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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os III.a Nafarroakoa | ||
가문 | 에브뢰(에브레우슈) 왕조 | |
생몰년도 | 1361년 7월 22일 ~ 1425년 9월 8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에브뢰 백국 망트 | |
사망지 | 나바라 왕국 올리트 | |
재위 기간 |
나바라 왕국의 국왕 | 1387년 - 1425년 |
아버지 | 카를로스 2세 | |
어머니 | 프랑스의 잔 | |
형제 | 마리아, 보나, 페드로, 필리페, 호아나, 블랑카 | |
배우자 | 레오노라 | |
자녀 | 호아나, 마리아, 수리아 1세, 베아트리체, 이사벨라, 카를로스, 루이스, 마가레타, 랑슬로( 사생아), 고데프리드(사생아), 호아나(사생아), 호아나(사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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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28대 국왕.2. 생애
1361년 7월 22일 프랑스 왕국 에브뢰 백국의 망트에서 나바라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인 카를로스 2세와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딸 잔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아, 보나, 페드로, 필리페, 호아나, 블랑카가 있었다. 1361년 11월 아버지 카를로스 2세는 아내와 아들을 에브뢰 백국에 남겨두고 나바라로 돌아갔다. 1363년 1월 잔느는 남편의 부름을 받고 나바라 왕국으로 향하면서 아들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고모인 블랑슈에게 맡겼다. 1366년 8월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나바라 왕국에 방문했다. 그 후 아버지가 에브뢰에서 백년 전쟁을 틈타 프랑스 왕위를 쟁취하고자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를 오가며 투쟁하는 동안, 그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바라 왕국에서 성장했고 1369년 8살의 나이에 왕국 기사 칭호를 받았다.1373년, 곤트의 존이 페드로의 딸 콘스탄차와 결혼해 장차 카스티야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 페드로에게 접근하자,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는 이를 감지하고 1373년 카를로스 2세에게 결혼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면서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1374년 3월 기스코뉴에서 곤트의 존을 만나서 엔리케 2세가 지난날 빼앗아간 나바라 왕국의 도시들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면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침공기지로 사용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곤트의 존은 얼마 안가 계획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고, 엔리케 2세로부터 보복당할 위기에 몰린 카를로스 2세는 1375년 5월 장남 카를로스와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라의 결혼에 동의하고 나바라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레오노라는 카스티야에 머물렀고, 그가 나바라 왕국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카스티야를 찾아갈 때 아내를 종종 만났다.
1378년, 카를로스는 아버지에 의해 노르망디로 파견되어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 대항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샤를 5세는 얼마 안가 카를로스를 체포했고, 나바라 왕이 잉글랜드인에게 임대한 셰르 부르를 제외한 프랑스 내 에브뢰 백국을 전부 몰수했다. 카를로스는 심문 중에 아버지가 잉글랜드와 손잡고 카스티야 왕국이 지난날 빼앗아간 로그로뇨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자백했다. 이에 샤를 5세는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엔리케 2세는 1378년 6~7월 나바라 왕국을 전격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결국 카를로스 2세는 1379년 3월 31일 투델라를 포함한 나바라 왕국 남부의 20개 요새를 카스티야 왕국에 넘겨주고 잉글랜드에 맞서 카스티야-프랑스 왕국과 군사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오네스 협약에 서명해야 했다.
그 후 파리에 억류되었던 카를로스는 1381년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가 레오노라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 왕국에 석방을 요청한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이후 카스티야에서 레오노라와 합류하여 그곳에서 수년간 지내며 딸 호아나, 마리아, 수리아 1세를 잇따라 낳았다. 1387년 1월 1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나바라 국왕이 되었고 카스티야 왕국을 섬기는 대가로 지난날 카스티야군이 빼앗아간 나바라 영토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가정 문제에 직면했다. 레오노라와 자녀들이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가 심각한 질병에 걸린 후 건강이 나아지자마자 카스티야로 가버린 뒤 7년 동안 나바라로 돌아와달라는 그의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카를로스가 그녀가 일국의 왕비인데 그 나라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자, 레오노라는 그가 자신에게 적합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카를로스는 일생 동안 4명의 정부와 랑슬로를 비롯한 여섯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고 알려졌으며, 그들을 레오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같은 대접을 해줬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레오노라가 사생아 랑슬로가 자신이 낳은 딸들을 제치고 왕위 계승자가 될까 우려해 남편을 압박하고자 이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결국 카를로스는 1390년 홀로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그 후 아내를 달래기 위해 장녀 호아나를 나바라로 불러 왕위 계승자로 공식 지명했다. 또한 사절을 꾸준히 카스티야로 보내 레오노라와 가족들의 신변을 보장하며 좋은 남편으로서 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레오노라는 그래도 쉽게 넘어가지 않다가 1394년 11월이 되어서야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와 투델라에서 카를로스와 재회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베아트리체와 이사벨라를 추가로 낳았으며, 카를로스는 1397년 9월 다섯 딸의 왕위 계승권을 귀족들로부터 인정받았다. 이후 고대하던 아들 카를로스가 1397년에 태어났고 루이도 1402년에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죽으면서, 나바라 왕국의 차기 군주가 여왕이 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1393년, 카를로스는 누이 마리아를 아라곤 왕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간디아 공작 알폰소 2세와 혼인시키고 아라곤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또한 같은 해에 잉글랜드로부터 셰르부르를 반환받았고, 또다른 누이 호아나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잇따라 결혼하게 했으며, 딸들과 사생아들을 이베리아와 남부 프랑스의 귀족들 및 통치자들과 결혼시킴으로써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도모했다.
1402년, 카를로스의 딸 수리아와 시칠리아 국왕 마르티누 1세의 결혼식이 거행되면서,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1406년에는 라마르슈 백작 하이메 2세와 넷째 딸 베아트리체의 결혼을 주선했다. 1408년 아내 레오노라와 장녀 호아나에게 나바라 왕국을 맡긴 뒤 파리로 가서 프랑스 왕실에 에브뢰 백국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1411년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네무르 공국을 대신 받고 매년 프랑스 왕실이 에브뢰 백국에 대한 '임대료'를 카를로스 3세와 후계자들에게 지불하는 선에서 해결되었다.
1409년 마르티누 1세가 사망하면서 수리아가 미망인이 되자, 카를로스는 수리아를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루트비히 7세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1410년 초 약혼이 취소되자 같은 해에 바르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두아르도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에두아르도가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1413년 7월 장녀 호아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수리아를 왕위 계승자로 삼는 동시에 든든한 사위를 얻어서 왕국의 미래를 보장받으려 했다. 그러나 수리아는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라곤의 시칠리아 대리 통치자로 계속 군림하기 위해 마르티누 1세의 사생아 페데리코를 상대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시칠리아는 혼란에 빠졌다. 이 상황을 우려한 카를로스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그녀를 돕거나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1415년, 페르난도 1세가 파견한 군대가 시칠리아의 혼란을 진정시켰고 4명의 대표들이 위원회를 결성해 내치를 담당했다. 이후 수리아는 나바라 왕국으로 보내졌고, 아버지와 재회한 뒤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확인되었다. 딸 호아나의 남편이었던 푸아 백작 장이 수리아와 재혼하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1세의 장남인 알폰소 왕자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이미 약혼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고, 페르난도 1세는 그 대신 셋째 아들 엔리케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얼마 후 페르난도 1세의 차남 후안이 카를로스의 작은 딸 이사벨라와의 약혼을 파기하자, 카를로스는 분개해 페르난도 1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아라곤 왕국 측은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빼내서 자신들에게 복속시키려면 반드시 수리아와 후안 왕자의 결혼이 성사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아라곤 국왕에 등극한 알폰소가 군대를 동원해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무력시위를 벌이자, 카를로스는 어쩔 수 없이 협상에 응하기로 했다. 이후 후안 왕자의 어머니인 알부르케르케의 엘레오노르의 중재 하에 후안 왕자와 수리아가 대면했고, 1420년 6월 10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맺은 협약에 따르면, 수리아의 권리는 그녀와 후안의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남편보다 먼저 죽으면 후안은 나바라를 떠나야 했다. 또한 카를로스는 다른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려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수리아 1세가 아들 카를로스 4세와 딸 수리아 2세를 낳자, 카를로스 3세는 귀족들을 소집해 두 손자와 손녀를 수리아 다음의 후계자로 소개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423년, 카를로스는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구성하는 세 자치구(나바레리아, 산 세르닌, 산 니콜라스)를 통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 자치구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매우 상이했고, 서로간의 분쟁이 심했다. 1258년 나바레리아와 산 세르닌 자치구 주민들이 산 니콜라스 자치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많은 건물을 파괴한 사건이 벌어졌으며, 1276년에는 산 세르넨, 산 니콜라스 민병대가 나바레리아를 공격해 수많은 시민을 학살하고 팜플로나 대성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파괴해버린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 세 자치구 통합을 집행하면서, 오랜 세월 이어지던 분쟁이 마무리되었다.
1425년 9월 8일,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그날 딸 수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수리아는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로 즉위했고, 카를로스의 유해는 레오노라가 묻힌 팜플로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레오노라(1363 ~ 1416):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의 딸
- 호아나(1382 ~ 1413): 나바라 왕위 계승자, 푸아 백작 장 1세의 부인.
- 수리아 1세(1385 ~ 1441): 나바라 여왕.
- 마리아(1388 ~ 1406): 미혼인 채 사망
- 마르가리타(1390 ~ 1403): 요절
- 베아트리체(1392 ~ 1412): 라마르슈 백작 하이메 2세의 부인.
- 이사벨라(1395 ~ 1439): 아라곤 왕자 후안과 약혼했다가 파기된 뒤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와 결혼.
- 카를로스(1397 ~ 1402): 비아나 공. 요절.
- 루이스(1402): 비아나 공. 요절.
- 사생아
- 랑슬로(1386 ~ 1420): 툴루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팜플로나 주교 대리 겸 교구 행정관을 맡았으며,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라는 상징적인 칭호를 받았다.
- 고데프리드(1394 ~ ?): 나바라 장군.
- 호아나(? ~ ?): 수니가 백작 이니고 오르니츠의 부인.
- 호아나(? ~ ?): 레린 백작 루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