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황청 주요 사건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color: #FFF; margin: -5px -11px; padding: 5px 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453600; margin: -5px 0px" |
사건 | 영향 |
<colbgcolor=#F8F0C3,#191919> 카노사의 굴욕 | 파문을 통한 교황권의 강화 | |
보름스 협약 | 주교 선출에 황제권 배제 | |
십자군 전쟁 | 교황권의 절정 | |
중세 흑사병 | 교황권 쇠락의 시작 | |
성직자 과세 | 교황권 해체 시작, 아나니 사건 | |
아비뇽 유수 | 서방교회 대분열 | |
콘스탄츠 공의회 | 서방교회 대분열 종식, 콘클라베 제도 정착, 위클리프파 이단 지정· 얀 후스 화형 | |
후스 전쟁 | 평화협정으로 후스파 용인 | |
사코 디 로마 | 교황권 위기의 상징 | |
16-17세기 종교개혁 → |
예방의학 Preventive Medicine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3c6><colcolor=#fff>
역학 (疫學) |
감염 ( 돌파감염 · 수직감염) · 검역 · 면역 · 방역 · 병원체 · 봉쇄 · 사회적 거리두기( 사회적 거품) · 생물 안전도 · 생물재해 · 손 씻기 · 슈퍼전파자 · 역학조사 · 예방접종( 백신) · 음압병실 · 자가격리 · 전염병(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 · 범유행전염병 · 법정 감염병) · 온실 면역(방역의 역설) / 혼합 면역(하이브리드 면역) · 집단 면역 · 코호트 격리 · 항원 결정기 / 항원 결합부 / 항원의 원죄 |
관련도와 영향도의 측정 · 질병과 사망의 측정 · 힐의 기준 · 연구에서 발생할 수 있는 편향 | ||
역사적 사건
|
14세기 흑사병 · 1918-19년 인플루엔자 범유행 · 2003년 SARS 유행 · 2009년 인플루엔자 범유행 · 2014년 에볼라 유행 · 2015년 MERS 유행 · 2019-23년 코로나-19 범유행 |
환경보건학
|
공해병 ( 미나마타병 · 온산병 · 이타이이타이병 · 카네미 유증사건) | |
의료관리학
|
간호관리학 | }}}}}}}}} |
14세기 흑사병의 전파 경로 |
[clearfix]
1. 개요
14세기 흑사병( 黑 死 病, Black Death) 또는 역병(Plague, 플레이그), 대역병(Great Plague, 그레이트 플레이그) 사태는 1346년에 유럽 동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353년까지 유럽 전역을 강타했던 대규모 전염병의 유행을 이른다.이때 창궐한 질병의 원인균은 DNA 추적 결과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일 가능성이 유력하며, 2022년 독일/영국 공동연구팀이 역학조사를 통해 이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 일부 학계에서 에볼라 출혈열 등의 이견이 있으나 주류는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만약 14세기 직전의 소창궐과 15세기 이후 3차 대역병의 유행이 모두 같은 페스트의 창궐이었다면,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혔던 범유행전염병이 된다.[1]
사태 이전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에 달했으나 대역병의 풍파가 지나간 후 15세기에는 3억 5천만으로 줄었다. 최소 1억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2]
이외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전 세계적으로 2억 명이 넘는 사람이 같은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역사상의 한 기간에 발생한 사망자 통계 가운데 가장 급격한 증가이다. 특히 그 기세는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의 3년간 최고조에 달하여, 유럽 인구의 30~50%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했다. 지역에 따라 발병률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벨기에나 폴란드[3]의 경우 사망률이 20%에 그쳤던 곳도 있으나, 보다 극심한 지역은 사망률이 80-90%까지도 집계되었다.
2. 명칭
본래 '플레이그(plague)'는 그 자체로 '역병'이라는 뜻이고 페스트 역시 같은 뜻이었으나, 사태 이후 사실상 중세 흑사병 또는 흑사병의 원인균을 칭하는 말로 변했다. 이를 사전적 의미와 구분하기 위해 'bubonic plague'라 칭하기도 한다.중세 흑사병을 가리키는 'Plague'는 대문자로 쓰고 정관사 the를 쓰지 않는다. 아예 일부 언어에서는 Plague 단어에 대해 따옴표로 표기하거나 모든 문자를 대문자로 처리하기도 한다. 즉, 'Plague'를 고유명사로 취급한다는 것인데, 거의 모든 인도유럽어족 언어에서 14세기 흑사병을 표현할 때에는 관사 없이 대문자로 표기하는 관습이 남아 있다. 그만큼 역병의 대표적 사례이자 많은 사람이 죽은 사태였다는 뜻이다. 이를 더 강조해서 '대역병', 즉 '그레이트 플레이그(Great Plague)'라고도 불린다.
3. 원인
중세 유럽을 휩쓴 이 역병의 원인균은 주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세 당시에는 현대와 같이 체계적인 의학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몇 가지 소수 가설도 있다. 치사율이 높은 여러 세균성 감염의 증후군이었다는 설, 에볼라 바이러스의 조상격 되는 바이러스가 원인이었다는 설,[4] 탄저병이 원인이었다는 설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이론은 역시 페스트균에 의한 감염이며, 특히 쥐가 옮기는 벼룩에 의해 페스트 균(Yersinia pestis)이 전파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5]현대에 이르러, 북유럽· 남유럽의 희생자들의 사체에서 추출한 죽은 세포의 DNA를 분석하여, 이들이 페스트균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일련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있었던 모든 역병의 창궐이 페스트균의 단일적 소행임은 확실하지 않으나 페스트가 주축이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2022년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볼프강 하크·요하네스 크라우제 박사와 영국 스털링대 필립 슬라빈 교수 공동연구팀이 “흑사병은 1338년 또는 1339년 키르기스스탄에서 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네이처에 역학조사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Lake Issyk-Kul) 인근 매장된 시신 7구의 치아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3명의 DNA에서 흑사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1346년 유럽에 흑사병이 전파되기 8년 전으로, 상인들이 거주하던 마을을 중심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호 인근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의 묘비. 중세 흑사병의 발병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무덤은 1649번째 해(1337-8), 호랑이의 해에 역병으로 죽은 신자 Sanmaq가 묻힌 곳이다."라 쓰여 있다. |
대역병이 짧은 기간 내에 유럽 전역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중세라는 시대적 한계에 따른 의학 지식의 부족과 그에 따른 행정적·제도적 미비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당시에는 현미경이 없었으며, 세균의 발견은 1676년 현미경을 처음 고안한 네덜란드의 안톤 판 레이우엔후크에 의해서야 이루어졌다. 예방 의학의 발달은 더욱 늦어서, 1877년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와 콜레라, 결핵의 원인이 박테리아임을 밝혀내기 전에는 이러한 역병이 미생물에 의해 일어났음을 알 길이 없었다. 중세의 위생관념은 현대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는데, 사체와 분변을 거름으로 사용했으며,[6] 흙으로 신체를 닦기도 했고, 벼룩이나 쥐 등 유해생물에 대한 방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인류가 손 씻기를 생활화한 것은 1870년대에 들어서였는데, 이전에는 의사가 시신을 부검하던 더러운 손으로 산모의 출산을 돕거나 감염된 환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다른 환자를 진료하기도 했다. 19세기 초반의 의사들은 피 묻은 수술복이 오히려 권위를 상징한다고 여겼을 정도다.[7]
보건 당국 역시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장기설(瘴氣說, miasma theory)에 따라 공기, 특히 더러운 냄새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으며, 거리에 불을 피워 공기를 태우려 하거나,[8] 기독교 신학이 지배하던 시대상에 맞게 신앙의 힘으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감염자와의 접촉이 주된 전염 경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마르세유 지방의 경우, 감염지로부터 도항한 이주자에 대한 40일간의 구금을 통해 잠복기를 넘기는 방법으로 전염을 방지하려 했다. 영어로 검역을 뜻하는 단어 ' 쿼런틴(quarantine)'은 바로 이 40일간의 구금 제도에서 유래된 말로 이탈리아어에서 40을 뜻하는 'quaranta'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통제 조치는 신고하지 않은 보균자의 유입을 초래했으며, 감염자가 급증하여 1348년을 전후해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행정력이 마비되었다.
다만, 흑사병 하면 떠오르는 까마귀 마스크를 쓴 역병 의사의 모습은 300년은 더 지난 17세기에 등장한 것이다. 물론 중세 흑사병 시기에도 모양은 달랐을 뿐 의사는 있었고, 17세기에도 냄새가 병의 원인이라 믿고 이를 차단하기 위한 의도로 나온 것이므로 흑사병 시절과 동일한 한계를 가졌던 것은 맞다.[9]
4. 전파
|
역사 유튜버 Ollie Bye의 영상. 중세 흑사병의 발원지가 중국 대륙이라는 설을 채택했다. |
역병의 전파 경로에는 여러 추측이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설, 혹은 인도에서 시작되어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평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동유럽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설이다.[10] 이 설에 따르면 전염 루트는 다음과 같다.
-
몽골 제국의 크림 반도 침공과 생물전
흑사병의 원인인 페스트균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기후 지대에 서식하는 쥐 등의 설치류에 기생하던 쥐벼룩을 중간 숙주로 하는 박테리아로, 몽골 제국의 킵차크 칸국 유목민들이 쥐와 접촉하면서 그 감염이 시작되었다. 1347년에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크림 반도에 있는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도시 카파를 침공하였는데, 제노바 시민과 몽골군 사이에서 공성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 부대는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성 안으로 쏘아 보내는 일종의 생물학전을 시도하였다.[11] 동서를 가리지 않고 중세 공성전 전술 가운데는 죽은 적군 시체나 동물 시체를 성 안으로 날려 보내는 전술이 존재했다.[12] 특히 비슷한 전법을 드라큘라 백작으로 유명한 블라드 가시공도 사용한 바 있다. 아무튼 이러한 전투의 결과, 카파 시내에서 대역병의 시작을 알리는 감염이 발생하였다. 아군이 적의 시체를 수거하고 운반하는 동안 쥐벼룩을 비롯한 보균 요인이 들러붙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몽골군도 질병 피해가 발생한 만큼 결국은 철수해야 했을 것이었고, 제노바령 카파는 그렇게 생존했지만, 이 전투가 전 유럽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대유행의 서막이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이 이 설의 주요 내용.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 피아첸차의 공증인 가브리엘레 데 무시스(Gabriele de Mussis)가 쓴 연대기에만 기록되어 이것이 유일한 근거 자료인데, 무시스는 이 사건을 마치 자신이 실제로 목격한 것처럼 기록했지만, 그는 카파 공성전 당시 고향인 피아첸차에 머무르고 있었다. 또한 이 연대기가 기록된 것은 공성전이 일어난 20년 후인 1367년이라는 점에서 항간에 떠도는 무용담이나 풍문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카파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던 시점에서 다른 항구 도시들에 이미 흑사병이 퍼지는 중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
죽음의 배(Death ships) 사건
1347년 10월경, 흑해에서 출발한 12척의 제노바 적(籍) 상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에 도착했다.[13] 그런데 선단의 선원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으며, 생존자 역시 전신을 광범위하게 뒤덮은 고름과 검은 부종을 보이며 죽어가고 있었다. 곧 주민들은 선원들이 끔찍한 괴질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칠리아 당국은 해당 선단을 즉시 항구에서 떠나도록 명령했으나, 그들이 떠난 직후 항구 주민들 역시 선원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면서 죽어나갔다. 괴질은 삽시간에 시칠리아 전체로까지 퍼졌으며, 주민들이 이탈리아 각지로 이동하면서 제노바, 피사,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했다.
-
유럽 대륙으로의 전파
영국 웨이머스 항에 새겨진 흑사병 기념 동판. "흑사병이 1348년 본 항구를 통해 영국에 유입되었다. 이 병으로 국민 전체의 30%에서 50%가 사망했다."라 쓰여 있다. |
그리고 여기에 더해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려 더욱 흑사병 확산에 일조하였다. 이 사이비 종교 신도들은 "흑사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벌이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나체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며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고 다녔다. 이것을 '채찍 고행'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채찍 고행단(Flagellant)'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해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길이라고 외치고 다녔지만, 문제는 이들이 채찍을 갈기면서 길거리 곳곳에 자신의 피를 뿌리고 다녔고, 오히려 더욱 흑사병 확산이 가속화되었다.
5. 피해
5.1. 유럽의 피해
행운은 우리에게 거의 미소짓지 않고, 다가오더라도 꽃이 지듯 재빨리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만에 빠져 자신이 불멸이라 착각하는 것을 방지하고 스스로 자제하며 살게 하려는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1348년, 동로마 제국의 한 작가
○ 1348년, 동로마 제국의 한 작가
흑사병으로 유럽은 수년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흑사병 때문에 인구 7,500만-2억 명, 당시의 유럽 인구의 최소 30%에서 50%, 지역에 따라서는,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 주민의 70 - 80% 이상이 몰살당한 곳도 적잖았다.[16] 그 결과, 대체로 유럽 인구의 1/3 에서 절반 정도가 흑사병으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7] # 사실 아시아에서도 맹위를 떨쳤지만 유럽에선 위기 때마다 터져 나오는 종말론 등으로 '인류 멸망 카운트다운' 정도로 여겨졌다. 거기에 중세 말기에 크게 성장한 도시들은 전염의 폭증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허나 유럽 사회가 비과학적인 방식으로만 흑사병을 다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유럽에서도 많은 역병 의사[18][19]들이 환자를 격리시키고 환자가 사용한 물건을 소각처리하는 등 방역조치를 취했고, 시체 운반인처럼 환자와 노출되는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안면까지 완전히 덮는 마스크를 쓰고 일했다. #
몇몇 자치도시들은 이러한 방역 조치로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특히 밀라노가 성공적이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병자들을 격리하여 인구 15% 이하만이 사망했다.[20][21] 반대로 오르비에토라는 도시는 전 인구의 90%가 사망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도 모두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 외에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의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도 질병 발생구역을 격리하고 외부 선박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22] 그렇다 해도 인구가 밀집된 데다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대부분 시민의 반 내외가 사망했다.[23] 혹은 베네치아의 외딴 섬에 강제로 격리되어 버려지기도 했다.[24]
이 외에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산맥 등의 험준한 산간지방들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 아이슬란드같이 인구가 적었던 곳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다.[25]
또한 고기와 생선과 유제품 같은 동물성 단백질을 많이 먹는 식습관을 가진 네덜란드 같은 지역의 주민들은 흑사병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아서 흑사병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살았다고 한다[26].
폴란드 왕국은 이례적으로 비교적 작지 않은 영토를 지녔음에도 국가 전체가 전염병을 크게 피해갔는데, 이에 대해 여러 가설이 있다. 첫째는 앞선 지역처럼 인구도 적고 띄엄띄엄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고,[27] 둘째는 당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전염병의 정보를 듣자 빠르게 각 성에 봉쇄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카지미에시 대왕이 유럽에서 받아들인 유대인들이 위생을 전파했다는 추측도 있고 흑사병이 퍼진 경로에서 멀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이에 대해서는 단순히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다. 흑사병이 크게 퍼졌다는 사료는 없지만 그렇다고 흑사병을 피했다는 사료도 많지 않다는 것. 이 학자들은 당시 폴란드에서 갑자기 임금이 크게 상승하고 곡물 가격이 폭락했다는 통계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는 전염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28]
하지만 중세 의학수준이란 건 결국 거기서 거기였다. 대다수 치료법은 나쁜 피를 뽑아 체내의 균형을 맞춘다는 사혈요법이었고,[29][30] 전염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과학적 연구 역시 없었다. 일례로 1348년 10월 파리 대학교 의학부는 1345년 3월 20일에 화성, 목성, 토성이 일렬로 늘어선 것이 관측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구 대기에 치명적인 오염이 발생했고, 이것이 흑사병이 원인이라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당시의 의학 수준은 현저히 낮았다.[31]
애초에 치료도 불가능했을뿐더러 많은 사람들이 채찍질 고행단[32] 같은 행위에 합류했기 때문에 전 유럽의 인구는 큰 폭으로 감소했다.[33] 코니 윌리스의 소설 둠즈데이 북에 흑사병으로 한 마을이 전멸하는 과정이 생생히 그려졌다. 물론 당시 유럽인들이 광신도는 아니었으므로, 이들의 활동을 가능한 막아보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사망률이 극히 높았던 이유로 당시 유럽의 인구 과잉 또한 꼽힌다. 유럽에서 대형 쟁기가 도입되며 중세농업혁명으로 1150~1300년 사이 유럽 인구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경작지와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인구가 더 빨리 증가했다. 부족한 경작지는 과도하게 분할됐으며, 일부 지역에선 자율적이었던 삼포제가 강제로 시행되거나 공동지 및 임야의 이용권이 제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인구밀집 지역에선 경지 부족으로 생산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불황 속에서 격심한 기근을 겪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곡가의 상승으로 식단에서 전분의 비중이 높아지고 단백질 및 비타민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됐다. 영양실조는 면역력 저하로,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다.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사망률이 극심하게 차이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이유를 경제 사정과 식단의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34]
중세 흑사병 창궐 원인으로 고양이를 악마의 동물로 여겨 씨가 마르도록 잡아댄 덕분에 고양이의 개체가 급격히 줄고, 상대적으로 쥐가 대량으로 번식해 대대적으로 병이 번졌다는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고양이와 개를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오류를 터트려서 쥐의 천적이 사라져 결국 쥐가 더 번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오히려 쥐에서 (사람과 더 가까이 생활하는) 고양이나 개로 벼룩이 옮겨지면서 감염이 확산되었다고 볼수도 있다.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너무 줄어들어서, 유행이 잦아든 후 유럽에는 다중 유산 상속을 받아 부유한 사람이 늘어나고, 인구가 크게 줄어든 탓에 노동자의 임금이 많이 상승하는 등 경제적 영향이 있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일꾼들이 식사 제공에 많은 돈을 요구했으며, 이를 제재하기 위해 왕이 제한 선을 그었으나 그러한 것들의 필요 없이 일꾼들이 많은 임금을 받았다.
이렇게 노동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서유럽에서 농노제와 장원제의 쇠퇴가 가속됐다. 또한 흑사병 대처에 무능했던 장원 귀족과 교회의 권위나 권력도 크게 하락했다. 그래서 장원에서 탈주자도 늘어 도시에 흘러들어 자유민이 되는 수도 증가해 도시의 발전과 기독교의 권위도 추락해 르네상스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르네상스와 거의 같은 시대지만, 흑사병 창궐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르네상스의 시작보다 약간 빠르다.
유대인들은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모함을 받아 학살당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위생 관념이 유럽인 기독교도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아서 흑사병 사망자가 적었던 것에 기인한다. 유럽인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이 흑사병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을 보고는 저자들이 우리들을 죽이려고 일부러 흑사병을 퍼뜨렸고 자기들은 안 걸린다고 오해하여 반유대감정을 키웠던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6세 등 교황청에서는 이를 막고자 했다.
참고로 흑사병은 그래도 국가 체급을 유지하던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붕괴시켜, 동로마 제국은 결국 도시국가 수준으로 약화되어 명맥만 유지하다가 100여년 뒤 멸망한다.
5.2. 유럽 이외 지역의 피해
- 흑사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국에까지 퍼졌다. 북송~ 남송대 당시 중국의 인구는 1억을 돌파했으나 흑사병에 전란과 맬서스 트랩 등의 문제까지 겹쳐 6,000만 명대로 감소한다.[35] 이 때문에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원나라가 흑사병과 여러 가지 막장 테크가 겹쳐 결국 멸망했다. 사실상 원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14세기 초 칭하이- 닝샤 지역에서 처음으로 흑사병 병원체가 발견되었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은 건 다름 아닌 중앙아시아- 몽골 지역에 있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이었다. 이미 이 지역의 오랜 이슬람화로 인해 크게 세력이 약해져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해 가며 살아왔는데, 난데없이 페스트가 이 교역로를 통해 전파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의 네스토리우스 공동체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고 만다.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36]
- 위의 교역로가 박살난 여파로, 원나라의 실크로드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제 무역 또한 큰 타격을 입는다. 이 때문에 발생한 도적떼가 홍건적과 왜구. 그리고 이 두 세력은 망해가는 재정 상태 속에서 간신히 나라 구실이나마 유지하던 고려를 침입하여 그나마 버티던 고려의 국력을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버려 결과적으로 조선 건국을 앞당겼다.
- 중동에서도 마찬가지로 흑사병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중동권이 유럽보단 수학이나 과학 등 의료에 도움이 되는 학문과 의학이 비교적 발전한 편이었다고는 하나, 현재도 페스트는 그리 만만하게 볼 질병이 아닌데 14세기 의학 수준으로 페스트에 맞서 효과적인 대처가 얼마나 가능했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의학이 발달한 지역이긴 했던 만큼 환자 격리 및 시체소각 등의 조치로 피해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으나 이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만다.
-
이집트가 그 타격이 심했다. 지중해 지역과
인도 지역에 모두 접한 이집트는 지중해 무역의 주요한 거점이었고, 이렇게 교류가 많다보니 당연히 전염병의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의 저자 윌리엄 맥닐은 여기에 이집트를 지배한 맘루크(Mamluk)에 의한 요인도 든다. 즉, 이들이
노예를 구입하기 위해[37] 페스트가 처음으로 퍼진
흑해 연안과 지속적인 접촉을 가졌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1340년대 최초 유행 이후 1517년까지 페스트 유행 횟수를 계산해보면 이집트가 31건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리고
시리아에 20회,
이라크에 1회로 발생 빈도의 차이를 확연히 볼 수 있다. 최초의 페스트 유행은 1347년에 시작되어 1349년까지 갔고
카이로 인구 50만 중 20만, 총 인구 800만 중 1/3이 사망했다. 이 페스트는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들어와
나일 강을 따라 상 이집트(남부 이집트)로 진행해 나갔다.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페스트[38]가 이어져 인구가 지속적 감소했고, 1798년
나폴레옹 침공 당시에는 겨우 300만에 달할 정도였다.
- 페스트가 이집트에 미친 영향은 막심했다. 도시 인구가 반 토막이 났다는 건 도시 상인 계층과 도시 노동자가 반 토막이 났다는 걸 의미했고, 특히 항구 지역을 중심으로 퍼진 페스트의 특성상 상인들이 우수수 죽어나갔다. 농촌 지역 역시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갔다. 이집트 경제의 두 축인 상업과 농업이 이렇게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유럽 패권 이전-13세기 세계 체제'의 저자 자넷 아부 루고드는 이러한 인구 상실로 인해 이집트 경제와 산업이 충분한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고, 이 손실분을 벌충하기 위해 맘루크 왕조가 더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39] 그러다보니 또 경제와 산업 발전이 더뎌지는 저주받은 사이클이 생겨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 이후 이집트는 이전에 누렸던 무역의 중심지 위치를 거의 상실하게 된다. 여전히 중요한 지역이긴 했지만, 오스만 통치에 있어서는 다른 지역에 우선순위가 밀렸고 무역에 있어서도 오만 상인· 포르투갈 상인· 인도 상인들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 결국 유럽과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도 흑사병이 전파되어 고려에서도 흑사병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특히 충목왕이 1348년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는데, 이 전염병이 바로 흑사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다만 고려는 도시화가 유럽은 물론 중국에 비해서도 덜 됐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그나마 유럽과 중국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사실 무엇보다 '역병'이라는 사료 상의 두루뭉술한 표현을 학자들이 흑사병이라고 해석해서 알아냈을 정도로 기록이 부실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해석될 수 밖에 없다. 단,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지 고려에서도 흑사병으로 최소 수십만이 목숨을 잃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으며, 결국 흑사병과 더불어 경제파탄과 상술한 홍건적, 왜구침입, 기타 막장테크와 정부의 병크가 겹치면서 왕조가 조선으로 교체되었다. 실크로드 교역망이 붕괴되면서 명과 조선 모두 대외교역보다는 국내 농업생산력 회복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조선의 상업은 이후 청나라가 서양과 제한적으로나마 교류하면서야 제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일본은 흑사병 피해가 확실하게 언급된 고려와 달리 의외로 별 이야기가 없는데 원나라의 일본 침공을 막아낸 뒤 대륙과의 교류가 아예 끊어지면서 흑사병이 상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가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로 교체된 시기와 비슷한 걸 보면 영향이 없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 1352년에 전염병으로 병사한 카이로의 압바스 칼리파 알 하킴 2세 역시 사인이 흑사병으로 추정된다.
6. 사태 이후
서유럽에서는 1720년 마르세유, 동유럽에서는 1770년대 모스크바에서 발병된 이후 한 번도 흑사병이 나타나지 않았다. 위생 상태의 호전이 이유로 거론되지만, 이 무렵 유럽에서 현재 대형 쥐들의 주류를 차지하는 시궁쥐(Brown rat)와 이전까지의 주류였던 곰쥐(Black rat)들 사이의 생존경쟁이 벌어졌고, 그때 승리한 시궁쥐들에 기생하는 벼룩이 전염력도 약하고 인간 피를 안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1]
범유행전염병 중 1위라는 것이지, 단순 질병 중 1위는 아니다. 감염성 질병 가운데 가장 많은 인류를 살해한 질병은 그 자체가 '
마마(역병신)'라고 불린 천연두이며, 미래에는
인플루엔자(독감)가 그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
다만, 인구 수 조사만의 자료임으로 흑사병에 감염되어 죽은 것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죽은 이들도 포함하는 수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를 들어 흑사병으로 의사가 죽을 경우, 그 의사가 커버하던 지역의 사고 등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다. 문제는 열악한 중세의 의료여건상 안그래도 사망률이 높은 판에 그 현장에 모두 참가해야하는 의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흑사병에 접촉할 확률이 매우 높으며 따라서 사망률이 매우 높을 수 밖에 없었다는것이다.
[3]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 국왕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흑사병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국경을 빠르게 봉쇄했다.
[4]
일부 연구자들은 흑사병의 전파 범위나 그 속도, 증상이나 유전자 연구 등을 근거로 흑사병의 실체가 페스트가 아니라
에볼라 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성 출혈열의 한 종류가 아닌 가하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5]
EBS의 한
종교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이 나왔다. 흑사병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자
이슬람의 학자들과
가톨릭계 국가의 학자들이 모여 서로 교차
연구를 진행하고, 이들은 신성한
불을 사용하면 이러한 흑사병을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교황 주위에 불로 벽을 만들어 교황을 지키자는 결론이 나왔고,
벼룩들이 그 불을 뛰어넘지를 못하므로
교황은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6]
물론 분변은 잘만 관리하면 훌륭한 비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분변을 모아서 사람과 닿지 않는 공간에서 건조, 동결, 열처리 등으로 소독하여 유해한 세균과 바이러스를 사멸시키고 거름으로 쓰일 양분만 남기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이 잘 관리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질병이 창궐하기 딱 좋은 환경이 된다.
[7]
오히려 산파의 경우 아이를 받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관습이 있었기에 산모의 사망률이 매우 낮았다. 문제는 당시 의사들은 이를 미신으로 치부했던 것. 피란 생명의 본질적인 신성한 것이라는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1847년에 와서야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에 의해 개선되었다.
패혈증 항목 참고.
[8]
다만 이 방법은 페스트가 공기로 전파되는 만큼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9]
여러 차례 전염병을 겪은 끝에 나온, 당시로서는 경험을 통해 완성한 첨단기술의 산물이었다. 역병 의사의 가면은 약초를 집어넣고 태워서 공기를 정화하여 의사에게 당시 기술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를 했고, 집게와 막대기 등을 통해 거리두기를 어느 정도 실현시켰다. 물론 피를 빼거나 불로 지지는 등 미신적인 행위 자체는 남아 있었으나, 역병 의사 자체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볼 수 있다. 당장 인류가 미생물이 병원균임을 완전히 규명해낸 것은 과학혁명이 시작된 지도 한참이 지난
19세기 중반의 일이기도 하다.
[10]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북부에서 시작됐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도 나왔다.
#
[11]
Biological Warfare at the 1346 Siege of Caffa. Emerging Infectious Diseases, 8 (9), 971-975.
[12]
그러나 이 전술은 원래 전염병 확산을 목표로 하기보단 적군의 사기 저하와 함께 아군의 시체처리 시간 단축이 주 목적이다. 공격받는 입장에선 날아오는 시체가 아군이기에 정신적인 충격이 크다. 거기에 공성전이면 민간인까지 많으니, 군인이 아닌 민간인은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데, 이렇게 날아오는 시체는 그 충격을 극대화시키기 충분하다. 누군가의 가족, 친척, 친구였다면 그 충격은 배가 되고.
[13]
Michael Platiensis(1357), quoted in Johannes Nohl(1926). The Black Death, trans. C.H. Clarke.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pp. 18–20.
[14]
그의 남동생은 몽리외의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였는데, 흑사병으로 인하여 그곳에 살던 수도자 35명 중 34명이 죽고 오직 그만 홀로 살아남았다. 이후로도 그는 수도원에서 기르던 개 1마리와 둘이 남아 수도원을 지켰다.
[15]
페트라르카는 생전 가족 및 친구들과 방대한 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흑사병 창궐 시기와 겹쳤기 때문에 그는 이 사태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의 편지에는 시인답게 그가 겪은 비통과 참담함이 문학적 표현으로 낱낱이 적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되고 있다.
[16]
이를테면, 1348년의 피렌체(플로렌스)의 세무 기록을 토대로 하면, 불과 4개월 동안에 도시 주민의 80%가 사망했을 수 있다고도 한다.
[17]
학자에 따라서는 60% 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당시 흑사병의 전파 속도가 너무 빨라서, 유럽의 의사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흑사병이 어디로부터 전파되었는지 따져볼 새도 없이, 창궐 2년째인 1348년에 이미 전체 인구의 1/3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을 피해 흩어졌기 때문에, 이 인구감소가 모두 흑사병에 의한 사망자는 아닐 수 있지만, 채 2년도 되기 전에 1/3의 인구 감소가 발생했다면, 1353년까지 이어지는 흑사병 창궐 기간 동안 절반 혹은 그 이상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18]
대표적으로
노스트라다무스가 있다.
[19]
다만 흔히 떠올리는 새대가리
역병 의사 복장은 흑사병 팬데믹으로부터 150년 가까이 이후에 등장한 최종진화형이고, 흑사병 당시에는 그냥 천으로만 얼굴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20]
이때
밀라노가 사용한 격리 방식은, 흑사병에 걸렸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해당 병자의 가족들을 모두 집에 가둬놓고 집 주변에 벽을 두른 뒤 아사할 때까지 내버려두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비인간적인 조치였지만, 감염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당시 기준으로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선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21]
이는 밀라노가 당시 주변 국가들과 달리 원로원도 과두정도 아닌, 순수한 1인 독재로 통치되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당시 밀라노의 영주였던 루키노 비스콘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였지만, 덕분에 방역을 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22]
특히 외부 선박의 경우 화살을 쏴서 막기도 했다.
[23]
그래도 이 정도의 수치라 할지라도 좁은 공간에 많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의 특성상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상술한 대로 지역에 따라서는 인구의 70%가 사망한 지역이 있을 정도라면 도시에서 50%라면 그럭저럭 선방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24]
포벨랴(포벨리아, 포베글리아)섬.
흑사병 환자 시체 16만 구가 이 섬에 버려졌다. 정신병원이 한때 들어섰으나 병원장의 끔찍한 만행이 드러나고 나서 몇 년 후 폐업해버렸다. 귀신의 섬이라 불리는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절대로 제한된다. 다만 1576년
페스트 환자들의 거주지로 사용된 곳은 이곳이 아니라 아닌 라자레토라는 다른 섬이다.
[25]
이 때문에 현대에 와서도 공중보건상 교통이 편리해질수록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아, 공항이나 항구 등에 질병 여부나 예방접종 여부를 조사하는 직원들이 있다. 만일, 예방접종을 맞지 않았을 경우 그 자리에서 돈을 내서 백신을 맞거나 거부할 경우에는 입국 금지 시켜버린다.
[26]
출처: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 B. H. 슬리허르 판 바트 저/이기영 역/ 사회평론아카데미
[27]
폴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삼림 비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28]
하지만 주변 국가들의 인구 감소가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폴란드도 주변 국가들과 왕성한 무역을 했기 때문.
[29]
이 치료요법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명목으로 무식할 정도로 피를 뽑는다는 것이다.
손가락 따기처럼 조금 뽑고 마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몇 리터씩 뽑아내곤 했는데 이러니 치료가 되기는커녕 과다출혈로 죽을 수밖에 없다.
[30]
이런 치료법은 무려 18세기에도 살아남아 루이 15세의 형, 브르타뉴 공작의 사망 원인도 이러한 사혈요법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시기,
루이 15세가 병에 걸렸을 때 그의 가정교사가 그를 격리하면서까지 사혈요법을 행하려는 것을 강력히 막았다. 덕분인지는 몰라도 친족들이 우루루 죽어나갔음에도 본인은 어찌저찌 목숨은 구했다.
[31]
그런데 이 시기 유럽은 기후 온난화가 정점을 찍었던 때라서, 흑사병이 널리 퍼지는데 많은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경우,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얼음 속에 묻혀 있던 바이러스들이 발견되기도 하는 실정이고... 비록 당대 학자들이 완전히 틀린 가설-분석-결론을 내놓기는 했지만, 시대를 감안하자면 기상학적인 관찰을 통해 흑사병의 전파 요인을 규명하겠다는 접근 방법은 그 자체로서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03284.html
[32]
흑사병을 타락한 인류에게 내린 하느님의 징벌로 해석하며 스스로의 몸을 채찍질하면서 순례하는 집단들로, 이들은 흑사병의 전파를 가속화했을 뿐만 아니라 폭도로 돌변해 마을을 약탈하기도 했다.
[33]
보면 알겠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동으로 이러면 병 안 걸린 건강한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전염된다. 게다가 성격상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여 모인다. 그리고 그 집단이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순례'하고 돌아다닌다...
[34]
베르나르트 슬리허 반바트, 『서유럽 농업사: 500-1850년』, 이기영 역 (까치글방, 1999), 126-129
[35]
다만 중국은 평시에도 혼란이 심하면 호적상 인구가 확 줄었다가 안정되면 복구되기를 반복했고 또 일정 비율은 언제나 세금을 낼 수 없는 빈민층이라 통계에도 빠지는 등 유럽에 비해 인구 추계가 부정확했기 때문에 얼마나 줄었을지는 알기 어렵다.
[36]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세계 최대 높이 산정
호수인
이식쿨 호 인근에 있는 네스토리우스 공동체의 묘비의 연도를 살펴보면 더욱 명백해지는데, 1336년까지만 해도 한 해에 한두 개 정도였던 묘비가 1337~1338년에는 32개, 1338~1339년에는 72개에 달한다. 무슨 이유로 인해 사망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건데, 바로 페스트가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식 쿨 호수 인근의 네스토리우스 교단 공동체의 묘비는 1345년을 끝으로 사라진다. 14세기 페스트를 전후로 이 공동체가 거의 궤멸해 버린 것이다.
[37]
맘루크는 원래 노예 군인을 의미하는 말로, 군인으로 시작했다가 힘을 잡아 14세기부터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14세기 이집트는 오직 맘루크 출신만이 요직에 올랐고 주요한 업무를 담당했기에, 지속적인
노예
군인의 공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38]
위에서 언급한 맘루크 요인이 작용한 결과일지도? 다른 어느 중동 지역보다 심한 결과를 보여줬다.
[39]
얘네는 원래 지들끼리도 싸우기 바빴던 애들이라, 이런 상황에서 남들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경제 발전 등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