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9:43:44

윌리엄 드 라 주쉬

성명 윌리엄 드 라 주쉬
William de la Zouche
생몰년도 1292년 이후 ~ 1352년 7월 19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러스솔프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카우드 궁전
아버지 로저 드 라 주쉬
어머니 줄리아나 드 브라시
형제 로저 드 라 주쉬
직위 요크 대주교, 잉글랜드 재무장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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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요크 대주교, 재무장관. 네빌스 크로스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

2. 생애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러스솔프에서 러스솔프 영주인 로저 드 라 주쉬와 줄리아나 드 브라시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일찍부터 성직자로서의 길에 들어섰고, 1315년 러틀랜드의 클립샴의 총장에 선임되었다. 1316년 부집사가 되었고, 132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대학에 남아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에도 12년간 대학에서 활동했다. 1328년 이전에 잉글랜드 궁정에 들어갔고, 1329년 1월 왕실 복식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329년 12월 반스테이플의 주교가 되었다. 6개월 후 엑서터 주교로 이동했고, 1331년 6월에는 헌팅던셔에 있는 약슬리 총장에 선임되었다.

1332년과 1333년에 왕을 위한 예복을 구입하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에 방문했으며, 1334년 7월 31일 왕실 옷장 책임자로 승진했고, 1335년 4월 1일 왕실 인장 관리인으로 승진했다. 그는 이 직위의 소유자로서 1335년 여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336년 요크 민스터 학장 직을 맡았고, 1337년 3월 재무장관에 선임되었다. 1년 후 로버트 우데하우스로 교체되었지만 9개월 후 다시 재무장관에 맡았다. 그는 백년전쟁을 치르는 국왕을 위해 자금과 장비를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40년 4월 4일, 요크 대주교 윌리엄 멜턴이 사망했다. 3일 후, 그는 재무장관으로서 임시로 자산을 관리하고 새로운 대주교를 선출하는 일을 주재하기 위해 요크로 향했다.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총리였던 존 드 스트랫퍼드는 그를 요크의 새로운 대주교로 선호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윌리엄 키스비를 선임하려 했다. 키스빌는 요크로 이동한 뒤 대성당 지부의 회원이 되었고, 주쉬는 5월 2일 재무장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대성당 지부는 왕의 희망에 반하여 주쉬를 요크의 새로운 대주교로 선출했다.

그러나 키스비가 에드워드 3세의 총애에 힘입어 자신이 요크 대주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주쉬와 키스비 모두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호소하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베네딕토 12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키스비를 옹호한다는 뜻을 밝혔고, 주쉬가 잉글랜드를 떠나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2세는 주쉬의 당선을 인정했고, 1340년 8월 13일 주쉬의 직위를 막으려는 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쉬는 네덜란드와 독일을 거쳐 아비뇽으로 향했다. 그러나 제네바 인근에서 기사 3명의 습격을 받아 제네바 호수 북쪽 해안의 외딴 곳에 갇혔다. 그는 몸값을 지불하고 납치범의 신원을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석방되었다. 이 납치는 키스비가 그가 아비뇽으로 가는 걸 막으려고 획책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비뇽에 도착한 뒤, 주쉬는 베네딕토 12세로부터 납치법에게 했던 맹세를 준수할 의무를 면제받고 자신을 납치한 자들의 신원을 밝혔다. 교황은 즉시 이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교황청의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주쉬가 공식적으로 요크 대주교가 된 시기는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즉위한 후인 1342년 7월 7일이었다. 1342년 9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주쉬는 12월 8일에 공식적으로 요크 대주교에 선임되었다. 에드워드 3세도 마지못해 이를 인정하고 주쉬에게 재무장관직을 돌려줬다. 그런데 주쉬는 요크 민스터의 학장의 후보 선정 과정에서 클레멘스 6세가 추천한 후보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클레멘스 6세에게 파문되었다. 클레멘스 6세는 주쉬가 죽기 3개월 전인 1352년 7월이 되어서야 파문을 해제했다.

그 후 주쉬는 에드워드 3세로부터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 임무를 맡았다. 1346년 가을, 필리프 6세로부터 잉글랜드를 침공하라는 요청을 접수한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가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자, 주쉬는 북부 요크셔의 리치몬드에서 병력을 신속하게 모집했다. 이에 잉글랜드 북부 지역인 컴벌랜드, 노섬벌랜드, 랭커셔 등지에서 3,000~4,000명이 모였고, 또다른 3,000명의 요크셔 병사들이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다가왔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군대를 모집할 때 험버 강 북쪽 지역에는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같은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했다. 잉글랜드군 상당수는 장궁병이었는데, 그중 1,200명은 랭커셔 출신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요크셔 병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리치먼드에서 바너드 성까지 진군했고, 주쉬는 그곳에서 군대를 3개 편대로 재구성한 뒤 진군을 이어갔다. 이후 1346년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네빌 남작 랄프 네빌이 좌익 부대를 지휘하고 퍼시 남작 헨리 퍼시가 우익을 지휘했으며, 주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군은 완패했고, 데이비드 2세는 생포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그의 활약에 감사를 표했고, 그가 국경을 계속 주의깊게 감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1348년 중세 흑사병이 잉글랜드를 강타했다. 주쉬는 그해 7월 28일 행렬과 기도를 명령했지만, 1349년 5월 흑사병이 요크셔에 당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요쿠 교구 성직자의 약 40%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자, 주쉬는 카우드 성, 리폰 및 비숍 버튼에 번갈아가며 거주했다. 그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추가 매장지를 봉헌하고 대체 성직자를 임명하는 걸 승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352년 7월 19일 카우드 성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크 민스터 본당에 있는 성 에드워드 제단 앞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