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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탈리아 왕국 | Regnum totius Italiae (604 ~ 774) 랑고바르드 왕국 | Regnum Langobardorum (568 ~ 7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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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의 세력권. 주황색이 랑고바르드족, 분홍색은 동로마 제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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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 568년 ~ 774년 | |
위치 | 이탈리아 | |
수도 | 티치눔( 파비아) | |
국가원수 | 왕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주요 국왕 |
알보인(568~572) 리우프란트(712~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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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랑고바르드어, 민중 라틴어 | |
종교 | 아리우스파, 서방 칼케돈파( 가톨릭의 전신) | |
종족 | 랑고바르드족, 이탈리아 로마인 | |
성립 이전 |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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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 프랑크 왕국 |
언어별 명칭 | ||
라틴어 |
Regnum Langobardorum / Regnum totius Itali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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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 Regno longobardo | |
롬바르드어[1] | Regn dei Lombards | |
프랑스어 | Royaume lombard | |
그리스어 | Βασίλειο των Λομβαρδών | |
영어 | Kingdom of the Lombar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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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초기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에 세웠던 나라이다.
2. 역사
2.1. 건국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랑고바르드족은 4세기 후반부터 훈족의 침략과 기근을 피하고자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주변 종족들과 전쟁을 벌여가며 차츰 남하하다가 540년대에 아우도인 왕의 인도하에 다뉴브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판노니아에 먼저 자리잡은 게피드 왕국(Gepid)의 왕 투리신드는 이들을 몰아내려 했고, 랑고바르드족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항쟁을 벌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고자 그들의 봉신이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때 5,5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보조군을 보내 나르세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석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546년에서 548년 사이,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 아우도인을 설득해 다뉴브 강에 접한 옛 로마 속주인 판노니아를 접수하도록 했다. 황제는 이를 통해 판노니아를 지배하는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이 격돌함으로써, 자국의 영토를 침탈하는 게피드족을 억제하기를 희망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의 도시였던 시르미움을 상실한 것에 분노했으며, 어떻게든 보복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후 랑고바르드족과 게피드족간의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고, 랑고바르드족의 왕 아우도인과 게피드 왕국의 왕 투리산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 사절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랑고바르드족의 편을 들어 그들을 공식적인 동맹으로 삼았고, 게피드족에게 대항해 군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549년,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이 전장에서 대치했다. 이때 투리신드는 아우도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아우도인은 이를 수락했다. 얼마 후 일리리쿰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인 요한네스가 10,000명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착했지만, 전쟁은 이미 끝났다. 요한네스는 그 대신 게피드족의 동맹 부족인 헤룰리족과 맞붙어 상당한 적병을 사살한 뒤 돌아갔다. 550년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은 다시 전쟁을 재개했지만, 양자는 서로와 맞붙는 걸 껄끄러워해 대치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아우도인이 먼저 2년간 휴전하자고 제안했고, 투리신드는 받아들였다.
그 후 투리신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압력을 행사하고자 쿠트리구르족과 동맹을 맺고 이들이 550년 또는 551년에 다뉴브 강을 건너 일리리쿰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하도록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에 대응해 동맹 부족인 우티구르족을 동원했고, 우티구르족은 크림 테트라크사이트 족과 연합해 쿠트리구르족의 본거지인 흑해 북서부 해안을 침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쿠트리구르족은 발칸 반도를 급히 떠나 본거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투리신드는 포기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는 슬라브 계열 부족인 스클라베니족과 동맹을 맺고, 자국이 다뉴브 강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걸 이용해 스클라베니족을 동로마 제국 영토로 수송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대가를 받았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의 동고트족에게 대항해 원정군을 보내려 했지만, 투리신드의 연이은 훼방으로 인해 진척이 잘 되지 않자, 투리신드와 화해하려 했다. 투리신드는 이에 응하기로 하고, 사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족이 맺은 것과 같은 수준의 동맹을 맺고, 원로원 의원 12명이 조약을 지지하겠다고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에 응했고, 551년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이탈리아로 진군할 때 게피드족 400명이 참여했다. 그 후 552년 휴전이 만료되자 투리신드와 아우도인은 다시 전쟁을 벌였다. 동로마 제국은 랑고바르드족이 나르세스를 돕기 위해 전사 5,500명을 보내준 것에 보답해 이에 상응하는 병력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게르마누스 장군의 아들인 유스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 아라티우스, 헤룰리족의 수아르투아스, 아우도인의 처남인 아말라프리드 등으로 구성된 동로마군이 결성되었지만, 울피아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느라 대부분이 그쪽으로 이동했고, 아말라프리드가 이끄는 군대만이 랑고바르드족과 합세했다. 이후 시르미움 서쪽에서 벌어진 아스펠트 전투에서, 게피드족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투리신드의 아들 투리시모드는 아우도인의 아들 알보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게피드족에, 제국에 복종하고 공물과 보조병을 바치며, 다키아 리펜시스와 싱기두눔 일대를 반환하는 대가로 그들의 주권을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했고, 투리신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560년경 아우도인의 뒤를 이어 랑고바르드족의 군주가 된 알보인은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부족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타르 1세의 딸 클로신드와 결혼했다. 그 후 게피드족을 꺾기 위해 당시 판노니아로의 진출을 꾀하던 아바르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준다면 게피드족의 땅을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아바르족의 군주 바얀 1세는 흔쾌히 수락하고, 랑고바르드족과 연합하여 게피드족을 대적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567년 쿠니문드 왕이 이끄는 게피드족이 랑고바르드족을 선제 공격했지만 아바르족의 원군에 힘입은 랑고바르드족이 완승을 거두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를 주살한 뒤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와인 잔으로 만든 후 허리띠에 착용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바얀 1세가 쿠니문드를 죽이고 수급을 벤 뒤 알보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또한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 로자문드를 아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대우했고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바르족을 끌여들인 것이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바얀 1세는 게피드족의 영역을 빼앗은 뒤 랑고바르드족까지 몰아내려했다. 그는 결국 아바르족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설득에 의해 이탈리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동고트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 여파로 피폐해졌고, 동고트 왕국을 꺾고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된 동로마 제국은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이탈리아인들에게 과중한 과세를 매기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게다가 사산 왕조와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정신없던 터라 이탈리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한편 랑고바르드족은 지난날 나르세스 장군 휘하의 동로마군에 고용되어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적이 있었기에, 이탈리아의 땅이 비옥하고 기후는 온화하다는 걸 잘 알았다. 알보인이 이탈리아로 진출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전후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575년 이탈리아 반도의 모습 | |
주황 | 동로마 제국 |
회색 | 랑고바르드 왕국 |
568년, 알보인은 부족 전체를 이끌고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여 포룸 줄리(Forum Julii. 오늘날 프헤쥬스) 마을에 무혈 입성했다. 이후 아퀼레이아로 진군하여 역시 무혈 입성한 뒤 569년 밀라노를 공략하고 북부 이탈리아 각지로 진군했다.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것을 제외하고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북부를 순조롭게 공략했다.
하지만 랑고바르드족은 공성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로마군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 주변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거점을 삼고 36개의 공국을 점령지 곳곳에 신설했다. 공작들은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전시에 왕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합류할 의무를 준수하는 한 자기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알보인의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다만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군이 주둔한 해안 도시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알보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희소하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의 치하에서 어떠한 폭력이나 부당한 억압이 없었고, 아무도 약탈하지 않고 도둑도 없고 강도도 없었으며, 모두가 안전하고 두려움없이 원하는 곳으로 갔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묘사를 과장된 것으로 여기지만, 그의 통치가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비해 지극히 온건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가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은 로마인들의 선진 문화에 깊이 감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지 주민들과 통혼하고 언어와 문화를 배웠으며, 침략 과정에서 이렇다할 약탈이나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군림하는 로마 황제의 혹독한 통치를 받는 것보다는 이민족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정중하게 대하는 그들의 통치를 받는 편이 나았다.
알보인은 이렇듯 민심을 얻고 나라를 순조롭게 다스렸지만, 사생활은 엉망이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베로나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허리에 차고 있던 쿠니문드의 해골에 술을 담은 뒤 쿠니문드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로자문드에게 이를 마시라고 요구했다. 로자문드는 억지로 술을 마신 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굴욕과 분노를 느꼈고, 남편에게 복수하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녀는 알보인의 양형제인 헬메치스와 남몰래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헬메치스는 로자문드의 설득을 받아들여 근위대원 페레도를 포섭해 알보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572년 6월 어느 날, 알보인이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헬메치스와 페레도가 공격했고, 로자문드는 알보인의 검을 사전에 숨겼다. 알보인은 검이 없자 발판을 뜯어서 저항했지만 끝내 두 사람에게 피살당했다. 페레도는 알보인의 어린 딸 알부이다와 함께 라벤나로 이동해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토대로 알보인 암살 사건의 배후에 동로마 제국이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2.2. 공위시대와 아우타리
헬메치스는 알보인을 죽인 뒤 왕을 칭했다. 그러나 공작들은 헬메치스의 통치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파비아 공작 클레프를 왕으로 옹립했다. 클레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헬메치스가 있는 베로나로 토벌대를 보냈고, 헬메치스는 로자문드와 함께 동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로 도피했다. 클레프는 이탈리아의 미점령지를 마저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했다. 그는 라벤나와 투시아를 압박하면서 라틴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를 랑고바르드 귀족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정복 전쟁 및 숙청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574년, 그는 아내 마사네와 함께 부하 또는 노예에게 암살당했다.그 후 공작들은 왕을 세우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575년 프랑크 왕 군트람이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트렌트를 공략하고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가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는 등 외세의 압박이 거세지자, 공작들은 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584년 클레프의 아들 아우타리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아우타리는 라틴 선주민과 랑고바르드족의 통합을 꾀했다. 서로마 제국 황제들이 줄곧 써 왔던 '플라비우스'라는 칭호를 채용해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으며, 개인적으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지만 칼케돈파와 가급적 잘 지내고자 노력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성인들의 유물을 교황 펠라지오 2세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칼케돈파를 신봉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에 대항하려는 랑고바르드족의 의식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칼케돈파에 온정적인 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그는 로마(즉 카톨릭) 의식에 따른 세례를 금지하는 정책을 반포해야 했다.
한편,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체 영지의 1/3을 랑고바르드 귀족이 점유하고 나머지 2/3은 로마인이 소유하는 정책을 반포했다. 이와 함께 라틴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랑고바르드 영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이 제도가 반포되면서 라틴계 지주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지배는 공고해졌다.
아우타리는 통치 기간 내내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신설한 라벤나 총독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트렌트를 탈환한 뒤 에윈을 그곳의 공작으로 세웠다. 585년 라벤나 총독에 부임한 스마라그두스는 프랑크,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두 종족이 그다지 협조하지 않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588년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시스를 탈환하는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589년 새 총독으로 부임한 로마누스는 프랑크 왕 킬데베르 2세에게 전리품을 전부 줄 테니 랑고바르드 왕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했고, 킬데베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크군을 파견했다.
프랑크군은 3개 대열로 이탈리아에 진입했고, 아우타리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에서 회전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파비아에서 농성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동로마군을 이끌고 모데나, 알티나, 만토바를 공략하였고, 파비아로 가서 프랑크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크군은 로마누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아우타리와 10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철수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질이 돌면서 많은 프랑크 병사가 죽어나가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누스는 개의치 않고 작전을 이어갔다. 그는 랑고바르드계 소국인 파르마, 레지오, 피아첸차 등의 복종을 받아내고 공작의 자녀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냈다. 이후 라벤나로 철수한 후 베네치아로 가서 충성 맹세를 받아냈으며, 별동대를 이스트리아로 파견해 여러 마을을 탈환하였다. 또한 프랑크 왕국에 사절을 보내 제멋대로 후퇴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킬데베르 2세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렇듯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동맹을 찾기로 마음먹은 아우타리는 589년 5월 15일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이우바리족의 지도자 발데르아다의 딸 테오도리다와 결혼하고 테오도리다의 남자 형제인 군도랄드를 아스트리 공작으로 선임했다. 또한 테오도리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자 형제가 트렌트 공작 에윈과 결혼했다. 이때 아우타리의 누이와 결혼했던 귀족 안술루스가 결혼 축하 행사 중에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2.3. 아길루프
590년 9월 5일, 아우타리 왕이 파비아에서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결혼 1년 만에 미망인이 된 테오도린다 왕비는 공작들로부터 차기 왕을 선택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녀는 지난날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한 뒤 랑고바르드족에 망명한 튀링겐족의 지도자이자 토리노 공작인 아길루프와 결혼하고 왕으로 세웠다. 테오도린다는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남 티롤 일대를 지배하며 강대한 영향력을 주변 지역에 행사한 바이우바리족의 일원이었고, 아길루프는 그녀에게 왕으로 지명되었기 때문에 향후 통치에서 그녀의 의사를 가급적 존중했다.그래서 당대 역사가들은 아길루프와 테오도린다가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렸다고 기술했다.일부 공작들은 아길루프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크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의 진영에 합세했다. 이에 아길루프는 무력으로 그들을 복종시키기로 했다. 베르가모와 가둘루프가 이끄는 반란이 특히 거셌지만, 594년 아길루프에게 패배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공작들을 복속시킨 뒤, 그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프랑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는 동시에 판노니아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어 북방과 동방 전선을 안정시켰다. 그 후 남방의 라벤나 총독부와 로마 시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길루프는 로마와 라벤나를 연결하는 움브리아 회랑의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했다. 한편 베네벤토 공국의 랑고바르드군은 나폴리를 포위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라벤나 총독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로마누스는 섣불리 로마나 나폴리를 구하러 갔다간 라벤나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592년 그레고리오 1세가 아길루프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누스는 협상이 이뤄지게 내버려뒀다간 움브리아 회랑이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넘어갈 것이라 여기고 이를 막기로 했다. 그는 그해 7월 라벤나에서 출진하여 해로를 따라 로마로 이동한 뒤, 움브리아 회랑의 도시들을 재정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이 깨지자, 아길루프는 분노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였고, 로마누스는 이번에도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593년 교황청의 재산을 털어서 랑고바르드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고, 아길루프는 이에 만족하여 물러갔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평화를 갈망하여 로마누스에게 랑고바르드 왕국과 휴전을 맺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로마누스는 절대로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 간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러다가 596년 로마누스가 사망한 뒤 새 라벤나 총독으로 부임한 칼리니쿠스는 전임 총독과는 달리 교황의 요청에 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601년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휴전 협약이 끝나고 전쟁이 재개되자, 칼리니쿠스는 601~602년에 파르마를 공략하고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포로로 잡았다. 이 소식에 분노한 아길루프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북부의 일부 공작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한 뒤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파도바를 공략하여 학살을 자행했으며, 뒤이어 에스테, 아바노, 몬첼리체를 공략했다.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에 오른 포카스는 칼라니쿠스를 해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하고, 과거 라벤나 총독을 역임했던 스마라그두스를 라벤나 총독으로 복귀시켰다. 스마라그두스는 칼리니쿠스가 주도하던 랑고바르드족과의 전쟁을 이어받았고, 아길루프가 포로로 잡힌 딸과 사위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걸 거부했다. 그러자 아길루프는 603년 크레모나를 포위하였고 605년 8월 21일 크레모나를 함락한 뒤 철저하게 파괴했다. 뒤이어 9월 1일 마토바를 점령했으며, 불투르나 요새를 포위하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고, 여세를 몰아 브레셀로를 공략했다. 결국 스마라그두스는 아길루프에게 사죄하고 605년 4월 아길루프의 딸과 사위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라벤나 총독부와 랑고바르드 왕국간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그는 아들 아달랄트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며 이탈리아 왕을 자처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제작된 왕관이 현재에도 전해지는데, 거기에는 'Gratia Dei rex totius Italiae(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이탈리아의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는 자신이 온 이탈리아의 통치자이자 랑고바르드족과 라틴인의 군주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었으며, 신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한다는 왕권신수설이 가미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통치 말년에 프랑크 왕국과 아바르족과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여 평화를 이어갔고, 랑고바르드인과 라틴인의 통합 정책을 이어갔다. 611년 프리울리 공작 기술프 2세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의 사주를 받은 아바르족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2.4. 아달랄트, 아리알트, 로타리, 로달트, 아리페르트 1세
616년 4월 아길루프 왕이 25년간의 통치 끝에 밀라노에서 사망한 뒤, 아들 아달랄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아직 14살이었기에 어머니 테오도린다가 섭정을 맡았고, 아길루프의 사령관 순다리트가 군사 지휘권을 맡았다. 순다리트는 아달랄트 즉위 직후 라벤나로 쳐들어가 위협을 가한 끝에 라벤나 총독 엘레우테리우스로부터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테오도린다는 아리우스파였던 남편 아길루프를 설득해 갓 태어난 아달랄트에게 가톨릭 방식에 따른 세례성사를 받게 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의 권유에 따라 단의론를 정식 교리로 삼은 것에 반발한 아퀼레리아 주교의 뜻에 따르면서도 랑고바르드 왕국을 장차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가톨릭 신앙이 투철했던 서고트 왕국의 군주 시세부트는 아달랄트에게 편지를 보내 테오도리다의 이같은 행적에 찬사를 보내면서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아달랄트는 성인이 되었을 때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고, 친 가톨릭 정책에 반감을 품고 있던 아리우스파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기로 했다. 626년,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아달랄트와 테오도리다를 라벤나로 쫓아내고 토리노 공작 아리알트를 새 왕으로 세웠다. 이에 교황 호노리오 1세는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에게 아달랄트를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는 라벤나 시가 전임 총독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라고 보고, 아리알트의 즉위를 인정했다.
630년 프리울리 공작 타소네가 군데베르가 왕비의 후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다. 아리알트는 타소네 공작이 일으킨 반란에 고전하다가 이사키오스에게 사람을 보내 타소네 공작을 대신 죽여준다면 매년 바쳐야 하는 공물을 300 두카트에서 200 두카트로 줄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사키오스는 이에 동의하여 타소네에게 서신을 보내 동맹을 맺고 싶으니 라벤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타소네는 이에 동의해 라벤나로 갔다가 이사키오스의 병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었다. 아리알트는 이에 만족하여 공물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또한 군데베르가를 파비아에서 멀리 유배보냈다가 나중에 궁정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직위를 돌려줬다.
아리알트는 수도를 밀라노에서 파비아로 되돌린 뒤 프리울리로 쳐들어온 아바르족을 격퇴했다. 그 외에는 이렇다할 대외 전쟁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 636년 사망했다. 사후 브레시아 공작 난딩의 아들 로타리가 왕위에 올랐다.
로타리는 그동안 동로마 제국과 평화롭게 지내는 걸 추구했던 전 왕들과는 달리 그들을 몰아내고 북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군사 활동을 개시한 그는 639년 오데르초와 알티노 시를 공격해 격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베네치아 석초로 도주했다.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 이사키오스는 토르첼로의 산타 마리아 마드레 디 디오 성당을 새로 세우고 로타리 왕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알티노 주교를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642년, 로타리는 수도 제노아와 루니 시를 포함한 리구니아를 정복했다.
643년, 로마 공국의 공작을 맡던 요안니스 차르툴라리오스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로마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이사키오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로마 시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차르툴라리오스는 성 마리아 아드 프라세페 성당에 숨었지만, 곧 끌려나와 사슬에 묶인 채 라벤나로 보내져 참수당했다. 로타리는 동로마군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틈을 타 라벤나로 진격했고, 643년 스쿨테나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군 8천 명이 전사했다고 하며, 이사키오스는 이때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타리는 여세를 몰아 라벤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본국에 돌아갔다.
643년 11월 22일, 로타리는 사적 복수를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하고 사형 집행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 일련의 법령을 반포했다. 또한 자신에게 거역한 공작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어느 공작도 왕의 권위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풀리아와 살레르노 시를 정복하면서 영토를 크게 늘린 베네벤토 공국조차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작 아레치스 1세는 아들 아이울프 1세를 파도바 궁정으로 보냈다.
652년 로타리 왕이 사망한 후 아들 로달트가 새 왕으로 등극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로타리의 왕비 군데베르가가 섭정을 맡았다.[2] 군데베르가는 파비아에 구세주 성전 교회를 세우는 등 종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로달트는 653년에 돌연 피살되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어느 여인을 강간하던 중 현장을 습격한 그녀의 남편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로달트 사후 바이우바리족의 일원이자 가톨릭 신자인 아리페르트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국 전역에 가톨릭을 전파하고자 선교사들을 보냈으며, 파비아에 구세주 교회를 세웠다. 이는 라틴인들이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고, 교황과 동로마 황제간의 대립이 갈수록 격화되는 것을 보고, 이탈리아 전역을 복종시키려면 가톨릭을 내세우는 편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교황 마르티노 1세가 동로마군에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는 등 교황청과 동로마 제국의 대립은 심각했지만, 그럼에도 교황들은 랑고바르드 왕국에 복종하는 대신 동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택했다.
2.5. 혼란기
661년, 아리페르트 1세는 숨을 거두면서 두 아들 페르타리트와 고데페르트를 공동 왕으로 세우고 나라를 양분했다. 고데페르트는 파비아에서 군림하며 아리우스파의 지지를 받았고, 페르타리트는 밀라노에서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두 왕은 곧 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고데페르트는 베네벤토 공작 그리말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말트는 장남 로무알트 1세에게 베네벤토를 맡긴 뒤 파비아로 진군했다. 그는 즉시 성문을 열고 그리말트를 환대했다. 그러나 그리말트는 진작에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얼마 후, 고데페르트는 그리말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그리말트는 밀라노에 군림하던 페르타리트를 축출한 뒤 고데페르트의 누이 테오도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대다수 공작들은 그리말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아스티와 토리노에서는 그에 대항하여 봉기하기로 마음먹고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는 두 도시의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한편, 페르타리트를 보호해주고 있던 아바르족에게 당장 자신에게 넘기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아바르족이 이탈리아로 돌려보내려 하자, 페르타리트는 프랑크 네우스트리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663년, 그리말트는 아스티로 침입한 프랑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페르타리트를 프랑크 왕국에서 끌어내거나 제거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663년, 콘스탄스 2세는 이탈리아 전역을 재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그는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를 받는 풀리아로 진군해 로무알트 1세를 격파하고 베네벤토를 포위했다. 그는 즉시 아들을 구하고자 출격했고, 콘스탄스 2세는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폴리로 후퇴했다. 이 승리는 여전히 위태로웠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들 로무알드는 나중에 반격에 나서 오트란토를 제외한 풀리아 전역을 탈환했다. 한편, 그는 동로마군에서 이탈한 불가리아 분견대를 고용해 세피노, 보이아노, 이세르니아 등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이탈리아 중남부의 통제를 강화했다.
여기에 카푸아 백작을 맡던 사위 트라스몬드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승진시켰고, 로타리의 칙령에 새로운 법률을 추가했으며, 파비아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종교 활동에서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안정적인 통치를 선보이던 그는 671년 사망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활을 쏴서 비둘기를 맞히려 했다가 팔의 정맥이 끊어졌고, 의사들이 이를 봉합하려 했다가 합병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의사들이 상처를 봉합할 때 독에 적신 거즈를 발랐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불확실하다.
그리말트 사후 아들 가리발트가 즉위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3] 귀족들은 그를 왕으로 모시는 것보다는 성인을 세우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지난날 그리말트에게 축출된 뒤 프랑크 왕국에 망명했던 페르타리트가 복위했다. 그 후 베네벤토 공작이자 그리말트의 장남인 로무알트와 협의한 끝에 그가 무제한의 자치권을 누리는 걸 허용하는 대신 자신의 아내 로델린다와 아들 쿠닝페르트를 파비아로 돌려보내게 했다.
페르타리트는 랑고바르드족이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사력을 다했다. 가톨릭 주교들에게 각자 교구를 맡아서 백성들을 설복시키도록 독려했으며, 왕국 전역에 교호와 수도원을 세웠으며, 밀라노 대주교가 대규모 공의회를 개최하는 걸 허용했다. 678년 아들 쿠닝페르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680년에는 동로마 제국과 "영원한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이탈리아 분할을 비준했다. 이 협약은 680~6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단성론을 비난한 공의회에 참여한 랑고바르드 사절단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왕국은 라벤나 총독부, 로마, 나폴리 등 동로마 제국의 주권 아래 남아있는 영토를 공격하지 않는 대신 이탈리아 대부분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아리우스파 세력이 강성했던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의 반감을 샀으며, 랑고바르드 귀족들은 쓸데없는 협약을 맺는 바람에 영지를 늘릴 기회가 사라졌다며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트렌토 공작 알라히스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680년 알라히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바이우바리족의 지원에 힘입어 이를 진압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이 두려웠기에 다시는 왕위를 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사면했다.
688년, 페르타리트는 파비아에서 사망했다. 이에 알라히스가 즉시 반란을 일으켜 왕위 계승자 쿠닝페르트를 코모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섬에 세워진 성에 유폐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알라히스는 즉위 후 폭압적인 정치를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다. 689년, 코모 호수에서 탈출한 쿠닝페르트는 피에몽트에서 병력을 모았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베네치아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출진했다. 양측은 로디 마을 인근의 코르나 테 다다에서 맞붙었다. 오랫동안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격전이 이어지다가 쿠닝페르트가 마침내 승기를 잡았고, 알라히스는 전사했다.
이리하여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쿠닝페르트는 왕위에 오른 뒤 알라히스를 무찌른 전장에 성 게오르기우스 수도원을 세웠고, 전쟁 중 파괴된 도시인 모데나를 재건했다. 하지만 전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90년, 레우니아의 안스프리트가 프리울리 공국을 침공해 그 땅을 차지한 뒤 왕을 자처한 것이다. 하지만 안스프리트는 파비아로 진군하던 중 베로나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사로잡힌 뒤 왕 앞으로 끌려갔다. 쿠닝페르트는 안스프린트를 실명형에 처한 뒤 추방했고, 프리울리 공국을 왕실 소유지로 삼고 아도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 후 랑고바르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공작들을 설득하여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했고, 교회와 수도원을 잇따라 설립해 민중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했다. 또한 698년 오랫동안 이탈리아 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던 단성론 논쟁을 끝내고자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정통 가톨릭과 단성론 추종자들의 화합을 도모했다.
700년 쿠닝페르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페르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스티 공작 안스프란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토리노 공작이자 바이우바리족의 일원인 라긴페르트가 반란을 일으켜 파비아로 진격했다. 701년 초, 라긴페르트는 노바라 인근에서 안스프란트와 베르가모 공작 로타리트를 격파하고 파비아에 입성한 뒤 리우페르트를 폐위했다. 그러나 701년 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고, 라긴페르트의 아들 아리페르트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리우페르트는 갑작스러운 국왕 교체로 인해 궁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감옥에서 탈출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되찾았다.
아리페르트 2세는 코모 섬으로 탈출한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파비아에서 리우페르트의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리우페르트를 감옥에 수감한 후 왕위에 복귀했다. 그러나 리우페르트의 지지자인 베르가모 공작 로타리트는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702년 왕을 자칭했다. 이에 베르가모로 진격한 그는 격렬한 공방전 끝에 베르가모를 함락시키고 로타리트를 체포한 뒤 노예와 전쟁 포로에게 실시하는 행위인 머리와 수염을 깎는 조치를 내린 후 토리노로 이송시킨 후 곧 죽였다. 리우페르트 역시 억류되어 있다가 목욕 중에 익사했다. 리우페르트의 후견인이었던 인스프란트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신체 절단형을 받았다. 다만 막내아들 리우프란트만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바이에른에서 아버지와 합류했다.
아리페르트 2세는 베르가모 공국의 권한을 축소하고 믿을 수 있는 측근을 관리인으로 삼았다. 얼마 후 프리울리 공작 코르볼로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가차없이 물리친 뒤 코르불로을 실명형에 처하고 페르모네를 프리울리 공작으로 세웠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가톨릭 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을 계속해서 수행했으며, 교황 요한 6세에게 본래 교회의 영토였다가 랑고바르드 왕국이 접수했던 코티엔느 산맥을 반환하는 등 교황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했으며, 잦은 내란으로 흔들리는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그는 초기에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뒤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다른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인간 불신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는 비밀 요원들을 왕국 전역에 보내 반란을 꾸미는 자가 있는지 철저하게 감시하게 했다. 또한 보물을 가능한 한 챙기면서도, 외국 사절을 맞이할 때 거칠고 바느질을 잔뜩 한 옷을 입고 맞이해, 그들이 자기가 자긴 보물을 탐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712년 초, 안스프란트가 바이에른에서 군대를 모집한 뒤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즉시 이에 맞섰고, 양자는 그해 3월에 맞붙어서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전세는 어느 한쪽으로 쉽사리 기울어지지 않았고, 안스프란트가 동원한 바이에른 용병대는 막대한 손실에 동요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런데 그는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았는데도 파비아로 철수해 버렸고, 이를 비겁한 행동이라고 여긴 병사들이 그를 등져버렸다. 아리페르트 2세는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하고자 파비아에서 달아났지만, 티키누스 강을 건너던 중 등에 짊어지던 보물에 짓눌리는 바람에 익사했다. 이후 안스프란트가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만에 병사했고, 아들 리우프란트가 왕위를 계승했다.
2.6. 리우프란트
리우프란트는 즉위 후 잦은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왕국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총리에게 왕국의 운영 전반을 맡을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 문서 관리관, 왕실 종자, 재무관 및 행정을 맡은 궁전 집사를 신설하거나 개편하여 궁전의 기능을 강화했다. 그리고 오직 수도 파비아에서만 궁정 예법에 기반한 행사와 연례 국민 회의를 개최하게 하면서 이에 적합한 건물들을 잇따라 세웠다. 여기에 보다 공평한 사법 행정 및 완전한 병역 부과, 안정적인 내부 보안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 관리기구를 재구성하고 위계와 기능을 정했다. 스쿨다키오(sculdascio)는 마을에서 판결과 집행을 담당했으며, 살리타리(saltarii)는 농촌 지역의 행정을 담당했으며, 프살테리(psalteries)는 도시를 다스렸다. 이들은 주교가 거주하는 도시 및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주교와 공작의 통제를 받았고, 공작과 주교들은 왕에게 연례 보고를 올리고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는 왕실과 국가 행정에서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국고를 충당하고자 이 공물 확보에 열을 올렸다.한편, 그는 로타리 왕이 반포했던 랑고바르드 법률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편하고 새로운 법률을 추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즉위 첫 해에 로타리 법령에 6가지 법률을 추가로 반포했으며, 713년부터 735년까지 로마법에 기반한 153개의 법률을 반포했다. 그는 법령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나님을 받드는 군주가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지혜로 제정하고 반포하기로 한 법은 하나님의 의지와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새 법률의 초안을 작성하고 공포하는 활동은 매년 3월 1일에 파비아에서 열리는 연례 국민 회의에서 시행되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구성원들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협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결속력을 강화했다. 그는 특히 가정법, 토지 및 주택 매매, 계약서의 유효성 등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신속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판사의 순행을 장려했고, 자유인을 이탈리아 외부에서 노예로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하층 계급간의 결혼을 보호하는 등 약자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한 가톨릭을 국교로 확정하고 수녀들을 보호했으며, 이교식 관습을 금지하고 교회법에 따른 결혼법을 도입했다. 그 외에도 강도나 살인에 대한 보상으로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돈을 늘리고 이를 마련하기 위해 가해자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는 등 여러 조치를 내렸다.
그는 처음에 동로마 제국과 교황과 평화롭게 지내려 했다. 스폴레토 공작 파로알트 2세에게 라벤나의 항구인 클라세를 라벤나 총독부에 돌려주도록 명령했다. 여기에 새 교황 그레고리오 2세에 대한 우정의 표시로 아리페르트 2세가 돌려줬다가 나중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도로 빼앗아갔던 코티엔느 산맥을 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귀족 내부에서 영지를 확장하고 싶어하는 기류가 갈수록 거세지자, 그는 마음을 바꿔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717년, 리우프란트는 일전에 라벤나에 돌려줬던 클라세 항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와 동시에, 스폴레토 공작은 나르니를 점령했고 베네벤토 공작 로무알트 2세는 쿠마에를 점령했다. 리우프란트는 곧 북쪽으로 철수했고,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장군이 쿠마에를 재탈환했다.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성상 파괴 정책으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성상 파괴를 밀어붙이는 동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고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잡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기로 했다. 레온 3세는 이를 저지하고자 라벤나 총독 파울로스에게 그레고리오 2세를 죽이거나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라벤나 주둔 동로마군은 로마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민병대에게 패퇴했다. 그 후 727년 라벤나에서 폭동이 일어나 파울로스가 살해당하면서, 라벤나 총독부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그는 이때를 틈타 공세를 개시해 포 강을 건너 볼로냐를 점령하고 727년에서 728년 사이에 프리가노, 몬테베글리오, 부세토, 산 조반니, 오시모, 그리고 펜타폴리스를 잇따라 공략하며 라벤나 총독부를 압박했다. 레온 3세는 에우티키오스를 파견해 라벤나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에우티키오스는 나폴리로 상륙한 뒤 일부 관리들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29년, 에우티키오스는 리우프란트에게 뇌물을 줘서 그레고리오 2세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무효로 하도록 유도했다. 이에 리우프란트는 최근에 교황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자신의 통제로부터 독립하려 하는 스폴레토, 베네벤토 공국을 응징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라벤나 총독부와 손을 잡겠다고 밝혔고, 에우티키오스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한 뒤, 그는 로마로 진군하여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인근에 진영을 세웠다. 그레고리오 2세가 교회 재산을 바치며 협상을 청하자, 그는 자신이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교황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힌 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베드로 대성당에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이후 교황과 라벤나 총독간의 화해를 중재하면서, 랑고바르드 왕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권위가 높은 군주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732년, 리우프란트는 통제에 따르지 않은 베네벤토 공국을 응징하고자 베네벤토로 쳐들어갔다. 그 사이, 리우프란트의 조카 힐데프란트가 라벤나를 급습했고, 라벤나는 얼마 안가 함락되었다. 라벤나 총독 에우티키오스는 베네치아 석호로 피신한 뒤 당시 총독의 암살로 혼란에 빠져 있던 베네치아를 수습하고 도제를 선출할 수 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5명을 임명하였다. 또한 리우프란트에 대항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을 지원해 두 공작이 힘을 합쳐 리우프란트와 맞서게 했다. 이리하여 리우프란트가 베네벤토에서 발목이 묶인 사이, 발칸 반도에서 파견된 동로마 함대가 베네치아 함대와 손을 잡고 739년 라벤나로 진격해 힐데프란트를 생포하고 라벤나를 탈환했다. 동로마 제국을 따르는 페루자 공작 아가토네는 여세를 몰아 볼로냐를 탈환하려 했으나 랑고바르드군에게 대패했다.
한편, 리우프란트는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연합군을 격파했다. 스폴레토 공작 트라사문트 2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적대적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3세에게 귀순했다. 리우프란트는 로마를 포위하고 시골 지역을 약탈하고 로마 귀족들을 랑고바르드 관습에 따라 면도하고 랑고바르드 옷을 입히면서 트라사문트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이 끝까지 응하지 않자, 움브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약탈을 자행한 뒤 파비아로 돌아갔다. 리우프란트가 떠나자, 트라사문트는 교황의 지원에 힘입어 739년 12월 스폴레토를 되찾았다.
741년, 리우프란트는 재차 남하하여 로마 공국과 라벤나 총독부에 타격을 입히고 로마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그레고리오 3세가 사망한 후 새 교황에 즉위한 자카리아가 협상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743년 테르니에서 만났다. 그는 움브리아 도시들을 교황청에 돌려주는 대신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는 것을 용인받았다. 그렇게 교황과 합의한 뒤 남쪽으로 진군해 동로마-스폴레토 연합군과 맞붙어 완승을 거두고 스폴레토를 장악한 뒤 트라사문트를 수도원에 가두었다. 이후 라벤나로 진격하여 공성전을 벌이자, 에우티키오스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라벤나 대주교 요한 5세와 시민 대표들을 교황 자카리아에게 보내 중재를 요청했다. 리우프란트는 교황의 설득에 넘어가 라벤나를 정복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이렇듯 내치와 외정 모두 성공을 거뒀으나, 여러 공작은 절대 왕권을 휘두르는 그에게 반감을 품고 반란을 도모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친척인 로타리의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모면했으며, 베네벤토와 스폴레토 공국의 잦은 반항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프리올리 공작 페모가 왕의 통제에 불응하다가 해임되고 그의 조카인 라치스가 그 자리를 꿰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저항을 분쇄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이탈리아의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교회의 협조를 받아내려 했다. 이를 위해 시에나와 아르조, 루카와 투스카니 시 주교들간의 갈등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았으며, 왕국 전역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고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여기에 로마 공국의 북부에 있는 수트라 요새를 점령한 뒤 그곳을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기증하겠다며 로마 교황의 영지로 삼게 했다.
한편, 그는 대외 외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717년 바이에른에서의 내부 분쟁에 개입하여 아내 군트루드의 형제인 우베르토를 지원했으며, 아디게 강에 있는 바이에른의 여러 성들을 공략했다. 또한 명목상으로는 메로빙거 왕조가 다스리지만 실제로는 카롤링거 궁재들이 통치하는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잘 지내려 노력했다. 725년 카롤루스 마르텔이 군트루드의 조카와 결혼한 뒤 양자간의 서신 교류가 이어졌고, 730년경 양국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737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아들 피핀을 파비아로 보내 리우프란트가 양자로 삼게 했다. 리우프란트는 피핀을 정성껏 대접하며 랑고바르드족의 관습에 따라 면도하게 한 뒤 풍성한 선물과 함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돌려보냈다. 738년, 리우프란트는 작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원군을 보내 카롤루스의 승리에 일조했다. 739년 리우프란트가 로마 공국을 약탈하고 로마 시를 압박해오자,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프랑크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전에 리우프란트에게 도움을 받은 바 있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탈리아 전역을 프랑크 왕국이 가지게 해줄 테니 도와달라는 교황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2.7. 라벤나 정복, 그러나...
744년 1월, 랑고바르드 왕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군림하며(32년)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리우프란트 왕이 사망했다. 사후 조카 힐데프란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 교황에 대한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프리올리 공작 라치스를 앞세운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었다. 라치스는 자신을 리우프란트 왕의 진정한 상속자이자 정책을 이어받을 계승자라고 내세웠다. 또한 왕실과 공작에 해를 끼치는 불복종과 간첩 행위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판사를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는 등 일련의 법을 제정해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이들의 봉기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또한 라틴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라틴 여인 타시아와 결혼했고, 전통적인 랑고바르드 의식이 아닌 로마 의식에 따라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746년부터 랑고바르드 왕의 칭호 대신 ' 프린켑스' 칭호를 내세웠다.그러나 이같은 친로마 정책에 많은 랑고바르드 귀족들이 반감을 품었고, 왕이 로마 교황과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평화 정책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749년 펜타폴리스를 침공하고 로마와 라벤나 총독부를 연결하는 도로의 요충지인 페루자를 포위했다. 이때 교황 자카리아가 포위를 풀어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파비아로 철수했다. 749년 7월, 밀라노에 모인 랑고바르드 공작들은 라치스가 교황에게 매수되었으니 더 이상 따를 수 없다며 아이스툴프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라치스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곧 온 가족과 함께 로마로 피신했다.
라치스를 몰아내고 새 왕에 옹립된 아이스툴프는 이탈리아 전체를 자신의 통치하에 두려는 야망을 품고, 이를 위한 군대의 재편과 강화에 전념했다. 모든 자유인은 군 복무 대상이 되었으며, 징병 대상자들의 경제적 자원에 상응하는 의무를 준수해야 했다. 대지주와 부유한 상인들은 흉갑과 말을 착용해야 하고, 보통 지주와 일반 상인들은 말, 방패, 창을 들고 나와야 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나무 방패, 활, 화살을 장비해야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고자 알프스 산맥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물류 흐름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여기에 피핀 3세의 형이며 당시 수도원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카를로만과 손을 잡아 피핀을 견제하게 했다.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모습 | |
회색 | 랑고바르드 왕국 |
주황 | 동로마 제국 |
750년, 라벤나 총독부를 침공한 그는 코마치오와 페레라를 공략했다. 이후 751년 여름 이스트리아를 공략한 뒤 라벤나를 포위 공격했다. 에우티키오스 총독은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고, 라벤나의 총독 궁전은 아이스툴프의 또다른 궁전이 되었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동로마 제국의 양식에 기반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752년,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로마 공국의 각 주민과 영토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는 분견대를 잇따라 파견해 로마를 괴롭혔고 753년 체사노 요새를 함락했다. 다만 로마 시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가톨릭 군주의 입장상 부담이 컸기에 쉽사리 감행하지 않았다. 한편 751년 라치스에게 충성하던 스폴레토 공작 루푸스를 제거하고 스폴레토 공국을 직할령으로 삼았으며, 베네벤토 공국에게도 충성 서약을 다시 한 번 확보했다.
753년 10월 스테파노 2세는 아이스툴프에게 사절을 보내 빼앗아간 요새를 돌려준다면 보상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지만, 아이스툴프는 무조건 복종하라며 거부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프랑크 왕국으로 찾아가서 피핀 3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일전에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랑크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적이 있는 데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가신이 되는 걸 막고 싶었기에, 피핀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4월 14일, 피핀은 프랑크 귀족들을 소집해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전쟁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카를로만은 지난해에 사망했기에, 프랑크 왕국 내에서 피핀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755년 봄, 피핀 3세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해 수사 계곡 요새에서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아이스툴프는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프랑크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어진 평화 협상 끝에, 755년 6월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이스툴프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넘기며, 자신이 빼앗았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철수한 후,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756년 1월부터 3월까지 로마 공방전을 전개했다.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프랑크군이 산맥을 넘지 못하는 사이에 로마 시를 함락시켜서 모든 걸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지하며 끝까지 저항한 수비대와 시민들 때문에 함락되지 않았고, 아이스툴프는 4월 초 포위를 풀고 파비아로 돌아갔다. 한편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이스툴프를 또다시 격파하고 파비아에서 포위 공격했다. 아이스툴프는 결국 756년 6월 항복하고 훨씬 가혹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번에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로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인질을 프랑크 왕국에 보내야 했으며, 상당한 배상금을 프랑크 왕국에 지불해야 했다. 이리하여 교황청이 피핀 3세로부터 라벤나 총독부 등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기증받으면서 교황령이 탄생했다.
2.8. 최후의 몸부림과 멸망
756년 12월, 아이스툴프는 사냥 도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하고 파비아의 성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다. 당시 로마에서 수도사로 지내던 라치스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비아로 달려가서 왕이 되려 했다. 그러나 토스카나 공작 데시데리우스가 피핀 3세의 지원에 힘입어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데시데리우스가 새 왕으로 등극했다. 757년 4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바오로 1세가 반대자들의 거센 도전으로 곤욕을 치르자, 데시데리우스는 이 때를 틈타 아이스툴프 왕의 패전으로 흔들리던 왕국의 권위를 되살리려 했다. 758년 펜타폴리스를 통해 스폴레토 공국으로 진군하여 로마 교황과 연계하여 독립을 꾀하던 알보인 공작을 체포해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했고, 베네벤토 공작 리우프란트를 몰아낸 뒤 자신의 사위인 아리치스 2세를 새 공작으로 앉혔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에 반항하던 두 공국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한편, 데시데리우스는 753년 고향인 브레시아에 성 살바토레 수도원을 세우고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게 했으며, 딸 안셀페르가를 수녀원장으로 선임했다. 또한 롬바르디아, 에밀리아, 투스카니 일대의 모든 수도원이 이 성 살바토레 수도원의 관할하에 종속되었다. 758년에는 바디아 레오넨세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수용했다. 또한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힘에 의존해 자신들을 또다시 치도록 유도할 것을 우려해 페라라, 피엔차, 펜타폴리스 등의 소유권을 교황에게 넘기고 로마로 가서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 등 교황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767년 6월 바오로 1세가 사망하자, 차기 교황을 놓고 여러 후보가 각축전을 벌였다. 그는 이에 개입해 친 랑고바르드 성향을 가진 인물을 교황으로 세우려 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을 따르는 귀족들의 대표였던 토토 공작이 동생 콘스탄티노 2세를 교황에 세우려 했다. 이에 로마 교회의 공증인이었던 크리스토포로와 아들 세르지오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세르지오에게 군대를 내주었고, 세르지오는 토토 공작을 살해하고 콘스탄티노 2세를 축출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은 새로운 교황 후보로 수사 필립보를 내세웠으나 크리스토포로는 이를 무효화하고, 다시금 선거를 열어 스테파노 3세를 정통 교황으로 내세웠다. 스테파노 3세는 768년 8월 7일 교황좌에 공식 착좌했다. 이후 알라트리에서 콘스탄티노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내 진압되었다.
768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사망하자, 두 아들 카롤루스와 카를로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왕국이 두 패로 나뉘었다. 스테파노 3세는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잘 먹히지 않자 데시데리우스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딸 데시데르타를 카를로만과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이 랑고바르드 왕국에 간섭할 여지가 크게 줄어들자,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로마를 장악하기로 마음먹었다.
769년,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순례를 핑계로 군대를 거느리고 교황령에 들어섰다. 산 피에트로 성당 인근 평원에 진영을 세운 그는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포함한 친 랑고바르드 세력을 지원했다. 그 결과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고, 크리스토포로는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3일만에 사망했다. 772년 교황 스테파노 3세가 중병에 걸리자, 아피아르타는 로마 교회의 권력을 장악해 유력한 귀족과 성직자들을 내쫓고, 1월 24일에는 소경이 된 채 라테라노 궁전의 독방에 수감된 세르지오를 교살해 후환을 없앴다.
이 무렵 카를로만이 사망했다. 데시데르타의 요청을 받은 그는 딸이 남편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게 해주려 했다. 이에 분노한 카롤루스는 공세를 개시해 카를로만의 영토를 접수했다. 데시데르타와 두 아들은 카롤루스의 공세를 피해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적대했다. 그는 이 상황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를 조속히 장악하고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겼다.
772년 2월 1일, 스테파노 3세가 사망한 후 하드리아노 1세가 새 교황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프랑크 왕국이 반 랑고바르드 정서로 돌아선 걸 눈치채고 친 랑고바르드파의 수장인 아파아르타를 해임하고 아파아르타에게 축출되었던 인사들을 복귀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교황이 "피핀 왕과 아이스툴프 왕이 맺었던 조약 대로 모든 점령지를 교황청에 넘겨라"라고 요구하면서 결렬되었다. 이에 데시데리우스는 공세에 나서 피엔차, 페라라, 코마키오를 점령하고 라벤나를 위협했다. 그러면서 카를로만의 아들들을 프랑크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로마를 치겠다고 위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친 랑고바르드파 인사들을 계속 해임했다.
772년 말,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그를 파문하고 카롤루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카롤루스는 작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교황의 요청에 응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돌렸다. 773년 봄, 카롤루스는 제네바 인근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두 부대로 나눴다. 한 부대는 카롤루스의 삼촌 베르나르도의 인솔하에 발레다오스타로 진군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이끌고 이끌고 몬체니시오를 가로질러 남하했다. 그는 프랑크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마 포위를 풀고 북상해 수사 계곡 인근의 키우세에서 카롤루스를 막아섰다. 그러나 발레다오스타로 가 있던 아들 아델치스는 베르나르도의 군대에게 참패한 뒤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
패전 소식을 접한 그는 파비아로 도주한 뒤 수비에 전념했다. 그러나 여러 공작들이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파악하고 프랑크 왕국으로 돌아섰고, 스폴레토, 페르모, 오소모, 안코나는 로마 교황에 복종하기로 했다. 카롤루스는 원정을 이어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카를로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파비아는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774년 초 함락되었고, 데시데리우스와 그의 아내는 프랑크군에 사로잡혔다. 카롤루스는 데시데리우스를 프랑스 북부의 코르비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랑고바르드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고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조건하에 자치를 누릴 수 있게 해줬다. 데시데리우스는 코르비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786년에 사망했다.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델치스는 남이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의 공작들마저 프랑크 왕국에 복종하기로 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한 뒤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의 영접을 받고 귀족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렸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반감이 생긴 일부 랑고바르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788년 말 동로마군이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아델치스를 랑고바르드 왕에 복위시키려 했지만, 스폴레토 공작 힐데프란트와 베네벤토 공작 그리말트 3세, 그리고 위니게스 휘하의 프랑크군이 결성한 연합군에게 패퇴했다. 결국 아델치스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랑고바르드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3. 왕사
롬바르디아 철관 |
랑고바르드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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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보인 | 클레프 | 아우타리 | 아길루프 | 아달랄트 |
아리알트 | 로타리 | 로달트 | 아리페르트 1세 |
페르타리트 고데페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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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말트 | 가리발트 | 페르타리트 | 알라히스 | 쿠닝페르트 | |
리우페르트 | 라긴페르트 | 아리페르트 2세 | 안스프란트 | 리우프란트 | |
힐데프란트 | 라치스 | 아이스툴프 | 데시데리우스 | }}}}}}}}}}}} |
이름 | 재위기간 |
알보인 Alboin | 565 - 572 |
클레프 Cleph | 572 - 574 |
공위시대 Interregnum | 574 - 584 |
아우타리 Authari | 584 - 590 |
아길루프 Agilulf | 591 - 616 |
아달랄트 Adaloald | 616 - 626 |
아리알트 Arioald | 626 - 636 |
로타리 Rothari | 636 - 652 |
로달트 Rodoald | 652 - 653 |
아리페르트 1세 Aripert I | 653 - 661 |
페르타리트/ 고데페르트 Perctarit/Godepert | 661 - 662 |
그리말트 Grimuald | 662 - 671 |
가리발트 Garibald | 671 |
페르타리트 Perctarit | 671 - 688 |
알라히스 Alahis | 688 - 689 |
쿠닝페르트 Cunincpert | 688 - 700 |
리우페르트 Liutpert | 700 - 701 |
라긴페르트 Raginpert | 701 |
아리페르트 2세 Aripert II | 701 - 712 |
안스프란트 Ansprand | 712 |
리우프란트 Liutprand | 712 - 744 |
힐데프란트 Hildeprand | 744 |
라치스 Ratchis | 744 - 749 |
아이스툴프[4] Aistulf | 749 - 756 |
데시데리우스 Desiderius | 756 - 774 |
4. 정치와 행정 구조
8세기 중반 랑고바르드 왕국의 행정구역(공국) |
매년 3월 초, 각지의 주교들과 공작들을 파비아에 위치한 왕궁에 소집해 왕국 의회를 열고 정치적, 사법적 문제들을 토의하고 결정했다. 랑고바르드의 국왕들은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거주하는 일이 잦았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과 다르게 왕으로 선출된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왕궁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 의례는 왕국 중앙정치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한편 궁정에는 화폐를 주조하는 조폐국과 왕국에서 가장 큰 법원인 중앙법원이 위치해, 결론적으로 중세 초 국가치고는 이례적일 정도로 국가의 핵심적인 경제와 사법, 정치, 의례가 모두 한 곳의 궁정에서 관리되는 체제였고, 이에 귀족들은 단순히 왕위를 차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궁정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허구한날 서로 싸워댔다. 중간에 귀족들이 왕위를 선출하지 않고 대공위시대를 열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의 권위가 강할 때는 중앙의 지방 통제가 매우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공작'이라는 직위는 보통 로마 제국의 둑스에게서 유래한 것이지만, 랑고바르드 족은 이름이 로마식인 둑스로 바뀌었을 뿐 둑스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직위가 이미 부족 시절부터 있었다. 한편, 이러한 공작이 지배하는 공국 하위에는 로마 시대의 가장 작은 행정구역인 Pagus 단위로 구성된 '백국'들이 존재했다. 이 백국들은 로마 시대의 전통을 이어 보통 도시보다는 농촌이나 마을들을 묶은 것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Gastaldato라는 관직도 존재했다. 이 관직은 왕이 직할령이나 자신의 사유지 등에 파견해 대신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으며, 역할상으로는 공작과 비슷하지만 공작보다는 행정적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다스리는 영토 역시 공작보다 소규모였다. 처음에는 왕이 자신의 직할령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법을 집행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후로는 공작들 역시 공국에 사적으로 이들을 파견해 대신 다스리게 하기도 했다.
sculdascio라는 하위 관직도 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치안판사' 정도 된다. 왕이 직할령에 직접 파견하거나 공작이 사적으로, 주로 도시보다는 마을에 파견했으며, 사람들 사이의 민사 사건을 다루고 판결하는 역할을 했다. 일부 군사적 기능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 행정의 경우 로마 시대의 쿠리아의 뒤를 이은 도시 참사회가 존재하여, 도시 자치를 수행하고, 공국 중심도시의 참사회는 대부분의 경우 공국의 중심 도시에 거주하는 공작의 통치를 보조하고나 법원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이 도시 참사회는 랑고바르드 왕국 멸망 이후로도 쭉 지속되어, 중세 이탈리아 도시의 정치적, 문화적으로 핵심적인 기관으로 남았다.
왕국을 구성하는 공국들 중에는 베네벤토 공국이나 스폴레토 공국처럼 교황령에 의해 분단되어 실질적으로 반독립 상태를 유지한 공국들도 있었는데, 이 공국들은 중앙의 의시와는 상관 없이 fare 집단 및 공작들이 자체적으로 정착해 세운 것들로서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1세기 노르만 족의 침공때까지 한참동안 유지되었다.
일부 공국들은 왕으로부터 조폐권을 부여받아 도시에 조폐소를 세워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다만 독자적인 화폐를 만든 것은 아니고, 왕국 공식 화폐를 공작이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
5. 사회와 경제
5.1. 기본 구조
랑고바르드 족의 사회구조는 자유민(Arimanno)-반(半)자유민(aldii)-노예(혹은 농노)로 이루어진다. 자유민은 스스로 무장하고, 부족의 중소대사에 참여할 권한이 있으며, 왕을 선출할 수 있고, 재산을 가지고 법정에 출두할 수 있으며 토지를 가지고 농노 또는 노예를 가질 수 있다. 반면 반자유민은 아래 문단에서 설명할 게르만족의 후원-피고용 관계에 따라 주인에게 피보호의 대상이 되지만, 농노나 노예와는 다르게 자유민과 결혼할 권리, 사법적으로 금전적 배상(wergild)을 받을 권리, 일정 수준 이하의 재산을 가질 권리 등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권리나 군사적 의무는 없었다.랑고바르드 족은 자유민(Arimanno)이 무장한 일정 수 이상의 전사들과, 그 전사들에 부속되는 여러 혈연적 친척들, 노예, 심지어 가축까지 모여 구성된 군사적, 사회적 집단인 fare로 구성되었으며, 공작은 이 fare의 지도자였으며, 랑고바르드 족의 공작은 이 fare의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기능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여러 공국들을 통치했다. 여기서 공작과 수하 가신들의 관계는 게르만 부족적 전통에 기반한 코미타투스로 설명할 수 있다.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한 알보인 왕은 정복한 영토를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여러개로 분할해 공작들에게 수여하였으며, 이윽고 이 공작들의 작위는 점차 그들이 소유한 봉토와 밀접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그들은 또한 Gairethinx라고 불리는 왕국 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회의에서 왕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권은 프랑크 왕국 같이 오직 세습으로만 왕위가 이어지던 나라에 비해 불안정했다. 이는 서고트 왕국이나 동고트 왕국과도 유사하다.
공작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배하는 전사 집단 및 부속 인민들의 우두머리였지만, 동시에 부족적 전통 및 로마적 전통을 계승해 각 지방의 군사 사령관이기도 했다. 이러한 군사적 기능은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 문화를 점점 더 깊게 받아들일수록 심화되었고, 나중에는 군사 사령관->자신이 지배하는 영지와 인민 보호->인민들을 보호하고 만족시키는 지역 지도자로 그 위상이 변화한다. 공작은 기본적으로 왕이 임명하는[5] 지도자였기에 철저히 왕권에 이론적으로는 종속되어야 했지만, 동시에 fare로 대표되는 랑고바르드 족의 사회 체제의 대표자로서 지역적 전통에도 종속되었다. 이러한 공작의 위상에 대한 두 가지 기능은, 왕국 내내 반복될 왕권을 강화하려는 중앙vs이에 저항하려는 공작들의 구도로 나타나, 최종적으로는 왕위 쟁탈전이라는 형태로 부딫히게 된다. 이는 6세기 후반의 소위 대공위시대에 절정에 달해, 이 시기에는 중앙의 위상이 바닥을 찍은 한편 지방의 자율성과 그 지방을 지배하는 공작들의 위세는 반대로 하늘을 찌르게 된다.
5.2. 법률
랑고바르드 왕국의 법률 체계는 기본적으로 랑고바르드족의 관습법과 로마법, 교회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랑고바르드법은 처음에 구전으로 전승되었지만 아우타리왕의 치세에 체계화되기 시작해 로타리 왕의 시대에 처음으로 칙령을 통해 명문화되었다. 다만 살리카법처럼 법전 자체가 하나의 책으로 명문화되는 것은 11세기나 되어서 일어나고, 왕국이 살아있을때는 주로 왕이 3월 초 궁정에서 정치적, 사법적 사안을 논의한 후 이에 대한 결과로서 발표되는 칙령이나 왕이 정책적으로 새로 발표하는 칙령을 통해 통치되었다. 한편, 로마인들은 랑고바르드법을 따르지 않고 로마법을 따랐다. 이후 랑고바르드법은 점점 로마법과 통합되기 시작해, 리우프란트 왕대가 되어 로마법의 요소를 대거 반영해 정식으로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리우프란트 왕의 사법개혁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결론적으로, 랑고바르드법은 기존의 로마법에 비해 여러 발전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사형 집행을 최소화하고, 이를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했다. 피해자와 그가 당한 범죄에 가치를 매겨 그만큼을 가해자가 보상하게 한 제도를 마련했는데, 이를 Guidrigildo라고 한다. 이 제도는 프랑크 왕국과 앵글로색슨 7왕국, 부르고뉴 왕국에서는 wergild라고 불렸으며 로마법에는 없는 게르만 전통법률의 유산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2세기 로마법이 다시 전면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사형 집행은 대역죄에 한해 축소되었다.
한편, 랑고바르드법에서는 중세시대 효과적인 사법 집행의 수단이었던 복수를 제한했다. 이 복수는 야만적인 시스템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부가 모든 사법적 분쟁을 해결해주기 힘들어진 당대 상황에서 'fare' 단위의[6] 공동체가 모여 자신의 구성원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정당한 응보적 집행을 대신 수행한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복수도 남용될 우려가 컸기에, Guidrigildo를 통해 복수를 행할 수 있는 경우를 엄격히 제한하고 이 기준에 벗어날 경우 금전적 배상으로 해결하도록 공포했다. 그 결과, 우리의 통념과는 반대로 중세 초에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수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개념은 mundio이다. 이 제도는 쉽게 말해 fare의 수장, 즉 가부장이 여성을 포함한 다른 fare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단순히 fare만 이 제도의 적용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차후 로마법과의 통합이 진행되면서 교회, 왕, 공작 등을 포함한 더 큰 단위의 사회 조직들을 포괄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부상해 갔다. 어떤 공동체 집단에 소속된 남성은 일정 나이에 도달해 무기를 들고 전사로서 행동할 수 있게 되면 selpmundi가 되어 mundio를 벗어나 자유민으로서 기능했고, 이후 결혼해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면 그가 다른 가족들을 mundio로서 보호해주는 식이었다. 반면 여성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아버지, 남편 등 자신을 보호해줄 보호자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만약 어떤 여성이 교회에 귀부했을 경우, 그 교회가 해당 여성을 보호할 책무가 있었다.
또한 이 mundio는 사법적 영역에서도 적용되었다. 보호자는 피보호자의 건강을 챙겨주고, 피보호자가 법정에 섰을 때 그를 변호해주고, 결투재판에서 그를 위해 싸워줄 의무가 있었으며, 또한 법에 의해 제한된 정도의 처벌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mundio는 여성을 대상으로는, 여성의 동의 없이 재산을 팔거나 빼돌릴 수 없다는 금지조항도 적시되어 여성의 권리를 나름 보호하고자 했다. 이 mundio는 본질적으로 가족적인 개념이라, 이 보호자의 의무는 거의 대부분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mundio 제도는 이후 무려 17세기(!)까지도 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제도로서 기능했다.
5.3. 경제
랑고바르드족이 처음 이탈리아에 진입했을 때, 이탈리아는 기나긴 동고트-비잔틴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해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기존 로마계 지배층들 중에서도 살해당하거나 반강제로 고향을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고, 주인없는 토지가 늘었다. 랑고바르드족은 이런 빈 토지를 차지해 전사들에게 분배하고, 이탈리아에 남은 로마계 지배층들은 토지를 몰수하거나 재산을 압류하는 등 탄압책을 사용함으로서 랑고바르드족의 기득권 확립을 시도했다. 덕분에 로마인 피지배층과 랑고바르드인 지배층의 구조가 농촌에서 성립되었으나, 랑고바르드족 자체가 수가 아주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다소 지역차가 있었다. 어쨋든, 일반적으로 랑고바르드인 지주는 로마 시대에 군인을 집에 머물고 재산의 3분의 1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인 hospitalitas를 근거로 들며 수확물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했으며, 이는 그 지주가 이끄는 fare에 분배되었다. 이러한 장원 체제는 로마제국 후기의 장원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단지 지주가 로마인에서 랑고바르드인으로 바뀌고, mundio에 따라 소작농이 농노로서 더 강하게 법적으로 지주에게 종속되었다는 차이가 존재할 뿐이었다.이후 점점 시간이 지나고 왕국의 지배체제가 서서히 이완되면서, 로마인들은 상업, 수공업, 법률 등의 분야에 진출하거나 몰락한 랑고바르드인 지주의 땅을 사들임으로서 경제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한편 토지소유가 점점 분산되고, 가난한 처지로 떨어지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후기인 8세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지주-농노로 이분화된 사회는 지주, 상인, 수공업자, 법률가, 의사, 농노 등 여러 계급들로 다원화되었고, 무역이 회복되고 화폐경제가 확장함으로서 은행이 설립되었다. 한편 교회 역시 베네딕토회의 주도로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경제적 발전에 힘입어 풍요를 누렸으며, 이를 기반으로 여러 학문적, 문화적 부흥을 이끌었다. 특히 여러 개혁들이 시행되고 왕권이 강화된 리우프란트 왕 치세에는 다시금 로마의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문화적, 예술적, 학문적 측면에서 로마의 고전 양식, 고전 학문을 회복하고자 하는 '리우프란트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된다.
6. 후예
랑고바르드족의 랑고바르드 왕국은 여기서 멸망하였지만 북부 이탈리아는 프랑크족 휘하에서도 롬바르드 왕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부 지역은 현재의 롬바르디아로 불리게 된다.이탈리아의 중남부 랑고바르드족들은 프랑크 제국의 반속국 상태에서 베네벤토 공국, 스폴레토 공국, 살레르노 공국 등으로 여명을 유지했지만 11세기 말엽, 노르만족의 도래로 정복되어 시칠리아 왕국에 흡수된다.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1세로 유명한 보나파르트가는 거슬러 올라가면 랑고바르드족에 기원이 닿는다.
7. 재평가와 유산
17세기 계몽주의의 시대 이래, 오랫동안 이탈리아인들은 랑고바르드 왕국 시기를 '암흑시대'로 평가절하했다. 계몽주의자들은 랑고바르드 왕국을 '영광스러운 로마'와 대비해 '야만적인 혼란기'로 정의했고, 영광스러운 로마의 유산들이 단절되고 중세적 전통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탈리아 민족성의 수치로서 평가되었다.그러나, 현대 사학자들은 이러한 계몽주의자들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핀트가 좀 다르긴 하지만 연속성 논쟁 문서에도 나와있듯 현대 사학자들은 랑고바르드 왕국을 비롯한 소위 중세 초기의 '야만 왕국'들이 한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계몽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랑고바르드 왕국은 로마의 유산이 단절되지도 않았고, 쇠퇴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가톨릭과 같은 '중세적' 요소와 결합해 더욱 발전하는 시기였다. 흔히 중세 초기는 로마식 도시 문화의 몰락과 무역의 중단, 기술의 실전, 사법 체계의 붕괴와 끝없는 폭력의 시대로 묘사되는데, 이들 중 그 어느것도 랑고바르드 왕국과는 관련이 없다. 로마식 도시 문화는 몰락하기는 커녕 오히려 왕국 정치와 문화의 핵심 요소였고, 새로 도시가 건설되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침체하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왕국을 구성하는 공국들을 대도시들을 기준으로 분할했을까. 또 무역의 경우 로마 시대보다 일정부분 침체한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6세기부터는 다시 회복되어 오히려 로마시대보다 더 융성하게 이루어졌다. 로마 멸망 후의 무역 침체는 로마라는 지중해 패권적 네트워크가 붕괴한 이후 각 지방이 각자도생을 모색하며 나타난 과도기에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며, 무역의 붕괴는 더더욱 아니다.
기술 또한 실전되지 않아, 콘크리트 기술 같은 경우는 실전되었기에 계몽주의자들이 암흑시대라 매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나 로마식 콘크리트 기술은 동로마에서도 실전된 기술이기에 논외로 치고, 알프스 이북에서는 실전된 석조 건축술과 보석 세공술을 비롯한 여러 정교한 기술들이 살아남아 더욱 발전하였다. 사법체계 또한 랑고바르드 관습법과 로마법을 적절히 융합한 로타리 왕의 법령집(Edictum Rothari)이 편찬되어 멀쩡히 사법 기능을 수행했다. 중세 초기에 사법 붕괴의 원인으로 드는 것이 주로 결투재판과 사적인 복수(fede)인데, 고고학 연구 결과는 이 시기의 사적인 폭력으로 희생된 사람 수가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의 중세 절정기~근세시기에 희생된 사람 수보다 적다는 것을 입증하며, 아이러니하지만 사람들의 평균 수명도 그때보다 약 10살정도 많았다. 왜냐하면 중세 후반부터 근세 시기에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어 도시에 사람이 몰려들고 따라서 위생이 개판이 되는 한편 전염병이 도는 등의 이유로 인해 평균수명이 중세 초에 비해서도 깎여나갔기 때문이다.
또, 랑고바르드족의 언어는 현대 이탈리아어의 탄생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랑고바르드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인들과 많이 동화되었지만 동시에 로마인들 또한 랑고바르드 인과 동화되어, 로마인들이 사용하는 민중 라틴어는 이 시기에 랑고바르드어와 결합해 로망스어의 독자적인 언어로서 분화되어 이탈리아어의 시조가 되었다.
또, 랑고바르드 왕국은 한때 서유럽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했다. 서고트 왕국이 고질적인 내전으로, 프랑크 왕국도 고질적인 분할상속으로(...) 개판이 되었을 무렵 랑고바르드 왕국만이 유일하게 서유럽에서 그나마 덜 개판(...)이었기 때문에, 비잔틴에서는 동방의 그리스-비잔티움 전통과 대비되어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전통의 핵심지로 랑고바르드 왕국을 인식했다. 후대에 샤를마뉴 시대에 프랑크 왕국에 수행한 역할을 랑고바르드 왕국이 원초적이게나마 수행한 것이다.
[1]
롬바르디아는 그 땅을 장악했던
랑고바르드족에서 나온 말이지만 현대
롬바르드어는
이탈리아어와 가까운
로망스어군이고
게르만어파가 아니다.
[2]
로달트가 군데베르가의 아들인지 여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3]
그리말트와 테오도타는 662년에 결혼했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잡아도 9살 이내다.
[4]
교황령 무력 흡수를 노렸으나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격파되었다.
[5]
물론, 부족적 전통에서 기인한 것인지라 동시대의
프랑크 왕국이나
서고트 왕국과는 달리 세습되는 경우가 다수였다. 초기에는 세습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공위시대를 거치며....
망했어요
[6]
다른 나라의 경우 '가문' 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