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7AA9C><colcolor=#000000>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 Jean V d'Armagnac, Comte d'Armagna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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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 5세 다르마냐크 Jean V d'Armagnac |
출생 |
1420년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 |
사망 |
1473년
3월 6일 프랑스 왕국 레크투르 |
배우자 | 이자벨 다르마냐크[1](1455년 결혼/1476년 사망) |
잔 드 푸아(1469년 결혼) | |
자녀 | 장, 앙투안, 로즈 |
아버지 | 장 4세 다르마냐크 |
어머니 | 나바라의 이사벨라 |
형제 | 마리, 엘레오노르, 샤를, 이자벨 |
직위 | 로마뉴 자작, 아르마냐크 백작, 로데츠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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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참여해 가스코뉴 정벌에 기여했다.그러나 친여동생 이자벨 다르마냐크와 근친상간을 저질러 결혼까지 하면서 두 교황에게 파문을 당할 정도로 당대에 심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샤를 7세가 파견한 군대에게 밀려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루이 11세의 용서를 받고 귀환했지만 잉글랜드와 내통해 반역을 꾀한 혐의로 고발당한 뒤 토벌군에 맞서 항전하다가 피살당했다.
2. 행적
1420년경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 다르마냐크와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이사벨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마리[2], 엘레오노르[3], 샤를 다르마냐크[4], 이자벨[5]이 있었다.그는 샤를 7세의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39년 기옌과 가스코뉴에서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40년 아버지가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장 드 뒤누아, 샤를 1세 드 부르봉, 장 2세 달랑송,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도팽 루이와 함께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담하지 않고 샤를 7세를 끝까지 따랐다. 그러나 1443년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이 릴주르댕에서 잉글랜드와 내통한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카탈루냐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아버지가 사면되자 곧바로 돌아갔다.
1450년 1월 5일, 아버지 장 4세가 사망했다. 그는 왕실군이 주둔한 몇몇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451년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정벌할 때 참여했고, 샤를 7세는 이에 보답하고자 왕실군을 아르마냐크 영지에서 전원 철수시키고 도시들을 돌려줬다. 이후 아버지 대에 잃어버린 코밍주 백국을 되찾기로 마음먹고,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와 동맹을 맺고 코밍주를 압박한 끝에 1454년 코밍주 백작 마티외 드 푸아코밍주가 사망한 틈을 타 코밍주를 접수했다. 여기에 자신의 부하를 오슈 대교구의 주교로 세우기 위해 무력을 동원해 신임 대주교 필리프 드 레비가 오슈 대교구에 부임하는 것을 막았다. 이에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격분해 프랑스 왕국에 항의했다.
이 무렵, 장 5세는 여동생 이자벨 다르마냐크와 사랑에 빠졌다. 연대기 작가 마티외 드 쿠시에 따르면 이자벨은 당대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레크투르 성에서 장, 앙투안, 로즈 등, 2남 1녀를 낳았다. 세번째 아이를 낳은 후 장 5세는 여동생과 결혼하기로 작정하고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결혼 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니콜라오 5세는 근친상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장 5세와 이자벨을 파문했다.
1455년 4월 니콜라오 5세가 사망하고 새 교황 갈리스토 3세가 등극했다. 그는 교황청이 새 교황 즉위로 어수선한 것을 호기로 삼고 캉브레 주교 앙투안 달레를 압박해 새 교황이 자신들의 결혼을 허가한 특별 교령을 위조하게 한 뒤 목사를 섭외하여 여동생 이자벨과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갈리스토 3세는 격노해 두 번째로 파문했다. 샤를 7세는 그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장 5세는 불응했다. 이에 샤를 7세는 담마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과 클레르몽 백작 장 2세 드 부르봉에게 각각 군대를 이끌고 아르마냐크 백작령을 침공하게 했다.
앙투안 드 샤반은 아르마냐크 본토로 진군해 루에르그를 점령했고, 장 2세 드 부르봉은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함께 기옌으로 진군해 17개 마을과 요새를 접수했다. 장 5세는 레크투르 성에 틀어박혀 가능한 한 오랫동안 항전했지만 함락이 임박하자 이자벨과 함께 그곳을 탈출하여 발렌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이자벨을 발렌시아에 남겨두고 피레네 산맥의 오르 계곡에서 군대를 모은 뒤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토벌대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자 아라곤 왕국으로 망명했다.
1457년, 샤를 7세는 파리 의회를 소집한 뒤 장 5세에게 출석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에 동의를 표하면서도 귀족 법원에서 자신의 사건을 조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거부했고, 장 5세는 플란데런으로 도주했지만 그곳의 주군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그의 망명을 거부했다. 이에 장 5세는 당시 도팽 루이가 아버지 샤를 7세를 피해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주나프로 피신했다. 1460년 로마로 가서 신임 교황 비오 2세로부터 강도 높은 보속을 수행하는 대가로 파문을 풀었다. 그러나 프랑스 의회는 1460년 5월 13일 결의안을 반포해 장 5세에게 근친상간, 반란, 왕과 정의에 대한 불복종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영구 추방을 선고했으며 모든 재산을 압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1461년 7월 샤를 7세가 사망했을 때 아라곤에서 근근히 지내고 있던 장 5세는 새 국왕 루이 11세의 사면을 받고 모든 땅을 돌려받았으며, 아라곤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1465년 프랑스 대귀족들이 루이 11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하여 공익 연맹을 결성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처음에는 루이 11세를 위해 싸우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남부에서 군대를 모았지만, 샹파뉴에 이르렀을 때 돌연 입장을 바꿔 사촌인 느무르 공작 자크 다르마냐크와 함께 공익 연맹에 가담했다. 이후 루이 11세와 공익 연맹간의 평화 협약인 콩플랑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는 모든 형벌이 취소되었고 모든 영지를 그대로 가질 권리를 인정받았다.
1467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노르망디 공작이자 루이 11세의 동생인 샤를 드 발루아와 동맹을 맺고 루이 11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루이 11세의 편에 섰다. 1468년 루이 11세가 용담공 샤를과 협상하기 위해 수행원 100명을 거느리고 페론으로 갔다가 샤를에게 사로잡히자, 왕을 구하기 위해 페론으로 진격했지만 그 사이에 루이 11세가 용담공 샤를의 강압에 못 이겨 그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협약을 맺으면서 무산되었다. 그러나 루이 11세가 전쟁이 끝났으니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하자, 그는 그랬다간 숙청당할 것을 우려해 여러 변명을 늘어놓으며 군대를 계속 자기 곁에 두었다.
1469년 8월 19일, 장 5세는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의 딸인 잔 드 푸아와 결혼해, 루이 11세가 자신을 칠 경우 공동으로 대적하기로 했다. 이에 경계심을 품은 루이 11세는 장 5세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서신 한 장을 증거로 제시했다. 이후 담마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이 이끄는 군대가 레크투르 성으로 피신한 장 5세를 포위했다. 그는 왕에게 사절을 보내 그 편지는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려 했지만, 왕은 그의 사절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이후 레크투르 성이 몇 주만에 함락되자, 그는 아내 잔과 함께 간신히 탈출한 뒤 바스크 지방의 푸엔테라비아 시에 피신했다. 이후 루이 11세는 그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1472년 5월 28일, 루이 11세에 의해 기옌 공작에 선임되었던 샤를 드 발루아가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장 5세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즉시 기옌으로 가서 영지를 관리하려 했지만, 왕실군이 투입되자 항복하고, 토벌대 지휘관 피에르 드 보주로부터 파리로 가서 왕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지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가면 루이 11세가 자신을 살려줄 것 같지 않다고 여기고 도중에 방향을 틀었다. 1472년 10월 19일, 그는 레크투르 시를 급습해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탈환하고 피에르 드 보주 및 장교들을 생포했다.
그 후 4개월간 왕실군의 공세로부터 레크투르 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1473년 3월 4일 아라스 주교 장 주프루아가 이끄는 군대에게 함락될 위기에 몰렸다. 이때 장 주프루아는 루이 11세가 장 5세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전했고 장 5세는 이를 믿고 항복하기로 했다. 다음날 장 5세는 일전에 사로잡았던 포로들을 풀어주고 레크투르 성채를 왕의 부하들에게 넘겼다. 그러나 그해 3월 6일에 왕실군이 도시에 들어와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고 장 5세 역시 피살되었다. 이후 장 주프루아는 왕명을 어기고 살육을 자행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왕을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페르피냥 시를 공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3. 가족
- 이자벨 다르마냐크(1430/1433 ~ 1476): 장 5세 다르마냐크 본인의 여동생. 친오빠와의 근친상간으로 당대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장 5세와 함께 교황 니콜라오 5세와 갈리스토 3세에게 파문당했다.
- 장 다르마냐크(1450 ~ 1516): 캉불라의 영주.
- 앙투안 다르마냐크(? ~ ?): 이름만 전해진다.
- 로즈 다르마냐크(1460 ~ 1526): 생파울의 영주 가스파르 드 빌뮈르의 부인.
- 잔 드 푸아(1454 ~ 1476):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의 딸. 장 5세가 살해된 뒤 뷔제-쉬르-타른 성에 투옥되었다. 남편이 살해당할 당시 임신했었지만 유복자로 낳은 딸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후대에 아르마냐크 일족을 단절하려는 루이 11세의 명령으로 잔이 독약을 강제로 먹어 뱃속의 아이를 낙태당하고, 며칠 후 사망했다는 전승이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딸을 사산한 뒤 석방되어 로도스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 딸: 1473년 4월 출생 직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