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 역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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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지키스탄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항목으로, 오늘날 타지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활동했던 왕조가 워낙 많았거니와 타지크인들이 부하라, 사마르칸드, 발흐 등지에서 활동했던 이유로 우즈베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 역사와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이 지역은 실크로드의 실세 소그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2. 고대
고대부터 파미르 고원 일대에는 청동기 문명이 나타났다. 판자켄트에서 서쪽으로 15km 거리에 위치한 지역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사라즘(Sarazm)이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기원전 4천년경에서 3천년경 기간 사이에 건설된 도시였다.기원전 2천년 경 무렵 인도유럽어족 유목민들이 볼가 강 유역과 우크라이나, 캅카스 일대에서 이란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인도로 이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트란스옥시아나로 이주한 인도유럽어족들은 타지크인들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 파키스탄의 칼라쉬, 아프가니스탄의 누리스탄인, 오늘날 파미르인들 역시 이 인도유럽어족 이주민들의 직계 후손이며 오늘날에도 적발벽안의 특성을 보인다. 인도유럽어족들은 우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곡식을 재배하기 적당한 땅이 나타나면 파종을 하고 몇 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고갈되거나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부족원 일부가 우마차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거주 영역을 급속히 넓혀나갔다.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스키타이, 사카족이라 불리는 기마 유목민들이 나타났다. 청동기 시대에는 말을 직접 타는 방식보다는 마차를 이용하는 방식이 흔했다면 스키타이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은 종자가 개량된 이유로 좀 더 크고 튼튼한 편이었다. 기마술을 바탕으로 스키타이 유목민들은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는 이 지역을 소그디아나라고 불렸으며, 그 외에도 박트리아와 마르기아나 등 여러 지역들에 다양한 세력들이 형성되었다. 중앙아시아의 마사게타이족 등은 페르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페르시아에 기병 전력을 제공하였으며, 조로아스터교가 번성하고 페르시아화가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붉은 색 머리에 파란 눈을 지녔다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정복 과정에서 이들의 조상 중 한 갈래로 여겨지는 마사게타이족과 싸웠으며 이후 소그드인 출신 록사나를 왕비로 맞아 결혼한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셀로우코스 장군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향수병 때문에 그리스에 돌아가고 싶어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불만을 품고 종종 폭동을 일으켰으며 이 와중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건국되었다.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의 중심지와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영토는 다소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 타지키스탄 역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타흐티 산긴(Takht-e-Sangin)의 고대 유적에서는 이오니아 식 기둥이 발견되었으며 판자켄트에서는 고대 로마의 전설상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마시는 것을 표현한 조각상이 불교와 그리스 고대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신상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고대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신도시 중 가장 동쪽에 있었다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 유적지가 오늘날 타지키스탄 서부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이 토하라인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소그드인들은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동하여 오아시스 도시들을 거점으로 국제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파미르고원 동부는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중세 토하리스탄에 해당하고, 파미르 남부는 인도의 쿠샨왕조의 영토로 고대 토하리스탄에 해당한다. 토하라인들이 건국한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타지키스탄 일대에는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관개시설이 확충되어 농업 생산성이 증대되었다. 이는 인구 증가와 교역량 확충으로 이어졌다.
3. 고대 말
소그드인들은 에프탈 족과 서돌궐 제국 등 여러 유목 민족과 협력하며 고대 말부터 중세 초까지 실크로드 교역의 실세가 되었다. 타지키스탄을 근거지로 한 소그드인들은 동서남북 무역을 통해 유목 제국 운영에 필요한 세금과 여러 물자를 공급하였으며 도시 운영과 행정을 담당하였다. 서기 6세기 중반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북인도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무역로가 뚫리면서 타지키스탄 산악지대 역시 무역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타지키스탄의 아지나 테페(Ajina Tepe)에서는 13미터 길이의 와불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당시 무역상들이 지나가는 도시의 불교 사원에 이런저런 보물들을 시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불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이 지역 역시 고대부터 경제가 부흥해왔음을 알 수 있다.[1]
이슬람화 이전에는 성문법이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회 및 경제생활을 규제했다. 결혼, 이혼, 재산, 조세에 관한 문제가 모두 성문법에 의해 규제되었다. 복잡한 사회가 그렇듯이 중앙아시아의 국가들도 정교한 법이 필요했다. 밭에 관개용수를 대는 것처럼 경제적으로 중요한 일은 재산권과 수용권, 지주에 대한 보상 등의 측면에서 규정되었다. 소그드인들은 대부분 신용증서나 송장 같은 문서를 읽고 쓰는 능력과 이자 계산 및 상품 배송 관련한 산수에 능숙했으며 배운 사람들을 우대했다. 오아시스 도시들의 생존 자체가 무역 및 주변 유목민들과의 관계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교역과 외교, 도시의 관리 모두가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였다. 또한 건조지대에서 한정된 수자원으로 농사를 짓는 일은 관개시설의 흐르는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용수로의 폭과 깊이, 지하수로의 흐름, 출구 수문의 크기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어야만 했다.
사라진 세계에 관한 이 같은 상세한 내용은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는 1933년 남부 타지키스탄의 산꼭대기에서 한 목동이 항아리 뚜껑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먼지더미 속에서 발견한 덕분이다. 그것은 아랍인들이 드리닥치기 전 판지켄트의 통치자 데바슈티치(Dewashtich, 재위 721~722)가 도주하면서 무그산에 1,500년 전 묻어둔 커다란 도자기 그릇을 덮고 있었다. 그 항아리에는 금은보화가 아니라 양피지에 쓰인 많은 공식기록물들이 담겨 있었다. 밀랍과 송진으로 세심하게 밀봉한 덕에 1933년 그날까지 그 내용물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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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세
사산 왕조가 이슬람 제국에게 무너진 이후 타지키스탄 일대도 자연스럽게 아랍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아랍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이슬람 이전 기존 중앙아시아 문화가 강했던 것은 물론 이슬람 제국의 변방에 위치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9세기 초반에는 사만 가문들에 의해 819년, 사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타지크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만 조의 확실한 실질적인 시조인 사만 쿠다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그 세력을 확립한 기록이 있으며, 그가 파르티아 제국의 대가문이었던 미흐란 가문 소속 혹은 미흐란 가문과 어느 정도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기록적인 단서가 있기에 사만 가문 역시 파르티아계 토호 혈통인 것으로 보인다.사만 왕조는 압바스 칼리프조에 반기를 들던 사파르 왕조를 붕괴시킨 후에 그 대가로 반독립적인 상태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사만 왕조의 지배자들은 종교적으로는 압바스 칼리파에게 충성했을지는 몰라도 중앙 정부로 세금을 보내지 않았다. 사만 왕조의 영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그리고 이란 동부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에 걸친 호라산 지역을 지배한 국가이다. 속지주의 관점에 따라 보면 사만 왕조는 타지키스탄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민족사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의 타지크인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타지크인들은 페르시아화한 소그드인, 박트리아인, 호라즘인, 토하라인 등등의 후손이다.
소그드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페르시아-이슬람 문화에 동화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상실했다고도 볼 수는 있다.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북부 출신 시인 아부 압둘라 루다키는 사만 왕조의 부하라에서 음악가이자 시인으로 활약하였고, 이란에서도 그를 위대한 페르시아인 시인으로 기리고 있다. 다만 소그드인들의 문화는 완전히 사멸되지는 않았다. 과거 소그드인 사회가 성문법에 바탕을 둔 기록 문화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그드인들이 활동하던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일대에 들어선 사만 왕조의 관료들 역시 잉크병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으며 행정 업무 관련하여 꼼꼼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소그드인들이 사용하던 소그드어 대신 아랍 문자와 페르시아어로 기록한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사만 왕조는 상인들과 장인들을 우대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마다 숙소를 세웠는데 이는 후대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 물크의 정책으로 계승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의 소그드인들은 위구르 제국, 고창회골을 중심으로 한 위구르족로 흡수되면서, 이슬람 이전 고대 소그드 문화는 중세 타림 분지와 투르판 분지의 위구르인들에게도 전수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타지키스탄 일대에서 출생하여 사만 왕조에서 활동하던 이븐 시나는 중세 의학을 집대성해서 세계 의학 역사에 획을 그었다. 부하라에는 서점이 흔했다. 청년 시절 이븐 시나는 우연히 부하라 시장의 한 가판대에서 알 파라비의 주석이 담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책을 떨이로 파는 것을 집어왔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996년 열여섯 살이 된 이븐 시나는 병든 통치자를 치료하는데 실패한 궁중 의사와 상의하기 위해 사만 왕조 궁전으로 불려갔다. 이븐 시나의 조언으로 사만 왕은 목숨을 건졌고, 그 대가로 이븐 시나는 사만 왕실 도서관을 이용할 권리를 얻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지 이전 부하라의 도서관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그리스와 인도의 고전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븐 시나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상술한 루다키와 마찬가지로 이븐 시나는 타지키스탄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이스마일파 출신이었고 이 때문에 다른 순니파 학자 및 관료들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었다. 종종 신변의 위협을 받았던 이븐 시나는 997년 부하라 왕실 도서관에 화재가 난 것을 계기로 중동의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로 이사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븐 시나가 떠난 것을 전후하여, 999년 사만 왕조는 튀르크계 왕조였던 카라한 칸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계기로 급속히 국력이 약화되었고,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은 튀르크화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타지크족들의 문화는 중앙아시아와 그 주변에서 번영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여러 왕조들의 문화에 기여를 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고르 왕조는 타지크계 왕조였으나 파슈툰족 민족 형성에 크게 기여한 왕조이기도 하다. 사만 왕조와 가즈니 왕조를 거치며 이슬람화된 아프간 산악 민족들이 타지크-순니 이슬람 문화를 바탕으로 고르 왕조를 세우고 확장한 것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에서 공용어로 사용되는 다리어와 타지키스탄의 타지크어는 중세 신페르시아어의 직계 후손이다.
4.1. 파미르인의 이스마일파 개종
오늘날 타지키스탄 동부, 파키스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 서부에는 시아파 이스마일파를 믿으며 파미르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인 파미르인이 거주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파미르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타지크어보다는 파슈툰인들이 사용하는 파슈토어와 유사하지만 이들의 문화는 파슈툰인들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사만 왕조가 건립되던 시절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시아파 내 소수종파였던 이스마일파(그 중에서도 니자리파) 신학자들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원래 암살단 어쌔신으로 유명했던 이스마일파였지만, 부하라에 자리를 잡았던 아부 야쿱 알 시지스타니를 비롯한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은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었고, 이들은 사만 왕조 내에서 암살과 테러를 저지르는 대신에 부하라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교리를 다듬으며 소일하는 경우가 많았다.[2]애초에 이스마일파 신학은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반인들에게 선교하기 난해하기 그지 없었고, 북아프리카의 이스마일파 파티마 왕조는 신민들을 순니파에서 이스마일파로 개종하려는 사업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하라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의 이스마일파 신도들은 이른바 "순결 형제단"이라는 단체를 세워서 철학 교육 진흥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결 형제단들은 회원들에게 "학문을 기피하지 않고 책을 경멸하지 않으며 광신적으로 하나의 교리에만 매달리지 않을 것"을 선서를 시키며 다수의 순니파 신도들도 회원으로 모았다.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이미 종교와 철학/과학을 따로 분리해서 공부하는 문화가 자리잡힌 상황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서부 출신 철학자 아부 술라이만 알 시지스타니는 "종교와 철학은 완전히 분리된 영역에 속하며 사실상 상호 양립이 불가능하다."(그러므로 종교계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을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중세 유럽의 철학자 오컴의 윌리엄의 견해와 유사한 것이었다. 상술한 이븐 시나를 교육한 그의 아버지 역시 순결 형제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었다.
사만 왕조가 붕괴되면서 이스마일파는 가즈니 왕조의 탄압을 받으며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서 소멸되었지만, 타지키스탄 동부 산악지대에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가즈니 왕조를 무너트리고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셀주크 제국은 시아파들을 차별하지 않고 여러 관직에 중용하였으나, 이들 중 일부는 셀주크 제국과 대치하던 파티마 왕조의 알 아즈하르 대학의 이스마일파 신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출신 학자로 셀주크 제국 재무부에서 근무하던 나시르 호스로우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후 순니파들에게 배척을 당하자 파미르 고원의 얌간(Yamgan)[3]으로 이사하여 현지 주민들에게 이스마일파 신학을 전파하였다 전해진다. 파미르 산맥의 주민들은 이웃한 서부의 타지크인들에 비해 이슬람으로 개종이 늦었고 근세까지 조로아스터교나 불교 등을 고수하며 살았다. 이들은 주변 지역들이 하나둘씩 이슬람화되는 상황에서 이슬람을 믿는 여타 민족들에 대한 반감으로 순니파 이슬람 대신 하나둘씩 시아파 이스마일파로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파미르인 시아파 이스마일파들은 노루즈 같은 조로아스터교 풍습들을 여타 순니파 무슬림들에 비해 더 잘 보존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4.2. 몽골 제국의 침략
중세 고르 왕조, 카라한 칸국 등을 흡수했던 호라즘 제국이 몽골 제국에게 패망하는 과정에서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유서깊은 도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몽골군은 오늘날 타지키스탄에 있던 중세 학문도시 후잔트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몽골군은 후잔트를 포위하면서 납사에 불을 붙여 투척하였는데, 배에 역청을 바르고 시르다리야 강으로 도망친 일부 주민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후잔트와 활발하게 교역하던 다른 도시들 이를테면 테르메즈, 고르, 발흐, 바미안, 헤라트, 구르간지 등등의 도시들도 점령한 뒤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타지키스탄 일대는 트린스옥시아나를 중심으로 들어선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가 되었다.5. 근세
황폐화되었던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은 티무르가 티무르 제국을 건설하면서 다시 복구되었다. 티무르는 이웃 나라들을 약탈하면서 얻어온 금은보화들을 투자하여 자신의 본거지였던 사마르칸트를 개발하였고, 다시금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모인 타지크인들은 번영을 구가하였다.우즈베크족이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등 트란스옥사니아는 부하라 칸국이 나타났다. 한편 우즈베키스탄 동부와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국경 일대, 페르가나 계곡에는 코칸트 칸국이 세워졌다. 한 편 서부에서는 타지크인들과 우즈베크인들, 투르크멘인들이 있었던 호라즘에 히바 칸국이 건국되었다.
이 와중에 이란에서는 쉬아 12이맘파 중심의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어 이란 내 페르시아인들을 거의 다 쉬아파로 개종시키면서 중앙아시아의 타지크인들과 이란 내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와 문화는 순니파 대 쉬아파로 분열되었다. 사파비 왕조의 쉬아12이맘파 개종 강요 당시 많은 페르시아계 순니 무슬림들이 오스만 제국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로도 탈주하였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어 세계 무역의 중심이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대서양과 인도양의 무역으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말린 찻잎을 수입하여 재수출하거나 말 수요가 많았던 무굴 제국에 말을 국제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에 수출하면서 18세기까지는 번영이 지속되었다. 우즈벡계 코칸트 칸국은 타지키스탄 고지대 출신 용병들을 이용하여 영토를 넓혀나갔다.
이후 차 수출도 해상 무역에 의해 대체되고 무굴 제국이 몰락하자 당시 타지키스탄을 다스리던 코칸드 칸국은 청나라의 신장 지역에서 납치한 한족들을 데리고 노예 무역을 시도하고,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약탈을 중지하는 대가로 보조금을 받아내기 이른다. 그러나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코칸드 칸국을 점령하고 타지키스탄 일대는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는 영국의 견제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려는 시도는 하지 못했고, 결국 계기로 타지크인들의 주 거주지는 북부의 타지키스탄, 남부의 아프가니스탄 이렇게 두 나라로 분할되었다.
6. 근현대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 일대로 남진하면서 타지키스탄 역시 러시아령이 되었으나 타지크 유력자들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주나 귀족 대우를 받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 바스마치 운동으로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 소련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에게 점령되면서 사회주의 운동과 공산화로 인해 부하라 소비에트 인민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이 때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는 우즈베크와 같이 있었지만 그 후 타지크족들이 자치를 선언했고, 따로 독립되어 나중에 1929년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1991년 타지키스탄으로 독립이 되었다. 하지만 1992년 이후 타지키스탄 내전이 나타나서 1997년까지 지속되었다( 타지키스탄 내전 참고). 내전이 끝난 이후 중도 세속주의 정권이 집권하여 현재까지 정권을 잡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에모말리 라흐몬 항목 참조.7. 참고문헌
- 동서문명의 십자로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문화 / 국립중앙박물관 출판사
- 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 인도 불교사 / 에티엔 라모트
-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 위키피디아 러시아어판 "파미르인" 문서
[1]
아프가니스탄의 고대 불교 유적들의 탈레반의 만행으로 상당수가 파괴된 것과 다르게 타지키스탄의 고대 불교 유적들은 두샨베 국립 박물관에 무난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2]
여담으로 부하라에서 공부하던 이스마일파 사상가 중에 후일
드루즈교의 시조가 되는 다라지(Ad-darazi)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드루즈교 문서 참조
[3]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 주에 있는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