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2:45:55

필리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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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
필리프 4세
Philippe IV
파일:Philippe IV.jpg
출생 1268년 4~6월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
사망 1314년 11월 29일 (향년 46세)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285년 10월 5일 ~ 1314년 11월 29일
나바라 국왕
1284년 8월 16일 ~ 1305년 4월 4일
샹파뉴 백작
1284년 8월 16일 ~ 1305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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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필리프 3세
어머니 아라곤의 이사벨
배우자 호아나 1세 (1284년 결혼/ 1305년 사망)
자녀 마르그리트, 루이 10세, 블랑슈, 필리프 5세, 샤를 4세, 이자벨, 로베르
종교 가톨릭
별칭 미남왕 (The Fair/Le Bel)
철왕 (The Iron/Le Fer)
}}}}}}}}}
1. 개요2. 봉신과의 전쟁
2.1. 아키텐 공국2.2. 플랑드르 백작령, 황금 박차 전투
3. 교황과의 대립
3.1. 아나니 사건과 아비뇽 유수3.2. 독실한 신자 그리고 생 루이
4. 성전기사단 탄압5. 사후
5.1. 귀족 리그들의 결성과 왕정의 불안정5.2. 후계
6. 사적 면모
6.1. 외모6.2. 성격
7.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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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카페 왕조의 제11대 왕이며, 필리프 3세의 아들이다.

프랑스사에 있어 역사적 의의가 큰 왕이다. 그는 대회의(Grand Conseil), 의회(Parlement), 재무원(Chambre des comptes)과 같은 행정 기관들을 파리로 이전하면서 관료제를 확립시켜 봉건제 국가였던 프랑스를 중앙집권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로마로부터 독립했다. 필리프 4세의 재위기간은 프랑스 최고 전성기 중 하나로, 유럽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인구가 높았던 시절이었다. 1284년 나바르의 여왕이자 샹파뉴 여백작인 후아나 1세와 결혼하여 공동왕 필리페 1세로 즉위했는데, 1305년 후아나 1세가 사망하자 아들 루이 10세가 나바라 왕국의 단독 국왕이 되었다.

2. 봉신과의 전쟁

필리프 4세의 재위는 프랑스 내부의 봉신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2.1. 아키텐 공국

프랑스 서남부에 위치한 아키텐 공국은 카롤링거 왕조 시절부터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아키텐 공작 휘하에 거의 자치령에 가까운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12세기경 아키텐의 알리에노르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영토를 보유한 플랜테저넷 가문의 앙리 2세가 혼인하게 되면서, 영국왕은 아키텐도 소유하게 된다.

13세기에 들어 심화된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왕국의 주권자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의 정치이론에 의하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파리 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따라서 1294년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의 소환 명령에 불응했고,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서 위신을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항복하고 대관과 일부 수행원들을 주요 도시에 입성시키라고 요구한다. 에드워드는 이 거래를 받아들였지만 필리프는 애초부터 아키텐을 먹을 생각인터라 '수행단'의 행렬은 몇 주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에드워드에게 내린 소환 명령도 취소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끝내 나타나지 않자 필리프는 공작령 몰수를 선언하고 공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2.2. 플랑드르 백작령, 황금 박차 전투

아키텐 전쟁은 프랑스에게 높은 재정 부담을 안겨주었다. 프랑스는 전국의 쌍껑티엠 (성직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부과되는 2%의 세금), 그리고 가장 부유한 지방인 플랑드르에 의존한다. 당시 플랑드르는 기 드 당피에르 백작의 치하에 있었는데, 기 드 당피에르는 인근 에노 백국의 도시들에서 일어난 폭동을 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압했다는 것 때문에 파리에서 왕의 재판을 받아 벌금을 내고, 플랑드르 도시들에 대한 권한을 잃는다. 모욕당한 기 드 당피에르는 1297년에 딸 필리핀을 에드워드 1세의 사남 에드워드 2세와 혼인시킴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필리프 4세는 기 드 당피에르의 일가족을 감금하고 혼인을 취소시킨다.

기 드 당피에르는 프랑스 왕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지만 푀르너 전투에서 참패한다고, 릴, 베르그, 덩케르크를 점령당한다. 드 당피에르는 겐트에서 영국의 지원을 기다리며 공성전을 벌인지만, 오래가지 않아 플랑드르는 프랑스의 손에 떨어진다. 1301년 5월에 필리프는 자크 드 샤띠옹을 플랑드르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필리프와 샤띠옹은 상인들과 귀족들에게 친화적인 조세정책을 펴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 기 드 당피에르에게 친화적이던 수공업자들의 미움을 샀다. 하지만 플랑드르에는 반프랑스파인 "리에바에르트"(liébaert)당이 브뤼허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1302년에 황금 박차 전투가 발발한다. 프랑스는 가장 주요 인물들인 국새상서 피에르 플로트와 로베르 2세를 잃고 완패한다. 플랑드르가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시점이었다.

3. 교황과의 대립

필리프 4세가 교황과 대립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재정적인 이유다. 필리프 4세는 즉위하자마자 강력한 통일정책을 펼쳐, 프랑스 통일에 방해가 되는 요소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그리고 그러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플랑드르의 백작 기 드 당피에르와 싸웠다.[1] 그러한 과정 속에서 막대한 전비 지출이 있었으며, 그러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필리프 4세는 당시 부유한 세력이었던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인 성직자세[2]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에 성직자들과 교황청이 반발했고, 교황 보니파시오는 아예 성직자세를 자발적으로 내는 성직자들까지 파문시키겠다고 위협한다.

둘째는 내정 간섭과 법률적인 이유다. 그레고리오 7세의 주도로 1059년에 시작한 그레고리오 개혁은, 인노첸시오 3세, 인노첸시오 4세 치하에서 법률적인 강화로 이어진다. 교황청은 십자군 정책과 "교황의 주도로 기독교 세계를 융합하자" (reductio ad unum)를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이를 필두로 법적 개혁을 감행했다. 강화된 종교법은 불가피하게 국가 주도로 도입된 세속법과 부딪혔다. 당시 유럽 법조계에는 각자 다른 대학에서 가르치는 종교법과 로마법 (또는 세속법)이 공존하고 있었다. 교황과의 충돌은 모순적인 법체계들의 충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교황은 이탈리아 출신 주교들을 프랑스 교구에 임명했다. 프랑스 왕은 충성스러운 봉신들에게 고위 성직자로 책봉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교황과 이런 중요한 권리를 분담한다는 것은 프랑스 왕에게 큰 위협이었다.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독실한 신자이지만 은둔자의 생활에 익숙하고 무능한 정치가였던 첼레스티노 5세를 절묘한 정치로 교체한 종교법 전문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필리프 4세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프랑스 왕국이 지방 영주들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십자군 전쟁에 나서주기를 원했는데, 필리프 4세가 통일정책을 펼치면 지방 영주들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필요한 군사 차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필리프 4세가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자 교황은 반발하며 이에 대한 금지 칙령(clericis laicos)을 내렸는데 필리프 4세는 분노하여 교황청으로 가는 물자를 끊는 것으로 대응했고, 결국 견딜 수 없었던 교황은 1297년에 금지 칙령을 취소하고 말았다. 그는 교황의 권위에 강조하는 동시에 화해의 표시로 프랑스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을 권리를 예외적으로 부여했고, 루이 9세를 시성한다.

하지만 교황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파미에르의 주교 베르나르 세세(Bernard Saisset)가 파미에르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재점화한다. 세세는 필리프 4세가 랑그독을 점령한 것에 반발해 필리프 4세의 정통성을 의문시하는 발언을 했고, 독립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푸아 백작을 선동한다. 필리프 4세는 그를 상리스 재판(1301년 7월)에서 이단과 국가반역죄로 투옥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교황의 감독 하에 프랑스에 파견된 도미니코회 출신 종교재판관들은 카타리파[3]를 심문, 탄압하고 있었다. 카타리파에 호의적이고 도미니코회에 적대적이던 프란체스코회 출신 수도사 베르나르 델리시외는 반종교재판관 운동을 벌이고, 필리프 4세의 지원을 요청한다. 필리프 4세가 이를 승낙하자, 교황은 세속 왕권이 교권을 침해한 것이라 판단한다. 1301년 12월 5일에 새로운 교서 Ausculta fili(들어라 아들아)를 내린다. 여기서 그는 베르나르 세세를 석방하라 요구하고, 1302년에 열릴 공의회에 프랑스 성직자들을 모두 소집하며, 필리프 4세에게 부여한 성직자 과세권을 취소한다. 필리프 4세의 국내 정책, 조세 정책, 그리고 통화/재정적인 실수에 대한 인신공격 또한 잊지 않는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즉각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리고, 1302년 4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른바 삼부회를 소집하여 귀족과 제3계급의 지지를 얻었다. 특히, 삼부회를 관장한 플로트는 교황의 교서를 왜곡하여 청중의 반교황적 감성을 고무시키고, 프랑스 성직자들의 지원을 사고자 성직자 권리를 복구하는 개혁을 약속한다.

교황은 삼부회에 대한 답변으로 Unam Sanctam(유일한 신성, 1302년 11월 18일)이라는 교서를 선포한다. 그는 세속 권력과 신성 권력의 관계를 정립하는 원론적이고 교리적인 논거를 나열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에 기반해 왕은 주교를 심판할 권리가 없으나, 교황은 왕을 심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르무안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해 필리프와 협상하려 한다.

3.1. 아나니 사건과 아비뇽 유수

1303년에 3월 7일에 플로트 사망 이후 필리프의 최측근이 된 기욤 드 노가레는 전임자보다 더 강경하게 교황을 성물매매자이자 이교도라고 비난한다. 격노한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데, 필리프 4세는 이러한 보나파시오 8세의 움직임보다 한 발 더 빠르게 보나파시오 8세와 원수 관계였던 시욘나 콜로나와 결탁하였다. 1303년에 필리프 4세는 기욤 드 노가레와 시욘나 콜로나를 교황 보나파시오 8세가 머물고 있던 작은 시골 마을인 '아나니'로 파견한다. 노가레와 달리 보니파시오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콜로나는 [4]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고 그를 납치하였다. 보나파시오 8세는 기욤 드 노가레와 시욘나 콜로나에게 저항하다가 시욘나 콜로나에게 뺨을 얻어맞게 된다.

이 충격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하고, 이후 즉위한 교황도 곧바로 사망하자, 필리프 4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교황에 앉혔다. 그가 바로 클레멘스 5세다.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프랑스 리옹에서 교황에 즉위했다. 그러던 중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7세가 로마를 점령하자 클레멘스 5세는 1307년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버렸다. 이가 바로 아비뇽 유수이며, 교황은 이후 70년 동안 프랑스 국왕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프랑스 성직자들의 독립성은 "갈리아주의"[5]의 초석을 깐다.

3.2. 독실한 신자 그리고 생 루이

교황과 대립했다고 해서 필리프 4세가 기독교 교리를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필리프 4세는 굉장히 독실한 신자여서, 항상 도미니코 수도원 출신 고해 신부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예수와 같이 거친 옷을 입었으며, 콤포스텔라나 순례길 [6]에 올랐다. 며느리의 외도남들을 강경하게 처벌한 것도, 남색과 이단을 일삼는 것이라 비판받은 보니파시오 8세와 대립한 것도 부분적으로나마 같은 취지에서였다. 필리프 4세는 특히 카페 왕조, 나아가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한 성자였던 조부 생 루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필리프와 교황의 대립도, 사실 생 루이의 기존 정책을 더 멀리 밀고 나아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생 루이 또한 왕권신수설과 세계적인 기독교 제국의 대표인 교황청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4. 성전기사단 탄압

1120년에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탄생한 성전기사단은 조직 확대과정에서 조직원들의 재산을 맡아 이를 바탕으로 금융업을 벌였다. 조직원뿐만 아니라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길 원했던 왕과 대귀족의 예금 금고 역할을 하기도 했고, 높은 금리로 돈을 대출해주는 등 오늘날의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루이 7세, 필리프 2세 시절부터 프랑스 왕들은 십자군 자금을 성전기사단 금고에 예금했고, 필리프 4세가 1297년에 돈을 빼내서 롬바르디 출신 금융가들이 관리하는 루브르 금고로 이전했지만, 성전기사단을 불신해서라기보다 아키텐 전쟁을 위해 급전이 필요했고, 루브르에서 돈을 빼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법적으로는 교황의 권위 아래 있었으나, 각국의 국왕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국가 간의 전쟁을 도맡는 등 국왕의 영향 또한 받았다. 성전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초기에는 인기가 높았지만, 1250년대에 접어들면서 십일조 조세 문제 때문에 교구 성직자들과도 자주 마찰을 빚었고, 수도사스럽지 못한 부유함과 "전쟁하는 수도단"이라는 이질적 특성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플랑드르 원정 등 전쟁으로 전비 충당이 시급했던 필리프 4세는 유대인을 탄압함과 동시에[7] 1307년부터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교황을 이용해서 성전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았다. 결국 1312년 교황을 압박해 성전기사단이 악마 숭배, 남색, 살인, 약탈 등을 일삼는[8] 범죄 집단이라는 교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파리 성전기사단을 구속한 뒤 갖은 고문을 시도해 138명 중 134명의 자백을 얻어냈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와 노르망디 지부장 제오프로아 샤르네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화형시켰다. 《 푸코의 진자》 등에서는 자크 드 몰레가 "머지않아 프랑스 왕과 클레몽 교황 모두 나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빌게 될 것이다. 너와 너의 자손들은 13대에 걸쳐 저주 받으리라!!"라고 소리치며 최후를 맞았다는 풍문도 있지만 실제 자크가 유언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9]

성전 기사단 탄압을 바탕으로 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동생 샤를 드 발루아( 필리프 6세의 아버지)와 차남 필리프( 필리프 5세)를 독일왕 후보로 내세우기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5. 사후

이렇듯 필리프 4세는 교회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이룩했지만, 아라트 숲에서 사냥 중 멧돼지의 공격으로 입은 상처와 뇌출혈로 1314년에 갑작스레 사망한다.

5.1. 귀족 리그들의 결성과 왕정의 불안정

필리프의 오른팔이었던 앙게랑 드 마리니는 뛰어난 재테크로 빠르게 부를 축적했고, 그 탓에 시기를 사고 있었다. 필리프 4세의 조세 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은 차마 왕을 비판하지 못하고, 마리니의 국고 탈취와 잘못된 재정 운영으로 인해 돈이 부족한 것이라 주장했다. [10] 필리프 4세가 사망하자, 필리프의 동생이자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샤를 드 발루아의 권고에 따라 마리니는 처형당했다.

동시에, 북부의 귀족들은 1314년에 필리프가 도입한 세금을 두고 관습법 위반이라 비판했다. 필리프는 토너먼트(귀족들의 친선 싸움)을 금지하여 군란을 막으려고 했지만, 장 옥세르의 지도 하에, 부르고뉴, 샴파뉴 등 110명의 지방 귀족들은 자치를 주장하며 귀족 권리 신장을 요구하려 했다. 프랑스는 일종의 영국식 명예혁명에 직면해 있었다.

5.2. 후계

필리프 4세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하지만 1314년에 첫째와 셋째 며느리인 마르귀리트와 블랑슈가 오네 가문의 기사 둘과 외도를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고, 필리프 4세는 문란함을 바로잡고자 오네 형제를 살을 발라서 처형하고, 며느리들을 가이아르 성에 감금한다. 그 탓에 장기간 동안 두 아들들은 부인을 잃었고, 얼마 가지 않아 카페 왕조 본가의 대가 끊긴다.

그의 장남 루이 10세는 즉위 2년 만에 20대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손자 장 1세는 루이 10세가 죽은 이후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죽었다. 조카 장 1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차남 필리프 5세 역시 상속자 없이 즉위 6년 만에 20대의 나이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 3남 샤를 4세는 자신의 여동생 프랑스의 이자벨을 이용하여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도 관여했으나, 역시 상속자없이 즉위 6년 만에 30대 초반의 나이로 죽게 되어서 결국 카페 왕조의 직계는 끊기게 되었다.

필리프 4세의 고명딸인 프랑스의 이자벨 플랜태저넷 왕가로 시집가게 되어 모계를 통해 플랜태저넷 왕조의 에드워드 3세에게 필리프 4세의 혈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사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모두 각각 장 1세, 필리프, 샤를 등 아들이 1명씩 있었지만 모두 영아기 때 요절했다(...). 더불어 딸들도 있었으나, 《 살리카법》의 확대 해석으로 인해 모계 계승이 불인정되어 왕이 되지 못했다.

이후 프랑스의 왕위는 필리프 4세의 동생이었던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이어받게 되어 그가 ' 필리프 6세'로 즉위해 발루아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샤를 4세의 생질이자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함에 따라 백년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6. 사적 면모

6.1. 외모

미남이었기에 "미남왕"이란 칭호가 붙었다.[11] 이 칭호는 한국어로 번역하기에 따라서 "단려왕"이라고도 한다.

필리프 4세의 최측근이었던 남프랑스 출신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기욤 드 노가레의 증언은 이러하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정조를 지키고, 육체가 순결하며, 겸허하고, 외모를 뽐내지 않으며, 말로 으스대지 않고, 결코 성내지 않으며, 아무도 증오하지 않고, 아무도 시기하지 않으며, 모두를 사랑하신다. 우아함의 극치이자, 너그럽고, 경건하고, 자비롭고, 항상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고, 타인을 비방한 적이 없고, 신실하고, 독실하고, 성당을 짓고 자선을 베풀고, 얼굴이 아름답고, 행동거지가 우아하며, 맞서는 모든 적들에게조차 엄숙한 분이다.

남프랑스 출신으로서 카페 왕조를 사무치게 증오한 파미에르의 주교 베르나르 세세는 필리프 4세의 핵심적인 정적이었다. 어렵사리 화해를 한 뒤에 사석에서 '고대의 새들이 올빼미를 왕으로 모신 이유가 재주는 보잘 것 없지만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란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
당신도 올빼미와 같구려.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아름답고, 또 말없이 째려보기만 하지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오.

파토나고 베르나르 세세는 이단과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살아남긴 했는데 운 좋게도 필리프 4세에게 잊혀져서라고.

박해를 피해 프랑스 왕국을 탈출했던 성전기사단의 단원도 필리프 4세라면 치를 떨었지만 그의 외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왕은 키가 큰 남자들보다 손바닥 한 뼘이 더 크고 뼈가 굵었으며 둔부와 허벅지는 탄탄하고 다리가 무척 길었으며 사자처럼 강인하고 용맹했다. 그는 얼굴이 아주 아름답고 피부가 매우 고왔으며 금발에서 광채가 흘렀고, 동시대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본 사람이라면 내 말이 결단코 진실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 성전기사단 단원

6.2. 성격

필리프 4세 시절 프랑스가 이룩한 업적 중 필리프 4세의 공헌도를 알기 위해 왕의 성격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 로베르 앙리 보티에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사실 필리프 4세는 정치보다는 사냥에 관심이 많아 기여가 적었다고 주장한다. 황금 박차 전투(1302년)까지 필리프 4세는 사냥에만 몰두해서, 국쇄상서인 플로트가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했고, 왕비 잔( 호아나 1세)의 사망 이후에는 종교에 심취해서 교회 건설과 순례에 집중했다고 한다. 플로트가 사망한 이후, 기욤 드 노가레나, 시종 앙게랑 드 마리니가, 거의 섭정자와 비슷한 권한을 갖고 큰 업무들을 도맡아 했다. 필리프 4세는 굵직굵직한 업적, 정복 전쟁이 주는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상당히 과묵한 왕이었고, 측근의 확인 없이는 결정을 내리기 싫어했다고 한다.

7. 창작물에서

필리프 4세와 자식들을 다룬 《 저주받은 왕들》(Les rois maudits)이라는 대하역사소설이 있다. 조지 R.R. 마틴이 《 얼음과 불의 노래》를 썼을 때, 영감을 많이 받은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선 위의 성전기사단 박해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템플 기사단 괴멸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필리프 4세가 템플 기사단 배신자의 조력, 암살단의 지원을 등에 업고 템플 기사단의 본거지를 습격하는 게 게임의 첫 스토리다. 자크 드 몰레가 화형당하는 장면을 클레멘스 5세와 함께 바라보는 것으로 등장.

나이트폴: 신의 기사단》의 등장인물이다.
[1] 당시 플랑드르 백작은 지금의 프랑스 북부,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를 다스렸기에 필리프 4세에겐 상당한 위협이었다. [2] 소득의 10%에 해당. 성직자세는 프랑스, 특히 프랑스 북부에서 오래된 관습이었다 [3] 12세기에 창설된 이교도 분파 [4] 콜로나는 니콜라오 4세 시절부터 교황을 조종했던 추기경 가문이었는데, 보니파시오가 개혁 차원에서 콜로나들을 몰아내었기 때문에 억하심정을 갖고 있었다. 그 뒤로 이들은 보니파시오를 적그리스도와 이교도로 그려내는 프로파간다에 일조한다. [5] 프랑스 종교 문제에 있어서 왕권이 교황청보다 우선한다는, 교회 민족주의 움직임 [6]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순례길. 오늘날 카미노데산티아고로 불린다 [7] 1306년 한 번에 추방된 유태인만 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의 재산은 당연히 몰수되어 왕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이후 15~16세기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때도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재산은 거의 대부분 몰수당했다. 다만 필리프 4세는 규제가 없는 비 유대계 고리대금업자의 천정부지로 치솟는 이자 때문에 나중에 추방한 유대인들이 세금만 내면 다시 프랑스로 귀환하여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고 추방된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대인 추방후 일어난 일 [8] 사실 당시 성전기사단이 저질렀던 일반 범죄를 따지면 저지른 죄가 꽤 됐다. 다만 이런 짓은 당시 대부분의 유럽 영주나 귀족들이 한두 번씩은 저지르던 행위였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나중에 그가 권력자에게 단단히 찍혔을 때이다. 예를 들어 재판없이 일반 농노나 상인의 재산을 빼앗거나 죽일 경우라도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지만, 나중에 다른 영주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왕에게 찍힌다면 그걸 근거로 강도죄와 살인죄로 기소해서 참수, 영지 몰수 동시 콤보를 먹게 되는 것이었다. [9] 이는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인용되어 유언으로 쓰인다. [10] 사실 마리니가 국고에서 직접적으로 사익을 위해 빼낸 적은 없고, 당시로써는 당연한 내부자 거래를 통해 부를 쌓은 것이었다. 전쟁과 궁궐 건설 등 대형 인프라 비용 때문에 국고가 바닥난 것이었다. [11] 원래 카페 가문 직계 한정으로 가계 구성원 중에는 미남이 많았다. 그의 잘생긴 외모에 의한 '미남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미 왕자 시절의 일이었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변함이 없는,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으로 상대방을 대했다고 한다. 당대의 어떤 인물은 이러한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사람도, 짐승도 아니다. 그는 조각상이다. Ce n'est ni un homme ni une bête. C'est une stat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