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01:53:00

바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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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초대 황제
바부르
ظه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7px-Babur_of_India.jpg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자하르 알딘 무함마드 바부르
ظه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1]
출생 1483년 2월 14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px-Timurid.svg.png 티무르 제국 안디잔
(現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사망 1530년 12월 26일 (향년 47세)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아그라
(現 인도 아그라)
재위 기간 무굴 제국 황제
1526년 4월 20일 ~ 1530년 12월 26일 (4년)
대관식 1526년 4월 20일
후임자 후마윤 (제2대)
부모 아버지 :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456 ~ 1494)
어머니 : 흐틀룩 니가르 카눔 (? ~ 1505)
자녀 슬하 9남 9녀
장남 후마윤 (1508 ~ 1556)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유년기3.2. 청년 시절
3.2.1. 떠돌이 신세3.2.2. 카불의 군주
3.3. 인도 정복기
4. 가계
4.1. 선조4.2. 후손
5. 기타

[clearfix]

1. 개요

"나에게 다른 것보다는 드높은 이름을 주시고 흡족한 마음으로 죽게 하소서. 그리고 그 명예가 나의 것이 된다면 죽음이 육신을 거두게 하소서"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부계 쪽은 티무르의 5대손이었고 모계 쪽은 칭기즈 칸의 15대손이라는 엄청난 핏줄을 가졌다.[2] 세계 최대의 정복 군주의 혈통을 물려받은 인물답게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정복하는 데에 썼다. 몇 차례나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쟁을 거치면서 끝끝내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북인도의 패자로 등극하는 데에 성공하며 무굴 제국의 기틀을 잡는 업적을 남겼다.

2. 상세

바부르는 1483년 2월에 페르가나의 군주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94년에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2년 후에는 사마르칸트를 정복했다. 하지만 사마르칸트 원정 도중 본거지인 페르가나에서 반란이 일어나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결국 사마르칸트까지 다시 빼앗기고 방랑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1501년에 페르가나와 사마르칸트 두 도시를 모두 재점령하려 시도했다. 이때 사마르칸트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면서 순간 빛을 보는가 싶었지만 결국 우즈베키스탄의 샤이바니 칸에게 패배해 달아나야만 했다. 겨우 샤이바니 칸을 피해 도망친 바부르는 1504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점령해 본거지로 삼고 인근 사파비 왕조 이스마일 1세와 동맹을 맺어 입지를 굳건히 했다.

바부르는 이스마일 1세로부터 지원받은 군대를 이끌고 사마르칸트를 다시 회복하였지만 다시금 힘을 기른 우즈베크인들에게 빼앗기며 또 실패했다. 이렇게 3번에 걸쳐 사마르칸트를 얻었다 뺏겼다를 반복하자 바부르도 지쳤던지 슬슬 사마르칸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남쪽의 풍요로운 인도 아대륙에 눈길을 돌렸다. 바부르는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에게 지원을 받아 막강한 화력을 갖춘 채 북인도로 남하했고, 파니파트 전투에서 당시 북인도를 다스리던 델리 술탄국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를 패배시켰다. 1526년에 델리를 함락한 바부르는 델리의 왕궁으로 입성해 스스로 칭제(稱帝)하고 마침내 무굴 제국을 건국하게 된다.

델리를 먹었다곤 하지만 바부르에게는 아직도 시련이 남아있었다. 북인도에는 바부르 외에도 메와르의 군주이자 라지푸트족의 지배자인 라나 상가가 힘을 키우며 패권을 노리고 있었던 것. 델리 술탄국이 이미 골골대며 망할 날만 기다리던 나라였던 것에 비하면 라나 상가는 한창 떠오르는 신흥국이었기에 바부르에게는 라나 상가가 더한 위협이었다. 라나 상가 역시 북인도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선 바부르를 꺾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바부르는 5만 명, 라나 상가는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칸와 전투에서 격돌했고, 칸와 전투에서 바부르가 신묘한 전술로 대승을 거두며 마침내 바부르가 유일무이한 북인도의 패자로 떠오른다. 이후에도 바부르는 북인도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투를 벌이다 결국 열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묻혔다.

3. 생애

3.1. 유년기

바부르는 1483년 2월 14일 우즈베키스탄 동부 시르 강 상류 페르가나 계곡의 안디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는 페르가나 지방의 군주로서 티무르의 3남 미란 샤의 증손이었고 어머니 후틀룩 니가르 카눔은 모굴리스탄 칸국의 유누스 칸의 자손으로 차가타이 계열로 칭기즈 칸의 15대손이었다.[3]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바부르는 어릴 적부터 제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바부르의 부족이 몽골, 튀르크, 페르시아의 혈통과 문화가 섞여있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바부르는 차가타이어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어에도 대단히 능숙했다고 한다.

1494년 아버지가 죽자[4] 12세의 어린 나이로 바를라스 가문을 이어 받아[5] 페르가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무렵 티무르 제국은 껍데기만 남은 채 후손들의 권력투쟁과 내분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바부르 역시 이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고, 당시 패기가 넘쳤던 어린 바부르는 조상인 티무르처럼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했다.

3.2. 청년 시절

3.2.1. 떠돌이 신세

바부르가 페르가나의 왕으로 즉위했다고는 하나 그의 주위에는 온갖 시련들만 산적해 있었다. 당시 티무르 제국은 허수아비로 내부에서도 수많은 세력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전쟁통이었다. 바부르가 다스리던 페르가나 주위에도 그의 삼촌들이 각자 왕 자리를 꿰차고 한 자리씩 해먹고 있었는데, 갓 즉위한 어린 바부르가 삼촌들의 눈에는 만만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바부르의 삼촌들은 어린 바부르를 시도때도 없이 협박하면서 전쟁 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렇다고 내부가 단합됐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페르가나의 귀족들은 바부르 대신 그의 동생 자한기르를 동생으로 올리고 싶어하면서 바부르를 위협했다고 한다. 바부르가 이런 상황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할머니인 아이산 다울랏 베굼이 바부르의 뒤를 봐주었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상당한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바부르가 왕좌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옛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열망에 차있던 바부르는 티무르의 발자취를 따라 대도시 사마르칸트를 함락하기로 정했다. 바부르는 즉위하고 2년만인 1496년에 사마르칸트로 진군했고, 약 7개월에 걸친 기나긴 농성 끝에 마침내 사마르칸트 공성에 성공했다. 그의 나이가 당시 15세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바부르는 적은 수의 군대만을 가지고도 사마르칸트의 치안을 다잡고 그럭저럭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본거지인 페르가나에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동생 자한기르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해 버린 것이다.

본거지가 날아가면 발 붙일 곳이 없게되니 바부르는 어쩔 수 없이 사마르칸트에 소수의 병사만을 주둔시킨 채로 페르가나로 향했다. 그러나 페르가나로 향하는 와중, 바부르는 사마르칸트를 인근의 경쟁 왕국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고 페르가나 수복에도 실패하며 완전히 붕 떠버린 상태가 되어버린다.[6] 갈 곳이 사라진 바부르는 힘을 키우기로 다짐한다. 3년 동안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떠돌며 군대를 육성했고, 타지크인들을 주로 모집하면서 정예병을 길러냈다. 그렇게 3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때를 기다리던 바부르는 마침내 1501년에 다시 사마르칸트를 되찾기 위해 공성전을 전개했고, 사마르칸트 성벽을 넘는 데도 성공하며 성공을 눈 앞에 두는 듯 싶었지만..... 당대 우즈베크인들의 군주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그를 막아서는 바람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전투에서 바부르를 압도한 샤이바니 칸은 사마르칸트를 넘겨주는 건 당연하고 바부르의 여동생을 첩으로 데려가는 조건으로 바부르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굴욕적인 협정을 맺은 바부르는 그를 따르는 소수의 병사들을 데리고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쳐나왔다. 평생의 숙원이었던 사마르칸트 함락을 눈앞에서 놓쳐버린 바부르는 비참한 상태로 고향인 페르가나라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였던 셈. 그는 중앙아시아의 산맥을 전전하며 간간히 지역 부족들에게 몸을 의탁했고, 1502년에는 페르가나 수복에 대한 희망마저 버리고 모계 친척이 다스리던 타슈켄트로 향했지만 그 곳에서도 경멸과 조롱만을 당하다가 굴욕적으로 도망쳐 나왔다.[7]

3.2.2. 카불의 군주

그렇게 갈 곳없이 유랑하던 바부르에게도 마침내 한 줄기 빛이 스며든다. 당시 카불은 바부르의 부계 친척인 울루흐 벡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울루흐 벡 2세가 너무나도 어린 아이를 후계자로 남기고 죽어버린 것.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자 무킨 벡이 스스로 카불의 왕을 자칭했지만 카불 시민들은 그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바부르는 빠르게 행동했다. 1504년 눈덮인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카불로 진군했고, 마침내 카불을 점령하면서 8년 여 만에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바부르는 이때부터 카불을 제2의 고향 삼아서 슬슬 대대적인 팽창 전쟁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바부르가 카불을 점령해 떠돌이 신세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산골짝에 있는 도시 카불에서는 별다른 세수가 없었고 경제는 빈곤했기 때문이다. 바부르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풍요로운 남쪽 인도 지방에 눈길을 돌렸다. 1505년에 바부르는 처음으로 카이베르 고개를 건너 북인도의 소왕국들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매 원정에 오를 때마다 막대한 부를 약탈해 카불로 돌아왔다. 1505년에 바부르는 샤이바니 칸에 맞설 동맹을 맺기 위해 티무르의 혈통을 물려받은 친척이자 헤라트의 술탄 후사인 미르자 바이카라 ( 후세인 바이카라)와 헤라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헤라트는 무슬림 세계 동부의 중심지였는데, 이 시기 바부르가 헤라트의 화려한 문화를 접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8] 참고로 헤라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샤이바니 칸에게 함락당한다.

헤라크가 함락당하자 바부르는 티무르의 혈통을 물려받은 티무르계 왕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로 급부상하게 된다. 나머지 친척들은 모조리 신하나 지방 토후들에게 자리를 뺏기고 죽임을 당해버렸던 것이다. '티무르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얻어낸 바부르 밑으로 수많은 티무르 왕족들이 샤이바니 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의탁하러 찾아왔고 바부르의 정통성과 힘은 급부상했다. 이때부터 바부르는 스스로 '왕중왕'이라는 뜻의 파디샤를 자칭했다.[9] 하지만 바부르가 왕중왕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졌다고 해도 크게 위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카불은 산골짝에 갇힌 빈곤한 도시였고 샤이바니 칸은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러던 중 최대 숙적이던 샤이바니 칸이 1510년 사파비 왕조 이스마일 1세에게 죽임을 당하며 상황이 급변한다.

샤이바니 칸이 죽은 것을 기회로 삼은 바부르는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었던 사마르칸트 정복 및 옛 티무르 제국의 복원을 위해 중앙아시아 정복 원정에 나섰다. 이스마일 1세 역시 바부르와 동맹을 맺어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중앙아시아 지방을 안정화시키려 하면서 둘 사이에는 동맹이 맺어진다. 이스마일 1세는 단순한 군사 동맹을 넘어 사파비 군대를 바부르에게 지원해주기까지 했고, 바부르는 대군을 이끌고 1513년 사마르칸트를 공성, 결국 함락했다. 그러나 우즈베크인들이 다시 힘을 길러 반격해오면서 세 번째로 사마르칸트를 빼앗기고야 말았다.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사마르칸트를 빼앗기자 바부르도 지쳤던지 미련을 버리고 마침내 남쪽의 부유한 인도 지방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10]

3.3. 인도 정복기

이 무렵 바부르는 사마르칸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신 과거 티무르가 정벌했던 남쪽 인도로 타깃을 정했다. 무려 3번에 걸쳐 사마르칸트를 빼앗기다보니 사람인지라 더이상의 원정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바부르는 우즈베크인들의 침략을 피해 남쪽의 북인도로 향했고, 1519년에 파키스탄의 체나브 강을 도하했다. 그는 주로 군자금 마련을 위해 그는 과거의 이슬람 정복자들처럼 펀자브 지방만을 침공했지만, 아직 인도 중심부로 원정을 떠나는 것은 위험부담으로 인해 망설이고 있었다. 게다가 사마르칸트 정복은 포기했지만 아직 티무르 제국의 복원이라는 꿈은 놓지 못하고 있었던 바부르였기에 과거 티무르 제국의 영토였던 펀자브 지방 이상의 영토 정복은 아직까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몇 차례의 인도 침공을 통해 그는 당시 북인도 지방을 통치하던 델리 술탄국 로디 왕조 망조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당시 델리의 술탄이었던 이브라힘 칸 로디는 왕권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억눌렀는데,[11] 이에 반발한 펀자브의 아프가니스탄계 총독이었던 다울라트 칸은 바부르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다. 바부르는 이 요청이 서북 인도 지역에 영향력을 미칠 절호의 찬스임을 깨닫고 이 제안을 수용한다. 대군을 이끌고 델리 술탄국으로 쳐들어온 바부르는 라호르와 디팔푸르 등 핵심적인 대도시를 단숨에 점령했다.[12]

델리 술탄국 침공의 단초를 제공한 다울라트 칸은 그와중에 바부르가 대도시인 라호르 대신 지방 소도시들 같은 쭉정이들만 넘겨주자 바부르를 배신했다. 그의 배신 소식을 전해들은 바부르는 1525년 다울라트 칸을 징벌하기 위해 그가 도망친 요새로 진군했고,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진 다울라트 칸의 군대를 쓸어버린 다음 그를 포로로 잡아 감옥으로 이송했다.[13] 기존에 펀자브를 지배하던 다울라트 칸을 제거한 바부르는 이제 펀자브 지방 전체를 통치하는 군주로 떠올랐고, 이 모든 게 인더스 강을 도하한지 3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편 당시 델리 술탄국에서 이브라힘 로디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은 다울라트 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이브라힘 로디의 삼촌이자 황족이었던 알라 웃딘 역시 이브라힘 로디에 대한 불만이 쌓인 사람이었는데, 그 역시 바부르가 쳐들어오자마자 쌍수를 들고 바부르의 군대에 합류하게 된다. 델리 술탄국에 입성한 바부르는 우즈베크인들이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본거지인 카불을 공성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시 돌아갔고, 대신 알라 웃딘에게 3만 대군을 맡겨 수도 델리를 함락하도록 시켰다. 하지만 이브라힘 로디가 정치질은 영 아니었을지 몰라도 군사적 재능 하나만큼은 뛰어났기에 알라 웃딘과 바부르의 군대는 패배하고야 만다.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바부르는 알라 웃딘을 경질하고 스스로 이브라힘 로디와 격돌할 준비에 나선다.
파일:vkslvkxm.png
마침내 둘은 1526년 4월 21일 델리 근처 파니파트에서 격돌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이브라힘의 군대를 박살낸 바부르는 델리와 아그라 지역을 차지해 일주일 후 스스로 인도의 황제(파디샤)임을 선포하고 무굴 제국을 건국한다.[14] 이로써 수 백년에 걸친 델리 술탄국의 북인도 통치가 끝나고 무굴 제국이라는 새로운 신성이 북인도에 등장한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메와르 일대의 라나 상가가 이끄는 라지푸트족 아프가니스탄의 저항을 물리쳐야 했다. 라나 상가는 라지푸트 출신의 토착 군주로, 카불에서 들어온 바부르를 외국인이라 부르며 멸시했고 바부르가 아니라 스스로가 북인도의 패자가 되고자 했다. 당시 라나 상가는 말와의 마흐무드 할지를 물리친 자신의 세력을 아그라 근처에 위치한 라야카르 강까지 뻗치고 있었다. 라나 상가 역시 인도 전역에 세력을 떨치는 것을 꿈꾸고 있었고 결국 라나 상가는 바부르를 펀자브로 쫓아내버리기 위해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바부르를 공격한다. 라나 상가의 군대는 수적으로 바부르의 군대를 압도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바부르의 군대는 크게 동요했으나 바부르는 병사들에게 결사항전할 것을 천명하며 성전을 위한 용기를 호소했다.

그는 또한 전투 전날 모든 술통의 술을 비워버리고 휴대용 술병의 술도 버림으로써 자신이 독실한 이슬람 교도임을 증명해보였다. 이런 바부르의 절실한 호소와 단호한 행동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일전을 벌일 준비를 마쳤고 마침내 1527년 2월 16일 아그라에서 40킬로미터쯤 떨어진 칸와에서 양군은 격돌하니 이를 '칸와 전투'라고 부른다. 칸와 전투에서 바부르는 자신이 강점을 가지고 있던 포병대 기병대를 적극 이용했으며,[15] 바부르의 뛰어난 용병술 뿐만 아니라 라나 상가 휘하 장군의 배신으로 인해 결국 라지푸트군은 무수한 사상자만 남긴 채 후퇴해야만 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전장을 빠져나온 라나 상가는 자신의 측근에게 독살당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16]

칸와 전투를 통해 델리와 아그라의 지배를 확고히 한 바부르에게 있어서 이제 남은 적은 동부의 우타르프라데시 지역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의 세력뿐이었다. 이들을 치기 위해 바부르는 1529년 아그라를 떠나 동쪽으로 진군해 아프가니스탄 군을 박살내버리고 비하르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앙아시아의 세력구도가 불안해지자 바부르는 그들에게 다시 비하르와 벵골의 통치를 보장하되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로써 바부르는 북인도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원정을 마치고 카불로 가던 도중 아그라에서 뜻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였다.[17] 향년 47세, 그의 시신은 고인의 유조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옮겨져 매장되었고 오늘날도 그의 무덤은 카불에 위치해 있고, 훗날 그의 고향인 우즈벡 안디잔에도 카불에서 옮겨온 흙을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

4. 가계

4.1. 선조

  • 티무르 (1336 ~ 1405): 티무르 제국 창업군주.
    • 미란 샤 (1366 ~ 1408): 티무르의 3남.
      • 칼릴 술탄 (1384 ~ 1411): 미란 샤의 장남. 티무르의 후계자.
      • 무함마드 미르자 (1390? ~ 1440?): 미란 샤의 3남.
        • 아부 사이드 미르자 (1424 ~ 1469)
          •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456 ~ 1494)
            • 바부르 (1483 ~ 1530): 무굴 제국 건국.

4.2. 후손

  • 마함 베굼
    • 후마윤 (1508 ~ 1556)
    • 바부르 미르자
    • 파루크 미르자

5. 기타

파일:카불 바부르.jpg
  • 카불의 바부르 정원. 1528년 완공되어 바부르의 묘지로 사용되었다. 이후 무굴 제국의 성지로 여겨져 자한기르, 샤 자한 등 후임 황제들이 순례를 오곤 했다. 무굴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정원을 가로지르는 수도가 깔리고 여러 초목들이 심겼으며 정원 주위 전체를 높은 벽으로 둘렀다.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 내전으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나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복원 작업을 거쳐 현재는 어느 정도 원형을 되찾았다.
  • 바부르의 재위 기간인 1528년에 아요디아의 라마 사원이 철거된 터에 바브리 성원이 세워졌는데, 바브리 성원은 인도가 영국에게서 독립한 뒤 1992년에 라마 사원 재건을 주장한 힌두교 단체에게 폭파당했다. 이후 바브리 성원 터를 두고 힌두교인과 무슬림의 분쟁이 이어지자, 2019년에 인도 대법원은 사원/성원 터를 힌두교 측에 분배하고 무슬림에게 대체 부지를 성원 건설용으로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
  • 개인사로는 시크교의 창시자이자 초대 구루인 구루 나나크와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나나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 만화가 래리 고닉이 그린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4권에서 등장하는데, 이름의 유래가 ' 비버'를 뜻한다는 가설에 입각해서 비버처럼 큰 앞니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마준'[18]이라는 대마초 사탕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에 의거해 대마에 취해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구루 나나크와의 만남도 그려졌는데, 포로로 잡혀온 나나크가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자 기분이 좋아진 바부르가 인심 좋게 대마초 사탕을 한 봉지 권하는 모습과 나나크가 "괜찮습니다, 폐하! 안 그래도 약 먹은 사람처럼 즐겁게 삽니다!"[19]라고 답하는 모습이 압권.
  • 과거 세계사 관련 서적이나 교과서에서는 보통 이름이 '바르'로 표기되곤 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정확한 발음이 알려지면서 바부르로 표기가 정착되었다.

[1] Ẓahīr al-Dīn Muḥammad Bābur [2] 그래서 무굴 제국의 정식 국명 '구르카니' 또는 '구르칸'도 부마를 뜻하는 몽골어 '귀르겐'(güregen)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바부르 생전에는 인도 지역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인 '힌두스탄(Hindustan)'으로 불렀다. [3] 참고로, 이런 이유로 바부르를 몽골인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몽골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전통적으로 부계 혈통만을 인정했었다. 또한 바부르의 가문은 중앙아시아 문화와 혈통이 진하게 섞여있어 실제 몽골과는 문화적, 혈통적으로 큰 연관이 없다. 티무르의 고조부가 칭기즈 칸의 8촌 형제인 카라차르이기에 방계 후손으로 볼 수 있겠으나, 오히려 바부르는 몽골보다는 티무르의 후예임을 더 강조하였다. [4] 사인이 기가 막힌데, 비둘기와 놀다 추락사했다(…)고 한다. 얄궂은 건 이러한 허망한 죽음이 손자 후마윤(바부르의 아들)에게도 똑같이 벌어졌다는 것. [5] 후에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대제도 증조할아버지의 전철을 밟은 아버지 후마윤의 뒤를 잇는다. [6] 바부르가 사마르칸트를 차지하고 있던 기간은 고작 100일도 안됐다. 바부르는 훗날 이 시절을 가장 비참했던 시기로 회고했다. [7] 바부르가 나중에 남긴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이 써져있다. '나는 타슈켄트에 머무는 동안 온갖 가난과 조롱에 시달렸다. 국가도, 단 하나의 희망도 없는 상태로 살았다.' 당시 바부르의 마음고생이 오죽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 [8] 다만 바부르는 헤라트의 지나치게 화려한 문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9] 다만 이는 티무르계 민족들에게만 한정되었고 여전히 동쪽에서는 샤이바니 칸이 위협을 가하고 있어서 굉장히 불안정한 때였다. [10] 다만 원정에서 아무 성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이전에 샤이바니 칸에게 굴욕적으로 넘겨줘야 했던 여동생 칸자다를 사마르칸트에서 구출해오는 데 성공하긴 했다고 한다. [11] 이브라힘 로디는 군사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 정치질에는 영 꽝이었다. [12] 다울라트 칸은 바부르가 들어올 때까지도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브라힘 로디의 진압군에 밀려 라호르를 빼앗겼다. 그래서 바부르가 다울라트 칸의 환대를 기대하며 라호르에 입성했을 때 그는 환영 행사 대신 로디 군대의 역습을 맞아 패배했고, 바부르는 그 대가로 라호르 점령 후 이틀 동안 라호르를 불태우고 약탈했다. [13] 다울라트 칸은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죽었다. [14] 이렇게 빨리 바부르가 칭제를 한 이유로는 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계속된 원정에 지친 바부르의 병사들은 고향인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는데 사마르칸트 점령을 포기한 바부르에게 있어선 인도야말로 자신의 제국을 세울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칭제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확고하게 정했고 또한 병사들의 충성심에 호소해 자칫하면 내란으로 벌어질 수 있었던 병사들의 동요를 겨우 진정시켰다. [15] 당시 바부르의 군대는 인도에서 가장 빠르게 포병과 총병 등을 도입한 군대였다. [16] 바부르는 칸와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전투에서 끝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라나 상가를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비무슬림 군주들 중 하나로 인정했다. [17] 바부르의 죽음은 다소 극적인 요소가 있었는데 그의 죽음에는 그가 사랑하던 맏아들인 후마윤이 악성 고열병으로 신음하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바부르는 후마윤의 병간호를 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아들의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이에 바부르는 아들 곁에 무릎을 끓은 채 신에게 아들대신 자신이 고통을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그 기도 덕분인지는 몰라도 후마윤은 기적적으로 병석에서 일어나 건강을 찾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번엔 바부르 자신이 중병에 걸렸고 결국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사망했다. [18] 'Bhang'이라고도 한다. [19] 실제로는 "괜찮습니다 폐하. 당신에 대한 경외가 마치 이 대마초 사탕처럼 제 정신을 이미 마비시켰기 때문에 더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