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7:31:28

루이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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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카페 왕조 제6대 국왕
루이 7세
Louis VII
파일:루이 7세.jpg
출생 1120년
사망 1180년 9월 18일 (향년 59세)
프랑스 왕국 알리에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1137년 8월 1일 ~ 1180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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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루이 6세
어머니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배우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1137년 결혼/1152년 이혼)
카스티야의 콩스탕스[1](1155년 결혼/1160년 사망)
샹파뉴의 아델 (1160년 결혼)
자녀 마리, 알릭스, 마르가리트, 아델,
필리프 오귀스트, 아녜스
종교 가톨릭
별칭 청년왕(The Young/Le Jeune)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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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이자 카페 왕조의 제6대 왕.

2. 생애

'전사왕' 루이 6세와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여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장남인 필리프가 15세에 낙마 사고로 요절[2]하여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즉위 직후, 추종자 중의 한 주교를 대주교로 승격시키려다가 교황 및 상파뉴 백작과 대립하게 되었다.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혼인했으나, 제2차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사이가 나빠져 1152년에 이혼했다.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10세로부터 아키텐 공국과 푸아티에 백작령의 광대한 영지를 15세에 계승했다. 아키텐 지방 영주들의 충성서약에도 불구하고, 훗날이 걱정된 기욤 10세는 영지를 지켜줄 유력한 사윗감으로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를 점찍고는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 3개월 후 루이 7세와 결혼한 엘레오노르는 루이와 함께 파리로 이동하던 중 시아버지인 루이 6세의 죽음과 함께 프랑스의 왕비에 올랐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에게서 아들을 얻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 7세는 이혼에 합의했다. 결국 1152년 3월 11일 교황은 10촌의 근친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무효화했다. 하지만 결혼 무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딸들인 마리와 알릭스는 적녀로 인정받았고, 양육권은 루이 7세에게 넘어갔다. 대신 엘레오노르는 결혼 이전의 대영지를 되돌려 받기로 했다. 결혼 취소가 승인되자마자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자신의 친척이었던 9세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넷과 약혼했다. 이 헨리가 바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즉,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아키텐의 방대한 영지를 가진 셈이 되어서 후에 지속적으로 전개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대립을 예고했다.( 앙주 제국)

그 후 루이 7세는 카스티야의 콩스탕스[3]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했고, 아델 드 샹파뉴와 재혼하여 1165년 고대하던 아들 필리프 오귀스트를 얻었다. 1171년에는 딸 아녜스를 얻었다. 1180년 알리에에서 사망했다.

그의 치세 기간 중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1] 스페인어 이름은 '콘스탄사', 프랑스어 이름은 '콩스탕스'로, 다 같은 이름이다. [2] 요절 사유가 기가 막힌데 이미 1129년 랭스에서 대관식까지 치른 상태였으나 1131년 10월 13일 농장 돼지가 필리프의 말 다리 사이로 뛰어드는 바람에 파리 근교에서 낙마사했다. 지금이나 당대에나 아주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불렸고, 졸지에 '돼지에게 죽은 필리프'라 불리게 되었다. 향년 15세. 참고로 야생 돼지와 싸우다 죽은 필리프 4세의 경우는 명예로운 죽음이라 불렸다. [3] 스페인어 이름은 '콘스탄사', 프랑스어 이름은 '콩스탕스'로, 다 같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