 세력 지도자는 바흐람 4세로 설정되어 있으며, 본국 영토는 작은 편이나 8개의 속국을 거느리고 있다. 항목 참조.
- 토탈 워: 로마 2의 DLC 분열된 제국에서는 고유 목표를 가진 5개의 세력(갈리아 제국, 로마 제국, 팔미라 제국, 고트, 사산조 페르시아) 중 하나다. 세력 지도자는 샤푸르 1세의 아들인 호르미즈드 1세.
- 사산 왕조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이란 학자인 압돌 호세인 자린쿠가 쓴 <페르시아 사산제국 정치사> #가 2011년 국내에 번역 출판되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고, 인터넷 중고 서점에서야 구할 수 있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에서는 사산 가문의 방계로 알려진 바반드 가문과 바두스판 가문의 가계도를 보면 사산 왕조의 군주들이 등장한다.
[1]
사산 왕조 말엽에 왕(황제)의 군대를 표시하는 깃발로 쓰였는데, 사산 왕조를 대표할 만한 다른 문양이나 상징물이 없기 때문에 사산 왕조의 대표 상징으로 여긴다.
페르시아어로는 'Derafsh Kaviani'나 'Darafsh Kaviani'라고 하며, '대장장이 카웨(Kaweh)의 깃발'이라는 뜻이다.
이란 신화에서 카웨가 사악한 뱀 왕
자하크의 폭정을 무너뜨릴 때 봉기군의 깃발로 쓰기 위해 자신의 대장장이 앞치마를 창대에 내걸었는데, 카웨가 이란 신화의 정통 왕조인 피슈더드 왕조의 자손
페리둔을 왕으로 옹립한 뒤 사람들이 이 깃발을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여 왕권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신화가 있다. 이 신화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케메네스 제국 멸망 직후 퍼르스의 프라타라카들이 주화에 이 깃발을 새긴 것을 보아 최소한 그 당시부터 퍼르스 지방의 상징이었음은 알 수 있다.
[2]
이란 신화의 상상의 동물로 사산 왕조 시대 각종 의복, 장신구, 예술품, 건축 등에 장식 문양으로 애용되었다. 황실의 물건에도 자주 쓰였기 때문에 황실의 상징 문양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3]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 상당수를 회복했음을 알 수 있다.
[4]
로마와의 전쟁중에 점령한 일시적 영토로, 약 10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았다. 평소 영토는 현대의 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캅카스+인더스 강 서쪽 하류의 파키스탄 서남부 지역 정도였다.
[5]
중세 페르시아어 '
샤한샤'(šāhān šāh).
샤푸르 1세 이후 주화에 새겨진 전체 칭호는 '이란인과 비이란인의 왕중왕'(šāhān šāh ī ērān ud anērān)이다.
[6]
아람어(메소포타미아 지역 공용어 겸 행정 언어), 파르티아어(4세기 이전 귀족층),
코이네 그리스어(4세기 이전 귀족층 및 로마인 포로들), 시리아어(메소포타미아 서부), 엘람어(메소포타미아 동부), 이란계 지역 언어들(아제르바이잔, 마잔다란, 호라산, 시스탄, 소그드, 호라즘, 발흐, 토하리스탄 등), 캅카스 지역 언어들, 아라비아 지역 언어들, 라틴어(로마인 포로들) 등
[7]
그리스도교(주로
네스토리우스파),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변종 분파들(
마니교,
마즈다크교,
미트라교 등),
불교,
힌두교,
바빌로니아 고대 종교 등
[8]
638년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함락시켰을 때, 노획한
은화의 양은 무려 90억 개나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사산 왕조가 누렸던 경제적 풍요가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51쪽
[9]
근대 왕조인
사파비 왕조 때도 몽골 제국의 침략 당시 농경지가 상당부분 황폐화되고 이후 목초지로만 활용되는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해 인구가 고작 464만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란은 1920년대에 와서야 인구가 1,000만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에 들어 8,000만의 인구로 폭증하게 된 것은 오일머니 빨로 때운 인프라를 확충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란뿐만 아니라 다른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현재도 중동과 이란의 인구 격차는 여전한데, 아랍 국가들 전체의 인구가 4억 2천만이며 터키의 인구만해도 이란과 비슷한 8,000만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인구 4,000만에 로마제국을 우습게 보는 초강대국이라고 썼지만 실제론 아니다.
[10]
현재도 이란의 인구 분포는 사산조 시절과 비슷하다.
[11]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보다 더 컸던 역사적 아르메니아(터키의 동부지역 대부분 포함)의 지역명 중 바스푸라칸(Vaspurakan)이 있는데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12]
북방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불길한 방위이기 때문에 방위명이 아니라 지명인 아두르바다간을 썼다.
[13]
Washt가 모여서 Drafsh가 되고, Drafsh가 모여서 Gund가 되는 식
[14]
물론 나중에는 로마의 반격으로 오히려 역공당해 페르시아의 피해가 심각해져서 더이상의 공세를 못하고 화친을 맺는다.
[15]
중세 페르시아어로 삶을 바친자/희생자라는 뜻인데, 이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돌격의 최전방에서 적에게 죽든 아군에 밀려 죽든
미친듯이 싸우던 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16]
사산조 기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
[17]
파르티아는 기병의 90%가 궁기병에 주요 전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사산 왕조에서는 중장기병의 비중이 늘고 궁기병은 이들과 보병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8]
로마와의 전쟁 때는 코끼리가 700마리 정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19]
중국 남북조시대 역사서 《
위서(魏書)》 등에 등장
[20]
정확히는 이름이 샤푸르라 표기되어 있지만 스타팅 연도상으로 샤푸르 2세라 추측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