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0:59:36

판노니아

Pannonia, Provincia Pannonia

1. 개요2. 위치3. 역사4. 출신 인물

1. 개요

판노니아(Pannonia)는 로마 제국 다뉴브강 우측 지역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속주이다. 오늘날의 판노니아 분지와 구 유고슬라비아 북부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

2. 위치

판노니아 속주(Provincia Pannonia)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아우르는 일대에 해당되는 넒은 지역이었다. 제국의 서방 지역 방어선 중 하나인 도나우(다뉴브) 방어선이 위치한 곳으로 도나우 강(다뉴브 강)을 경계로 서쪽에는 노리쿰, 남쪽에는 달마티아 속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3. 역사

판노니아는 예로부터 다키아족, 게르만족, 켈트족 등이 거주하는 비옥한 지역으로 로마가 오기 전까지는 켈트족이 많이 거주한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35년,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본국 이탈리아 갈리아, 알프스 일대의 안정적인 보호를 위해 처음으로 이 일대에 로마군을 보냈다. 이때부터 판노니아 지방을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집안 내 남자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등)이 본격적으로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고자 작업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 이래 로마군이 처음 판노니아에 진출한 이후, 로마는 기원전 14년 판노니아 일대를 대부분 정복하고 시르미움을 장악하며 속주 작업을 끝냈다.

이후 로마는 이 일대에 항구적인 군단 숙영지와 식민도시들을 여럿 건설했다. 그러나 이 일대의 여러 부족들은 자신들을 무력으로 정복한 로마에 맞서 달마티아인들과 연합한 뒤 서기 6년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양자이자 공식 후계자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으로 차차기 황제로 낙점된, 티베리우스의 양자이자 친조카 게르마니쿠스를 판노니아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 반란은 젊은 시절부터 게르마니아 전쟁 등을 통해 로마 최고의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티베리우스가 총지휘한 로마군이 3년에 걸쳐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완전히 진압할 정도로 격렬했다.

서기 9년 판노니아 일대에서 대규모 반 로마 움직임이 사라진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는 판노니아 일대를 개편했다. 따라서 일리리쿰 일대는 북쪽의 판노니아와 남쪽의 달마티아로 나눠졌고 모두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즉위 전 오랜 기간 동안의 경험에 기초해 로마 군단 3개를 판노니아 속주에 주둔시켜 향후 발생할 반로마 움직임을 제어케 했다. 또 판노니아 일대를 로마화 시키는 작업을 계속케 했는데, 이 조치에 따라 이 일대 주민들은 과거 갈리아 일대의 켈트족처럼 로마 제국에 동화되도록 했다.

이 작업들은 게르마니아 전쟁 종결 후 진행되었는데,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외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소 드루수스)였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오랜 행정 경험을 쌓았던 친아들을 총독으로 파견해 전반적인 판노이아의 로마화를 진행케했는데 소 드루수스는 3년간 판노니아 일대와 일리리쿰 지방을 통치했다. 이때 소 드루수스는 이 일대 근처에서 로마를 위협하던 아르미니우스를 견제하면서 도나우 강을 기점으로 새로운 제국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는데 힘썼다.

티베리우스 치세 아래에서 판노니아 지방은 로마의 핵심 방어선의 중심 역할을 맡을 속주로 변모했고, 주민들의 로마화 역시 안정적으로 진행됐다. 이후 판노니아는 트라야누스 시절인 102년에서 107년 사이에 다시 동과 서로 나눠었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판노니아를 판노니아 수페리오르(서쪽 판노이아 일대)와 판노니아 인페리오르(동쪽 판노니아 일대)로 분리시켰다. 이때 그는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에는 3개 군단을,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에는 새로이 1개 군단을 배치해 도나우 방어선 일대를 정비했다. 그러다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판노니아 일대는 다시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제국 전역을 순방하면서 제국 전역을 정비한 황제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는 이 일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 새로 식민도시 아일리아 무르시아, 아일리아 아퀸쿰(現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서안)을 개척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판노니아 일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대대적으로 도나우 강 북쪽의 게르만족들이 내려오면서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판노니아 일대의 속주들을 방문해 전쟁을 치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치세 내내 판노니아 속주를 재건하고 이 일대를 항구적으로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지시를 내려 정복되거나 포로로 잡힌 게르만 부족들을 자유민으로 이 일대와 북부 이탈리아에 대규모 정착시켜 나갔는데, 판노니아 등 제국 서방 속주들을 복구되면서 국경 밖 게르만 족들이 자뮤민들로 정착했다.[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에도 판노니아는 제국의 도나우 방어선의 핵심 지역 역할을 수행해냈고,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근위대 병사들까지 배출하더니 3세기부터는 로마정예군인들의 출생지이자 병참 속주 기능을 수행하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이런 까닭에 판노니아는 후기 로마제국 시대때 여러 명의 황제, 장군, 군인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해냈다. 또 갈리에누스 프로부스 시대때 대규모로 숲이 개간되면서 기존의 목재 외에도 보리, 맥주 등이 생산됐다. 또한 이 일대의 철광, 은광이 개발돼 제국에서 상당히 생산적인 지방이 되었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라 로마를 사분할 통치로 정비했을 때 판노니아 일대 역시 다시 정비됐다. 혼란을 정리하고 단독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1세는 주변 일대의 정복 등을 통해 판노니아 속주를 확대 재정비했으며, 4~5세기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의 교구 중 하나인 판노니아 교구까지 설치됐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이민족의 침입이 가속화됐고 최전선, 그 중에서도 다뉴브 강의 유로가 크게 두 번 꺾이는 곳에 있는 판노니아는 특히 피해가 컸다. 그 결과 5세기 중반 훈족의 침공이 한창일 때 판노니아 속주는 서로마의 통제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났다.

4. 출신 인물

판노니아 일대는 3세기 이후 로마 제국의 수많은 군인들의 고향이 되어 수많은 황제들을 배출해냈다. 또한 판노니아 근처의 일리리아, 모이시아, 달마티아 일대까지 합치면 후기 로마 제국의 황제들 중 상당수가 같은 동네출신일 정도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염병과 인구소모로 정착민들이 줄어들던 로마 내 판노니아 일대와 북부 이탈리아에 대규모의 게르만족들을 노예가 아닌 자유민 신분으로 이주시켜 이후 유럽의 민족 구성까지 바꿔놓았다고 평가받는다. 이들은 그리 오래지 않아 212년 카라칼라 때 로마 시민이 되었는데 이전에는 보조병으로 오래 굴러서 겨우 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