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 Jacob van Artevel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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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287년경 ~ 1345년 7월 24일 | |
출생지 | 플란데런 백국 겐트 | |
사망지 | 플란데런 백국 겐트 | |
아버지 | 얀 반 아르테벨데 | |
아내 | 카타리나 반 코스터 | |
자녀 | 필립 반 아르테벨데 | |
직위 | 겐트 봉기군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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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란데런 백국의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 겐트의 지도자.2. 생애
겐트의 부유한 옷감 상인이었던 얀 반 아르테벨데의 아들로, 1326년경의 기록에는 겐트 직조공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징수하는 세기로 등재되었다. 프랑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강력한 양조업자 길드에 등록했다고 한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처음 결혼해 두 자녀를 낳아 지역 귀족과 결혼시켰고, 영향력 있는 겐트 가문 출신의 카타리나 반 코스터와 재혼해 아들인 필립 반 아르테벨데를 낳았다.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할 무렵, 잉글랜드 당국은 잉글랜드산 양모를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으로 수출하는 것과 플란데런산 천을 잉글랜드으로 수입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법안은 반포했다. 이로 인해 플란데런 경제가 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당시 플란데런 백작이었던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스 왕실에 계속 충성했으며, 파리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사 플란데런을 거의 들리지 않으면서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숙청했다. 이에 플란데런 주민들은 깊은 반감을 품었고,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갈수록 강해졌다.
급기야 겐트의 유지인 시제르 르 쿠르트레지앙이 백작의 친 프랑스 정책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에 반감을 품은 겐트 주민들이 야코프를 지도자로 삼고 반란을 일으켰다. 야코프는 도시의 다섯 대장 중 첫번재로 선출된 뒤 탁월한 웅변술을 발휘해 동료들이 부재중인 압제자에 반기를 들고 잉글랜드의 친구가 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떠받들었고, 그는 헨트의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에서 반 프랑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반색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가 텅 비어버렸고, 왕은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무기, 물자 수급에 들어가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의 여러 대급업자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야 했다. 이 막대한 빚을 감당하려면 새로운 재원 마련이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부유하기로 유명한 플란데런을 자기 편으로 확고히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지시를 받은 사절들은 플란데런 각지를 돌며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으라고 권유했다. 그 결과 야코프가 이끄는 겐트와 브뤼헤, 이프르 등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무역을 정상화하는 조약을 맺기로 했다. 특히 야코프는 겐트에서 사절단을 만났을 때 잉글랜드군이 플란데런에 상륙하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프랑스를 합동 공격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니, 당분간은 잉글랜드에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로 해주겠다고 밝혔다. 사절단은 잉글랜드로 곧장 돌아가서 야코프의 제안을 전달했다.
1337년 11월,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플란데런 백국으로 파견되어 카잔트 전투에서 플란데런 민병대를 격파했다. 카잔트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에드워드 3세가 원했던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이들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품기 시작했고, 플란데런의 친 프랑스 인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겁먹었다. 이에 고무된 플란데런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필리프 6세에 더욱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1338년 4월 11일, 야코프는 잉글랜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프랑스군 선봉대를 격파했다. 그리고 4월 23일, 야코프는 테르노이젠의 비에블릿 성 앞에서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후 야코프는 플란데런 백국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잉글랜드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양모 무역을 재개했고, 루이 1세는 1338년 여름 겐트를 떠나 필리프 6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1340년 1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프랑스 국왕을 옹립하려는 야코프를 비롯한 플란데런인들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겐트 시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플란데런 도시 행정관들과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은 뒤 수많은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으로서 플란데런인들이 선왕들과 맺었던 조약의 의무를 면제하겠다고 선포해 민중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 2월에 프랑스 왕국 전역에 자신이 루이 9세의 선한 법과 관습을 복구할 것이며, 필리프 4세 이후 왕실이 신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해온 화폐 가치 절하를 중단할 것이고, 프랑스 왕들은 앞으로 언제나 왕국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조언을 듣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반포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맞서 에드워드의 포고문의 사본을 소지한 사람은 누구나 반역죄로 처벌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플란데런 도시들을 대상으로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후 야코프는 잉글랜드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플란데런 백국에서 위세를 떨쳤으며, 슬로이스 해전과 투르네 공방전에서 잉글랜드군을 도왔다.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는 필리프의 아들 필립의 대모가 되어줬다. 1342년에는 겐트, 브뤼헤, 이프르가 상설 국가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그가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세 도시 상인들만이 잉글랜드 무역 특권을 혜택을 누리는 것에 다른 플란데런 도시들의 불만이 갈수록 거세졌고, 농민과 귀족들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 피카르디에서 오던 곡물 수입이 크게 줄어들면서 생필품 가격이 급상승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342년 말과 1343년 초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기근이 발생해 많은 이가 아사했고, 야코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에게 간절히 요청해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1343년 초, 겐트 상인 얀 반 스틴베케가 야코프가 자신의 맹세를 어겼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후 야코프와 얀의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야코프는 일단 브뤼헤와 이프르의 지지자들 덕분에 겐트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1345년 겐트에서 직공 길드와 제분업자 길드가 피비린내나는 충돌을 벌였다. 그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1345년 7월 13일 슬로이스에서 에드워드 3세를 접견해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야코프가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을 대신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흑태자 에드워드를 플란데런의 지배자로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겐트에 돌았다. 심지어 그가 잉글랜드 장궁병을 데리고 오려 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이러다가 잉글랜드가 플란데런 백국을 완전히 점령할 것을 두려워한 지지자들은 해명을 요구하기 위해 야코프를 소환했다. 그는 이에 응했지만, 겐트로 돌아온 직후인 1345년 7월 24일 주민들의 습격으로 친구와 추종자 70여 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그의 가족은 추방되어 잉글랜드로 이주했다가 1360년이 되어서야 귀국이 허용되었다. 그의 막내 아들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1381년 12월 겐트 반란군을 이끌고 아버지를 살해한 주동자 12명을 살해했지만, 1382년 11월 27일 반란을 진압하려는 프랑스군에 맞서다 루즈베케 전투에서 전사했다.
19세기 민족주의가 부흥했을 때, 벨기에와 네덜란드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자유의 영웅"으로 치켜세웠으며, 사회주의자들은 그를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인물로 추앙했다. 1863년 겐트에 그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다. 2000년에 세워진 겐트의 가톨릭 대학 아르테벨데 대학교 칼리지(Arteveldehogeschool)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