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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프리 스태퍼드

<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초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
Humphrey Stafford, 1st Duke of Buckingham
파일:험프리 스태퍼드.webp
이름 험프리 스태퍼드
Humphrey Stafford
출생 1402년 8월 15일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스태퍼드
사망 1460년 7월 10일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노샘프턴
배우자 앤 네빌[1]
자녀 험프리, 헨리, 존, 마가렛, 캐서린, 조앤, 앤
아버지 에드먼드 스태퍼드
어머니 글로스터의 앤[2]
형제 앤 스태퍼드
직위 스태퍼드 백작, 버킹엄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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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고,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2. 생애

1402년 8월 15일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스태퍼드에서 제5대 스태퍼드 백작 에드먼드 스태퍼드와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딸인 앤의 아들로 출생했다. 즉, 모계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았다.[3] 누이로 앤[4]이 있었다. 1403년 7월 21일, 아버지 에드먼드는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4세를 위해 반란군 지도자 헨리 '핫스퍼' 퍼시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후 험프리는 1살의 나이에 6대 스태퍼드 백작이 되었다. 어머니 앤은 스태퍼드 전체 영지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20년간 영지를 통치했고, 계부인 윌리엄 부르시에가 스태퍼드 가문의 재산을 실질적으로 관리했다. 험프리는 성년이 될 때까지 연간 1,260파운드 미만의 수입을 받았다. 어머니는 법에 따라 후견인이 될 수 없었기에, 험프리는 헨리 4세의 왕비인 나바라의 조앤의 후견을 받았다.

1420년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1421년 4월 22일 헨리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24년 헨리 5세가 사망한 후 헨리 6세의 섭정 위원회에 합류했다. 이때 섭정 위원회에 함께 있었던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와 헨리 5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간의 권력 분쟁이 심해졌다. 그는 두 사람간의 갈등을 가급적 중재하려 애썼다. 1425년 10월 켄터베리 대주교 헨리 치셀, 고림브라 공작 피터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중재했다. 1428년 글로스터 공작이 왕의 숙부 자격으로 더 많은 권력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는 글로스터 공작의 지위는 6년 전에 공식화되었고, 현재는 변하지 않으며 앞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또한 그는 헨리 보퍼트에게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취임한 후 가터 훈장을 지닌 고위 성직자라는 전통적인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때까지 윈저 궁에서 떠나 있으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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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잔 다르크를 죽이려는 험프리.jpg
잔 다르크를 죽이려는 험프리
1429년 4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1430년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위해 왕과 함께 프랑스로 여행했다. 이후 노르망디 보안관, 파리 주지사,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파리와 일드프랑스 일대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1431년 루앙에서 열린 잔 다르크 재판에 참석했는데,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다시는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자 격분해 단검으로 그녀를 찌르려 했다가 주변인들에게 제지되었다. 한편, 그는 1431년에 페르슈 백작이라는 칭호와 함께 노르망디 일부 지역을 영지로 수여받았다.

1438년 어머니 글로스터의 앤이 사망한 후 어머니의 영지까지 상속받으면서 상당한 수입을 획득했다. 1442년부터 1452년까지 칼레의 수비대장을 역임했지만, 잉글랜드 왕실이 칼레에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비로 급료를 지불해야 했다. 1444년 9월 14일 버킹엄 공작에 취임했으며, 1450년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의 관리인이자 도버 성주로 선임되었다. 또한 1445년과 1446년에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서 왕실 대표를 맡았으며, 1447년 2월 18일 잉글랜드의 무관장 자격으로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를 반역 혐의로 체포했다.

1450년 잭 케이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사촌인 윌리엄 스태퍼드와 함께 진압을 시도했지만 6월 18일 세븐오크스에서 매복에 걸려 참패했다. 당대의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로버트 파비안에 따르면, 잭 케이드는 승리를 거둔 후 험프리가 버린 갑옷과 헬멧 및 금박 박차를 착용했다고 한다. 반란이 나중에 진압된 후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켄트를 진정시키기 위해 설립된 조사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 후 요크의 리처드 앙주의 마르그리트 및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험프리는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험프리의 아내로 자신의 맏며느리가 서머셋 공작의 딸 마거릿 보퍼트였지만, 자신의 아내 앤 네빌은[5] 요크의 리처드의 아내 세실리 네빌의 누이였기 때문에 양쪽 모두와 인척관계여서 둘 중 한 쪽을 지지하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1452년 요크의 리처드가 군대를 모집하고 런던으로 진군했을 때 헨리 6세를 호위하여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지만, 양자간의 화해를 주선해 리처드가 무기를 내려놓고 군대를 해산하도록 설득한 후 왕실의 사면을 받게 했다.

1453년 여름, 잉글랜드 남부를 순행하고 있던 헨리 6세가 정신병에 걸렸다. 이후 요크의 리처드가 통치가 불가능해진 왕을 대신해 호국경에 선포되었고, 서머셋 공작은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헨리 6세는 1454년 성탄절에 정신을 차렸고,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설득에 따라 서머셋 공작을 석방하고 요크의 리처드를 해임했다. 이에 요크의 리처드는 숙청될 것을 우려해 잉글랜드 북부로 가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고, 헨리 6세와 추종자들이 군대를 이끌고 뒤따랐다. 양자는 세인트 올번스 인근에서 대치했고, 그는 1452년 때와 마찬가지로 양자간의 평화 협상을 이루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협상이 실패했고, 1455년 5월 22일 리처드가 기습 공격을 가해 랭커스터군을 무너뜨렸다. 서머셋 공작은 전사했고, 헨리 6세는 생포되었으며, 그는 얼굴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진 채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리처드는 헨리 6세를 데리고 요크로 간 뒤 정신병이 재발한 왕을 대신해 호국경에 재차 취임했다. 그러나 왕의 지지자들은 리처드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이때 험프리는 리처드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두번째 호국경을 자처했다. 그러다가 1456년 2월 헨리 6세가 제정신을 되찾은 후, 리처드는 다시 호국경에서 물러났다. 그해 10월 8일 왕실에 코벤트리에 도착한 뒤 의회가 열렸다. 의회는 험프리의 거센 반대를 뿌리치고 리처드의 지지자들을 정계에서 배제했다. 같은 날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와 코벤트리의 도시 경비대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이에 험프리는 즉시 뛰어들어 양자를 설득해 서로 화해하게 했다.

이후 요크 지지자들과 랭커스터 지지자들 사이의 충돌이 재개되었고, 험프리는 고심 끝에 랭커스터 왕조를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그가 요크의 리처드를 완전히 실각시키고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1459년 10월 12일, 험프리는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의 리처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웨일스로 도주했고 의회는 리처드의 지지자들을 반역자로 선언하고 모든 재산과 지위를 몰수했다. 리처드의 아내인 요크 공작부인 세실리는 험프리의 감독을 받게 되었는데, 연대기에 따르면 험프리는 자신의 처제이기도 한 세실리를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1460년에 자신의 처조카이자[6] 후대에 킹메이커로 널리 알려질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군대를 이끌고 요크의 리처드와 합세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다. 험프리는 이에 맞서기 위해 출진했고 7월 10일 노샘프턴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랭커스터군이 참패했고 험프리는 전사했으며 그의 유해는 노샘프턴의 그레이 프라이어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앤 네빌(1408 ~ 1480): 험프리 스태퍼드의 아내로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그의 후처 조앤 보퍼트의 딸. 동복형제자매로 켄트 백작 윌리엄 네빌, 제5대 솔즈베리 백작인 리처드 네빌[7], 요크의 리처드의 아내 세실리 네빌 등이 있다.
    • 험프리 스태퍼드(1424 ~ 1459): 스태퍼드 백작. 이 사람의 아들 헨리 스태퍼드가 1460년 이후 할아버지의 지위였던 버킹엄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제2대 버킹엄 공작이 된 헨리는 에드워드 4세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리처드 3세의 찬탈에 가담하여 윌리엄 헤이스팅스를 반역 혐의로 처형시켰지만 곧 리처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 헨리 스태퍼드(1425 ~ 1471): 기사. 마거릿 보퍼트의 세번째 남편.
    • 존 스태퍼드(1427 ~ 1473): 윌트셔 백작.
    • 마가렛 스태퍼드(1435 ~ ?): 기사 로버트 던햄의 부인.
    • 캐서린 스태퍼드(1437 ~ 1476): 제3대 슈루즈베리 백작 존 탈보트의 부인.
    • 조앤 스태퍼드(1442 ~ 1484): 제2대 보몬트 자작 윌리엄 보몬트와 초혼, 노퍽 및 서퍽 보안관인 버킹엄 출신의 기사 윌리엄 크니베트와 재혼.
    • 앤 스태퍼드(1446 ~ 1472): 기사 오브리 드 베레와 초혼, 제5대 코브햄 남작 토머스 코브햄과 재혼.


[1]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조앤 보퍼트의 딸로 곤트의 존의 외손녀다. [2]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의 딸로 에드워드 3세의 친손녀. [3] 외증조할아버지가 에드워드 3세(어머니 앤의 친할아버지)다. [4] ? ~ 1432,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와 초혼, 제2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와 재혼 [5] 앤 네빌의 어머니 조앤 보퍼트와 험프리의 어머니 글로스터의 앤이 친사촌이기 때문에 육촌 지간이기도 했다. [6] 아내 앤 네빌의 친정조카. [7] 킹메이커로 유명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