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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바투타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븐 바투타
ابن بطوط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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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라와티 앗탄지 빈 바투타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بن عبد الله اللواتي الطنجي بن بطوطة
출생 1304년 2월 24일
마린 왕조 탕헤르
사망 1369년 (향년 64-65세)
마린 왕조 마라케시
직업 탐험가, 지리학자, 학자

1. 개요2. 생애3. 유럽에서의 수용4. 한국어 완역5. 문화상대주의와 문화 충격6. 일화7. 여담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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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ابن بطوطة, Ibn Battuta
1304년 2월 25일 ~ 1368년 / 1369년 경[1]

중세 모로코의 위대한 탐험가이자 모험가, 순례자, 상인, 여행가, 법관이다. 마르코 폴로와 같은 시대에 세계 일주를 한 사람으로 모로코 탕헤르 출신. 본명은 샴스 알 딘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븐 압달라 븐 이브라힘 알 루와티 알 탄지. 귀환 후 모로코의 술탄 아부 이난 파리스의 명을 받고 이븐 주자이를 편집자로 삼아 유명한 "여행기(리흘라)"를 써내었다. 본래 제목은 "여러 도시의 경이로움과 여행의 신비로움을 열망하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

이븐 바투타가 여행을 시작한 나이는 불과 21세로 이후 30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 10만 킬로미터를 종횡무진 누비며 14세기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2] 또한 본인이 무슬림인만큼 여행 동기도 종교적 신의를 기반으로 시작됐기에 당시 여러곳에 토착화된 현지 무슬림들을 기록에 남겨 현대 종교학계에서도 사료로 인용된다.

원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필사본이 남아있기에 그 기록이 전해지게 되었다.

2. 생애

파일:이븐 바투타 여행.png
1304년 모로코의 탕헤르의 법학자 집안으로 태어났다. 1325년 메카를 향해 순례를 떠났는데 순례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왕들의 사신과 대상을 겸하여 중동, 중앙아시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동아프리카, 남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중국을 거치는 장대한 여행을 했다. 24년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서아프리카 말리 지역을 여행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 모든 여정을 여행기에 자세히 남겼으며 말년엔 모로코에 돌아와 법관으로 일하다 1368년 사망하였다. 대략적인 일대기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븐 바투타는 133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 황제를 알현하였다. 당시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나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흑해를 건너 크림반도에 상륙, 이후 킵차크 칸국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킵차크의 우즈베크 칸(Öz Beg khan)의 기독교인 아내였던 안드로니코스 3세의 딸 바얄룬 팔레올로기나( Bayalun Palaiologina)가 출산을 위해 고향을 방문하게 되자 우즈베크 칸의 명령으로 그녀를 수행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게 된다.[3]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을 오갔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나[4] 이븐 바투타는 워낙 그의 여행기라는 정확한 기록이 있어 그의 장대한 여행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중세 시대 아프리카부터 중국의 대원제국까지 직접 경험한 시대상과 문화, 정치, 종교, 사회에 대해 폭넓게 기록하고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 웨인즈(David Waines)의 "이븐 바투타의 오딧세이(The Odyssey of Ibn Battuta: Uncommon Tales of a Medieval Adventurer)"에 의하면 이 양반도 워낙 장기간 여행한터라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적는 이븐 주자이에게 기억이 헷갈려 엉뚱한 이야기를 말하기도 하고 아무리 중세가 남의 글을 베껴쓰고 덧붙이고 2차 창작하는데 이골이 났다지만 자신 이전의 여행기를 참조하면서 베끼고 확장했다는 것을 알아낸 학자들과 정말 그가 중국에 갔는지 의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읽어보면 정확한 내용도 많지만 중국의 닭이 타조만하다느니 같은 엉뚱한 이야기도 조금씩 나온다.

여행기 와중에 여자 이야기도 꽤 많이 쓰는 편이었다. 이를테면 어느 유럽 지방 여자가 예쁘더라 등등은 양반이었고, 자신이 몰디브에서 머무르는 동안 현지처가 4명에다가 여러 명의 여성 시종을 두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몰디브에서 먹는 생선이 정력에 좋아서, 매일같이 한번씩 현지처들을 찾아 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기서 그는 몰디브 문화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는데, 외지에서 몰디브로 선박이 들어오면 선상 사람들이 이곳 여성들과 결혼하는데, 떠나게 되면 곧 이혼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신 역시 몰디브에서 여러명의 여성과 결혼하였다라는 이야기도 남겼다.

3. 유럽에서의 수용

이븐 바투타 사후 중동 특히 그의 모국인 모로코에서 큰 인기를 누린 것으로 추정되며 아랍 여행자이자 탐험가인 울리히 야스퍼 시첸과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중동 여행중에 "여행기"의 축약본을 구입했고, 이후 많은 유럽 학자들이 축약 출판물에서 "여행기"의 일부를 발췌해 번역했다. 영국에서는 사무엘 리가 1829년 "아랍어 축약판으로 번역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발간했고, 프랑스에서는 183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완벽한 형태의 "여행기"가 발견되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져 번역되었다. 그리고 1853년 - 1858년까지 번역, 4권으로 출간되었다.

4. 한국어 완역

명성에 비해 한국엔 그다지 많이 알려져있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에 아랍어 전공자가 드물어 그의 여행기를 번역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역판이나 영역판을 한국어로 중역해서 소개하는 정도였는데, 정수일이 2001년 원문을 한국어로 완역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로는 이곳저곳에 많이 소개되는 편이다.

정수일 교수에 의하면 초역본은 그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바 있으나 아랍어 원본 완역은 프랑스어, 영어에 이어서 자신의 한국어 번역이 세계에서 세 번째라고 한다.[5]

5. 문화상대주의와 문화 충격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문화상대주의 따위는 없었던지라, 여행한 지역의 토착민들의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야만인 취급을 곧잘 하곤 했다.

예를 들어 말리 제국에서는 '금과 자원이 넘쳐나는 자원이 풍부한 제국이자 신실한 이슬람 국가'라는 이미지를 기대했지만, 도착하고보니 말리의 종교 문화는 이슬람교와 아프리카 토착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융합되어 있는, 좋게 보자면 종교의 다양성이 있는 사회지만 그의 눈에는 이교도가 판치는 사회였다. 말리의 여자들은 히잡 등 머리카락을 가리는 의상을 입지 않았고,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거리낌없이 대화할 수 있었으며,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등 자주성을 가졌다. 역시나 이 또한 현대의 시각으로는 성평등적인 사회지만 그의 눈에 말리는 '야만적이고 문명화가 덜 된' 모습이었고,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말리 제국의 환상을 철저히 박살냈다고 그의 여행기는 말하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당시 말리의 황제였던 만사 술레이만의 행보였는데,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쥔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지로 뒤덮인 꼬질꼬질한 일개 병사 두명과 눈을 맞추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바투타에게 큰 충격이었다. 또한 황제를 직접 알현한 자리에서 이븐 바투타는 빵덩어리 세 조각과 구운 소고기, 그리고 발효된 크림을 대접받았는데, 이는 말리에서 전통적으로 여행객에게 대접하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돈과 황금 등의 선물을 기대했던 바투타는 이를 보곤 실망한 나머지 비웃음을 크게 터뜨렸다고 한다. 사실 금을 주지 않은 말리 제국도 그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말리는 고립 정치를 하고 있었기에 외부 영향을 피하고 금을 외교 관계에서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금광의 위치를 알리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현대인들의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법학 지식이 풍부했던 이븐 바투타는 여행간 지역에서도 법관으로 일하면서 풍족하게 먹고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연유로 자신에게 풍족하게 잘 해주었던 지역 관련해서는 술탄이 영웅호걸이다 지역 주민들이 신앙심이 깊다 정직하다 등등의 갖가지 칭찬을 써놓았지만,[6] 상술한 말리 같은 경우에는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국가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건만 자신이 기대하던 만큼 대접해주지 않았는지[7] 감정을 담아 부정적인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여행지에 대한 개인 감정에 따라 어조를 바꿔서 서술하는 편이었다. 그가 방문하고 장기체류했던 몰디브 역시 이슬람을 믿었지만 아무도 히잡을 쓰지 않고 현지인 여성 대부분이 배꼽부터 무릎까지만 가리고 상반신을 노출하고 다녔는데도 불구 몰디브인들이 매우 신앙심이 깊고 정직하다는 등등 칭찬 위주의 서술을 남기기도 했다.

즉, 이븐 바투타의 이러한 편향적인 서술 또한 그가 여행한 지역의 신변잡기나 정치경제적·문화사회적 현황, 그리고 당대 현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몇 안되는 귀중한 1차 사료라 할 수 있다.

6. 일화

  • 고향 탕헤르에서 이집트로 가던 도중, 함께 온 튀니지 상인이 북아프리카의 도시 비자야에서 죽어버렸다. 상인은 3천 디나르에 달하는 황금을 유산으로 남겨놓으면서 그걸 튀니지의 상속인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몰라도 그날 비자야 총독이 그 유산을 싸그리 빼앗아가버렸다.
항구 쪽에서 파로스 등대 쪽으로 가보았더니 등대의 한쪽 벽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등대는 하늘 높이 솟은 방형건물로서 문은 지상에 나있다. 문 앞에는 문높이의 건물 한 채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나무판을 가로질러놓아 문으로 통하게 하였다. 나무판만 치우면 속수무책이다. 문 안에는 등대지기가 앉을 자리가 하나 있고 등대 내부에는 방이 꽤 많다. 등대 내 통로의 너비는 9 쉬브르[8]이고 벽 두께는 10 쉬브르이며 등대 네 변의 너비는 각각 140 쉬브르에 달한다. 등대는 높은 언덕 위에 서 있는데, 시내까지의 거리는 1파르싸호[9]에 달한다. 등대는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길쭉한 육지에 세워져 있고, 바다는 성벽이 잇닿아 있다. 그래서 육지에 있는 이 등대로 가려면 시내 쪽에서 가야만 한다. 등대에 연결된 지대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시의 전속 묘역이다. 1349년에 내가 마그리브로 돌아가는 길에 이 등대에 다시 들렀더니, 등대는 이미 폐허가 되어 들어갈 수도, 문까지 오를 수도 없었다.
  • 이집트의 도시 딤야트의 한 수행자는 빼어나게 잘생긴 용모를 가졌다고 한다. 여인이 그에게 반해 억지로 그를 덮치려 시도하자, 화장실로 도망쳐 눈썹과 수염을 싹 밀어버리고 나왔다. 기겁한 여인은 크게 화를 내며 다시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븐 바투타는 이 수행자를 만나 말을 하다가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 이집트의 도시 '알 문야'의 목욕탕에서는 남자들이 죄다 치부를 덜렁거리면서 벌거벗고 다녔다. 기겁한 이븐 바투타가 이를 총독에게 꼰지르자 총독이 크게 노하여 목욕탕 주인들을 불러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더 생기면 경을 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나일 강에서 2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 '만라위'는 11개에 달하는 제당소가 있다. 수행자가 제당소로 들어가는 걸 막지 않는 게 관행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따뜻한 빵을 들고 와서는 당즙을 끓이는 가마 속에 집어넣는다. 좀 있다가 꺼내면 빵에 달디단 당즙이 흠뻑 묻어있는데 그걸 들고 가면 된다.
바위의 돔은 참말로 기이한 구조물로서 견고하면서도 이채로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기실 좋다는 점은 다 가지고 있으며, 기교란 기교는 다 부린 성싶다. 이 돔은 사원 한가운데의 언덕바지에 있는데, 대리석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문이 네 개 있고, 주위는 대리석을 잘 다듬어 깔았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겉이건, 안이건 간에 갖춰놓은 갖가지 화려한 장식은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대부분 도금을 하여 눈부시게 반짝이며, 보는 사람마다 황홀해지니, 이 모든 것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 다음은 레반트에서 이븐 바투타가 들은 이야기다. 마그리브의 성인 아부 야쿠브는 고행을 하며 전전하던 도중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어느 가난한 주민이 자기 집에 묵으라며 잠자리를 내주었는데, 어려운 살림에도 닭을 잡고 고깃국을 끓여주는 등 그를 융숭히 대접했다. 감격한 아부 야쿠브는 주인에게 딸의 혼수용품으로 마련해놓은 구리 대접들을 가져오라 시켰고, 주인이 대접들을 가져오자 구리 대접을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 돌려주었다.
  • 레반트 지방의 도시 '타라불루스'의 총독 산다무르는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어떤 날은 한 부인이 찾아와, 그녀가 우유를 팔고 있었는데 시장의 관리 하나가 찾아와 억지로 우유를 빼앗어 마셨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렇다할만한 증거는 없었다. 그러자 산다무르 총독은 그 관리에게 할복을 명했다. 관리의 배를 가르자 그 안에서 마신 우유가 쏟아져나왔고 [10], 이로서 여인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해냈다는 것이다.
  • 레반트 도시 '사르민' 시의 사람들은 '십'자를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시장에서도 거간꾼들이 거래를 할 때 9 다음은 10이 아니라 '9 더하기 1'이라고 말한다. 한 터키인이 이를 보다가 답답해서 거간꾼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리며 '10이라고 말해 이 멍청아'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도시에 세워진 모스크의 돔 역시 이 전통을 따라 10개가 아닌 9개다.
  • 바알라바크는 레반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특히 체리와 포도잼이 인기다. 이 곳 사람들은 접시나 숟가락 등을 나무로 깎아서 여러 개를 층층이 쌓아 겹쳐놓는데, 이렇게 10개까지 쌓아 겹쳐놓아도 보는 사람에게는 하나로 보인다. 이걸 허리띠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식사를 할 때에 꺼내서 나누어서 사용한다.
  • 대도시 다마스쿠스에 대해 좋은 말을 가득 써놓았다. 다마스쿠스 대사원의 아름다움을 여러 행에 걸쳐 극찬하는 한편, 다마스쿠스인들은 인심도 좋다고 썼다. 이븐 바투타가 한 골목길을 지나던 중, 한 소년이 들고있던 자기그릇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옆에 있던 관리가 돈을 내주며 새로운 그릇을 사라고 베풀어주었다는 것. 이븐 바투타는 아마 다마스쿠스에 발이라도 들일 수 있다면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굶어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븐 바투타 역시 노자도 떨어지고 열병에 걸려 시름시름하던 도중, 한 다마스쿠스 주민이 집에 초대해 치료해주고 돈을 챙겨주었다고...
  • 아라비아 사막의 발다흐 계곡에는 물 한방울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계곡 내부 딱 한군데 '타부크'에서만 옛 시절에 선지자 무함마드가 손을 씻은 샘물이 웅솟음치고 있는데,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마셔도 마르는 법이 없다. 이 곳을 제외하면 물을 채울 곳이 없기 때문에 모든 순례자들은 필수적으로 여기를 거쳐야 한다. 반대로 타부크에서 닷새 거리인 '알 히즈르' 우물에도 물이 많지만 아무도 함부로 마시지 못한다. 무함마드가 이 곳을 들릴 당시 길을 다그치지 위해 물을 떠마시지 못하도록 명하였기 때문. 그래서 낙타에게 물을 먹이거나 반죽이나 하는 용도다.
  • 성스러운 도시 메디나의 수석 무아진은 '아부 압둘라'라는 이름이다. 젊을 적에는 훤칠하게 잘생기고 성실한 하인이었는데, 워낙 성격이 좋아서 주인이 그를 크게 신뢰했다. 주인이 그에게 집을 맡기고 여행을 떠났을 때, 주인의 처가 아부 압둘라를 유혹하려 시도했다고 한다. 결국 아부 압둘라는 스스로를 거세하고 혼절했다.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그를 치료했고 이븐 바투타의 시대까지 살아남아 수석 무아진 자리까지 올랐다.
  • 메카에서 카바 신전 주위를 돌면서 참배하려고 하는데, 타는 듯이 뜨거운 태양이 발 아래의 대리석 판을 달구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는 말을 했다. 사람들이 물을 뿌리긴 하는데 물을 뿌리면 지글지글 끓는 것처럼 보일만큼 어마어마하게 뜨거웠다. 그래서 두꺼운 양말을 신고 걸어다녔는데 그래도 무지막지하게 더웠다고 한다.
  • 인도 델리의 궁정에서 머물 시절, 카르나타카 출신의 법학자 '자말룻 딘 알 마그리비'와 친구를 맺었다. 자말룻 딘 알 마그리비는 장인으로부터 자그마한 집 한 채와 노비 2명을 선물로 받아 근근히 먹고 살았다. 마그리비는 늘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옷꾸러미 안에 넣어두고 전전긍긍하며 살았으나 어느날 노비 2명이 작당해 그 주머니를 가지고 달아났다. 안그래도 소심했던 마그리비는 큰 충격에 빠져 당장에 식음을 전폐했다. 이븐 바투타가 이 사실을 왕에게 고하자 왕은 당장 보상해줄 것을 명했지만 그 소식이 닿기도 전에 마그리비가 죽어버렸다.
  • 메디나에서 메카를 잇는 순례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데, 개중 필수품이 미숫가루다. 미숫가루를 물에 개어 죽을 만든 뒤 설탕을 뿌려 먹는 것이다.[11] 아랍인들은 순례객들을 상대로 장터를 세워 , 대추야자, 식용유 따위를 파는데 이를 사먹으면서 길을 가면 된다.
  • 메카에 대해서는 장대한 모스크 카바 신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길게도 써놓았다. 또한 메카 사람들의 후한 인심을 극찬하는 기록을 남겼다. 메카 사람들이 빵을 구우면 그 주위에 거지들이 몰려드는데, 그러면 아무리 빵의 양이 적더라도 최소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를 흔쾌히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어린 고아들이 '미크탈'이라는 바구니를 들고 시장판에 앉아있으면,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온 손님들이 그 아이들을 고용하는 풍습에 대해서도 썼다. 손님이 물건들을 고르면 고아들이 바구니 안에 고이 보관해놨다가 집까지 배달해주고 몇 푼의 급료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 당대 메카 사람들은 외양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밝고 청초한 흰 옷을 즐겨입었으며, 향료를 애용하고 눈화장도 하며 푸른 나뭇가지로 이를 닦았다고.[12] 특히 메카의 여인들은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향수만은 비싼 걸 사서 쓴다는 기록도 남겼다. 메카 사람들은 오후 3시 전까지는 딱히 무얼 먹지 않고, 그 전에 배가 고프면 말린 대추야자 정도로만 배를 채워서 신체가 건강하고 질병이 적다고 적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소식의 중요성
  • 델리의 시내에는 총 11개의 나무돔들이 세워져 있다. 돔은 4층의 건물인데 층마다 무희와 가수들이 상주하며 한가운데에는 물소가죽으로 만든 3개의 통이 놓여있다. 통 안에는 장미수가 가득 차있으며 길을 가는 사람 누구나 원하는만큼 떠마실 수 있다. 대신 빈랑나무 열매나 누라나무의 잎사귀 15개를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 메카에는 '하산'이라는 이름의 정신병자가 하나 있다. 본래는 워낙 똘똘한 젊은이였는데, 한 수행자가 부리는 기적을 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발설하는 바람에 그만 미쳐버렸다고 한다. 그는 배가 고프면 시장에 가서 아무 점포나 들어가 마음대로 얻어먹으며 생을 연명했는데, 신기하게도 아무도 그를 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가 밥을 먹어주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기뻐했다. 그래서 물장수나 음식점이나 그가 오면 목을 빼고 그를 맞으려 들었다고... [13]
  • 메카인들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한 7월 27일을 매우 성대하게 기린다. 그 날만 오면 거리를 온통 고급 비단이나 마포천을 씌운 고급 가마로 가득 메운다. 낙타는 비단 목걸이를 두르고 가마의 씌우개는 땅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드리워져서 가마가 아니라 돔에 더 가까워보인다. 사람들은 길 양 옆에 불을 지펴놓은 채로 촛불과 횃불을 들고 행진한다. 카바 신전은 불빛을 받아 찬란한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음식과 당과를 나누어 먹고 친구들과 서로 즐긴다. 메카 전체에서 밤 내내 성대한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 메카는 상당한 인구가 모여사는 대도시지만, 주변이 산인데다가 물도 없는 황량한 곳이라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근 마을에서 메카로 식료품과 물건들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근 소마을들은 메카로 물건을 팔아서 생계를 잇고, 더 많은 물건을 팔수록 알라로부터 복이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만약 마을의 남정네들이 메카로 팔 물건을 충분히 구비해놓지 못했다면 집안 여인들이 난리를 치거나 아예 집에서 쫒아내기까지 한다.
  • '아부 가라'라는 사람은 한 도시의 총독을 맡다가 지나치게 재물을 낭비해 사람들의 고발을 받고 도망쳤는데, 운좋게도 델리 술탄국의 술탄에게 막대한 황금을 하사받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허나 그는 본디 구두쇠에 겁이 많아 항상 금을 자기 이부자리 아래에 깔고 잤는데, 매일같이 금속덩어리를 허리 아래에 깔고자니 허리에 큰 병이 생겨서 죽어버렸다.
  • 인도에 머무를 무렵, 한 강가에 들르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마침 우기였던지라 엄청난 양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는데, 빗물은 독초에 묻어있는 치명적인 독을 함께 씻어내려오기 때문에 그 불어난 강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락없이 독사하고야 만다고 한다.[14] 그래서 4일 동안이나 강가에 묵었지만 강물은 그 누구도 감히 마시지 못했다.
  • 이라크 지방의 도시 '알 루와크'에 머무를 때 불 쇼를 관람하기도 했다. 마른나무 몇 단에 불을 활활 지핀 다음, 불길 속에서 춤을 추는가 하면 불길을 입으로 삼키는 묘기를 보여줬다고. 심지어 어떤 자는 큰 뱀을 잡아 이로 대가리를 물어 자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실 불 묘기는 그렇게 드문 것만은 아니어서 전술한 인도의 강가에 머무를 때에도 같이 머문 수행자들이 불 속에서 춤추고 뒹글었지만 아무 상처도 나지 않은 기적을 보여주었다는 글을 남겼다. 특히 자신의 옷을 빌려갔는데, 그 옷을 입고 불 속에서 뛰어놀았음에도 불구하고 옷에 아무 그을림이 없어서 놀랐다는 말도 썼다.
  • 바스라에 갔을 때에도 여러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바스라가 당시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이었던만큼 대추야자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서 대추야자 값이 엄청 쌌는데, 그 때 말린 대추야자를 양껏 먹었다고 한다. 바스라 사람들은 대추야자를 끓여서 '사일란'이라는 밀당을 제조하는데 그 냄새가 매우 향기로웠다고. 또한 바스라에 있는 7개의 첨탑 중 하나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이름을 부르며 탑 한구석에 박혀있는 나무 손잡이를 흔들면 그 탑이 움직인다고 썼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잡이를 흔들었지만 정통파였던 이븐 바투타는 아부 바크르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잡이를 흔들었는데도 탑이 흔들렸다고.[15]
  • 아바단에서 한 독신 수행자를 만났다. 그 수행자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한 달에 한 번씩만 도시로 내려와 한 달치 먹을 물고기들을 잡아가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수행자가 사원의 폐허 속에서 명상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다가가자, 그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이븐 바투타에게 축복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수행자는 이븐 바투타가 워낙 마음에 들었는지 그날 저녁에 시종을 시켜 물고기 1마리를 식사거리로 보내주었는데, 그 물고기가 이븐 바투타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물고기였다고...
  • 샤스타르 시의 한 대사원에 여행객 신분으로 머물 때 워낙 잘 얻어먹어서 무려 16일 동안이나 체류했다. 한 사람 앞에 4인분은 족히 될 법한 양의 후추볶음밥, 버터, 튀긴 , , 고기, 당과 등을 수북히 쌓아주었다.
  • 이자즈 지방의 술탄의 술타령을 들어주는 일도 있었다. 당시 이자즈 지방의 술탄은 주색잡기를 좋아하던 인물이었는데, 거기에다가 얼마 전 세자까지도 세상을 떠나자 극도의 슬픔에 빠져 술을 사발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술탄에게 초대되어 술자리에 불려간 이븐 바투타는 그에게 자신의 견문록을 들려주고 대신 술탄의 술주정을 들어주었다. 기나긴 술주정을 들어주다 질렸는지 마지막에 니 아버지는 금욕적이고 청렴하게 살았는데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쏘아붙이고 나왔다고 한다.[16] 저렇게 말하고 나오자 술탄의 신하가 아무도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했는데 대신 말해줘서 고맙다고 감사해했다는 건 덤이다.
이스파한 사람들은 용모가 준수하고 살색은 밝고 흰데 불그스레한 빛이 약간 돈다. 사람들은 모두가 용감하고 기개가 있다. 음식에 한해서는 모두가 너그러울 뿐만 아니라, 경쟁심이 대단하다. 그러다보니 여러가지 이상야릇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가령 한 사람이 친구를 청해서는 '나와 함께 가서 난과 우유를 좀 맛보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가보면 갖가지 요란스러운 음식을 내놓고 대접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과시한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는 요인들도 그러하거니와 모든 이들이 웃어른을 우대한다. 총각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음식 잔치를 성대히 벌여놓고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기도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하기를 총각 한 패가 다른 패를 정해서 촛불에 음식을 지어주었더니, 이번에는 후자가 전자를 청해서는 비단불에 음식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 페르시아의 중심 도시들 중 하나인 이스파한 지방의 특색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이스파한의 특산물인 수박이 그렇게 맛있었다고 극찬했다.
  • 이스파한의 경우 이슬람 분파들의 싸움 때문에 폐허가 된 곳이 많아 황량해보이는 면이 없지않았다고 썼지만, 다음으로 들른 대도시 쉬라즈는 훨씬 나았던 걸로 보인다. 다마스쿠스에 비견될 정도의 아름다운 도시라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 특히 여자들이 월요일 날에 빠짐없이 몇천명씩이나 몰려가 새벽 예배를 듣는 것이 기특하기 짝이 없다고 흐뭇해했다. 그 어떠한 도시에서도 여성들이 이렇게 예배에 활발히 참여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었기 때문이다.
  • 기행문 중간중간에 델리의 술탄이 가졌던 막대한 부에 대한 일화를 여러 개 소개한다. 예를 들어 호라산의 한 법학자 '아미르 압둘라'는 인도로 가서 술탄의 호의를 얻었다. 그를 꽤나 아꼈던 술탄은 그의 창고를 열어주며 '저 안에 들어가서 너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금을 갖고 가라'는 명을 내렸다. 아미르 압둘라는 옷에 무려 13개의 주머니를 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 금을 꽉꽉 채워서 창고문을 나서자마자 쓰러질 수준의 금을 가지고 나왔다. 그가 가지고 나온 양의 금을 재어보니 무려 11kg. 한화 약 8억 9천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 인도 술탄에 대한 다른 말도 있다. 또다른 신하가 병에 걸리자, 왕이 병문안을 왔다. 왕은 거대한 저울과 금을 가지고 왔는데, 저울에 한쪽에 그 신하를 올리고 반대편에 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신하가 '전하! 이럴 줄 알았다면 옷이라도 많이 껴입을 걸 그랬습니다!'라고 토로하자 왕은 바로 '그렇다면 당장 있는 옷을 다 껴입게'라고 지시했다. 신하는 최대한 두꺼운 겨울옷을 있는대로 껴입고 저울 위에 올라갔고, 왕은 옷을 껴입은 신하와 금이 수평을 이룰 때까지 금을 쌓았다. 저울이 평형을 이루자 왕은 그 금을 모두 신하에게 주고 쾌유를 빌었다.대인배
  • 스리랑카 주민들에 대한 인상은 좋았던 모양이다. 이븐 바투타는 그들이 이교도이긴 하지만 무슬림들을 존대하며,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지내기도 한다며 좋아했다. 이게 인상깊었던 이유는 인도의 다른 힌두교도들은 무슬림들을 해치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하는 것 역시 좋아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븐 바투타가 인도 힌두교도들과 같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거나 물을 마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무슬림들이 음식을 달라고 하면 삶은 고기를 솥째로 들고 와서 던져주고, 바나나 잎사귀를 따와서는 쌀밥을 그 위에 얹고 조미료를 뿌린 뒤 멀찌감찌 떨어져 지켜본다고 했다. 이븐 바투타가 먹다 남은 건 절대 손대지 않고 짐승들에게나 던져줬는데, 철없는 어린 아이가 그걸 먹으면 크게 화를 내면서 매질하거나 소똥을 먹였다. 소똥이 불결한 걸 씻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페르시아 카자룬 지방의 사람들은 손님을 잘 대접한다. 오는 손님에게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고기와 유락을 섞어만든 완자, 얇은 빵을 수북히 대접한다. 최소한 사흘 간 대접하지 않고는 함부로 떠나보내지도 않는다. 그리고 손님이 요구할 게 있으면 무엇이든 제기만 하면 어느 정도 안에서는 해결해주기까지 한다.
  • 바그다드에 들어서서는 그 장대한 규모와 화려함에 감탄하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바그다드에는 우아하고 거대한 목욕탕들이 많은데 땅에서 솟아나는 시꺼먼 역청을 욕탕 바닥에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칠했고, 윗쪽에는 하얀 회칠을 해서 흑백색이 서로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고 썼다. 게다가 바그다드의 목욕탕에는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관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들어갈 때마다 3개의 수건을 지급해서, 하나는 들어갈 때 아랫도리를 가리는 용도로, 하나는 나올 때 아랫도리를 가리는 용도로, 마지막 하나는 몸에 있는 물기를 씻어내는 용도로 썼다고 한다.
  • 다만 이븐 바투타가 방문할 당시의 바그다드는 이미 아바스 왕조 시대의 그 번영하던 바그다드가 아니라 이미 오랜 전란 끝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바그다드였다. 그래서 옛적에 세워진 궁궐과 병원, 대사원들이 죄다 파괴된 상태로 잔해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바그다드는 경제 사정이 궁핍했던지라 여행자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원이 단 한 곳 밖에 없었는데, 이븐 바투타는 옛날에는 바그다드 거리거리마다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며 바그다드의 쇠락을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 타브리즈에서는 잘생긴 튀르크계 청년들이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보석 시장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데, 그러면 여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앞을 다투며 보석들을 있는 대로 쓸어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당연히 이븐 바투타는 이를 아니꼽게 봤고 기행문에도 따로 적어 남겼다.
  • 티그리스강 주변에는 역청이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알 카야라'라는 도시가 있다.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두면 그 구덩이에서 자연스레 역청이 시꺼멓게 올라와 가득 차게 되는 것인데, 이를 저장해두었다가 퍼가서 파는 것이다. 이 곳에서 나는 역청은 유난히 품질이 좋아서 칠흑색에 광택이 나고 차지며 냄새가 좋다고. 구덩이 근처에 있는 물웅덩이에서도 역청이 새어나오기 때문에 물웅덩이 수면에 낀 유막을 걷어내 말리면 이 역시 역청으로 쓴다고 한다. 역청을 운반할 때에는 역청에 불을 질러 바싹 말린 다음 토막토막 쪼개서 운반한다.
  • 부유한 도시 '마리딘'의 늙은 수석법관 '부르하눗 딘'은 덕행으로 이름이 높다. 평소 값싼 옷만을 걸치고 다니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며 절대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 어느 날은 한 가난한 여자가 찾아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남편이 자신을 다른 부인과 동등하게 대해주지 않는다고 토로하자,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녀를 따라나섰다고 한다. 여자가 집에 가서 남편을 데려오는 동안 길가에 홀로 서있었다는 것이다. 화가 난 남편이 역시 법관을 알아보지 못하고 모욕했지만 법관은 꿋꿋이 인내했고,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이 법관에게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신분을 밝히며 당황스러워하고 있던 남편을 교화시켜주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 제다에서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 제다에서 물을 구하러 다니던 도중, 갑자기 한 맹인 거지가 나타나 이븐 바투타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븐 바투타가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이븐 바투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덥석 잡았다고. 초면인 거지가 갑자기 손을 잡으니 놀란 이븐 바투타는 얼이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그 거지가 '손가락에 꼈던 반지는 어디로 갔는지요?'하고 묻더란다. 사실 이븐 바투타는 메카를 건너올 무렵 반지를 빼서 한 수행자에게 기부했던 터라 이븐 바투타의 놀라움은 더더욱 컸다. 거지는 '그 반지 속에 비밀이 들어있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으니 도로 가져오시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메카까지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반지를 되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노릇이니 반지를 다시 찾아오는 일은 실패했다고 한다.
  • 수단 해안가에 있는 '라스 다와이르' 항구에는 작은 사원 모양의 갈대 정자가 하나 있다. 그 안에는 타조알 껍데기가 수북히 쌓여있는데, 껍데기마다 물이 가득 차 있어 마시기도 하고 요리도 하며 유용하게 써먹었다. 라스 다와이르는 바다가 내륙으로 뻗어들어온 계곡 같은 자그마한 만으로, 이 곳 사람들은 천조각 네곳 귀퉁이를 잡고 물 속에 담갔다 꺼내기만 하면 팔뚝만한 숭어들이 줄줄이 잡혀올 정도로 어획량이 많다.
  • 수단 해안가를 거닐다 보니 종종 원주민들이 보이는데, 시꺼먼 피부에 옷이라고는 누런 천을 목에 대충 두른 게 전부였다고 한다. 대단히 야만스럽고 거친 자들로서 머리에 손가락 너비만큼의 붉은 띠를 질끈 묶고 다녀서 그 모습이 보기 심히 괴이했다고. 다만 외지인들에게 날카롭지는 않아서 그들에게 낙타를 빌려타곤 했다.
  • 예멘의 도시 '할리'에는 셰이크 카불라 힌디라는 이름의 대단한 금욕주의자가 살았다. 매일 누더기 옷에 펠트 모자만을 쓰고 조그마한 방 안에 틀어박혀 은거하는데, 이븐 바투타가 직접 가봤더니 고작 세수용 주전자, 야자 잎사귀를 엮어만든 식탁 뿐이었고 식탁 위에는 바싹 말라빠진 보리빵 한 조각, 소금 접시, 박하잎 하나가 끝이었다고 한다. 어떤 손님이 찾아와도 이런 상차림이 끝이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아무 부담없이 그를 마음껏 찾아갈 수 있었다고 썼다.
  • 예멘의 최대 도시이자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사나 시에서는 독특하게 생긴 벽돌과 석회로 지은 건물들을 볼만하다고 칭찬했다. 또한 예멘, 에티오피아 등지에서는 비가 한여름에, 그 것도 매일 오후에 쏟아붓듯이 내린다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일부러 비가 오지 않는 시간대를 골라 이동했다고 한다. 당시 사나 시는 길바닥 전체가 돌로 잘 포장이 되어있어서 비가 내리쳐도 물이 차지 않고 모두 그대로 빠져나갔다고.
  • 아덴은 시가지가 크긴 한데 수목도 농작물도 물도 없어서 황량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호승심이 상당히 세다고 주장했는데 그 증거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써놓았다. 어느 날 한 상인이 하인더러 양 한 마리를 사오라고 시장에 보냈다. 다른 한 상인도 같은 일로 하인을 시장에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날 시장에는 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 두 하인 사이에선 경매가 붙었고, 그 양은 무려 400디나르라는 어마무시한 가격에 낙찰됐다. 경매에서 이긴 하인은 기분이라도 좋았으니 됐다고 자위하며 집으로 되돌아갔는데 주인은 경쟁에서 이겼음을 기뻐하며 무려 1,000디나르를 상으로 주었다. 반대로 진 하인은 풀이 죽어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주인이 극도로 화를 내면서 두드려 패고 내쫒아버렸다고(...)
  • 소말리아의 도시인 '제일라'는 하도 더럽고 황량하고 악취나고 최악이라고 깠다. 물고기 썩는 비린 냄새와 낙타를 무작위로 잡아대는 피비린내가 썩어서 차마 도시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해안가에서 그냥 머무르다 바로 떠났다.
우리는 차려놓은 음식을 들었다. 주식은 버터에 볶은 쌀밥인데, 큰 나무쟁반에 담았다. 밥 위에는 쿠샨을 얹었다. 쿠샨이란 닭고기와 기타 육류, 물고기와 채소 등으로 만든 일종의 혼성 반찬이다. 그들은 한 그릇에는 덜 익은 바나나를 갓 짜낸 젖에 섞어놓고, 다른 한 그릇에는 발효된 젖을 담는데, 그 위에 절인 레몬과 절여서 시큼짭짤한 후추송이 그리고 푸른 생강과 망고를 얹는다. 이 곳 망고는 사과 비슷한데, 씨가 있다. 익으면 맛이 대단히 좋아서 과실로 먹으며, 익기 전에는 레몬처럼 시큼하여 식초에 절인다. 그들은 밥을 한입 먹고는 꼭 이러한 신 과실과 시큼하게 절인 채소를 곁들인다. 모가디슈 사람들은 어찌나 많이 먹는지 한 사람이 먹는 양이 보통 우리네 몇몇 사람이 먹는 양에 맞먹는다. 그러다보니 몸집이 크고 비대할 수밖에 없다.
  • 소말리아의 중심지 모가디슈에 대한 인상은 어지간히 좋았던 모양이다. 특히 모가디슈의 술탄이 차려준 밥상이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지 모가디슈의 요리에 대한 설명을 구구절절 써놓았다. 모가디슈인들이 음식을 하도 많이 먹어서 하나같이 뚱뚱하다고 뒷담화(?)를 남기기도 했다.
  •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까지 내려갔다왔다. 다르에스살람의 거주민들은 아랍계보다도 더 피부색이 짙은 완연한 흑인종으로, 모두 맨발로 다닌다고 했다. 특히 바로 옆에 흑인 이교도들이 넘쳐나다보니 전투적일 수 밖에 없고 신앙심이 투철했다고. 건물은 꽤나 단아하게 생겼는데 모두 목조로 지었고 지붕은 수초로 이었다고 한다. 그 곳의 술탄 '아부 무즈피르 하산'은 엄청나게 관대해서 외지인이 찾아올 때마다 상아 노예를 하사했는데, 그가 죽고 자리를 물려받은 동생은 그와 정반대여서 되려 있는 것도 뺏어가는 악인이라 욕을 있는대로 처먹었다고 글을 남겼다.
  • 예멘 최남단 도시 '자파르'는 정어리가 넘쳐나서 가축이나 양의 사료로 쓰인다며 희한해했다. 현지인들은 모두 예의가 바른데, 하도 날씨가 푹푹 찌는 듯이 더워서 옷도 그냥 수건을 허리와 어깨에 대충 묶고다니는 수준이다. 그래도 워낙 땀이 차는 바람에 남녀를 막론하고 상피병에 걸려 두 다리가 퉁퉁 부었고 남자들 대부분이 고환습진(...)에 시달리고 있다는 슬픈 사실을 적었다.
  • 자파르에서는 운이 좋거나 고귀해보이는 사람이 손님으로 오면, 그 손님이 손 씻은 물을 주인이 마시거나 가족들에게 나눠주어 마시도록 한다.
  • '필발(蓽茇)' 나무 잎사귀를 상당히 좋아했다. 잎을 따서 빈랑 열매와 함께 씹는데, 이러면 입안이 깨끗해지고 구취가 사라지며 음식을 잘 삭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입맛을 돋우며 정욕을 붇돋는 부가효과도 있다고. 그래서 예멘이나 아랍 지방 사람들은 밤이면 필발잎을 머리밑에 놓고 자다가 잠에서 깨든가 누가 부르면 바로 잎을 입에 넣어 씹는다. 그러면 구취가 사라진다. 다만 이렇게 좋은 필발 잎사귀이지만 상당히 귀한 것이라 아무나 함부로 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 인도호두도 굉장히 좋아했다. 큼직한 야자열매를 맺는데, 껍데기를 잘라낸다음 위를 빠개어 그 속에 있는 달고 시원한 물을 마신다. 물을 다 마시어 갈증을 해소하면 껍데기 조각을 숟가락처럼 만들어 하얀 과육을 퍼먹는다. 꼭 계란살같다는 평가를 남겼는데, 당시 이븐 바투타가 얼마나 좋아했던지 몰디브에 1년 반 정도 머물 당시 야자를 주식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야자는 열매 말고도 쓸모가 많아서 꽃에서 당즙을 채취해 과자나 꿀을 만든다거나[17] 우유맛이 나는 야자젖,[18] 유용한 야자유[19] 등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쓸 수 있었다.
  • 예멘에서 오만으로 배를 타고 올라갈 때 고생을 꽤 했다. 물고기 뼈로 골조를 잡고 낙타 가죽으로 천장을 덮은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을 방문하는가 하면, 새알들을 주워서 바닷새 고기와 함께 삶아 먹기도 했다.[20] 항해 도중에는 말린 대추야자와 물고기 따위 뿐이었고 하루는 밤 내내 심한 폭풍이 불어닥쳐 진짜 죽을 뻔하기도 했다. 폭풍이 물러가고 한 오만 상인이 통옥수수에 대추야자 당밀을 발라 과자를 만들어주자 맛있게 먹어치웠다고 썼다.
  • 오만의 한 안내자가 옷가지와 돈을 가로챌 생각으로 일부러 조수가 드나드는 어떤 만으로 인도하는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안내자가 이븐 바투타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옷과 돈을 빼앗을 의도였기 때문.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안내자를 쫒아낸 뒤 신의 도움으로 한 일행을 만나서 겨우 살았다.
  • 오만의 여자들이 음탕하고 천박하다고 신랄하게 깠다. 하루는 술탄과 같이 있었는데, 한 예쁘장한 여인이 찾아와 '제 머리에 사탄이 들렸습니다'라고 고했다. 귀찮았던 술탄은 그렇다면 빨리 나가서 사탄을 쫒아내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러자 여인이 '저는 함부로 집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더란다. 술탄은 그딴건 상관치 말고 나가서 사탄을 쫒아내라고 말해주었는데, 여인은 이 말을 핑계로 마음껏 집 밖에 나가 활보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여인이 이렇게 밖에 나가서 무슨 짓을 해도 여인의 아버지는 그녀를 벌할 수 없는데, 이는 술탄이 직접 허락해준 일이기 때문이다.
  • 오만 사막 부근에는 '자말 알크'라는 유명한 강도가 있다. 페르시아 출신으로 기마병 부대를 거느린 채 강도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자카트를 바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만 강도짓을 했고, 또한 그 빼앗은 재물로 순례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덕에 의외로 영웅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오만판 로빈 후드 특히 사막 곳곳에 물을 숨겨놓고 관군이 쫒아오면 바로 사막으로 도망쳐 그 곳에서 버티며 죽을 때까지 잡히지 않고 버텼다는 말이 있다.
  • 오만의 특산품이나 다름없는 진주 채취에 대해서도 글을 남겼다. 줄 한끝에 허리를 질끈 묶고선 바다 바닥으로 잠수해 조개를 찾는 것이다. 조개를 찾으면 쇠붙이로 잘라내어 가죽 주머니 속에 담고 작업을 계속한다. 숨을 참기 어려울 지경이 되면 줄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 물 위로 올라온다. 이렇게 채취한 진주의 5분의 1은 술탄이 그대로 가져간다. 조개의 진주 뿐만 아니라 살 역시 햇볕에 말리면 주옥이 된다고 써놨는데, 사실 살을 말리면 주옥이 되는게 아니라 조갯살 내부의 침전물이 말라서 주옥이 되는 것이다. 당대인들은 몰랐던 과학적 오류였던 부분.
  • 제다에서 이집트로 가기 위해 배편을 알아보던 도중,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기껏 예약한 배에서 내렸다. 이게 천운이었는데 그 배는 인근 곶에서 침몰해 타고 있던 승객들이 죄다 익사해 죽었기 때문. 이븐 바투타는 이걸 보고 크게 놀라 알라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황제와 직접 대면도 했다고 한다. 하기아 소피아도 들어가보려고 했는데 비기독교인이라서 들어갈 수 없었다고. 더군더나 수녀원의 존재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볼거리도 많고 사람들도 지적이라고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 아나톨리아 지방은 그토록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썼다. 사람들은 생긴 것도 준수하고 예의바르며 도시 역시 잘 구획되어 있고 깨끗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로마의 영향이 남아있어 성풍속이 이슬람에 비해 자유로운 건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특히 튀르크인들이 그리스계 여무희들을 사들여 음란하게 즐기는 걸 극도로 혐오했다. 정작 자기도 여행하면서 사들였으면서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니는 것 역시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 아나톨리아 지방의 한 술탄은 금식월 내내 밤에 고깃국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그 이유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고깃국이기 때문. 자그마한 그릇에 담은 고깃국에는 불콩을 얹고 유락과 설탕을 섞었는데 이븐 바투타가 직접 먹어본 결과 꽤 맛이 좋았다고 했다.
  • 튀르키예의 라자키야 시에서는 말을 타고 시장을 지나고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달려와 말고삐를 빼앗아 서로 쥐려고 싸움을 벌였다. 설마 강도 패거리인가 겁에 질려 말 위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옆에 지나가던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그 사람들은 강도가 아니라 서로 이븐 바투타를 모셔가 대접하려고 다투는 사람들이라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래서 직접 목욕도 시켜주고 음식, 당과류, 과일 등을 얻어먹으며 호화롭게 대접받았다는 것이다.
  • 문화상대주의 따윈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라 유대인에 대한 비하적 면모를 보인 적도 있다. 튀르크 술탄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와 코란 독경사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탄마저도 예를 표하는 걸 본 이븐 바투타는 곁에게 저 사람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는데, 알고보니 그는 유대인 출신 의사였다. 의술로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기에 술탄마저도 그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하지만 독실한 무슬림이던 이븐 바투타 입장에서 의사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고, 유대인 따위가 코란 독경사들 앞에 자리를 틀고 앉은 게 더 꼴보기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븐 바투타는 바로 큰 소리로 이 저주받을 놈아, 이 저주받을 놈의 자식아, 네가 유대인인데 어떻게 감히 쿠란 독경사의 앞에 앉는다는 말인가?하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쫒아냈다.
  • 튀르크 술탄이 그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돌을 보여주기도 했다. 반달반들 윤이 나는 아주 단단한 검은 돌이었는데, 4명의 석공을 불러 철망치로 16번이나 세게 쳐댔는데도 금이 가지조차 않아서 감탄했다고 했다. 애초에 검은빛을 띠는 철질 운석의 경우 웬만한 충격으로는 손상이 가지 않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 한 터키 여성이 말을 탄 채로 하인과 함께 길을 가고 있는 걸 보고 같이 동행했다. 그러나 계곡물을 건너는 도중, 물이 들어차자 말이 그녀를 등에서 떨어뜨려 버렸다. 하인이 여주인을 살리려 강에 뛰어들었고 여주인을 살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하인이 죽어버렸다. 이븐 바투타는 그를 추모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 조그마한 읍에서 머물렀는데, 딱히 머무를 데가 없어서 한 기독교도 노파의 집에서 묵었다. 노파는 이븐 바투타 일행이 장사치인줄 착각하고 사프란을 잔뜩 가져와놓고 사라고 권유했지만 끝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 겨울에 길을 가다가 얼어죽을 뻔하기도 했다.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길이 눈에 뒤덮여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 게다가 아나톨리아 지방 사람들은 묘 위에 집 비슷한 구조물을 지어서 장식하는데, 이때문에 무덤이 사람 사는 집인줄 알고 달려갔다가 허탕도 많이 쳐서 정말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어느 하숙관을 찾는 데에 성공해서 간신히 모두 살아났다고 한다.
  • '카스타무니야' 시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도시였는데, 특히 물가가 싸다고 칭찬하며 좋아했다. 무려 40일이나 머물렀는데, 살찐 양고기 덩어리, 빵을 각각 2디르함 어치만 사면 이븐 바투타 일행 10명이 배터질듯이 먹었다고 한다. 호두와 밤이 맛있었는데 이건 1디르함 어치만 사도 모두가 먹고나 남는 수준이었다. 밀로 만든 당 역시 2디르함 어치만 사도 충분했으며, 겨울인데도 꽃을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도시들 가운데에서 가장 물가가 싼 도시였다며 특히 좋아했다.
  • 배를 타고 흑해를 항해하는데, 미친 광풍이 불어와 이븐 바투타는 점점 겁에 질려갔다. 겁먹은 이븐 바투타는 선장에게 '위로 올라가서 바다 상황이나 좀 보고 오시오'라고 말했는데, 선장이 올라갔다오더니 이븐 바투타더러 알라께서 당신을 보우할 테니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이 말하길래 정말 죽는 줄 알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에 질렸다고... 다행히도 바람이 방향을 바꿔서 간신히 항구로 살아돌아갈 수 있었다.

7. 여담

말리에 체류하던 당시 식인을 하는 부족 관련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중략) ... 대노한 술탄은 외국에서 온 백인 법관을 식인종들이 사는 불신자들의 지방으로 추방해버렸다. 그곳에서 4년간 살게 한 후 법관을 귀환시켰다. 그곳의 불신자들은 백인들을 잡아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인은 설익어서 먹으면 해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인들만이 익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군의 흑인들이 술탄 만사 술레이만을 찾아왔다. 그들의 추장도 함께 왔다. 통상 그들은 귀에 큰 귀걸이를 달고 다니는데, 귀걸이 직경은 반뼘이나 된다. 그들은 비단이불 같은 것을 쓰고 다닌다. 그들의 고장에는 금광이 있다. 그래서 술탄은 그들을 환대하면서 대접으로 시종 한 명을 하사하였다. 이후 그들은 술탄이 하사한 시종을 잡아먹고서는 얼굴과 손에 피를 바른 체 술탄을 찾아와 사의를 표하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통상 그렇게 그들에게 파견되는 사람을 처치한다고 한다.

인도의 정치가 자와할랄 네루는 자신이 딸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쓴 세계사 편력에서 이븐 바투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로 꼽았다.

아랍에미레이트(UAE) 두바이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븐 바투타 몰'이 존재하며, 각 구역마다 이 사람이 여행했던 국가들을 테마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으며 구조물도 있다. 그러나 본질이 쇼핑몰인 것은 변치 않는다.

모로코의 대도시 탕헤르에는 그의 이름을 딴 탕헤르 이븐 바투타 국제공항과 종합경기장 '스타드 이븐 바투타'가 존재한다. 최대 수용 가능 인원이 65,000명에 달한다.

8. 대중매체

  • 대항해시대 시리즈
    • 대항해시대 3에 "여행기"가 "삼대륙 주유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진흙모스크, 면 불탑, 달리는 새(타조)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선 삼대륙 주유기가 퀘스트를 통해 얻는 발견물로 등장한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는 A급 항해사로 등장한다. 언어가 아랍어 5레벨, 페르시아어 4레벨이라 많은 유저들이 영입한다.
  • 징기스칸 4
    • 시나리오 2, 4에서 모로코 지역의 장수로 등장한다. 1271년 시작인 시나리오 2에서는 1330년대는 돼야 재야로 등용되며, 처음부터 마린 왕조의 장수로 나오는 시나리오 4는 1370년 시작이라 원래라면 나올 수 없고 게임에서도 금방 늙어 죽는다.
  • 언어스드: 트레일 오브 이븐 바투타
    • 이븐 바투타의 행적을 21세기에 조사한다는 설정이지만 게임 자체가 미완성이다.
  • 워해머 판타지
    • 아라비 모험가 이븐 젤라바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1] 구글에서 검색하면 1377년 사망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2] 그래서 2001년 국내 정식 번역 이전에는 3대륙 주유기라는 이름으로 인용되기도 했다. [3] 다만 아야 소피아 내부는 황제에게 성당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본인이 무슬림인 만큼 십자가에 예를 표할 수 없었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4] 하지만 주류 역사학계는 마르코 폴로 역시 중국에 다녀온 것이 맞다고 보고 있다. 당시의 중국 제국인 원나라 측에서 마르코 폴로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야 수많은 외국인들을 정복해서 포로로 데리고 있던 세계제국이던 원제국에서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딱히 이름을 날릴 전공을 세웠거나 재주가 있던 인물은 아닌지라 그냥 일개 듣보잡 색목인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부 과장된 내용을 제외하면, 원나라 당시에 행해졌던 여러가지 군사 문화 등, 직접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내용들이 동방견문록에 많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5] 처음에는 두 번째라고 소개했으나, 영어 완역판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 정정했다. [6] 이븐 바투타가 일행들과 함께 델리 술탄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현지인 관리들이 요리사 20명을 붙여주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븐 바투타는 델리 술탄국의 관리들이 유능하고 청렴강직한 사람들이라는 서술을 덧붙였다. [7] 이 외에도 말리에 입성한 초창기에 자신을 포함해서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 여섯 명이 배탈이 났는데 이 중 한 명은 결국 죽었고 이븐 바투타도 2달 동안 사경을 해멨었다고 한다. [8] 1쉬브르는 약 22.5cm다. [9] 약 6.24km. [10] 이곳과 전혀 상관없는 일본에도 가난한 사무라이의 자식이 떡을 훔쳐 먹었다고 떡장수가 억지를 쓰자 사무라이가 아들의 배를 갈라서 무죄를 증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소운 참고 [11] 이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식량이 떨어졌을 때 추종자들에게 모래를 쥐어주었더니 밀가루죽이 되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12] 이걸 '칫솔나무'라고 하는데 가지를 잘라서 이를 닦는 칫솔 용으로 쓴다. 지금도 아라비아 반도의 일부 유목민들은 이 나뭇가지를 상비용으로 구비해놓고 식후나 수시로 사용한다. [13]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에도 광문이라는 거지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는 내용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도했던 기생이 광문이가 오면 춤을 춘다든가 싸우던 사람들이 광문이를 보고 싸움을 멈췄다든가 하는식. 전근대 대중매체가 있기전 일종의 '스타'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 [14] 사실 엄청난 양의 빗물과 유량을 생각해보면 독초의 독보다는 각종 세균에 오염된 물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15] 말이 이렇지 이븐 바투타 역시 굳이 알리나 아부 바크르의 이름 따위 부르지 않아도 탑이 흔들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장난으로 탑을 흔들고 있는 걸 보자 그만두라고 말했다는 말도 있다. [16] 물론 저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고 손으로 술탄이 잡고 있는 금과 은으로 된 술병을 가리키며 '당신은 금욕과 청렴으로 유명한 술탄 아흐마드의 후예입니다. 당신의 권위에 대해서는 비난의 여지가 없지만 저것들만큼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7] 아침에 나무에 올라가 꽃을 살짝 잘라낸 다음 거기에 작은 통을 매달아두면 야자꿀이 흘러나온다. 저녁에 다시 올라가 물로 깨끗이 씻어준다음 통을 갈아주고 다시 상처를 내어 이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 상당한 양의 꿀이 만들어진다. [18] 야자에 쇠붙이를 찔러넣어 휘저어주면 하얀 액즙이 나오는데, 이를 물에 타면 맛이 꼭 우유맛으로 영양가가 높다. 일부 사람들은 부식으로 삼아 먹기도 한다. [19] 떨어진 야자열매를 껍질을 벗겨 잘게 썰어 햇빛에 말린다. 말린 야자를 솥에 넣고 찌면 기름이 나오는데 등유로도 쓰고 머리에 바르기도 한다. [20] 이때 이슬람식으로 새알을 삶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들을 책망했는데 그러자 재수없었는지 더이상 그 사람들이 이븐 바투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