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7 18:51:06

네스빗 무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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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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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55년 8월, 스코틀랜드군이 네스빗 무어에서 잉글랜드군을 섬멸한 전투.

2. 상세

1346년 10월 17일,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 12,000명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괴멸되었다. 데이비드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스코틀랜드 귀족 50명 이상이 살해되거나 왕과 함께 생포되었다. 잉글랜드의 지원을 토대로 스코틀랜드 국왕을 자처하던 에드워드 발리올은 이 기회를 틈타 스코틀랜드로 잠입해 갤러웨이에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뒤 1355년까지 갤러웨이의 일부 지역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를 붙잡아둬서 스코틀랜드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뜯어낼 생각만 했을 뿐, 발리올을 복위시키는 데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350년, 에드워드 3세는 데이비드 2세의 몸값으로 40,000 파운드를 설정하고, 발리올을 따랐던 스코틀랜드 지지자들의 영지를 돌려주며, 데이비드 2세가 자녀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어린 아들인 곤트의 존을 데이비드 2세의 후계자로 지명한다면, 데이비드 2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해주고 스코틀랜드와 화해하겠다고 제안했다. 데이비드 2세는 합의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 1352년 초에 잠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 호국경을 맡았으며, 왕위 계승권자였던 로버트 스튜어트는 자신을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키는 어떠한 조건도 지지하는 것을 꺼렸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1352년 3월 에드워드 3세의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데이비드 2세는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런던 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여전히 프랑스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린 터라 이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1354년, 그는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지불해주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역시 거부했는데,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스코틀랜드를 자기들을 통제하에 두려는 잉글랜드의 추가 시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1355년 초,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의 영지를 약탈했다. 이에 마치 백작은 복수를 결심하고,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각자 사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기사 60명의 지원을 받으며 1355년 8월에 잉글랜드 국경으로 진군했다.

윌리엄 더글러스는 부관인 댈하우지의 윌리엄 램지에게 노럼 성 수비대를 유인하기 위해 노럼 주변의 땅을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램지는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했고, 노럼 성주인 히턴의 토머스 그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이들을 추격했다. 윌리엄 더글러스와 패트릭 5세는 던스에서 남쪽으로 7마일 떨어진 네스빗 무어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아군을 추격하던 잉글랜드군을 습격했다. 그 결과 토머스 그레이, 제2대 데이커 남작 윌리엄 데이커가 생포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글랜드의 고급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고, 일반 장병들은 프랑스 기사단에 맡겨졌다. 프랑스 기사단 사령관은 당시 잉글랜드군의 손에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 사건은 현지에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언덕에 '살육의 언덕'이란 이름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355년 9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의 9개월간 휴전이 체결되었고, 대부분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북부에서의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얼마 후 스코틀랜드로 건너온 프랑스인들의 독려를 받고 휴전을 파기한 뒤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황폐화했고, 11월부터 베릭 공방전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