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1:14:05

알주바호타 전투



파일:Batalha_de_Aljubarrota_02.jpg

1. 개요2. 배경 및 진행3. 영향4. 여담

1. 개요

1385년 8월 14일 포르투갈 중부 알주바호타(Aljubarrota)에서 벌어진 전투. 포르투갈 왕국 주앙 1세 카스티야 왕국 후안 1세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포르투갈은 잉글랜드 왕국의 도움을 받아 카스티야 침공군을 격파하고 독립을 재확인 했다.

2. 배경 및 진행

1385년 포르투갈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싸움이다. 페르난두 1세가 1383년 사망하며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즉위하지만, 페르난두 1세가 사망 몇개월 전 포르투갈 왕위를 베아트리스의 후손이 잇도록 카스티야와 조약을 체결한 탓에 포르투갈, 특히 카스티야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상인계급의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들은 이를 무시하고 포르투갈 왕으로 주앙 1세[1]를 추대하고, 이에 후안 1세[2]가 포르투갈로 진공하여 싸움이 1385년까지 계속되었다.

후안 1세는 이 반란세력을 처단하고자 카스티야 및 아라곤과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충성파 귀족들, 그리고 카스티야 왕위 주장자였던 잉글랜드의 실세 곤트의 존이 포르투갈을 지원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백년 전쟁중이었던 프랑스에서 기사 2천 여명을 지원받아 총 3만에 달하는 군세를 모아 리스본으로 진격하였고, 이를 맞아 주앙 1세는 논의 끝에 먼저 선수를 쳐서 기세를 꺾어야 병력차를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 이미 잉글랜드에서 보내 준 장궁병 6백 명을 포함한 연합군 6천 여명을 이끌고 리스본 인근의 알주바호타 언덕에 진을 치고 요새화했다.

카스티야 연합군이 질과 양 모두 압도적으로 우월한 병력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후안 1세가 동맹국의 몀성 높은 프랑스 기사들을 우대하면서 카스티야 귀족 병력과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알주바호타 공략 전날의 작전회의에서 프랑스 기사들과 카스티야 귀족간에 말싸움이 벌어지면서 두 세력간의 사이는 완전히 결렬되었고, 결국 프랑스측의 주장대로 프랑스 중기병대가 선봉 돌격을 하는 동안 카스티야 귀족들은 지원을 거부하고 후방에 대기하는 형상이 되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포르투갈 연합군의 대부분이 갑옷조차 제대로 없어서 한 벌을 나눠입은 신세인 징집병들임을 비웃으며, 알주바호타 언덕에 유일하게 기병대가 올라갈 수 있는 남측 사면을 통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으나 마름쇠와 임시 바리케이트로 도배된 언덕지대에서 쏟아지는 잉글랜드 장궁병과 포르투갈 석궁병 및 투석병의 사격 세례를 받고 절반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최종적으로 포르투갈 보병 방진에 도달했으나 햇빛이 내리쬐는 언덕을 뚫고 지친 중장기사들은 체력 차이와 머릿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포르투갈에 항복했다. 포로가 된 프랑스 병력들은 몸값 지불 대상으로서 후방에 이송되었으나, 날이 지나기도 전에 카스티야 본대가 돌격을 감행하면서 포로 교섭 의지가 없다고 판단, 이미 스스로 몸값을 지불한 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로들은 전부 처형당했다.

한편 귀족들의 거부로 프랑스 기사들을 지원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후안 1세는 프랑스군의 괴멸 소식을 듣고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돌격을 감행하여, 프랑스군의 1차 돌격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 군 간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카스티야군은 압도적인 머릿수로 포르투갈 연합군의 킬존을 뚫고 주앙 1세를 직접 전열로 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지만, 전초전과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물러서지 않는 포르투갈 연합군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두번의 대규모 돌격 끝에 후퇴하면서, 포르투갈 군이 1천 여명의 사상자를 낼 때 약 3~4배에 달하는 피해를 입으며 물러나고 만다.

전투 이후 현장에서 물러난 후안 1세는 원정이 실패로 끝났음을 파악하자 병력을 내버려두고 소수 측근과 함께 카스티야로 귀환해버렸고, 왕이 부재한 카스티야 연합군은 각자도생을 위해 와해되어 포르투갈에서 철수했다. 주앙 1세의 포르투갈군은 카스티야군을 추격하진 않았지만, 카스티야군은 퇴각 도중 주앙 1세를 지지하는 주민들에게 공격받아 추가로 5천 명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3. 영향

이 전투로 인해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주앙 1세는 이 승리를 기념하고자 승리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알주바호타 인근에 지어 이를 기념하는데, 이 수도원이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탈랴[3] 수도원이다.

이듬해 포르투갈, 잉글랜드 양국은 페르난두 1세 시기인 1373년 체결한 잉글랜드-포르투갈 조약[4]을 새롭게 윈저 조약(1386년)으로 갱신해 현존 가장 오래된 잉포 동맹을 재확인했다. 주앙 1세는 리처드 2세의 사촌이자 선대왕 에드워드 3세의 손녀 랭커스터의 필리파를 주앙 1세의 왕비로 맞아 들였다.

4. 여담

이 전투의 삽화가 주호민 닮은꼴로 나온적이 있다.아래 링크 17분 쯤 재생.

https://www.youtube.com/watch?v=NOhS0HpAU9U
[1] 보르고냐 왕조의 적통이 아닌 사생아였다. [2] 베아트리스의 남편이자 카스티야의 왕으로 페르난두 1세의 사위에 해당한다. [3] Batalha, 포르투갈어로 전투를 뜻한다. [4] 이 조약은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이 포르투갈 군사기지 이용을 요청하면서 다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