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9:07:33

슬라브족의 이동

파일:525px-Slavic_archaeological_cultures,_beginning_of_7th_century.png

1. 대이동 이전2. 6세기3. 7세기 이후

1. 대이동 이전

슬라브인들의 원래 고향은 지금의 동유럽 일대이다. 그들의 고향의 정확한 위치는 고고학적 증거가 별로 없기 때문에 폴란드 일대, 우크라이나 일대 등 여러 가설이 존재하나 아무튼 로마 제국 국경 너머 게르마니아보다 더 멀리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고대 로마는 1세기부터 초기 슬라브인들과 접촉하여 이들을 비스툴라 베네티(Vistula Veneti), 또는 스포리(Spori) 혹은 스팔리(Spali)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2. 6세기

4~5세기 무렵 이웃의 게르만족이 쇠락해가는 로마 제국 하의 서유럽으로 대거 이주하자, 중동부 유럽의 인구는 감소하였고 슬라브인들은 이웃이 떠난 바로 그 자리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6세기에 동로마 제국 국경인 다뉴브 강에 다다랐다. 다뉴브강 남쪽의 주인인 동로마가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및 사산 왕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이들은 아바르 칸국의 산하에 놓여 아바르족과 함께 슬금슬금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인들의 땅인 발칸 반도를 습격하였다.( 동로마-아바르 전쟁) 그 중에서도 순수 유목민인 아바르족은 적당히 약탈을 하고 다시 다뉴브 강을 넘어 돌아갔지만, 순수 유목민은 아니었던 슬라브족 중 일부는 아예 발칸 반도에 정착해서 살기도 했다.

초기에야 깔짝대는 수준에 그치긴 했어도 동로마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580년대부터는 통제가 불가능할 만큼 대규모로 발칸 반도를 습격하였다.[1] 발칸 서북방의 거점인 시르미움이 582년에 함락되는 등 3 부쩍 거세졌던 것이다.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591년에 페르시아 제위계승분쟁에 개입하여 바흐람 추빈을 몰아내고 호스로 2세를 복위시킨 댓가로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의 넓은 영토를 할양받으면서 동방전선을 안정시켰고, 나아가 그전까지는 572년부터 산발적으로 계속되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할애하느라 수세적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발칸 전선에서 완전히 공세 모드로 바꾸었다. 이에 대해서 아예 영어 위키백과에 마우리키우스의 발칸 전역(戰役)이라는 문서가 따로 있으니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으면 이를 참조하면 좋다. 이는 굉장히 성공적이었어서 그간 침탈당한 땅을 다 되찾고 아바르 및 슬라브인을 강 너머로 다시 몰아냈다. 하지만...

3. 7세기 이후

파일:슬라브족이동.jpg
7세기, 슬라브족의 이동(빨간색 화살표)

마우리키우스는 성과지향적이면서도 엄격한 황제였다. 위에서 서술된 580년대 수세로 일관했던 기간 동안 발칸 각지가 함락되었고 그 곳들의 주둔군이 포로로 많이 잡혀서 약 1만 2천 명 남짓이었는데, 포로 몸값 지불을 거부해서 그 포로들이 다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심을 크게 잃었던 데다가, 602년에는 이미 좁은 의미로 '발칸 방위'라는 목표는 이미 다 완수되었던 가운데, 다뉴브 너머에서 아바르와 슬라브 상대로 예방전쟁을 치르는 과정 중 다뉴브 이쪽의 로마 영내가 아닌, 다뉴브 너머에서 그대로 주둔하며 월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방어도 아니고 예방전쟁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던 장병들은 단체로 폭발했고, 여기에 편승한 백인대장 포카스가 선동해서 일리리아군을 이끌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플로 내려가 마우리키우스를 축출 및 시해한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눈 앞에서 분명히 자기들을 위기로 몰아넣던 로마군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후퇴하자 아바르인과 슬라브인들은 얼마 안 가 동로마의 정정불안을 눈치챘다. 이러한 가운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자신을 복위시켜 준 은인인 마우리키우스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결국 동로마에게는 지옥 같은 양면전선이 만들어졌다. 마우리키우스의 성과는 몇 년 못 가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국가의 존망 위기를 맞은 동로마는 국가 행정력 자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저그처럼 내려오는 이들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침공에 시달린 원주민들은 슬라브인들이 살지 않거나 접근하기 힘든 험한 산지나 섬으로 이주 혹은 아직 동로마의 행정력이 온전한 몇몇 거점들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그대로 잔류해 슬라브인들과 통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인에 동화되었다. 콘스탄스 2세가 그나마 630~40년대의 폭풍과도 같은 이슬람의 침략이 소강상태가 된 658년부터 여러 슬라브 부족들을 산하에 복종시키는 한편 소아시아로 사민시키는 등 처음으로 반격다운 반격을 했지만[2] 온전하지는 못했고, 그 공백을 불가르인들이 치고들어와서 상당 부분의 슬라브인을 복종시키고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발칸 반도는 8세기 말~9세기 초 정신을 차린 동로마가 회복한 그리스 일대를 제외하면 슬라브인들의 세상이 되었는데 스클라비니 남슬라브인들의 조상, 안테 동슬라브인들의 일부를 구성했다고 한다. 슬라브족들이 동슬라브, 남슬라브, 서슬라브로 나뉘면서 동시에 슬라브조어도 저마다 분화하였다.


[1] 영어 위키백과 Siege of Thessalonica (676–678) 중 'From the 560s, the Slav communities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newly established Avar Khaganate. Raids became larger and resulted in permanent settlement, especially as the Avars were able to capture fortified cities, leading to loss of imperial control over the surrounding areas. While the Byzantines were preoccupied in the East against the Persians, the 580s saw ever deeper and more destructive raids in the Balkans, even into southern Greece.' [2] Siege of Thessalonica (676–678) 중, 'The only imperial reaction came in 658, when Emperor Constans II campaigned in Thrace, brought many Sclaviniae under imperial control, and relocated many Slavs to Asia Min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