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피에르 도르주몽 (Pierre d'Orgemo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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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15년 ~ 1389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라니쉬르마른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
아버지 | 장 도르주몽 | |
자녀 | 피에르, 아모리, 니콜라, 기욤 | |
직위 | 프랑스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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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최측근이었다.2. 생애
1315년경 라니쉬르마른에서 장 도르주몽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 도르주몽은 파리 생루에 건물을 소유한 부르주아였다. 그는 일찍이 법학을 공부하고 1340년 파리 삼부회에서 서기로 활동했다. 이후 왕실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356년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루아 왕조를 지지했다. 특히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반란이 1357년에 파리에서 발발했을 때도 샤를 도팽을 지지했다. 그 결과, 그는 샤를 도팽의 인정을 받았다.1373년 11월 20일 샤를 5세에 의해 프랑스 총리에 선임되어 1380년 사망할 때까지 총리를 역임하면서 내치를 전담했고, 1373년 크리스마스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또한 1350년부터 1380년까지 이어지던 프랑스 연대기의 집필에 참여했다. 1384년 샤를 6세에 의해 도피네 총리로 선임되었다. 1389년 6월 3일 파리에서 사망했고, 생트카트린뒤발데콜리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네 아들을 낳았다. 장남 피에르(1343 ~ 1409)는 파리 주교, 테루안 주교, 파리 삼부회 고문, 회계회의소 회장, 누아지르세크 영주를 역임했으며, 차남 아모리(1350 ~ 1400)는 샹티이 영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의 총리, 샤를 6세의 회계 및 법률 고문,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총리, 대평의회 의원을 역임하면서 갤드레 공국과 이탈리아에서 여러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삼남 니콜라(? ~ 1416)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참사회원이자 의회 서기 고문이자 회계원 회원을 역임했으나, 1414년 용맹공 장이 파리로 입성하게 하려는 음모에 참가했다가 발각되어 1416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고 오를레앙 주교의 감옥에 갇혔다가 곧 사망했다. 4남 기욤(? ~ 1421)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제빵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의 물과 숲의 관리인, 왕의 전쟁 재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