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5 10:31:56

바투 칸


파일:바투 칸 중국화.png [1]
Batu Khan
생몰년: 1205 ~ 1255
재위기간: 1242 ~ 1255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칭기즈 칸의 손자.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차남이며, 오고타이 칸의 조카로 후에 킵차크 칸국 세운 인물이다. 13세기 몽골의 세계정복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몽골인들은 바투[2]생 칸(Сайн хаан)이라 불렀는데, 좋은 황제[3]이라는 의미이다.

2. 생애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시 말해서 칭기즈 칸의 손자다. 장자가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리에 있는 땅을 물려받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주치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가장 먼 곳인 러시아 초원 지대에 자리잡게 된다. 주치가 숨을 거두자 칭기즈 칸은 주치 울루스의 영지를 그의 아들들이 물려받도록 하였는데 첫째인 오르다가 몸이 약해서 둘째인 바투가 통치권을 물려 받았다.

바투의 영토는 세메이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오랄, 아다지, 호라즘 왕조 본토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차크 지역으로부터 볼가강 서쪽의 정복지이자 제베 수부타이의 서방 원정으로 손에 넣은 드넓은 초원 지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즉 몽골 제국의 서북쪽 끝으로 유럽과 가장 가까웠던 유목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칭기즈 칸의 사망 당시, 주치 울루스는 몽골 제국의 서북부 지역인 볼가강 유역을 끼고 있었으며 휘하에 약 4,000명의 군대를 두고 있었다. 이 주치 울루스는 주치의 첫째 아들[4]과 둘째 아들 바투[5]에게 이어졌다. 오고타이 칸 시절 초반에 바투는 주로 대 전선에서 싸웠으며,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서방 원정군을 이끄는 사령관이 되었다.[6] 1235년 바투, 귀위크, 몽케, 수부타이 등이 이끄는 15만 이상의 대규모 몽골군이 서방원정을 위해 집결하였고 1236년 볼가강을 넘어 러시아를 전격 침공하였다. 이 서방 원정군은 러시아에 난립하던 공국들을 싸그리 쓸어 버렸다.[7]

러시아를 침공하던 도중 주치의 혈통 문제가 뇌관으로 작용하면서 칭기즈 칸의 다른 손자들[8]과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단, 같이 왕따 당하던 툴루이계와는 꽤 친했다. 결국 사촌들[9]에게 욕을 당한 바투는 빡쳐서 오고타이 칸에게 일러바쳤다. 바투의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 칸도 빡쳐서 구유크 등을 소환한 뒤 씨족 간에 분쟁을 일으킨 죄를 물어 갈궜다.

러시아의 생존자들은 헝가리로 도망쳐서 몸을 의탁했는데, 바투는 이들을 추격하는 동시에 갈 수 있는 한 서쪽 끝까지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몽골군은 폴란드, 헝가리를 넘어 오스트리아까지 정찰을 한 뒤 군세를 셋으로 나누어 동유럽을 침공하였다. 바투의 형 오르다(Orda)와 차가타이의 아들 바이다르(Baidar), 오고타이의 차남 카단(Kadan)이 이끄는 북쪽 군대는 곧장 폴란드를 습격하여 레그니차 전투를 치루었고,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본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베레츠키 고개를 넘었으며 남동부 병력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약탈한 뒤 다뉴브 강을 따라 헝가리 평원까지 진출하여 모히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바투는 1242년까지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을 공격했다가 군대를 물러 돌아갔다.

몽골군이 동유럽에서 철수한 이후 수부타이 등은 쿠릴타이에 참여하기 위해 바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갔지만 바투는 볼가 강 유역에 남아 미적거렸다.[10] 이 때문에 구유크는 1246년이 되어서야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었다.[11] 구유크와는 계속 사이가 안 좋아서 바투는 몽골 제국 본대와는 따로 놀면서 킵차크 칸국을 세웠다.[12] 이때 바투의 영지는 러시아, 이란, 캅카스 등을 망라했다.

귀위크 칸과의 사이는 갈수록 안 좋아졌는데, 결국 귀위크는 바투가 이란과 캅카스에 임명한 지방관을 자기 사람으로 바꾸는 한편 1248년 바투를 몽골 초원으로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귀위크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던 바투는 대규모 군대를 모아 서서히 몽골 초원 쪽으로 이동했고 이에 질세라 구유크 역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구유크가 급사하면서 내전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귀위크 칸 사후 바투는 칭기즈 칸 일족의 큰 어르신으로서 제국의 차기 대칸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비록 정통성은 오고타이계에 있었지만 바투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1250년 바투는 자신의 영토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해서 자신과 사이가 좋고 몽골 제국 내에 세력이 미약한 툴루이계의 몽케를 대칸으로 올렸다. 그리고 저항하는 오고타이계와 차가타이계를 힘으로 찍어눌러버리면서 대칸 옹립자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13] 몽케도 대칸이 된 이후 자신의 지지세력인 바투의 독립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후 바투는 서쪽에 대한 정복을 계속하며 자신의 칸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14][15]

3. 평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_Khan.jpg

몽골의 전승에 따르면 현명하고 온화한 칸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러시아의 전승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무자비한 폭군으로 등장한다.[16] 유럽 원정을 책임진 장수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실제 당시 동유럽에서 몽골군의 악명은 자자했는데, 일례로 바투가 한 러시아 귀족의 아들을 잡고 금발벽안의 모습에 반해 어루만졌는데, 그가 바투의 손을 치자 분노해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대의 러시아 시문학에서는 우리는 열심히 싸웠는데 하느님의 군대에게 이길 수는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군사적 능력은 시원찮은 면이 많았다. 기실 원정군에서 바투는 바지사장 격이고 실제로 부대를 지휘한 건 칭기즈 칸 이래의 개국공신이자 백전노장 수부타이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토르조크 전투에서는 2주나 허비하고도 이기지 못해서 수부타이를 불러와서 겨우 제압하고[17] 코젤스크 전투에서는 7주를 허비하고 병력도 4천 명이나 잃었는데 그런데도 못 이겨 다른 부하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이겼다. 지옥에서 올라온 공포의 대왕...이 아니라 허당(?) 바투 아예 나중엔 자기 자신도 순전히 수부타이 덕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인정했으니 자타공인 시원찮은 군사령관인 셈이다.

심지어 모히 전투에서는 수부타이가 세운 작전을 무시하고 멋대로 나섰다가 바카투(팔합독)라는 본인이 신임하는 장수가 전사하는 일까지 겪게 되었다.[18] 본인에게도 이 일이 엄청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구하러 온 수부타이에게 졌으니 돌아가자고 했다가 수부타이의 단호한 모습에 포기하고 수부타이 덕에 어찌저찌 이긴 뒤에는 분했는지 괜히 수부타이에게 "니가 늦게 와서 이렇게 된 거잖아!" 라고 화풀이했다. 이에 수부타이도 못 참겠는지 또 바투에게 "대왕께서 제 말 안 들어서 이런 건데 왜 제 탓입니까?" 라고 반문하는데 바투는 할 말이 없었는지 수부타이 덕분에 이긴 거 맞다고 인정하고 데꿀멍했다. 그러면서도 수부타이는 바투의 패배를 미끼 삼아 헝가리군을 싸그리 쓸어버린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군사적 측면에서는 빈 말로도 명장으로 불러 줄 수 없는 편.

다만 바투가 군사적 능력은 딸려도 총사령관으로서의 상황 판단력만큼은 좋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원균처럼 답없는 내부의 적 수준까진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도 본인의 역량 부족을 인정하고 지휘권을 사실상 수부타이에게 넘겼기 때문.[19] 별 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전근대에서 능력에 하자가 있던 군주들 중 이것조차도 못 해서 패가망신한 군주가 한둘이 아니다. 덕분에 당시 몽골군들은 큰 패배를 당한 기록도 그다지 없고 동유럽까지 진출하며 세계 최강의 명성을 쌓아올린다.

실제 바투는 군사적 능력보단 정치적 능력을 더 주목해야 하는데, 생 칸(Сайн хаан)이라는 별명이나 구유크 칸 사후 후계 문제에 적극 개입하며 몽골 제국 내에서 주치 가의 영향력을 확대한 점, 킵차크 초원 지역에서 몽골의 지배권을 굳게 다진 점 등을 종합해 보면 정치력이 상당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해볼 수 있다. 실제 바투와 이후 바투 후손들의 행적을 보면 바투는 꽤 성공한 편이다. 그가 세운 킵차크 칸국도 다른 칸국들처럼 혼란이 좀 있기는 했지만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일 칸국이 각각 14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것에 비해[20] 무려 1502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후신 국가들은 대부분 16세기 중반에 무너졌지만 크림반도에 자리잡은 크림 칸국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으니 어찌보면 최후의 승자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본가도 몽골제국 - 원나라 - 북원 등으로 이어지다가 17세기에 결국 대칸 자리가 청나라에 넘어간 것과 비교하면 참 질기게도 살아남은 셈. 거기다가 킵차크 칸국의 존속시기는 러시아에게는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이기도 그 여파가 굉장히 오래 이어진 걸 감안하면[21]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 바투는 악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22]

다만 바투가 그렇게도 악명이 높은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과 같은 전쟁범죄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수부타이와는 달리 잘 싸우지는 못했지만 바투는 꼭 정복한 곳[23]마다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선량왕이었다메[24] 내 편엔 자비롭지만 적에겐 무자비하다? 이것만 놓고 보면 확실히 칭기즈 칸의 손자 맞다.[25] 칭기즈칸이 자식과 손자들에게 항상 "동정의 열매는 후회"라고 가르쳤다는 설이 주류이다. 그러므로 일단 정복을 하면 군인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인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사실 이건 바투만의 문제가 아니라 칭기즈칸의 직계후손들은 극소수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기록상 다 그랬다. 칭기즈칸의 가족들도 온화하다고 기록된 이복형제인 벨구테이조차 딱 한번, 어머니인 소치겔을 납치한 메르키트족을 상대로 대량학살을 벌인 바 있다.[26]

4. 대중매체에서

파일:바투.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서는 주치의 아들로 조금 늦게(1207년 생) 등장. 이 때도 74/91/72의 꽤 우수한 무장이었지만 PK추가시나리오 3에서는 더욱 능력치가 82/96/83으로 올라가고 특기 연사까지 추가되어서 완전 전투괴물로 변신. 역사처럼 동유럽으로 파견해서 폭주하듯이 유럽 도시들을 함락할 수 있다. 다만 아버지 주치와 마찬가지로 초기 충성도가 낮기 때문에 영주를 바꾸고 연회로 충성도를 올려두자. 플레이어가 고려를 할 경우 바투가 영주로 있는 사마르칸트는 고려에서 멀긴 하지만 가도가 깔려 있기에 이규보나 먼저 고려의 장수로 빼냈을 가능성이 높은 야율초재를 간첩으로 보내서 바투를 빼낼 수 있다. 사실 위에 서술된 행적을 보면 바투는 군사적 능력보다는 정치수완이 더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전투력이 그 수부타이보다도 높은 것은 다소 과대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영화 퓨리어스에서 등장. 300 크세르크세스처럼 이상한 중국식 복장으로 등장. 거기다가 몽골족은 하지 않은 중국식 상투를 하고있다. 아마 위의 중국화에 크나큰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배우는 고려인 출신인 알렉산드르 루돌포비치 초이.

국내 온라인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에서 바투의 이름을 딴 바투세트라는 아이템이 존재한다. 거상 내 몽골지역 내의 왕의무덤이라는 던전에서 드랍하는 아이템이며, 민첩성의 스탯을 어마어마하게 올려주는 아이템.
[1] 의상을 보면 알겠지만 명나라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2] '용감하여 상대가 없는 사나이'라는 뜻의 몽골어라는데, 용사를 뜻을 가진 '바가투르/바토르'와 동일한 듯하다. [3] 몽골어에서 "생(Сайн)"은 "좋은", "잘", "Good"이라는 뜻이다. 몽골어 첫 인사인 "Сайн байна уу"도 "잘 지내시죠?"라는 뜻이다. 서양 군주풍 별명으로 치면 '선량왕(善良王, the good)'을 들 수 있다. [4] 흰색 올다. [5] 황금 올다(졸로타야 올다, 金帳, Golden Horde) - 칭기즈 칸의 씨족들은 황금씨족이라 불리는데 그중 칭기즈 칸의 첫째 아들인 주치의 계승자인 바투의 올다는 황금올다라 불렸다. [6] 사실 바투는 명목상 총사령관이었고 실제로는 수부타이가 원정군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았다. [7] 그나마 가장 북쪽에 있던 노브고로드 공국만이 겨우 살아남았으나 이들 역시 몽골 앞에서 버로우타고 깨갱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것마저도 바투의 대실책 탓이 컸다. [8] 구유크로 대표되는 오고타이계와 차가타이 [9] 특히 오고타이의 첫째 아들이었던 귀위크와 가장 적대적인 사이였다. 일반적으로 사촌들이 혈통 문제로 인해 바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추측하나, 김호동 교수의 경우에는 사촌들이 서방 원정에서 바투가 보여준 무능에 열 받아서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원정 이전부터 구유크 등 오고타이계 및 차가타이계 사촌들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고 이들의 분쟁에서 오고타이가 바투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의 무능력을 옹호한 건 아닐 것이다. [10] 바투와 그의 부관들은 유럽원정을 계속 진행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하지만 원정대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수부타이는 바투에게 다소 협박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까지 귀환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의견에 따라 철수를 선택했다. 대신 타협책으로 귀환길을 발칸반도를 경유하는 길로 잡아 약탈전을 계속 수행했다. 추측이지만 바투가 원정을 더 하고자 한 이유는 이후 킵차크 칸국의 일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기반을 더 만들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11] 구유크 칸이 대칸에 오를 때 바투는 형제들을 보내 주치 일족을 대표하게 했다. [12] 바투도 구유크 칸의 시대에는 데꿀멍 중이었고 몽케 칸 이후의 일이라 믿어진다. 다만, 바투의 생전에는 주치 울루스 내부에서만 칸을 자칭했고, 외부에서는 '아카'를 칭했던 것 같다. 그러나 원정부대를 복귀시키지 않고, 자신의 통솔권 아래에 두면서 사실상 독립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3] 오고타이 사후 일족의 연장자는 차남 차가타이로, 주치와 사이가 나쁘던 차가타이의 지원 하에 구유크는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차가타이가 사망한 이후 구유크까지 사망하자 칭기즈 칸의 손자들 중에서 바투가 가장 연장자로 올라섰다. 한편 차가타이 사망 시에 구유크가 차가타이가 지명한 후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후계로 올리면서 차가타이계와도 사이가 나빠졌었다. 또한 칭기즈 칸 사망시에 몽골 초원과 대부분의 몽골인들을 상속받은 툴루이는 오고타이의 압박 속에 사실상 이러한 권리들을 대부분 강제로 빼앗겼었으며, 툴루이의 아내 소르가그타니 베키는 오고타이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오고타이계에서 다음 대칸 지위를 계속 차지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공공의 적 [14] 칭기즈 칸이 분배한 영역에 따르면 서아시아는 차가타이 칸국에서 담당하여야 했지만, 몽케는 자신의 동생 훌라구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사실상 강탈해 버렸다. [15] 앞서 바투도 오고타이가 파견한 오고타이/차가타이/툴루이 가문의 군대를 자신의 수중에 넣었는데, 훌라구도 몽케 사후 지휘하던 타 가문의 부대들을 자신의 예하에 잡아두었다. [16] 헌데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은 딱히 이상한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도 막상 전쟁이나 정치에서는 냉혹하고 잔인한 면을 보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 당장에 일생에 걸쳐 엄청난 학살을 자행한 항우, 조조는 개인적인 면에서 보면 항우는 아픈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조조는 자기 실수로 아들을 잃고 아내에게 이혼당한 뒤 그 아내에게 재결합해달라고 싹싹 빌었다가 퇴짜맞은 적 있는 인물이다. [17] 정작 수부타이는 그걸 3일만에 해낸다.(...) 사실 2주 공격한게 데미지가 축적되어 쉽게 공략했다카더라 [18] 다만 수부타이와의 합동 작전 자체의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에 바투는 수부타이의 명령을 무시한 원균 수준의 막장까지는 아니고 단순히 돌격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이며, 따라서 바투의 졸전을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19] 사실 수부타이는 몽골군에서 소위 레전드 그 자체로 여겨졌으니 바투 입장에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기도 했다. [20] 오고타이 칸국이 1310년에 무너졌고 일 칸국도 1355년에 멸망했다. 그나마 14세기 중반까지 살아 남았던 차가타이 칸국 또한 1370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몽골계 칸국들 중 킵차크 칸국을 빼면 15세기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21] 본디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서유럽보다도 문화가 발달했으나 몽골의 침략으로 그 모든 것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몽골-타타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까지 250년 정도가 걸렸고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여 서유럽을 따라가기까지 300년은 더 걸렸으니 무려 500년동안 러시아는 몽골-타타르의 지배와 그 여파로 서유럽보다 발전이 뒤처졌다. 심지어 표트르 대제조차도 서유럽을 완전히 따라잡지 못해서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의 황족, 귀족들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 물론 프랑스어가 러시아만이 아니고 전유럽적으로 상류층에게는 공용어 수준이긴 했지만 한때는 유럽에서 가장 문화선진국중 하나가 남의 나라 언어를 공용어로 쓸 지경이 되었다는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도 몽골-타타르에 의해 날아간 국력으로 러시아는 서쪽이 아니라 만만한 동쪽(시베리아)를 공략해야용했고 민족적으로도 본디 동슬라브 계통의 루스는 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걸친 국가였는데 이 지배의 여파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몽골-타타르의 지배는 농노제 같은 악습을 더 강화시키는데 일조해서 오늘날까지도 억압적인 러시아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다. 다만 농노제 같은 악습은 몽골-타타르의 멍에 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관점도 있긴 하다. [22]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냐면 그나마 이라크 같은 곳이 러시아와 비슷한 신세다. 이쪽은 당시에 힘들게나마 아바스 왕조가 유지되며 나름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공으로 아바스 조가 멸망한 후 다시는 그 타이틀을 되찾지 못하였고 그나마 후에 아바스 조가 부활하긴 했으나 원래 본거지를 몽골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본거지를 옮겨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안 그래도 지력이 고갈되가던 이라크는 이 침공을 계기로 쑥대밭이 되어 회복이 어려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현 상황을 보면 이라크가 더 심하긴 하다. 적어도 러시아는 강대국은 된 적은 있으니까... [23] 대표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24] 서양 제후나 군주들 별명을 보면 알겠지만 '선량왕' '선량공'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꼭 선량하지만은 않았다. 대표적으로 부르고뉴 선량공 필리프는 정치질과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 기껏해야 성왕 루이 같은 경우가 별명에 걸맞은 삶을 살았고 동아시아도 인(仁)이라는 묘호가 붙은 군주는 대게 인자한 편이긴 한데 인조나 청인종 같은 예외도 있다. [25] 칭기즈 칸도 몽골인에게는 성군급이지만 칭기즈 칸에게 짓밟힌 러시아, 서아시아에서 그 얘기를 꺼냈다가는 욕먹을 수 있다... [26] 표현에 따르면 납치범들은 그 친척의 친척에 이르기까지 도륙했고 그들의 여자란 여자는 취할 수 있는대로 다 취하고 남은 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