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대공국 Velikoye knyazhestvo Moskovskoye Lietuv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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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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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6년 ~ 1795년 | |||||
성립 이전 | 폴란드 병합 이후 | ||||
발트계 공국들 | 프로이센 왕국 | ||||
러시아 제국 | |||||
합스부르크 제국 [[갈리치아| 서갈리치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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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224><colcolor=#fff> 위치 | 동유럽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일부 | ||||
수도 |
보루타(13세기경) 케르나베(1279~1321) 트라카이(1321~1323) 빌뉴스(1323~1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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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 | ||||
국가원수 | 대공 | ||||
주요 대공 |
민다우가스(1236~1263) 게디미나스(1316~1341) 알기르다스(1345~1377) 요가일라(1377~1392) 비타우타스(1392~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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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리투아니아어, 루테니아어[1] 등 | ||||
종족 |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루테니아인[2] 등 | ||||
종교 | 발트 종교→ 가톨릭(국교), 정교회[3], 유대교 | ||||
통화 | 즈워티 | ||||
주요사건 |
13세기 초 건국 1251~1263년 리투아니아 왕국 1385년 크레보 연합 →1386년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 1569년 루블린 연합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탄생 |
언어별 명칭 | ||||
리투아니아어 | Lietuvos Didžioji Kunigaikštystė / Lietuva | |||
중세 리투아니아어 | Didi Kunigystė Lietuvos | |||
폴란드어 | Wielkie Księstwo Litewskie / Litwa | |||
기타 언어별 명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라틴어 | Lituania | ||
이디시어 | ליטע (Lite) | |||
벨라루스어 | Літва́ (Litvá) | |||
우크라이나어 | Литва́ (Lytvá) | |||
리보니아어 | Leišmō | |||
크림 타타르어 | Litvaniya | |||
독일어 | Litauen | |||
헝가리어 | Litvánia | |||
루마니아어 | Lituania | |||
러시아어 |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литовско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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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동유럽에서 현 리투아니아 영토는 물론, 벨라루스, 라트비아의 라트갈레 일대, 우크라이나, 몰도바, 오늘날 스몰렌스크 일대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의 서부 영토 등의 지역을 장악했던 국가다. 북방 십자군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유일한 발트계 부족이었으며 튜튼 기사단의 공격을 버텨낸 걸로도 모자라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드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대국이었다. 이후 1569년 폴란드 왕국과 연합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이어진다.2. 리투아니아 통일과 확장
민다우가스 왕조 리투아니아 왕국 시절 영토. 아직 본격적인 확장을 하기 전이다.
동유럽 대부분이 슬라브 계통 민족인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는 발트어파에 속한다. 발트족은 기원전 2천년경부터 존재했던 긴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다른 민족들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었다. 이미 북유럽과 러시아까지 다들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한참 지나서, 본격적으로 십자군이 종교전쟁을 벌이던 13세기 무렵까지 리투아니아는 토착 다신교를 믿고 있었으며, 이 시기 유럽에서 불던 북방 십자군 전쟁으로 이웃 프루스인들이 정복당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서유럽의 군사 기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원래 원시적인 장비만으로 싸워야 했던[4] 리투아니아인들은 튜튼 기사단을 늪지대에서 게릴라전으로 격파한 후 사살한 튜튼 기사단원들의 시체에서 갑옷을 뺏어입는 방법으로 점점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싸움질하던 리투아니아는 튜튼 기사단의 위협 때문에 1236년 초대 리투아니아 대공 민다우가스의 지도 아래서 통일되었으며, 발트 지역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를 상대로 북방 십자군 정복사업을 시도하던 튜튼 기사단을 꾸준히 좌절시켰다.[5]
리투아니아 대공들은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끼인 이교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매우 잘 이용했으며 양자 사이에서 적극적인 줄타기를 통해 많은 실리를 챙겼다. 리투아니아를 통일한 민다우가스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선포하여 교황으로부터 리투아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리투아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개종을 취소하고 다신교로 복귀했으며 1263년 조카에게 암살당해 리투아니아 왕국의 성립은 물 건너간다.[6] 이후 30년간의 혼란기를 거쳐 게디미나스 왕조를 연 비테니스는 뜬금없이 동로마 제국에게 정교회 총대주교구를 리투아니아에 설치해달라고 요구해 정교회에도 발을 들여 놓았다. 비테니스는 1293년부터 1316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이끌었는데, 튜튼 기사단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전사했다.
비테니스의 아들인 게디미나스 치세에 이르러 리투아니아는 본격적으로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나간다. 그는 루테니아의 소규모 공국들과 혼인 동맹을 맺고는 공동의 적이었던 튜튼 기사단을 상대했으나, 동시에 이를 통한 상속권을 빌미로 루테니아의 소규모 공국들을 도리어 침공해 정복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 일대인 루테니아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구심점이던 키예프 루스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작고 약한 여러 공국들만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리투아니아는 이런 틈새를 적극적으로 노려 영토를 넓혔다. 루테니아의 공국들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유혈 사태는 튜튼 기사단이나 몽골 제국과의 전쟁과의 비하면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고, 종종 무혈점령도 일어났다.
'몽골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도시들에게는 잘 해준편이다'라는 통념은 적어도 동유럽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칼가 강 전투로부터 수십여 년이 지난 1274년 몽골 제국군은 스몰렌스크를 한 차례 약탈하였으며 1278년에는 랴잔을 약탈하였다. 1293년에는 몽골군이 다시 14개 공국을 침략하여 약탈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루스인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등 인적 자원의 수탈도 만연하였다. 다시 말해서 몽골-타타르인들은 이미 항복한 상황에 있던 공국들을 트집을 잡아서 침략하고 약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7]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 입장에서 몽골인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인이지만 리투아니아인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로 여겨져 위화감이 적었다. 다른 한편으로 리투아니아 측은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슬라브인의 문화를 존중해, 루테니아어를 배우고 '오래된 것을 부수지 않는다'는, 북방 십자군들과 대비되는 원칙을 세웠다. 게디미나스의 리투아니아 세력은 루테니아 영토를 합병할 때면, 언제나 지역 주민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지방 법률을 보존하며 봉건 영주들의 재산권을 절대 터치하지 않고 상인들의 계약을 맺을 자유도 건드리지 않는 영민함을 보였다. 게디미나스 치세의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방향으로 진출하여 과거 키예프 공국에 해당하던 영토 상당수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게디미나스는 자신을 '리투아니아와 루스의 왕'으로 칭했다.
튜튼 기사단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게디미나스의 장례식은 이교식으로 치러져 애마와 시종들이 같이 화장되어 순장되었다. 이교적 전통이 아직 강했던 빌뉴스가 점점 커져가는 리투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게디미다스의 아들 알기르다스는 그의 형제 켕스투티스가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본토를 방어하는 사이[8]에 동쪽으로 진출하여 타타르인들로부터 키예프, 비텝스크, 체르니히우(체르니고프) 지방 및 스몰렌스크를 탈환했다. 알기르다스는 마침 동시기에 똑같이 통일을 이룩하고 확장에 매진하던 폴란드 왕국는 루테니아 지방을 놓고 확장 경쟁을 벌였으나, 폴란드는 종교도 루테니아의 동방정교와 다른 서방 가톨릭이었고, 토착종교에 걸쳐있어 종교적으로 아예 제3자였던 리투아니아와 달리 융통성이 없고 폴란드의 문화를 강요해서 확장이 지지부진했다. 결과적으로 승자는 리투아니아 쪽이었다. 게디미나스의 아들 알기르다스가 사망한 1377년에 이르면 리투아니아는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닌 유럽의 대국으로 자라난다.
파일:15th lithuania map.jpg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최대 판도,하얀 선은 현재의 국경
인구 수가 얼마 되지 않았던[9] 리투아니아인이 순식간에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몽골과 튜튼 기사단의 침략과 잔혹행위에 있었다. 과거 키예프 공국 영토의 주민들은 몽골인의 파괴와 노예 사냥에 큰 곤경을 겪었던 와중에 무자비한 정복정책으로 유명한 북방 십자군까지 쳐들어오자 절망에 빠져있었다. 14~15세기 들어서 리투아니아인들이 루테니아 여러 공국에 무혈점령까지 하면서 영토를 급격히 확장했던 것은 이들이 타타르인들보다 공납을 적게 요구했기 때문에(다시 말해서 타타르인들이 공납을 과도하게 수취했기 때문에) 아니 적어도 이미 항복한 상황에서 또 쳐들어와서 집을 불지르고 사람을 납치하는 일은 안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리투아니아인은 튜튼 기사단이나 몽골인들처럼 철저하게 정복지를 파괴하는 정책 대신에 현지인들에게 해방자를 자처하며 협조를 구하는 정복 정책을 선택했고, 이 방식이 루테니아에서 제대로 먹혀들었다. 리투아니아인은 루테니아의 기득권들에게 "우리는 새것을 들여오지도 않고, 옛것을 바꾸지도 않는다."라는 말로 안심시키고, "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10]과 루테니아인은 상호간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라는 성문도 만들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인구의 2/3 혹은 3/4는 루테니아인(과거의 키예프 대공국의 주민이었던 정교회를 믿는 동슬라브족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루테니아의 지도층들과 자주 통혼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확장은 15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1387년부터 1392년의 기간 사이에 오늘날의 몰도바와 루마니아 영토에 해당하는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이 리투아니아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1392년부터 1430년까지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다스리며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큰 영토 팽창을 이루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1399년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타타르군에게 패배[11]함으로써 흑해 일대의 영토를 동쪽으로 더 확장하는데에는 실패하였지만, 1410년 벌어진 그룬발트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리투아니아의 숙적 튜튼 기사단을 궤멸시킴으로써 명예를 회복하였다.
1410년 벌어진 그룬발트 전투(리투아니아어로는 잘기리스 전투)의 승리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알기르다스의 후계자 요가일라(야기에우워)가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었다. 요가일라는 여태까지 발트 다신교를 믿어왔던 리투아니아인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폴란드에서 리투아니아로 성직자들이 건너왔으며[12] 성당이 폴란드 문화를 전파시키는 거점이 되었다.
3.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사회와 경제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서부의 볼히니아를 정복한 것을 시점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도 봉건 제도가 유입되었다. 봉건 지주이자 전사에 해당하는 계급은 인구의 10% 이하를 차지했고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16세기 중반까지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농민은 단일적 계층이 아니었다. 농노가 아닌 농민은 자유를 누리며 군사 원정에도 참여하여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소귀족에 가까웠다. 14~16세기에는 도시가 많이 늘어나고 도시 인구도 크게 증가하였다. 고대부터 동유럽의 중심도시 중 하나였던 폴로츠크는 인구가 5만명 가까이 되었고 2~3천명이 거주하는 소도시의 숫자는 500개 가량 되었다.주민들의 법적 지위는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따라 달라졌다. 빌뉴스, 폴로츠크, 브레스트, 민스크, 나바흐루다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 많은 권리를 누렸다. 이 도시들은 마그데부르크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의 주민들은 봉건적 의무에서 면제되었고, 세금은 돈으로만 내면 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합쳐지기 이전에는 도시 주민의 80%는 루테니아인이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시대에는 유대인, 독일인들이 도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도시 주민들은 가톨릭이나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면서 폴란드화했다.
4.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사모기티아인
리투아니아인들이 제마이티야(Žemaitija) 사람이라는 뜻에서 제마이차이(Žemaičiai)라고 부른 사모기티아인은 리투아니아인들의 친척 뻘 되는 같은 발트어족으로써, 리투아니아인들이 킵차크 칸국의 잔당들과 싸우며 영토를 넓히는 동안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본토를 방어하였다. 한 번은 사모기티아인들이 1260년 라트비아의 두르베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대패[13]시킨 덕분에 리보니아 기사단 영토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사단이 일찍 망할 뻔한 적도 있었다.“리투아니아인과 사모기티아인과 루테니아인은 상호간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 같은 성문에서 보듯이 사모기티아인은 인구가 리투아니인보다도 적었으나 중요한 대접을 받았는데, 리투아니아인들이 타타르인들과 싸우고 루테니아의 유력자들과 외교전을 펼치며 영토를 넓히는 동안 사모기티아인들은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본토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의 가톨릭 개종은 요가일라가 개종한 138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리투아니아의 저지대에 살던 사모기티아인들은 좀 더 보수적이고 반기독교 감정이 강해서[14] 15세기에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들 사모기티아인들은 폴란드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다른 리투아니아인들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17~18세기 리투아니아의 대귀족들이 거의 완전히 폴란드화 했던 상황에서, 사모기티아의 중심도시 셰울레이[15]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5. 영토 확장의 중단 및 폴란드화
킵차크 칸국이 멸망하고, 15세기 중순 크림 칸국이 들어섬에 따라 리투아니아의 영토 확장과 유지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게 되었다. 크림 칸국의 타타르 전사들은 전열을 가다듬은 후 리투아니아 대공국 일대를 마구 들쑤시고 다니며 노예 무역을 위한 납치를 일삼고 다녔다. 드니프로 강 일대는 주민들이 지주까지 포함해서 전부 노예로 잡혀가거나 피난을 가는 바람에 야생의 상태로 복구될 지경이었으며, 심지어 빌뉴스까지도 크림 타타르족의 습격을 대비해 요새를 보강해야 할 지경이었다.결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얼마 안가 드니프로 강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크림 타타르족은 드니프로 강 일대의 비옥한 흑토 지대를 약탈할 생각만 하고 정착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공백지가 된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는 코사크라고 불리는 일종의 자유민들이 들어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루테니아 곳곳에 퍼져있던 리투아니아인은 14세기에는 주로 루테니아 유력자들과 통혼했지만, 15세기 들어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여파로 성당을 통해 전파되는 폴란드 문화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점차 공식 석상에서 루테니아어[16] 대신에 폴란드어를 쓰게 되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면서 서로간의 구별이 옅어지게 된다. 1440년 카지미에시 4세부터는 다시 야기에우워 왕조 왕들이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 지도층 사이에서 루테니아어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폴란드어의 사용빈도가 증가하는 추세는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단순한 동군연합 형태에서 아예 연방으로 합쳐지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만약 리투아니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고 폴란드와 연합하지 않았다면 정교회로 개종하고 동슬라브화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연대기 작가들도 리투아니아의 폴란드화에 영향을 받았다. 15세기 중반까지 리투아니아의 연대기 작가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야말로 키예프 대공국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입장에서 연대기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키예프 루스의 후계국가 중 하나인 모스크바 대공국이 성장하면서 리투아니아를 압도하고 또한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이 폴란드인과 동화되면서, 리투아니아 연대기 작가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키예프 루스가 아닌 아예 로마 제국에서 찾고자 하였다. 《리투아니아와 사모기티아 연대기(Хроника литовская и жмойтская)》는 폴레모나스라는 기독교인 로마 황족이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뿌리라는 주장을 담은 책인데, 소설 형식으로 쓰인 이 연대기에는 네로 황제의 가족인 폴레모나스는 외모가 출중하고 용기가 가상하여 네로 황제의 질투와 핍박을 받게 되고, 폴레모나스와 그의 친지들은 타락한 로마 제국을 떠나 리투아니아의 네만 강가에 정착하여 리투아니아 공후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리투아니아와 사모기티아 연대기》에서 환빠성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역사 소설로 재창작해서 만든 이야기가 바로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 쿠오 바디스》이다.
다른 한편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은 러시아사 학계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인데 이는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이 서로 분리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키예프 루스 멸망 이후 러시아인들은 노브고로드 공국과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결합하게 되었고, 벨라루스인들과 우크라이나인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결합하면서 서로 상당한 수준의 차이점을 가지게 되었다. 세 민족은 모두 같은 키예프 루스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정치적 분리가 문화적 차이로 이어졌던 것이다.
6. 폴란드-리투아니아
15세기 초까지는 분열되고 몽골에 의해 지배받는 러시아 공국들의 상황과 사실상 주인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옛 키예프 대공국 영토의 상황 덕택에 손쉽게 영토를 확장한 리투아니아였으나,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거대한 장벽에 부딫히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 공국들을 모두 통일시키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국경을 맞대게 된 것이다. 두 대공국간의 충돌은 1492년에 처음 발생했으며, 이후 약 30년 간 두 국가는 치고 받았는데, 같은 루스계 주민들이라는 동질성으로 묶인 모스크바와 달리 소수의 리투아니아인이 거대한 영토를 다스린다는 명확한 한계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이 전쟁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 30년 간 벌어진 수차례의 전쟁에서 리투아니아는 전성기의 영토 중 절반 가량을 빼앗기며 극도로 수세에 몰렸다.16세기에 들어와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변모한 루스 차르국에 맞서 리보니아 전쟁(1558~83)을 치르다가 거의 멸망 직전에 내몰렸다. 폴란드 또한 리투아니아에 막대한 원조를 했으나[17]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원조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러시아를 막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즉 리투아니아가 방어하고 폴란드가 원조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아예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18], 러시아의 위협에 공동대응하는 과정에서 양국 엘리트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감은 이런 여론을 부채질했다.
1566년 리투아니아의 엘리트들은 그로드노 조약을 통해 리보니아 공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통합시켰고[19], 1569년 1월 루블린 근교에서 폴란드측과 처음으로 양국의 통합을 안건으로 놓고 회담했다. 그러나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회담은 결렬되었고, 3월 1일 리투아니아 대표단이 루블린을 떠나자 6월 6일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영토의 1/2(볼히니아·키이우·브라츨라우·포돌리아)에 달하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부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병합했다. 사실상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의 절반이 날아갔지만 러시아를 더 큰 위협으로 여기던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협상을 계속했다. 폴란드측은 완전히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리투아니아측은 이에 반대하고 연방화를 주장했다. 결국 리투아니아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569년 7월 4일 지그문트 2세가 루블린 조약안에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일인을 각각 왕이자 대공으로 선출하고,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의 세임(Sejm)에서 왕이 선출되도록 정해졌으며, 빌뉴스의 의회 및 리투아니아 대공 선출 제도는 폐지되었다. 다만 폴란드보다 영토가 더 넓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 체제가 더 정교하고 판례가 많다는 점 덕분에, 연방의 법 체계는 리투아니아 대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재작성되었다. 이로써 여태까지 단순한 동군연합 관계였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완전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멸망"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루블린 조약 이후 양국 사이에 관세는 폐지되었고, 단일 통화를 사용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상당부분이 폴란드 영토에 합병된 것과 더불어 독일인과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리투아니아인 부르주아들이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환경[20][21]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귀족 문화가 발달한 폴란드-리투아니아였으나, 중산층이 너무 얇았고 자생적인 부르주아 문화를 키우지 못한 문제로 인해 이웃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점점 도태되었다.[22]
물론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이 자국의 폴란드화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개혁 이후 상당수의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도회지 주민들은 폴란드 문화를 상징하던 가톨릭, 독일인들을 상징하던 루터교회와 별개의 칼뱅교회, 혹은 헝가리에서 전래된 유니테리언 등등으로 개종하고, 활발한 교육 사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리투아니아에 칼뱅교회 부속 학교를 세우는데 특히 열심이었던 라드빌라(폴란드어로는 라지비우) 가문은 대홍수(역사)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북부를 침공하던 스웨덴 측과 스웨덴-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제안하기 이른다.(케다이니아이 조약) 그러나 조약을 비준한 야누시 라지비우가 사망하고, 스웨덴군이 폴란드 리투아니아 각지를 약탈하여 민심이 스웨덴군에 돌아서버린 것을 계기로 스웨덴군은 연방 각지에서 강한 저항을 받으며 물러서게 되었다. 전쟁 이후 개신교 국가 스웨덴에 침략에 같은 리투아니아 개신교도들이 협조하였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유니테리언은 불법화되고, 칼뱅교회 역시 상당한 탄압을 받았다.[23]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793년 폴란드 분할로 멸망하고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분할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의 클라이페다 일대를 제외한 리투아니아어 사용지역 전역이 러시아 제국에 흡수당했다. 그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리투아니아 대공국 임시정부를 세웠지만[24] 허울만 좋은 임시정부였고, 러시아 원정에 참여한 나폴레옹의 대군이 군수물자로 쓸려고 이것저것 마구 약탈하는 바람에 리투아니아 전역이 초토화되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러시아에 밀려 퇴각하는 와중에도 한 번 더 이곳을 지나가며 또 한 번 소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리투아니아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후 리투아니아는 다시 러시아 제국령이 되고 말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잠시 독립을 이룩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 왕국이 될 뻔 하기도 했다. 독일 제국은 독일 귀족인 빌헬름 폰 우라흐를 민다우가스 2세로 추대해 리투아니아에 괴뢰 왕국을 세웠지만 독일이 패망하며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으로 독립했다.
7. 역대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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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창작물에서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의 튜토닉 캠페인에 등장한다. 캠페인 내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팩션으로, 원래 역사상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상술한 것처럼 인구도 적고 기술력이 낙후된 상태에서 외교력을 이용해서 영토를 넓히던 국가였으나 게임에서는 이 부분이 구현이 안 되어있고 결국 리투아니아 팩션은 상대 팩션보다 뭔가 모자란 유닛들을 여러모로 조합해서 힘든 싸움을 펼쳐야 한다.
[1]
현대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의 전신.
[2]
동슬라브 계열의
루스인. 현대의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도 이들과 관련이 깊다.
[3]
대부분의 영토는 본디
키예프 대공국을 위시한 루스계 공국의 땅이었고. 당연히 그 지역 사람들은 정교회를 믿고 있었다.
[4]
원시적인 장비라고는 하지만 이미 이들도
철기 시대에 접어든지 한참 되었기에 철제 무기 정도는 다 갖추고 있었다.
[5]
튜튼 기사단은 현
칼리닌그라드 동쪽 절반 및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지방(이 지역들은 소(小) 리투아니아(Mažoji Lietuva)라 불린다.)의 일부 리투아니아인을 정복하고
농노화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6]
중세 유럽에서 왕이라는 직함은 교황이 인증해줘야 했기에 이 때부터 리투아니아 지도자들은 대공이라고만 불렸다. 훗날 1429년에
비타우타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와 연계해 리투아니아 왕위를 노렸지만,
폴란드 왕국 의회에서 반대했고 1430년에 비타우타스도 죽자 흐지부지된다.
[7]
정작 처음부터 몽골에 항복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갈리치아-볼히니아의 경우 약탈 피해가 적었다.
[8]
십자군이 30여년동안 100번이 넘게 침공해왔다.
[9]
한창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는 전성기 시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리투아니아인 인구는 대략 30만명 정도였으며, 대공국 전체 인구의 1/10정도에 불과했다.
[10]
리투아니아 해안 저지대 주민을 일컫는 명칭.
[11]
킵차크 칸국에서 쫓겨난
토크타미쉬 칸의 복위를 도우려고 타타르족과 전쟁을 벌였다.
[12]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오지 않고 폴란드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13]
리보니아 기사단의 마스터 포함 기사 150여명이 두르베 전투에서 전사했다. 보병 전사자 수는 미상이다.
[14]
메멜(클라이페다) 지방 바로 옆에 있던 위치 때문에 튜튼 기사단과 가장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지역이었다.
[15]
아이러니하게도 근현대에 십자가 언덕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16]
리투아니아가 루테니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루테니아인 유력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기 위해, 리투아니아어 대신에 루테니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었다.
[17]
1560년대 폴란드에서 징수된 세금의 70%가 리투아니아-러시아 전쟁의 전비로 나갈 정도였다. 게다가 폴란드는 리투아니아-러시아 국경 쪽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여 리투아니아를 원조했다.
[18]
예를 들어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리투아니아 대공 1544~72 재위, 폴란드 왕 1548~72 재위)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은 결국 폴란드의 위협이라고 주장하면서 통합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19]
리보니아 공국은 이후로도 명목상 존속하다가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공동통치령(Condominium)이 되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의 왕위 계승 분쟁의 연장으로 벌어진 스웨덴-폴란드 전쟁에서 승전한 스웨덴에 1629년 대부분이 점령되고 나머지 지역은 인플란티 주(Inflanty Voivoideship)로 개편되어 소멸했다.
[20]
물론 독일인 개신교 신자들과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정통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제재를 받았고, 이들 또한 연방에서 부르주아로 발전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21]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였던 이들은 연방 내에서는 아르메니아 동방 가톨릭을 믿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가톨릭 역시 동방 전례를 바탕으로 귀일교회의 일파였기 때문에 정통 가톨릭 신자만큼의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22]
1447년에
카지미에시 4세 재위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귀족의 권한을 크게 확대하고 농민을 지주에게 예속시키는 법령(일명 카지미에시 특권{Kazimiero teisynas/Statut Kazimierza})을 공포했으며, 1529년과 1566년에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루블린 합병 이전에도 이미 리투아니아 대공국 농민의 절대다수는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했다.
[23]
후대 폴란드의 민족주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는 당시 케다이니아이 조약을 비준했던 야누시 라지비우 등을 저열한 매국노로 묘사하였다.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야누시 라지비우를 폴란드에 리투아니아가 완전히 예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당시 정황을 보면 리투아니아 귀족의 폴란드화가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된 마당에 그 중에서도 가장 대빵인 라지비우 가문 사람이 무슨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로 변신한게 아니라, 나라의 절반이 러시아에 먹힌 상황에서 나머지 절반도 스웨덴에 먹혀 군사적으로 판이 다 말렸다고 판단한 다른 폴란드 귀족들도 줄줄이 스웨덴에 항복하는 마당에 똑같이 행동한 편에 가깝다. 그런데 하필이면 야누시 라지비우가 항복한 사람들 중 가장 최고위급(무려 리투아니아 대헤트만이었다)이어서 제일 돋보이는 사람으로 욕먹는 것에 가깝다. 애초에 야누시 라지비우는 연방의 가장 큰 위기였던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봉기와
루스 차르국의 침공에 가장 치열하게 맞서 싸우던 인물이다.
[24]
폴란드에선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