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니드 헤드겐 전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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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01년 6월, 오와인 글린두르가 이끄는 웨일즈 반란군이 잉글랜드 토벌대를 격파한 첫번째 전투.2. 상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왕좌를 위협하는 강력한 대귀족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는데, 이는 웨일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웨일즈는 반자치적인 봉건국가, 주교령, 샤이어, 왕이 직접 소유하는 토지가 다양하게 섞인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리처드 2세에게 숙청된 이들의 땅이 몰수되어 왕의 지지자들에게 부분적으로 분배되었지만, 다수의 영지는 왕실 직할지가 되었다. 이때 많은 웨일스 사람들이 새로운 왕실 직할지를 대신 관리해주는 대가로 여러 직책과 지위를 획득했고, 이를 토대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출세길을 도모하고자 했다.그러던 1399년 9월 30일, 리처드 2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반란으로 폐위된 뒤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했다. 웨일스인들은 자신들에게 출세길을 열어준 리처드 2세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이 사건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1400년 1월 헨리 4세를 암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던 음모가 발각되면서 여러 사람이 숙청되었을 때 웨일스 출신 잉글랜드 궁수 대장이 처형되자, 웨일스 국경 도시인 체스터에서 심각한 소요가 일어났다. 웨일스인들은 이 일을 계기로 헨리 4세가 웨일스인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으며, 리처드 2세에게 기용되었던 웨일스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되고 영지를 잃을 거라는 불안감을 품었다.
오와인 또한 리처드 2세의 폐위와 헨리 4세의 등극으로 인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당시 그는 웨일스 주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제3대 루틴의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와 오랜 영지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1399년에는 리처드 2세가 주재한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헨리 4세가 즉위한 뒤 새로운 왕의 추종자였던 레지날드 그레이가 재차 소송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그는 다음 군사작전을 위해 민병대를 모으라는 왕명을 글린두르에게 의도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오와인이 이 때문에 민병대를 소집하지 않자, 헨리 4세는 그를 반역자라고 규탄하고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박탈했으며, 그레이 남작에게 반군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와인은 왕에게 서신을 보내 해명하려 했지만, 서신은 모종의 이유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는 끝장이라는 걸 직감한 오와인은 1400년 9월 16일 일가족과 성 아삽 교회 학장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웨일스 프린스를 자칭했다. 그는 9월 19일 그레이 요새를 공략한 뒤 파괴했으며, 덴바이, 루들란, 플린트, 하워든 및 홀트를 며칠 만에 공략했다. 9월 22일 오스웨스트리를 습격해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9월 24일 남쪽의 웰시풀을 포함한 포이스의 여러 성채를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앵글시의 튜더 가문은 오와인의 형제인 튜더 압 그루퍼드의 지휘하에 봉기를 일으켰다. 튜더 가문은 앵글시의 저명한 가문이었으며,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 때 참여한 웨일스 궁수 대장 그윌림 압 튜더와 리스 압 튜더가 이 가문 출신일 정도로 리처드 2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곧 오와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원정을 벌이고 있던 헨리 4세는 오와인이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군대를 돌려 9월 26일 슈루즈버리에 도착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노스 웨일스 전역으로 이동했지만, 그 과정에서 악천후 속에서 산속에 숨어있던 웨일즈 유격대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고 막심한 피해만 입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0월 15일 병력이 크게 줄어든 채 슈루즈버리 성으로 돌아왔다. 오와인의 반란군이 헨리 4세를 물리치자, 그의 명성은 웨일스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1401년, 반란은 웨일스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웨일스 북부와 중부 시골 지역 전체가 오와인을 지지했으며, 북부 전역의 잉글랜드 도시, 성 및 사유지에 끊임없는 습격이 벌어졌다. 심지어 웨일스 남부의 브레콘과 궨트에서도 스스로 "오와인의 아이들"이라 자칭하는 이들의 봉기와 약탈이 벌어졌다. 헨리 4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약한 헨리 '핫스퍼' 퍼시를 웨일스 토벌대 지휘관으로 세웠으며, 14살된 아들 머스의 헨리 왕자를 헨리 퍼시의 부관으로 세웠다.
1401년 6월, 잉글랜드인과 플란데런 용병대로 구성된 토벌대 1,500명이 오와인 글린두르의 본거지인 마이나드 헤드겐으로 접근했다. 이에 맞서 싸우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부대 숫자에 대해, 그루피드 히라에토그가 기술한 <오와인 글린두르 연대기>는 120명이었다고 기술했다. 마이나드 헤드겐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는 마이나드(Mynydd)는 웨일스어로 산을 의미하며, 에버리스트위스(Aberystwyth) 산맥에서 북동쪽으로 20마일 떨어진 곳일 거라고 추정한다. 전투 과정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오와인 글린두르가 토벌대를 유인해 200명을 사살하고 생존자들을 생포했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글린두르는 가볍게 무장한 웨일스군의 기동성을 제대로 살려 중무장한 잉글랜드군을 유격전으로 제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나드 헤드겐 전투에서 토벌대가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 4세는 슈루즈버리와 헤레퍼드 성에서 대규모 병력을 집결한 뒤, 웨일즈 중부로 향했다. 그의 목표는 오와인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시토회가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악천후와 오와인 군대의 끊임없는 습격에 시달린 끝에, 헨리 4세는 스트라타 플로리다 수도원에 도착했다. 오랜 고생을 하느라 마음이 무척 상했던 헨리 4세는 이틀 간 공격한 끝에 수도원을 부분적으로 파괴한 뒤 오와인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의심되는 수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오와인이 대규모 왕실군과 전면전을 벌이길 기피하고 유격전을 끊임없이 구사하자, 헨리 4세는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그의 군대는 장대비로 인해 완전히 젖었고, 갑옷을 입고 잠을 자야 했다. 한 번은 거센 빗줄기로 인해 헨리 4세가 있던 천막이 떠내려가서 헨리 4세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1]. 잉글랜드군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채 막심한 피해만 입고 헤리퍼드 성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헨리 4세가 반란 진압에 연이어 실패하면서, 오와인 글린두르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졌고, 웨일스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웨일스인들 사이에서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