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6:43:56

자크 겔뤼

성명 자크 겔뤼
Jacques Gélu
생몰년도 1370년대 ~ 1432년 9월 7일
출생지 트리어 선제후국 이부아
사망지 프랑스 왕국 오트알프 앙브룅
직위 투르 대주교, 앙브룅 대주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투르 대주교, 앙브룅 대주교. 잔 다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 유명하다.

2. 생애

출신 가문은 불분명하며, 출생년도 역시 1371년에서 1376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될 뿐 분명하지 않다. 단지 트리어 선제후국의 이부아에서 출생했다는 것만 분명하다.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391년 석사 학위, 1395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1401년 3월 11일 오를레앙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1402년 3월 29일 법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402년 12월 14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에 의해 사법 고위관에 선임되었으며, 파리 삼부회의 고문직을 역임했다. 1407년 11월 28일 루이 1세 도를레앙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부하들에게 피살당한 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 의해 도피네 지방 법원장에 선임되었다. 1414년 10월 5일 도팽 루이에 의해 왕국의 재정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414년 11월 7일 투르의 대주교로 선임되었으며, 1415년 4월 8일 콘스탄츠 공의회 첫번째 회의에 참석해 1418년 마지막 회의까지 쭉 참여했다. 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5명의 프랑스 고위 성직자 중 한 명이었으며, 1417년 11월 11일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한 콘클라베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이 선거에서 8표를 획득했다. 1418년 3월 말 또 4월 초에 프랑스 왕실에 마르티노 5세의 교황 선출을 지지하는 서신을 보냈으며, 1418년 4월 14일 그가 거행한 미사에서 도팽 샤를이 마르티노 5세의 선출이 타당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했다.

1418년 5월 29일 부르고뉴군이 파리를 점령한 뒤 도팽 샤를을 지지하는 그를 죽이려 들자, 도팽 샤를과 함께 파리를 탈출해 부르주로 피신했다. 1419년 1월, 도팽 샤를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여정을 떠났지만, 1420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간의 트루아 협약이 체결되고 도팽 샤를의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는 헨리 5세에게 서신을 보내 도팽 샤를을 지나치게 억압하지 말고 존중하라고 호소했으며, 레동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를 만나 도팽 샤를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고, 모든 브르타뉴 영주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도팽 샤를의 왕위 계승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421년 9월 말 로마로 가서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와 아라곤 국왕이자 조반나 2세의 양자 알리폰소 5세와 앙주 공작 루이 3세간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협상에 참여했다. 1426년 7월 앙브룅 대주교에 선임된 뒤 영적인 삶에 전념하면서, 앙브룅 역대 교구장들의 목록 및 앙브룅의 역사를 다룬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앙브룅 본당에 자주 방문해 그곳의 언어로 설교했고, 성직자들에게 권고하고 교회 업무를 수행했으며, 앙브룅 계곡에서 활동하는 발도파에 대응하여 이단심문관을 투입했다.

1429년 잔 다르크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처음엔 도팽 샤를에게 주의를 촉구하고 신성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금식과 기도를 권고하는 동시에 그 소녀를 면밀히 검사할 것을 권장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개입을 믿고 싶다고 밝혔다. 이애 따라 잔 다르크는 푸아티에에서 철저한 심사를 받았고, 그곳의 성직자들은 그녀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게 분명하다고 선언했다. 이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오를레앙 공방전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잔 다르크가 도팽에게 보내는 신의 사절이라고 확신했다.

1429년 6월, 자크 겔뤼는 잔 다르크의 신성한 사명을 옹호하기 위해 <De Adventureu Johanne(잔이 오다)>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하와 프랑스 왕가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막 일을 시작한 경이로움이 모든 사람의 귀에 울려 퍼집니다. 아주 어린 소녀가 그 악기입니다. 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섭리의 결과로 보고, 다른 이들은 처녀를 악령의 장난감으로 간주합니다.

이후 그는 아래의 다섯 가지 질문을 제시했다.
1.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람이나 왕국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합당할까요?
2. 그녀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서 행동해야 할까요?
3. 신성한 지혜가 남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맡겨진 일을 여자에게 맡기는 것이 합당할까요?
4. 우리는 하느님의 일과 사탄의 일을 구별할 수 있으며, 어떤 표징으로 그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5. 일은 신의 성품에 의해 성취되어야 하는데, 인간의 신중함의 법칙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해야 할까요?

그는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했다.
1.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공의를 통해 하느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2. 하느님은 더 많은 수의 전투로 단련된 군대로 그들을 대적하는 것보다 한 여자를 통해 강력한 군대를 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훨씬 더 잘 보여 주셨습니다.
3.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잘 되십니다. 그는 일반법을 제정했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더욱이 여성은 종종 신성한 신비의 전달자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4. 우리는 영혼을 반영하는 외적인 행위로 판단할 수 있지만, 잔이 고결한 소녀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5.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장 27절의 구절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 약한 자를 선택하셨습니다.

1430년 잔 다르크가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생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크 겔뤼는 샤를 7세에게 서신을 보내 "신의 계시를 받든 처녀를 석방하기 위해 공개적인 기도를 할 것이며, 어떤 수단이나 돈, 대가를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구출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구하는데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잔 다르크는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1432년 9월 7일, 자크 겔뤼는 앙브룅에서 통풍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사후 500년이 지난 1932년 7월 30일과 31일, 앙브룅에서 그를 기념하는 종교 축제가 조직되었다. 이 행사에서는 교황 대사이자 리용 대주교인 마글리에네 몬시뇰, 리옹 시장인 모랭 추기경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