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6:33:02

브레퇴유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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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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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56년 4월 ~ 8월 20일,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인 카를로스 2세의 영지인 브레퇴유(Breteuil) 요새를 포위 공격한 공방전.

2. 상세

1350년대 중반, 프랑스 왕국의 상황은 지극히 암울했다. 중세 흑사병의 창궐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특히 1355년 10~11월 흑태자의 슈보시로 남부 프랑스의 500개 마을이 파괴되고 수많은 인적, 재산 피해가 발생하고 있을 때조차 소극적으로 대응하기만 하자, 수많은 이들이 지배층에 대한 혐오와 환멸을 느끼고 전쟁에 대한 열의를 잃어갔다.

상황이 이렇듯 악화되었지만, 프랑스 수뇌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단결해서 난국을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권력 쟁탈전에 몰두했다. 나바라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인 카를로스 2세는 어머니 호아나 2세 필리프 6세에 밀려 프랑스 국왕이 되지 못한 것에 오래전부터 반감을 품고 있었고, 장차 블루아 가문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를 기회를 엿보았다. 급기야 장 2세의 심복인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살해하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손잡으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다. 장 2세는 그가 잉글랜드 편에 붙으면 내전을 피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매우 힘들어진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에게 많은 이권을 넘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카를로스 2세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1356년 초,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를 포함한 모든 노르망디 영주들을 루앙 성에 초대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잔치가 한창일 때, 장 2세가 느닷없이 자식들과 같은 상석에 앉아있던 카를로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붙들며 외쳤다.
"이 배신자! 너는 내 아들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

카를로스의 종자 콜린 더블레(Colin Doublet)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왕실 근위대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그 후 현장에서 체포된 카를로스는 측근 4명과 함께 샹폴 성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두에의 아를뢰 요새로 이송되었다. 이때 추종자 4명[1]이 참수되었고, 그들의 유해는 광장에 내걸렸다. 카를로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에브뢰 가문과 노르망디 귀족들은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장 2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노르망디에 파견했다.

1356년 4월,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대부분을 장악하고 항복을 거부한 노르망디 중부의 브레퇴유 요새를 포위했다. 5월 14일, 장 2세는 샤르트르에 머물면서 잉글랜드의 대응에 대비해 병력을 모으고자 전국에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민중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장 2세는 병력이 모이지 않자 5월 말과 6월 초에 소집령을 재차 반포했다. 한편 필리프는 코탕탱 반도 북부로 도주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조속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356년 8월 18일, 5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지휘하에 코탕탱 반도 북동쪽의 생바스트라후그에 상륙했다. 그들은 필리프가 지휘하는 200명의 노르만 병사들과 합류했고,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브르타뉴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800명의 추가 병력이 몽트부르에서 가세했다. 잉글랜드군은 6월 24일 몽트부르에서 출발하여 노르망디 서부 일대를 관통하며 약탈을 자행했고, 7월 5일 브레퇴유에 도착했다. 브레퇴유를 포위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했고, 수비대는 1년간 동안 포위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급을 받았다.

헨리는 여세를 이어가 7월 4일 베르누이로 진군해 그곳을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여긴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프랑스군이 베르누이에서 11km 떨어진 콩데쉬르이통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는 전투를 준비했다. 프랑스군이 콩데쉬르이통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낙오병들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 헨리는 그들과 3~5km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했다. 장 2세는 헨리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헨리는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는 애매한 답을 했다. 그 후 헨리는 밤에 숙영지를 철거하고 45km 떨어진 아르장탕까지 강행군했다. 장 2세는 이들을 추격하는 대신 브레퇴유를 재차 포위하기로 했다.

7월 12일부터 브레퇴유 포위를 재개한 장 2세는 성벽 아래에 땅굴을 파서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8월의 어느 시점에 거대한 이동식 공성탑을 지어서 성벽까지 밀고 들어갔지만, 수비대가 공성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격퇴되었다. 이렇듯 수비대가 악착같이 저항한 데다 1년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저장했으니, 가까운 시일에 성을 공략하는 것은 요원했다. 여기에 가스코뉴에 있던 흑태자 에드워드가 8월 4일부터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여러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장 2세는 처음엔 가스코뉴에서 올라오는 적을 격퇴하자는 제안에 "브레퇴유의 반역자들이 더 위험하다!"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프랑스 남서부의 민심이 심하게 악화되어 자칫하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 들 수 도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결국 브레퇴유를 무력으로 공략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그 대신 수비대에게 코탕탱 반도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해주고 귀중품과 물품을 가져갈 수 있게 해줄 테니 브레퇴유를 떠나라고 권유했다. 수비대는 처음엔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장 2세가 막대한 돈을 찔러주자 이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브에퇴유 문제를 해결한 뒤, 장 2세의 프랑스 주력군은 흑태자를 물리치기 위해 남하했고 푸아티에에서 격돌했다.
[1] 그 중 2명은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에 관여한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