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01:07:46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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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
Archambaud de Grailly
생몰년도 1330년 ~ 1412년
출생지 가스코뉴 공국
사망지 푸아 백국
아버지 피에르 2세 드 그레일리
어머니 페리고르의 에랑부르주
아내 이자벨 드 푸아카스텔봉
자녀 장 1세, 가스통 1세, 아르샹보, 마티외, 피에르
직위 부흐의 카프탈, 마르상 자작, 베아른 자작, 카스텔봉 자작, 푸아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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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된 가스코뉴 공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지지했지만 나중에 푸아 백작위를 아내로부터 물려받은 뒤 프랑스 왕국의 압력을 받고 프랑스의 봉신이 되었다.

2. 생애

1330년경 가스코뉴 공국에 속한 카스티용의 자작인 피에르 2세 드 그레일리와 페리고르 백작 헬리 9세의 딸 에랑부르주의 아들로 출생했다. 에랑부르주는 피에르 2세의 두번째 아내로, 피에르 2세는 첫번째 아내이자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인 보르도의 아살리드와의 사이에서 장 2세 드 그레일리, 브루니센데 드 그레일리[1]를 낳았다.

그레일리 가문의 시조인 장 1세 드 그레일리는 본래 사부아의 제네바 호수 기슭 출신으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통치 기간에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삼촌인 사보이아 백작 피에르 2세의 수행단을 따라 잉글랜드를 방문한 뒤 당시 왕위 계승권자였던 에드워드의 기사가 되었다. 그 후 베나쥬 자작으로 선임되었고, 보르도의 제염소와 도르도뉴강 통행료 취득권을 획득했으며, 가스코뉴 영지의 세네샬로 발탁되었다. 1270년 잉글랜드 국왕이 된 에드워드 1세 십자군 원정에 동행했으며, 1289년 트리폴리와 아크레에서 프랑스 자원부대를 이끌고 맘루크 왕조의 공세에 끝까지 항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기옌으로 돌아왔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가스코뉴 침공에 맞서 항전했다.

장 1세 드 그레일리 이래로, 그레일리 가문은 대대로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가스코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버지 피에르 2세 드 그레일리(1285 ~ 1356)는 카스티용 자작으로서 가스코뉴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으며,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기사로서 백년전쟁에 참여했지만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다. 반면 아르샹보와 조카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잉글랜드 왕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아르샹보는 135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카스티용 자작위를 물려받았고, 1356년 9월 19일 조카 장 3세와 함께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해 잉글랜드군의 완승에 기여했다.

이후 그와 장 3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 등 프랑스 장성들이 아키텐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데 참여했으며,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군사를 일으킨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1364년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 참가했다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참패했고, 장 3세와 함께 사로잡힌 뒤 500프랑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76년 9월 7일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 의해 파리의 템플 탑에 감금되어 있던 조카 장 3세가 옥사한 뒤 조카가 맡고 있던 부흐의 카프탈 직위를 물려받았으며, 1377년 3월 2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 의해 비스카야의 세네샬에 선임되었다.

1381년 카스텔봉 자작 로저 베르나르 2세 드 푸아카스텔봉의 장녀인 이자벨과 결혼했다. 1391년 8월 1일,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던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 사냥을 마치고 식사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곧 사망했다. 가스통 3세의 유일한 적법한 아들이었던 가스통은 1380년 6월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푸아 백국의 작위와 영토는 가스통 3세의 두번째 사촌이자 이자벨의 남동생인 마티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마티외 역시 1398년에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이로 인해 아르샹보의 아내 이자벨이 푸아 가문의 마지막 구성원으로서 모든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아르샹보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카스텔봉 자작에 이자벨의 남편으로서 푸아 백국의 공동 통치자 자격으로 마르샹 자작, 베아른 자작, 카스텔봉 자작, 그리고 푸아 백작에 취임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프랑스 왕국의 가장 큰 영토 중 하나였던 푸아 백국이 잉글랜드의 봉신에게 넘어가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르샹보가 프랑스 왕실에 충성을 서약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프랑스 무관장 루이 드 상세르에게 푸아 백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루이 드 상세르는 군대를 일으켜 아르샹보가 다스리고 있던 대부분의 영토를 점거해, 아르샹보가 1399년 5월 10일에 타르브에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겠다고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아르샹보는 프랑스 국왕을 주군으로 받들었으며, 두 아들 장 1세 가스통 1세를 인질로 파리 궁정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1412년 프랑스 왕실에 의해 랑그독 보안관이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레일리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버리고 푸아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사용했다.

3. 가족



[1] 1315 ~ 1374, 베아른의 영주 베르나르 2세 달브레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