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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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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백년전쟁의 원인
2.1. 왕위 계승권2.2. 가스코뉴 지배권2.3. 플랑드르 지배권2.4. 스코틀랜드 문제
3. 경과
3.1. 시대 구분3.2. 개전(1336)3.3. 제1기(1337~1360)
3.3.1.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1338)3.3.2. 슬로이스 해전(1340년): 잉글랜드의 승리 → 2년간 휴전3.3.3. 브르타뉴 계승 전쟁(1341년~1364년)3.3.4. 크레시 전투(1346년): 잉글랜드 승리
3.3.4.1. 잉글랜드 승리의 원인분석3.3.4.2. 사상자3.3.4.3. 전쟁 이후 → 잉글랜드의 프랑스 국토 유린
3.3.5. 교황의 중재로 휴전(1346 ~ 1355, 10년간), 흑사병 창궐3.3.6. 흑태자 에드워드와 푸아티에 전투 (1356년): 잉글랜드 승리
3.4. 소강기(1360~1415)
3.4.1. 프랑스의 재기와 화평 협상3.4.2.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
3.4.2.1. 잉글랜드의 내전 → 랭커스터 왕조의 설립(1399)3.4.2.2. 프랑스의 내전 + 자크리의 난(농민반란)3.4.2.3. 교황청의 분열
3.5. 제2기(1415~1453)
3.5.1. 아쟁쿠르 전투(1415년): 잉글랜드 승리3.5.2. 파죽지세 잉글랜드군 → 잉글랜드왕, 헨리 5세의 급사(1422)3.5.3. 풍전등화의 프랑스: 잉글랜드군의 루아르강(프랑스 왕의 본거지)까지 남하(1428)3.5.4.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전투(1429): 프랑스 승리
3.5.4.1. 잔 다르크 사로잡힌 뒤, 화형(1431)
3.5.5. 프랑스의 승리(1435 ~ )
3.5.5.1.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왕의 화해(1435)3.5.5.2. 파리 수복(1436)3.5.5.3. 프랑스의 영토수복(1441 ~ 1453)3.5.5.4. 백년전쟁의 끝(1475):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4. 의의: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5. 기사도의 유행과 몰락이 함께했던 전쟁6. 트리비아
언어별 명칭
프랑스어 Guerre de Cent Ans
영어 Hundred Years' War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1453년,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근대 유럽의 프롤로그.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로마 멸망)-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 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확고히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등등, 여러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116년 동안 싸우지는 않았고, 한쪽이 약해지면 계속 중단되었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전쟁(1701~1815)[1]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휘황찬란한 자본력으로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프랑스 기사단 vs 거지꼴로 몰려와서 온갖 얍삽한 "방화 & 노략"을 자행하는 잉글랜드 약탈군들이 이 전쟁 초기의 이미지였다. 얼라이언스 vs 호드 마침 상징색도 비슷하다.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완전무장한 기사의 전쟁이라는 모습과는 많이 다를 텐데, 당시 프랑스 인구수는 1000만 명을 넘는 엄청난 강대국이었고, 잉글랜드는 200만 명인 데다 이웃 왕국한테도 털리고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불태우며 큰 피해를 입혔다.

프랑스가 어리석을 정도로 정면승부에 집착한 것을 이해하려면 기사도 문화[2]와 국력 차이[3]를 이해해야 한다. 또, 잉글랜드가 발칙한 도발을 통해서 프랑스 군대를 원하는 전쟁터로 유도해놓고 기습과 방화를 반복했던 것은, 잉글랜드가 내란으로 분열하는 동안 '토벌 전쟁'을 자주 치렀던 경험에서 비롯되는 전술이다. 당시의 잉글랜드는 특별히 방화범이나 전문 살인자들을 운용했다는 루머도 옳지 않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4]

프랑스는 정치 전략적으로 큰 목표가 없어서 끌려다녔고, 잉글랜드는 뛰어난 전술을 보였지만 인구,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는 부실한 조약에도 만족하거나 혹은 자멸&자폭을 겪으면 속절없이 후퇴를 했고, 프랑스는 항상 얍삽한 영국의 전술에 정면돌파로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서로 큰 '한방'이 나타나지 않았다. 또, '가난한 잉글랜드인'들은 거대한 프랑스가 끝없이 더 성장하는 경제 불평등을 역전시킬 수 있는 찬스라서 열심히 약탈을 했으나, '부유한 프랑스'는 패배하면서도 부유했다는 점도 이러한 전황이 지속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전쟁이 110여 년이나 이어지고, 이때의 잉글랜드-프랑스 대립이 근세기 유럽의 분쟁의 대부분으로 이어지는 것은, 잉글랜드-프랑스 통합 왕조라는 집단이 분리되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이 각자의 국경선과 민족 성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 두 라이벌의 외교 싸움에서 촉발되는 유럽의 각종 분쟁,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들이 양 국가를 지원하면서 얻은 엄청난 황금으로 일으키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 그리고 두 세력이 다투면서 약해지는 동안 독일이라는 신흥강자의 부상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십자군 전쟁 이후 근대 유럽이 보여주는 거의 모든 변화의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첫 번째 사건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이다.[5]

2. 백년전쟁의 원인

0. 잉글랜드와 프랑스라는 광대한 영토의 정통성과 경제구조가 노르망디 공국의 잉글랜드 침공 등으로 인하여 하나로 묶이게 되었다.

1. 프랑스: 훨씬 큰 인구, 문화, 기술을 자랑하고 부유했다.

2. 잉글랜드: 프랑스의 문화, 경제, 기술을 기반으로 영국은 종속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휘황찬란한 십자군 함대를 보고 잉글랜드인들은 국력 차원의 생존에 대해서도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6] 그러자, 잉글랜드인들은 부유한 프랑스가 앞으로도 끝없이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경제 불평등에 대한 컴플렉스가 커진다. 결국, 잉글랜드 귀족들은 풍요로운 프랑스를 약탈할 수 있는 '껀수'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위의 배경에서, 전쟁의 단초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2.1. 왕위 계승권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은 기존 카페 왕조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 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당시 15세)가 있었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상속권자지만, 잉글랜드 왕이란 것도 있고 기존 살리카법에서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부정하던 것도 있고 해서[7] 결국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즉위, 왕위를 계승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에드워드는 어쩔수 없었는데 하필 그때 로버트 1세(로버트 브루스, 1274 ~ 1329, 재위 1306~1329)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대에게 처절하게 발려버리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마저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귀족들이 에드워드 3세에게 호응하지 않았던 것도 더 나서기가 어려운 요인이 되면서 방치, 묵인하고 있었다가 나중에 이를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아무리 상황이 불리해도 당근 외손자가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은 실제로도 그럴 듯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반면 필리프 6세는 필리프 6세 대로 왕위에 위협이 되는 잉글랜드 왕의 봉지를 통제하려고 했다. 그 두 떡밥이 가스코뉴와 플랑드르였다.

2.2. 가스코뉴 지배권

노르망디 공작이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8][9] 여기에 가스코뉴가 더해졌다.

가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인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여긴 프랑스 남서부의 노른자 같은 땅에다 당시 가스코뉴의 포도주 무역 세금이 잉글랜드 전 지방의 세금과 맞먹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오래전부터 이 땅을 놓고 티격태격했다. 이런 노른자위 땅을 두고 양국이 치고박은 건 당연히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1201년 ~ 1259년, 1226년 ~ 1243년, 1294년 ~ 1298년, 1324년 ~ 1327년에도 이미 전쟁이 있었다. 특히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벌인 첫 전쟁은 프랑스가 부빈 전투로 잉글랜드를 관광보내고 1215년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8세)가 런던을 일시 점령해 대관식을 목전에 둘 뻔도 했다. 이는 존 왕의 급서와 헨리 3세의 즉위로 저지되었으나, 훗날 헨리 5세가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왕이 되려고 한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는 200년 만에 역관광을 당했던 것이다. 잉불제국의 꿈은 망했다

2.3. 플랑드르 지배권

플랑드르는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일단 필리프 4세 이후 프랑스가 이 지역에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잉글랜드는 워낙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라(잉글랜드는 양모 수출국이었고 플랑드르는 유명한 모직물 제조 지역이었다) 항상 대립이 존재했다. 결국 1300년 플랑드르는 프랑스에 합병되었지만 플랑드르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1302년 코트레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고 있었다.

과거엔 플랑드르 상인들이 전쟁을 조장했다는 배후 상인설이 잠시 반짝했지만, 백년전쟁은 원인이 한두 개가 아닌 데다 정치에 대한 상업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론은 군산복합체 음모론에 기반한 음모론일 뿐인지라 결국 묻혔다.

2.4. 스코틀랜드 문제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건 스코틀랜드 문제였다. 잉글랜드는 샤를 4세가 죽은 다음 해 바로 로버트 1세가 죽자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1329 ~ 1371)가 1334년 프랑스로 도망치자 잉글랜드는 데이비드 2세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잉글랜드는 맞불을 놓는 식으로 필리프 6세(1328~1350)의 이복동생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3세의 망명을 받아주었고 이에 프랑스가 반발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3. 경과

3.1. 시대 구분

대부분의 시기 구분에서 1360년의 휴전까지를 1기로 두는 건 합의가 이루어진다. 가끔 1380년대로 두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간헐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태자 에드워드의 사망을 휴전기의 기준으로 한 것.

그러나 이후 구분이 문제인데, 심재윤의 <서양중세사의 이해>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2기(잉글랜드 우위)와 3기(프랑스 우위)를 가르고 있고, 위키피디아와 Osprey 출판사는 1429년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2, 3기와 4기를 가른다.[10] 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은 1396년[11]과 양측의 왕이 모두 사망한 1422년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 뒤에 보듯 휴전으로 취급되는 여러 기준도 1340년~1355년도, 1375년, 1396년도 등이 있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이 문서에서는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 상륙 여부를 기준으로 시기를 제1기 - 소강기 - 제2기로 가르고 있다.

3.2. 개전(1336)

이런 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십자군을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기다렸으나 필리프 6세의 십자군 준비에 대해 과도한 부담(...)을 느낀 교황이 오히려 십자군 원정을 인가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종교적 열정 하나만 가지고 교황이 십자군을 가라고 부추겼다면 이제는 교황이 십자군을 말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덕분에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과도한 빡침을 느낀 필리프 6세는 일종의 무력 시위를 위해 마르세유에 집결시켰던 함대를 자신의 본거지인 북부 프랑스 지방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들 함대에는 프랑스와 함께 잉글랜드의 앙숙이었던 스코틀랜드 소속의 함선들이 동맹 명목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지중해에 있는 함대를 북부 프랑스로 이동시키려 하자면 바로 잉글랜드의 앞마당인 도버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언제든지 한 번은 싸우게 될 것 같아 노심초사하던 차에 코 앞에서 대규모의 프랑스 함대를 구경하게 된 잉글랜드의 입장은 당연히 "전쟁이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필승의 일념으로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명목으로 의회의 동의를 얻어 1336년 프랑스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 보낸 선전포고의 시작 문구가 걸작인데 "자칭 프랑스 왕이라는 발루아의 필리프는 봐라..." 안 그래도 말 안 듣는 교황 때문에 빡쳐 있었던 필리프 6세는 난데없는 잉글랜드 왕의 어그로에 눈이 뒤집히고 만다. 결국 필리프 6세는 1337년 무력으로 아키텐 영지를 점령하고서 자신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 에드워드 3세의 아키텐 영지를 적법한 프랑스 왕으로서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3.3. 제1기(1337~1360)

모두들 프랑스로 가자. 말거머리처럼 그 피를 빨고 또 빨기 위해

ㅡ 전쟁 초기 잉글랜드에서 유행하던 어구.

3.3.1.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1338)

선전포고 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양모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모직산업으로 먹고 살던 플랑드르에게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 되었고 결국 플랑드르 도시들은 살기 위해 프랑스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1337년 야콥 반 아르테베르테가 겐트 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래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플랑드르 백작이 쫓겨나고 1338년 에드워드 3세가 앤트워프에 상륙하면서 1340년 플랑드르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에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플랑드르는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던 터라, 에드워드 3세는 그 김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노르망디의 영주로서 프랑스 국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던 것을 파기하고 스스로 프랑스 국왕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혹은 플랑드르의 핸트 시장이란 이야기도 있다. 율리우스력 1340년 1월 26일.)

플랑드르를 확보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체결했고 에노 백작 등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의 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북부 프랑스로 침공해 들어갔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가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동안 필리프 6세는 전면전을 피했고 용병으로 고용한 귀족들도 밍기적거려서 전쟁은 지지부진했다.

3.3.2. 슬로이스 해전(1340년): 잉글랜드의 승리 → 2년간 휴전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을 타개하기 위해 필리프 6세는 바다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남부해안 지역을 습격하여 가스코뉴를 약탈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곧 영국과 프랑스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을 놓고 치열한 타툼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를 봉쇄하기 위해 슬로이스항을 함대로 포위했다. 이에 1340년 6월 24일 프랑스 함대 및 잉글랜드, 그리고 플랑드르 간의 대규모 해전이 발생했다. 슬로이스 해전에서 플랑드르의 도움을 받은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함대 190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프랑스 해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12]

슬로이스 해전 이후 육상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에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진격을 가까스로 저지하였다.[13]

이때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면서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결국 1340년 9월 25일 양국은 2년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3.3.3. 브르타뉴 계승 전쟁(1341년~1364년)

하지만 휴전은 1년 만에 깨졌다.

1341년 4월 브로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면서, 브로타뉴 공작령에서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브로타뉴 공작령은 프랑스 왕가, 잉글랜드 왕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지역이었다. 장 3세의 조카인 잔느(팡테블 백작 - 계승순위가 우선됨)와 장 3세의 배다른 동생인 장 드 몽폴(몽폴 백작 - 어머니의 여백작 지위를 승계)의 후계대결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실령과 달리 브르타뉴에서는 자체 관습법에 의해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할 때는 프랑스가 살리카법을 옹호했는데, 이때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살리카법을 옹호하면서 장 몽폴과 손을 잡게 된다.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은 몽폴은 반대하는 대다수의 제후를 무찌르고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손에 얻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에 공격을 가했고, 잉글랜드가 이에 맞서 개입했다. 프랑스는 10월 몽폴을 포로로 잡았으나 아내 잔느가 몽폴의 아들인 장(장 4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서부 브르타뉴의 에느본에서 강경하게 농성했다. 죄다 잔느야 그래서 "두 명의 잔느가 싸웠다"라고 일컬어진다.

1342년에 벌어진 브르타뉴의 일련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나며 다시 한번 일시 정전이 체결되었다.

정전이 종결되고 1346년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의 군대가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다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면서 전쟁을 벌였고 이 여파로 이탈리아에서 잘 나가던 가문 하나[14]가 파산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서 플랑드르까지 가는 동안 프랑스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잉글랜드군은 비용을 자체 조달하고 프랑스군을 끌어내기 위해 약탈 행렬(chevauchee)을 자행했다. 가는 길에서 돈이 되는 건 다 약탈하고 불 지르고 다니면서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런 약탈은 중세 전쟁에선 기본이었으나 잉글랜드군은 아예 싸그리 털어먹고 불 질러버린다는 점에서 한층 더 악독했다(...)

3.3.4. 크레시 전투(1346년): 잉글랜드 승리

결국 프랑스군은 약탈 행렬을 더 두고 보기도 그렇고 충분한 군대도 모으고 해서 1346년 8월 26일 프랑스 크레시에서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만 명의 잉글랜드군이 3만 명의 프랑스군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면서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단,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사료마다 다르다. 잉글랜드군은 6천~1만2천, 프랑스군은 2만~10만으로 나온다. 잉글랜드군은 1만~1만 2천, 프랑스군은 3만~4만으로 보는 게 중론. 중기병 수로는 잉글랜드는 2300~4천 대 프랑스는 최소 2/3에서 대부분이 기병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6천 명이 제노아의 석궁병들. 여하간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다.
3.3.4.1. 잉글랜드 승리의 원인분석
이에 대해서는 장궁을 이용한 강력한 투사 무기를 이유로 드는데 사실 좀 더 복합적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에서 좋은 자리 잡고 있음.
  • 롱보우를 이용해서 상대를 투사 무기로 압도함.[15]
  • 잉글랜드군이 계속 화살을 퍼붓자 프랑스군이 어쩔 수 없이 언덕 위로 올라옴.
  • 잉글랜드군이 양 날개에서 화살비를 쏟아붓고 프랑스군은 화살비를 피하느라 중앙으로 밀리는 바람에 과다 밀집 상태에 빠짐.
  • 프랑스 기마대는 일단 말뚝과 목책에 저지되고 지친 프랑스군을 언덕 위에서 쉬고 있던 잉글랜드 하마(下馬) 기사[16]가 격퇴.
  • 프랑스군이 퇴각하면 잉글랜드의 하마기사들이 다시 말을 타고 프랑스군을 추격.

라는 식으로 기본형이 만들어진다.
3.3.4.2. 사상자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만~3만으로 추정되며 왕자 11명과 기사 1,200여 명이 포함된 수치라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 중에는 필리프 6세(당시 프랑스 왕)의 동생인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룩셈부르크 백작 요한 1세 등 화려한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3.3.4.3. 전쟁 이후 → 잉글랜드의 프랑스 국토 유린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이 전투가 끝나고 2달 후인 10월에 프랑스의 부름[17]으로 1만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으나 미리 대기한 잉글랜드 군대의 패해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고 1357년 풀려났다.

결국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군은 이제 프랑스 북부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방 천지로 약탈 행렬을 자행하기 시작, 프랑스 전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프랑스군은 모롱 전투(1352년 8월)[18]등 몇 차례 똑같은 방식으로 덤볐지만 잉글랜드군의 필승 패턴에 막혀 군대만 꼬라박기 일쑤.

3.3.5. 교황의 중재로 휴전(1346 ~ 1355, 10년간), 흑사병 창궐

이런 가운데 양측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1355년까지 휴전 협정을 맺는 문제를 협상했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널리 퍼지자 아예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자는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휴전 협정 교섭 중 필리프 6세가 사망했고(1350) 그 뒤를 이어 장 2세(1350~1364, 선량왕)가 즉위했다.

1354년 아비뇽에서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는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거나 그 대신으로 아키텐 영토의 인정 및 투레인, 앙주, 메인 등의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 2세 역시 '님하 즐' 하며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3.3.6. 흑태자 에드워드와 푸아티에 전투 (1356년): 잉글랜드 승리

그 후로는 통치 질서가 붕괴되고 따라서 국방이 약화되어 프랑스 인들에게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 그리고 위험이 다가왔다.
14세기 중반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전투가 재개되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를 약탈하며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갔고, 마침내 율리우스력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에서 흑태자의 잉글랜드군과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일전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군보다 세 배나 많았기 때문에 장 2세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못지않게 무능했던 장 2세는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리고 각종 장애물이 가득한 언덕을 향해 개돌하도록 지시하는 짓을 저지른다. 미리 정찰병을 보내서 '넝쿨과 가시덤불 등 자연 장애물 때문에 진입로가 제한돼 있고, 정면에 뚫린 진입로는 기병 4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데다 잉글랜드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다'는 상세한 보고를 받고 이에 대한 대책을 준비한 것은 좋았으나, 내놓은 작전이란 것은 기병이 진입하기 어렵다면 두 발로 걸어서 화살비를 맞아가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울타리를 통과해서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적과 교전하는 것이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세 배나 많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참패하고 말았고,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부가 대거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흑태자는 장 2세를 극진히 대우하긴 했지만 결국 몸값은 다 뜯어냈고, 심지어 프랑스가 몸값을 지불할 돈이 없자 장 2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잉글랜드로 건너가 스스로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기사도 돋네 좋게 말하면 대인배지만 왕으로는 확실히 글러먹었다.

프랑스에선 왕까지 사로잡히자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왕세자(뒤의 샤를 5세, 현명왕)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삼부회의 평민 의원들은 에티엔느 마르셀을 중심으로 '국왕이 국정 운영하지 못하게 하자'라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제안'을 하는 바람에 1년여에 걸쳐 협상을 끝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평민 의원들과 협상을 포기한 샤를 왕세자는 자신을 국왕 섭정으로 선포하고 1358년 프로방스와 콩피에뉴에서 별도의 삼부회를 소집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농민들에 의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나자 샤를 왕세자는 이를 평정하고 파리로 쳐들어가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내에 내분을 유도해 에티엔느 마르셀을 척살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문제가 정리되면서 협상이 재개되어 1360년 잉글랜드는 프랑스에게 확장된 아키텐과 칼레calais, 퐁티웨Ponthieu와 푸아투Poitou를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다(1360년 휴전). 그리고 1364년, 장 2세가 런던에서 죽었다.

3.4. 소강기(1360~1415)

3.4.1. 프랑스의 재기와 화평 협상

푸아티에 패전으로 프랑스가 군대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이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던 중 프랑스에서는 베르트랑 뒤 게클렝이라는 장군이 등장했다. 브르타뉴 출신인 게클렝은 탁월한 게릴라 전술을 바탕으로 약탈 행위를 거듭하는 잉글랜드군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먼치킨 유닛 흑태자 에드워드는 각지에서 프랑스, 카스티야[19]을 쳐바르면서 다녔지만[20] 건강도 악화되어 후기에는 가스코뉴 지방에만 웅거했고 그 사이에 게클렝은 다른 잉글랜드 장군의 군대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한편 착실히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프랑스 성채를 회복했다. 짤짤이 노가다

장 2세의 뒤를 이은 샤를 5세와 게클렝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민심을 잃을 정도의 약탈이라는 잉글랜드군의 삽질이 겹쳐서 프랑스는 1380년대에 이르러서는 노르망디와 가스코뉴를 제외한 기존 영토를 거의 다 회복했다. 이런 와중에 때마침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에 걸려 죽었다(1376).

브르타뉴는 1364년 올레 전투에서 결국 친영인 몽폴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최후의 결전에서 샤를 드 브로와가 사로잡히고, 게클랑이 포로가 되면서(!) 잔느 여백작은 승계를 포기했고, 결국 몽폴의 아들 장 4세가 브르타뉴의 공작으로 프랑스와 화해했다. 그러나 장 4세가 몰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이(1372년) 발각 되면서 장 4세는 다음해 추방되고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직속영지(1378년)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잔느 여백작까지 브르타뉴의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나면서(!) 샤를 6세의 즉위에 따라 1381년 장 4세가 다시 복귀했다.

전황이 불리한 가운데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잉글랜드 의회는 극빈자를 제외한 왕국의 모든 신민에게 인두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했고, 결국 1381년 5월 분노한 하층민과 농노들로 구성된 수만 명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 ( 와트 타일러의 난)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협상 자리에 나갔다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진압되었다.

1385년 5월에는 장 드 비엔느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 1,500(비전투병, 보조병 제외. 맨앳암즈 1,000명, 궁수500명)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해 가을 스코틀랜드군 4,000(맨앳암즈 1,000명, 경기병 3,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대륙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데 이어 본토를 공격당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잉글랜드는 맨앳암즈 6,000, 장궁병 6,000으로 주력 전투병만 12,000, 보조병 포함 2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해 로우랜드 지방의 대부분을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결국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 하지만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왕위를 노리지 않을까 우려하던 리처드 2세가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원정을 일찍 중단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21]

한편 스코틀랜드 측에서는 이 잉글랜드 원정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의 이득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온 귀족들을 강제로 억류한 채 프랑스 왕실에 피해 보상금을 요구했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서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겼을 정도로 동맹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392년의 아미앵 회의와 1393년의 루랑쟝 협상, 1396년의 아르들 회의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은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이후 1415년까지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화평을 빌미로 잉글랜드는 내전이 벌어지니...

3.4.2.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

3.4.2.1. 잉글랜드의 내전 → 랭커스터 왕조의 설립(1399)
흑태자의 요절에 이어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자(1377)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했으나, 인두세 문제로 잉글랜드는 내전에 휩싸인다.[22] 화평이 대강 종결되고 나자 리처드 2세는 반격에 나서 글러스터 공과 알란델 백작을 처형(1397년)했으나, 아일랜드 원정에 빈틈을 보이며 결국 패배해 런던 탑에 유폐되었다. 그렇게 해리포드 백작의 아들 랭커스터 공작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랭커스터 왕조, 1399년). 잉글랜드 중부의 노섬벌랜드와 웨일즈, 웨일즈 근처의 변경 영주들이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헨리 4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제압했다.
3.4.2.2. 프랑스의 내전 + 자크리의 난(농민반란)
한편 프랑스는 샤를 5세(재위 1364~1380)의 아들인 샤를 6세(재위 1380~1422, 친애왕)가 돈키호테급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기사도 숭배자였는데 진짜로 발작으로 미쳐버렸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23]와 오를레앙 공작파(아르마냐크파[24])[25] 섭정 후견의 실권을 두고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26] 1407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27]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재무장관 겸 아키텐 총독)[28]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터지게 되었고 거기다 자크리의 난(1358년)이라는 농민반란까지 일어났다.
3.4.2.3. 교황청의 분열
같은 기간엔 교황청마저도 분열되었다.(...) 1378년 로마로 돌아간 교황의 후계가 누가 정통이냐는 문제가 불거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비뇽 교회(친프랑스)와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로마 교회(반 프랑스)로 대립되었다.[29] 자, 이제 대체 누가 화해를 주선할 것인가?

쿨타임 됐다. (적군을) 까자!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3.5. 제2기(1415~1453)

3.5.1. 아쟁쿠르 전투(1415년): 잉글랜드 승리

헨리 4세(재위 1399 ~ 1413)의 뒤를 이은 헨리 5세(재위 1413 ~ 1422)는 의회의 지지를 끌어내고 세력 정리도 할 겸 이 기회에 다시 내분에 빠진 프랑스를 공격했다. 1415년 부르고뉴 공작파와 친교를 맺고 또 노르망디에 상륙한 헨리 5세는 칼레까지 진군했고 샤를 6세(정확히는 샤를 달브레 장군의 대행)도 여기에 맞서서 응전을 준비했는데 에드워드 3세가 처음에 겪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친 잉글랜드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집결해 공격한 것...까진 좋은데 1415년 벌어진 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처럼 처절한 삽질을 거듭하다 패한다. 안 그래도 점성 높은 아쟁쿠르의 진흙탕(뻘밭)+장마비에 병목지형으로 프랑스군이 우르르 밀려드는데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반격하자 밀려난 부대가 뒤로 후퇴하다가 뒤섞여버린 것. 보쌈인가 그래도 프랑스군은 어떻게 잉글랜드군 본진까지 밀어붙이긴 했는데 프랑스 하마 기사들이 잉글랜드 하마 기사들과 싸우다가 잔뜩 지친 가운데 경무장한 잉글랜드군 궁수들이 측면을 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버렸다. 오오 위대한 삽질... 총사령관인 샤를 달브레도 여기서 전사했다. 같은 패턴의 패전을 반복하는 것은 묘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한 세대를 전멸시켰다는 프랑스 육군의 삽질을 연상시킨다.[30]

3.5.2. 파죽지세 잉글랜드군 → 잉글랜드왕, 헨리 5세의 급사(1422)

부르고뉴파의 도움까지 얻은 잉글랜드군은 베르네유(Vernile)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31] 이어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1세(재위 1406 ~ 1437)의 지원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1418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파리를 점령하자 샤를 황태자는 파리에서 도망쳤다.

1419년 샤를 황태자의 계책으로 부르고뉴 파는 잠시 이탈했으나, 당사자인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거리에서 오를레앙 파에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인 선량공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에 확실히 달라붙게 되었고 결국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가 샤를 6세가 죽으면 자기 아들인 샤를 황태자 대신 사위인 헨리 5세에게 계승권을 준다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헨리 5세가 골골한 샤를 6세에 이어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당시 앙리 1세만 있었으니까. 헨리 5세가 샤를 6세보다 18살이나 어렸고 건강했기에 이 점을 확신했다.

그러나 1422년 헨리 5세가 35살의 나이에 급서하고 9개월 젖먹이 헨리 6세(재위 1422~1461)가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샤를 6세는 그로부터 정확히 2개월 후에 사망했고, 그 후 프랑스 왕위는 1429년에 샤를 7세가 즉위할 때까지 잠시 공석이 되었다. 샤를 6세도 사망하면서 외손자 헨리 6세가 조약에 따라 최초의 잉프 공동왕이 되었지만 트루아 조약 자체도, 그러고 무엇보다 11개월짜리 아기가 잉프 공동왕이 된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졌다.

3.5.3. 풍전등화의 프랑스: 잉글랜드군의 루아르강(프랑스 왕의 본거지)까지 남하(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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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잉글랜드 프랑스 전황 지도.

하지만 잉글랜드는 아직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는 언플로 샤를 황태자가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고 오를레앙 공작과의 스캔들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퍼트렸다. 그렇기에 트루아 조약이 성립이 가능했다는 논리였고 또 오를레앙 공작의 땅에 있는 샤를 도팽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도 매우 적절한 선전이었다.

거기에 잉글랜드는 또 하나의 정통성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랭스였다. 프랑스 왕은 대대로 파리가 아닌 대성당이 있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바로 부르고뉴의 주도가 랭스였고 잉글랜드는 부르고뉴와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다. 샤를이 정식으로 프랑스 왕권을 주장하려면 파리뿐만 아니라 랭스까지 회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덧붙이면 프랑스는 아비뇽 교회마저도 교황이 난립하는 반면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한 명의 로마 교황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날 가톨릭에선 분열시대의 아비뇽 교황은 정통 교황이 아닌 대립 교황으로 본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은 아직 건재했다. 쐐기를 박기 위해 섭정인 랭커스터 공작 베드포드 존과 글로스터 공 험프리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기어이 1428년에는 샤를의 본거지가 목전인 루아르 강까지 남하했다.

잉글랜드군의 다음 목표는 오를레앙이었다. 오를레앙은 앞서 말했듯 샤를을 돕는 마지막 대영주의 요충지로서 함락될 경우 루아르 강을 건너 황태자인 도팽[32] 샤를( 샤를 7세, 재위 1422~1461, 도팽 즉위는 1417년)의 본거지인 시농까지 점령이 가능했다. 말 그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 왕국의 사망 플래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잉글랜드군이 주변 요새를 전부 다 무력화 시키고 오를레앙을 꿀꺽하려던 순간 한 인물이 등장하였으니...

3.5.4.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전투(1429): 프랑스 승리

바로 그 유명한 잔 다르크. 잔 다르크와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농성이 아닌 야전으로 잉글랜드를 몰아내버렸다(1429년 5월).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 이후 잔 다르크는 1429년 6월 파타이 전투에서 전설적인 명장 탈보트누르면 야구 선수로 링크되는건 기분 탓이다 경의 군대마저 아쟁쿠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역관광을 시켰고 심지어 트루아와 랭스까지 함락시키면서(1429년 7월) 부르고뉴를 관광시켜버리고 샤를을 정식 프랑스 왕 샤를 7세로 즉위시키면서 전장의 추를 프랑스 쪽으로 돌려놓는다.
3.5.4.1. 잔 다르크 사로잡힌 뒤, 화형(1431)
잔 다르크 자신은 파리까지 수복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을 안정시키려던 온건파 샤를 7세와 기존 프랑스 귀족의 견제를 받다 파리 탈환의 기회를 놓쳐버린다. 더불어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혀 1431년 루앙에서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1412~1431)가 활약한 시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지대하다.

잔 다르크의 승리 요인으론 역시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잉글랜드군 200명만 만나도 튈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성처녀라는 이미지에 스스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장 뷔로를 비롯한 유수의 대포 전문가의 활약도 들긴 하는데 대포가 활약하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이유는 아닐 것 같다.

3.5.5. 프랑스의 승리(1435 ~ )

3.5.5.1.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왕의 화해(1435)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그동안 앙숙이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가 프랑스왕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의 동맹을 단절하면서 더이상 프랑스 내에서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샤를 7세는 마콘 백작령 폰티우 백작령, 오세르 백작령 및 아미안 기타 도시의 영유권을 필리프 3세에게 양도하고 왕에 대한 종속의 예를 평생 면제하였다. 반면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의 동맹관계를 정식으로 파기하였으며 그 결과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다년간에 걸친 항쟁에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동맹을 잃었기 때문에 백년전쟁 종결을 위한 조건이 정비되었다.
3.5.5.2. 파리 수복(1436)
이후 프랑스군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 경과 라 이르 같은 장수들의 활약으로 1436년 파리를 수복하고 1437년 파리를 다시 프랑스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전세를 역전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잉글랜드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33]
3.5.5.3. 프랑스의 영토수복(1441 ~ 1453)
프랑스군은 1441년 상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 포미니(폴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사실 대포 자체가 살상력이 어마어마했다기 보다는 프랑스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언덕 위에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우세한 프랑스 병력과 기마대에 쳐발리는 식이었다. 포미니 전투를 끝으로 오랫동안 잉글랜드령이었고 잉글랜드 왕의 근거지였던 노르망디[34]마저 프랑스 손에 떨어졌으며 앙주 일대 멘까지 수복했다.[35] 뒤이어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으로 탈보트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분전을 분쇄하고 보르도 시를 포함한 가스코뉴를 점령,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버렸다.
3.5.5.4. 백년전쟁의 끝(1475):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나약한 헨리 6세가 칼레를 지키기 위해 잃어버린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1475년) 잉글랜드는 더 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했고, 이것이 백년전쟁의 끝이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칼레[36]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으면서 잉글랜드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 기능하면서 재정 수입의 35%를 담당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잉글랜드피의 메리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 전쟁했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잉글랜드는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의의: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

백년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프랑스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전까지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왕도 다르고 정치 체계도 달라도 딱히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컨대 프랑스 귀족이 잉글랜드 귀족이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의 측근이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고 프랑스에 영지를 갖던 귀족도 잉글랜드 국왕 편을 드는 등등. 이것이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별개의 국가로 확연히 분리시켜 놓았다.

이는 근대적 개념의 "국가"를 일반 대중(그 당시엔 백성)이 인식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백년전쟁 전까지 백성의 입장에서, 자기의 주 소속은 "잉글랜드", "프랑스"등 어느 국가가 아닌 봉건제하의 어느 "영주님" 소속이었다. 더구나 중앙집권체계가 아니었던 그 당시의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왕"이 실질적인 백성을 지배하기보다는, 백성이 속한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가 곧 백성의 주인이었다. 백년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이 지리하게 이어지자 사람들은 오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기를 갈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잉글랜드, 프랑스 어느 한쪽이 승리하여 전쟁을 끝내주기를 기원하는 백성들은 스스로의 심리적인 소속을 "잉글랜드", "프랑스"의 각 국가에 정의하게 되었다.

나아가 기마대 행렬은 프랑스 농촌을 크게 망가뜨려 놓았다.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농촌 기반을 파괴 → 돈 없어진 프랑스가 용병 관리 못 함 → 용병이 다시 프랑스 마을을 텀 → 땅과 집을 잃은 프랑스 농민이 도적이 됨' 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마대 약탈 행렬이 오히려 거래 규모를 확대시켜 결국 프랑스의 국부를 증대시켰다는 반론도 있다. 무조건 털기만 한 건 아니고 일단 병사들도 이것저것 사고 팔고하는데 여기에 마을 사람이나 상인이 들러붙어서 거래 규모가 커졌다는 이론인데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흠좀무.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국왕권을 강화해갔다. 샤를 7세는 정부 조직을 재편하고 고등법원을 일부 지방에 설치했으며, 1438년의 부르주 칙령으로 프랑스의 교회가 교황청이 아닌 왕의 직속에 가깝게 되면서 왕권(특히 세금)이 증대되었다. 또 1448년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다. 루이 11세(재위 1461 ~ 1483) 때에는 부르고뉴 공의 군대가 먼치킨 스위스 용병대에게 쳐발리자 프랑스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에 이어 앙주, 프로방스를 차례로 직속으로 흡수했다.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포병 전력을 증강시켜 1500년대 초에는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문제는 그때 등장한 상대가 뭐든지 튕겨내는 스페인 테르시오. 지못미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대로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 경이 전사하자 더이상 요크 가문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나약한 헨리 6세하에서 양 세력은 장미전쟁으로 격돌한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쳐 잉글랜드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고 그렇게 하여 등장하는 왕가가 바로 튜더 왕조다. 추가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 잉글랜드는 대륙국가에서 완전한 섬나라/해양국가화 하게 되었고, 잉글랜드가 본의 아니게 해양진출에 목매게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면서 잉글랜드는 섬나라의 특성을 살려 맹활약, 이 과정에서 산업혁명을 이루어내며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통해 얻은 풍부한 자원으로 전 세계의 패권을 쥐어나갔다. 백년전쟁의 패배가 잉글랜드에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우리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백년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초엽[37]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후 잉글랜드 프랑스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지게 된 역사적인 계기라고 볼 수도 있다. 하긴, 백 년도 넘어가는 기간 동안 전쟁을 했으니 과연 국민감정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전쟁을 했던 수많은 국가들의 외교관계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2번의 세계대전 때 공공의 적인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연합국으로 동맹관계였고, 19세기까지에 비하면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부분적으로 축구 국가대항전 A매치나 국제 스포츠대회라도 열리게 되면 "딴 새끼들은 몰라도 저 새끼들만큼은 우리가 무조건 꺾어야 된다!"라면서 서로를 강하게 비방하고 싸우는 것이 현실이다.[38] 그래서, 아직도 영불관계에서 설문조사를 해보면 아니나다를까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여전히 서로를 지목하는 경우도 간간이 있다.

5. 기사도의 유행과 몰락이 함께했던 전쟁

  • 기사도가 발전하고 또한 쇠퇴하는 전쟁으로서, 특히 프랑스는 기사도에 입각하여 정면승부에 집착했다.[39]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기사도의 종주국이나 다름없었고, 군인들의 사상 이전에 신분여하를 막론한 남성들의 사회심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프랑스는 전문군인이 곧 기사였고, 군인들의 전투교리는 기사도가 중심에 있었다.
  • 프랑스는 위풍당당한 정면승부에 집착한 것이 당연할 정도로 유럽 최대 최강의 '인간전차' 프랑스 기사단, 넘치는 물자, 석궁과 화포 같은 앞서는 기술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전술 전략적인 유연함의 부족으로 패배를 거듭했다.
  • 잉글랜드가 정정당당히 기사도에 입각해서 싸웠다면 금방 박살났을 것이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프랑스가 병력을 집중할 수 없도록 각지에서 약탈, 방화를 저지르며 돌아다녔고, 프랑스 기사들이 올 때는 항상 고지대로 올라가서 함정을 파고 기병들을 무력화 하였다.
  • 백년전쟁 직전의 잉글랜드는 프랑스에게 경제적인 노른자위를 쭉쭉 빨려나갔던 시대였던지라, 프랑스에 비해서 기사들의 숫자도 적었고, 잉글랜드 군대는 수많은 내전으로 분열하는 시대를 겪으면서 약탈과 방화 위주의 전술이 발달해서 평민과 용병들이 대부분이었다.
  • 잉글랜드군들은 방화범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평민에서 뽑은 약탈부대를 주로 운용했으니 약탈과 방화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 위의 탓으로, 잉글랜드의 이미지는 도적떼, 프랑스는 정면승부에만 집착하는 바보 기사들의 이미지로 요약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차이는 전쟁 후반이 되면 많이 사라진다.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기술과 재화들을 많이 약탈했고, 프랑스도 점점 평민 중심으로 게릴라를 펼치는 등의 변화가 벌어진다.
  • 잉글랜드 군대는 백년전쟁 당시의 프랑스처럼 쇠갑옷이 많지 않아서, 기름칠 같은 관리를 덜 해도 되는 편한 복장이었고, 항상 프랑스 도시들을 방화하고 약탈하면서 긁어모은 보물들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 프랑스 기사들은 무협지나 판타지의 관점으로 '멋있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기사도의 핵심이 피끓는 전투의지 고취였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크라시 전투, 아쟁쿠르 전투에서도 프랑스 기사들은 잉글랜드군의 롱보우에 맞아도 갑옷으로 튕겨내면서 굳건히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갑옷 주조술이 앞서 있었다. 프랑스는 정면돌격을 할 경우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심할 경우에는 네발로 기어가면서도, 병사들을 독려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적을 노려보면서 죽기도 하였다.
  • 프랑스에서 파비스를 못 챙긴 제노바 석궁수들을 처형하는 사건은,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광기어릴 정도로 발전한 유럽 기사들의 군인정신에도 기인하는 바가 있다. 당시 기사들은 기사도에 입각해서 전원이 후퇴없이 돌격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기사들이 주축이 된 프랑스 군대의 관점에서 제노바 용병들의 후퇴는 너무나 부끄러운 행위였기에 당연히 벌어진 군법 집행이었다(...).
  • 잉글랜드 군대는 평민들이 많아서 왕의 지휘부대마저도 직속 기사들을 제외하면 상당히 초라했다. 하지만 프랑스 기사단은 아름다운 갑옷을 자랑했으며, 갑옷이 녹슬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방지하려고 항상 기름을 발라서 거울처럼 닦아놓았다. 잉글랜드 병사들마저도 프랑스 기사단의 번쩍거리는 갑옷의 아름다움에는 기가 죽을정도로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했으나... 나중에는 프랑스에서도 잉글랜드군의 지독한 약탈&방화 때문에 집을 잃고 도적떼로 변해버린 프랑스 민중들을 모아서 싸워야했을 정도로 전황이 나빠진다.
  • 기사도가 프랑스의 전략에 도움을 주는 일도 있었다. 부유한 프랑스 귀족들은 잉글랜드인들에 비하면 전쟁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편이어서, 후방지역의 프랑스 귀족들이 기사도의 영향으로 남자의 로망(?)에 불이 붙어서 전쟁에 뛰어드는 것으로 병력을 충당해야 했다. 또한, 잉글랜드 군대는 평민으로 이루어진 약탈부대가 많다보니, 종종 프랑스 귀족들이 하층민인 잉글랜드 병사들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해주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프랑스 쪽에 통째로 투항하는 상황도 있었다. 물론, 보통은 프랑스를 호구로 보고 뒤통수를 쳤지만...
  • 기사도의 몰락 역시 백년전쟁에서 시작된다. 잉글랜드군은 유럽최강의 인간전차 프랑스 기사단을 평민 출신의 약탈부대와 병사들이 전술적으로 털어버렸고, 심지어 백년전쟁을 끝낸 프랑스의 영웅은 잔 다르크라는 시골 소녀였다.

6. 트리비아

  • 각종 중세배경의 게임, 소설에 수많은 영감과 이미지를 제공하는 전쟁이다.
    • 보통은 멋진 기사들의 전쟁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실상은 위처럼 굉장히 얍삽하고 바보같은 이미지가 섞여있다.(...). 전쟁의 계기부터 사실상 프랑스에게 뒤처질 위기에 처한 잉글랜드가 제멋대로 시비를 틀면서 약탈하는 전쟁으로 요약되는 감이 있으며, 그 중간에는 온갖 어리석은 해프닝이나 바보짓으로 전쟁에 일거에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 유럽의 중세게임에서 성 뺏고 성 먹는 전략구도가 많이 나오는 것도 백년전쟁의 현실적인 진행상황이었다. 당대에는 도시 하나만 정복해도 싸움을 지속할만한 자본력이 부족하다 보니, 서로 성이나 도시 하나만 점령해도 더 이상 싸울 돈이 없는 상황이 허다했다. (잉글랜드가 전략적으로 전쟁을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지출이었고, 프랑스는 기사단이라는 편제 자체가 엄청난 자본을 소모한다.)
    • 이전에도 용병들의 비중이 낮지는 않았으나, 특히 유럽내에서 용병들이 대활약을 시작하는 전쟁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중세시대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하면 얼마든지 돈을 뽑아낼 수 있었기에 앞다투어 용병들을 고용하고, 이로 인하여 십자군 전쟁 이후 호황을 맞이한 용병들이나 가뜩이나 발전한 이탈리아 공국들의 은행업이나 유럽의 자본이동이 더욱 크게 발달한다.
  • 묘하게 조선과 일본과의 임진왜란을 닮은 전쟁이다.
    • 1. 섬나라가 육지국가(프랑스는 대륙, 조선은 반도)에게 패배했다.
    • 2. 패배한 섬나라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 내전이 벌어졌다. 임진왜란에서 패한 일본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이 전쟁에서 패한 잉글랜드는 장미전쟁을 치뤘다.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세력이 해당국가(잉글랜드, 일본)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 3. 승리한 국가에서는 여러 명장들이 적군과의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며 크게 활약했다..임진왜란에서 조선에서는 이순신, 권율, 곽재우, 권응수, 이정암, 김시민등이 100년전쟁에서 프랑스에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라 이르, 장 뷔로, 잔 다르크 등이 있었다.물론 승리만 하던 명장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투에서 패배한 패장들도 더러 있었는데 조선에는 원균, 정발, 송상현, 신립, 김천일, 이일, 이억기 등이 패전하였으며[40] 프랑스에는 샤를 달브레 등이 패배하였다.
    • 4. 구국의 영웅이 정작 국왕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고 결국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기 전에 죽었다.
  • 일각에서는 대륙국가와 섬나라의 전쟁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임진왜란보다는 중국과 일본의 중일전쟁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전쟁 초기에 대륙국가가 섬나라에게 패배를 거듭하다 중후기에 가면서 대륙국가가 전세를 역전하여 섬나라를 이긴 점도 비슷하고...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거의 1대1 전면전이라면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미국에게 크게 패했다는 점이랑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를 이긴 프랑스는 전후 왕권강화와 정치 안정을 이룩하여 서유럽의 강자로 급부상했고 중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우파 좌파 세력간 내전을 겪으며 중일전쟁 때보다 더 크게 초토화되었고 이후 내전에서 승리하여 우파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한 좌파 지도자가 벌인 으로 20년 가까이 경제, 정치가 후퇴하여 늦게나마 강국이 되었다는 게 차이점이라 할수 있겠다.

[1] 역시 114년의 기간을 자랑한다. 오오( 루이 14세 시절부터 나폴레옹 1세가 프랑스에서 쫓겨날 때까지) [2] 기사도 자체는 어리석은 사상이 아니라, 십자군 원정 시절부터 유럽 군대의 부대운용과 전투의지를 뒷받침 해주는 '소프트웨어'였다. 특히, 프랑스는 성지 이스라엘을 정복한 기사도의 중심국가였다. [3] 인구수와 자본력 이외에도 갑옷 제작술, 화포 주조술 등등 모든 면에서 프랑스가 유리했다. 잉글랜드는 이를 열심히 훔치고 모방하면서 차이를 좁힌 것이다. [4] 잉글랜드는 척박한 땅이었고 중세의 '기갑사단'에 해당하는 기사단을 유지할 자본이 부족했다. 그 대신에, 잉글랜드 내전으로 촌락을 불태우며 싸울 때, 평민과 궁수들의 가치를 깨닫고 왕이 직접 이들을 지휘했다. 그래서 백년전쟁의 잉글랜드 군대는 약탈부대라고 자주 욕을 먹는데... 욕이 아니라 맞는 말이다. 약탈부대는 국가의 명령을 받는 점을 제외하면 도적떼처럼 약탈&도주가 주된 전술이었고, 아무 죄도 없는 프랑스 도시들을 약탈하고 불질렀으니 방화범도 욕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긴 하다. [5] 근대까지도 이 둘의 자존심 대결은 유럽 분쟁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이후로도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의 초반처럼 약탈대와 해적을 보내서 깐족거리며 유럽에 분란의 씨앗을 뿌리고잉글랜드가 또, 대륙국가인 프랑스도 비슷한 짓을 하지만 뭘 해도 명분을 찾아내서 대규모로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인다호구가 또. [6] 당시 잉글랜드는 18세기의 게임 체인저나 그레이트 게임을 주도하는 최강국 역할이 아닌 유럽 대륙 북서쪽 끝에 자리했을 뿐인 섬나라 정도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잉글랜드는 부유한 나라도 아니었고, 프랑스와의 해양 경쟁에서 밀리면 언젠가는 말라죽을 입장이었다. [7] 살리카법은 애시당초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계로 이어지는 여성 왕위 계승을 막으려고 1316년에 확대해석을 한 결과물이었다. 살리카법 참조. [8]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작위가 프랑스의 국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9] 오늘날에 비유해보자면, 프랑스라는 건물이 있고 잉글랜드라는 건물이 있다고 치자. 잉글랜드 국왕은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건물 내 상점에서는 임차인으로서의 권리만 행사할 수 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건물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단 이 건물들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지켜지다못해 건물주가 잘못하면 임차인들에게 털릴 수도 있다. [10] 이는 중간기를 길게 잡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는 1369년부터 1389년까지를 프랑스가 영토를 탈환하는 2기, 이후 잠시 휴전기를 두었다가 1415년부터 1429년을 잉글랜드 재우세의 3기로 보고 있고(즉, 사실상 다섯 국면의 구분이다), Osprey 출판사는 헨리 4세의 즉위년인 1399년을 기준으로 2기와 3기를 가르고 있으나 이는 잉글랜드적인 기준에 가깝다. [11] 아르들 회의가 있던 해. [12] 잉글랜드가 제노바에게 보상금을 주고 프랑스 해군을 지원하지 말라고 한 게 영향을 끼쳤다. [13] 묘하게 바다에서 강한 잉글랜드육지에서 강한 프랑스라는 구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에도 이어졌다. (사실 프랑스 육군은 통일 상태의 독일을 제외하면 맞붙을 만한 규모의 상대가 별로 없다.) [14] 이탈리아의 바르디와 페루치 가문이다. 잉글랜드 양모 수출 독점권과 여러 혜택을 조건으로 하여 에드워드 3세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이를 통해 에드워드 3세는 전쟁 자금을 얻었고 두 가문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가 돈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받아 두 가문 모두 몰락하고 만다. [15] 프랑스군은 제노아 용병 석궁병들이 석궁을 썼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16] 말에서 내린 기사를 뜻한다. 절대 동물 하마를 타고 다니는 기사가 아니다! [17] 필리프 6세는 크레시 전투 2달 전부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동안 씹고있었다. [18] 네슬레경인 기 장군이 말에서 내려 싸우라는 신박한 전략을 세웠음에도 프랑스는 장궁병에게 간발의 차로 졌고, 이후 프랑스는 다시 장궁병에 꼴아박는 과거의 기병대로 돌아갔다(...) 프랑스의 기사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1351년에는 양군에서 30명의 기사가 장소와 일시를 정하여 대결한 <30명의 싸움>을 제안해 벌일 정도였다. 물론 전쟁의 성패와는 상관 없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19]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분쟁에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둘 다 끼어들었다. [20] 게클렝도 정면 대결에선 흑태자를 못 이겼다. 아니, 게클렝 자체가 정면 대결에서 승률이 영... [21] 결국 14년 뒤 존의 아들 헨리가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끌어내고 헨리 4세로 즉위한다. [22] 1380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런던이 점령되었고, 1387년의 라드콧 브릿지 전투로 국왕에 동조하는 화평파 귀족들이 반대파에게 크게 졌다. [23] 장 2세의 막내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로부터 시작된 가문이다. [24] 루이의 아들인 샤를이 결혼한 아르마냐크 백작가의 이름을 땄다. 후에 부르봉 왕가가 되는 부르봉도 이 파에 협력한다. [25] 샤를 5세의 작은아들 루이 1세로부터 시작된 가문이다. [26]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은 모두 왕의 방계 후손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숙부와 조카 사이였다. [27] 플랑드르 백작을 겸임한 필리프 2세의 아들이었다. [28] 샤를 5세의 아들로 샤를 6세의 동생이었다. [29] 아비뇽 유수 문서의 서방 대이교 대목 참조. [30] 물론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근대화로 전쟁의 규모가 커진 것에 반해 전술이나 전략이 따라주지 못해 한번 자리잡은 방어선을 붕괴시킬 만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프랑스 외에도 영국, 독일 또한 1차대전 당시에는 참호전이라는 삽질을 계속해야 했다. 실제 대전기 프랑스는 1차대전 초중반 서부전선을 단독으로 지탱하다시피했고, 독일군의 서진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31] 이 전투에서 본격적으로 플레이트 아머vs 장궁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일단 승리는 플레이트 아머. 근데 이탈리아 용병들은 잉글랜드군 측면을 공격한 게 아니라 본진을 털러 가다가 반격크리 먹고 달아나버렸다... 가우가멜라도 그렇고 라피아, 마그네시아 등등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패배 플래그인 듯 싶다. [32] 직역하면 돌고래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의미는 도팽 공작위를 뜻한다. 잉글랜드의 황태자에게 주어지는 작위인 웨일스 공과 마찬가지로, 도팽 공작의 칭호는 프랑스의 황태자에게 주어졌으므로 도팽은 프랑스 황태자를 일컫는다. [33] 나중에 둘이 본격적으로 격돌하는 게 장미전쟁이다. [34] 그런데 노르망디는 사실 필리프 2세 시절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존 왕으로부터 무력으로 빼앗았다가 100년전쟁 때 다시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땅이다. [35] 전통적으로 노르망디의 일부였던 채널 제도는 프랑스가 빼앗지 못해서 프랑스 본토 코앞에 있는 이곳은 영국의 영토로 확정된다. 조그만한 섬들이라 영국이 이곳까지 다스리긴 하지만 채널 제도는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고 있는 영국 왕실 영토이다. [36] 영국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땅. [37]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1802년 아미앵 조약이 맺어지면서 영국 왕의 문장에서 백합이 삭제되었다. 물론, 충돌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다시 이어졌지만... [38] 물론, 축구판에는 사이가 좋은 국가들이 거의 없긴 하다. [39] 기사도 자체가 정면승부, 그중에서도 기병들의 정면돌진, 하루 종일 강철갑옷을 입고 싸울 수 있는 인내심을 기르는데 최적화 된 군인 사상이었으므로 당연하다. [40] 정발과 송상현, 김천일, 이억기는 다소 중과부적인 측면도 있어 절대 원균과 동렬에 놓을 인물이 아니다. 정발, 송상헌 같은 경우엔 각각 동래성 전투, 부산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성 하나에 군민을 합쳐 수천 명밖에 되지 않는 이들을 이끌고 싸웠으나 적들은 적어도 1만은 되는 군대였다. 이건 도저히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가 없는 조건이었고 김천일의 경우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여러 의병 부대와 관군을 합쳐도 1만 명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적들은 10만 명이었다. 이억기의 경우 어느 병신 친일파 삼도수군다이묘통제사 병신력 넘치는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쪽도 당연히 질 수밖에 없었다. 신립은 탄금대 전투의 패배로 원균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었지만 이쪽은 최소한 책임감은 있는 인물이었기에 책임감도 능력도 없는 원균에 비하기는 미안한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