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23:21:24

베르투카 달브레

이름 베르투카 달브레
Bertucat d'Albret
출생 1335년
가스코뉴 보르도
사망 1383년 10월
프랑스 왕국 알브레 공작령
아버지 베르나르 에지 5세 달브레 또는 베르나르 2세 드 베이레스
직위 용병대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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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스코뉴 공국 출신 용병대장.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사이를 오가며 백년전쟁에서 활동했다.

2. 생애

가스코뉴 공국의 중심지 보르도에서 알브레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아미텐 공국의 중위를 맡은 베르나르 에지 5세 달브레(Bernard Ezi V d'Albret, 1295 ~ 1358)의 사생아라고 하며, 또다른 설로는 베르나르 에지 5세 달브레의 조카인 베르나르 2세 드 베이레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사생아였기에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었지만, 남프랑스 일대에서 명망 높은 알브레 가문의 일원으로서 군 경력을 쌓는 데 도움받을 수 있었다.

1350년대에 몽퀴크에서 용병 활동을 수행했으며, 사촌인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의 군대에 가담해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과 함께 프랑스군을 대적했다. 이후 피작 시 인근의 퐁스를 점령했으며, 뒤이어 오베르뉴의 세무르를 점령했다. 1358년 4월, 그는 주민들에게 많은 돈을 받아낸 뒤 세무르에서 철수했다. 이후 쿼시의 카스텔나우-몽트라티에를 접수하고 주변 영토에 살던 주민드로부터 몸값을 받아냈다.

1359년 여름, 오베르뉴를 약탈하는 로버트 놀스의 대용병대에 가담했으며, 1361년 8월 세갱 드 바드폴이 이끄는 랑그독 약탈행진에 참여했다. 1362년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와 알브레 가문이 맞붙었을 때 알브레 가문 편에 참여했지만, 그해 12월 5일 루나크 전투에서 참패를 몉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석방된 뒤 생플루를 몸값으로 지불했다. 1363년 생플루 민병대에 생포된 뒤 처형될 뻔했지만, 무라트 자작 기욤 드 카르디악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졌다.

1364년 5월 16일 프랑스군 사령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군대에 가담해 코르슈렐 전투에 참여했으며, 1365년 오베르뉴에 돌아와서 블로 르 로쉐에 정착했다. 1366년 전우인 베르나르 드 라 살과 함께 마르실리 르 샤텔을 점령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으며, 흑태자 에드워드의 카스티야 원정에 동행했다. 1367년 9월 프랑스로 돌아완 뒤 베르나르 드 라 샬과함께 샤를 다르투아의 용병대에 가담해 루아르 강을 건너 프랑스 왕국의 상당 부분을 횡단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1369년 로버트 놀스, 존 챈더스와 함께 쿼시 일대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했으며, 1371년 베르나르 드 라 살과 함께 오베르뉴와 리무쟁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371년 10월 14일 피작에 정착한 뒤 베르나르 드 라 살과 함께 게보당과 비바레에서 약탈 작전을 벌였다. 1373년 8월 3일 120,000 프랑을 받는 대가로 게보당과 비바레에서 떠났다. 1373년 12월, 베르투카는 매복 공격으로 사로잡힌 뒤 앙주 공작 루이 1세에게 전달된 후 로크모레 성에 갇혔다. 1376년 초 큰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뒤 잉글랜드군 진영에 들어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공세로부터 베르주라크를 지키려 했다가 또다시 생포되었다. 프랑스 지녕에 있던 그의 사촌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가 개입한 덕분에, 그는 풀려날 수 있었다.

1378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로크포르 성과 아르베루에 영지를 수여받았으며, 1379년 봄까지 나바라 국왕을 위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싸웠다. 같은 해 말에 랑그독과 오베르뉴 및 쿼시까지 프랑스 남부 전역을 6개월간 활보하며 군사 활동을 벌였따. 1381년 봄부터 런던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잉글랜드와 아키텐의 거대 용병대 지도자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로부터 리온스, 생마뉴, 포덴삭, 랑고이랑, 베르퇴유 등지를 수여받았다. 1383년 10월 사망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동생의 아들인 라모넷 드 소트가 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