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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혁명 Révolution belge Belgische Revolutie Belgische Revolu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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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830년 8월 25일 ~ 1831년 7월 21일[1] | |
장소 | |
네덜란드 연합왕국(오늘날의 벨기에)[2] | |
원인 | |
7월 혁명의 간접적인 영향과 경제문제[3] | |
결과 | |
벨기에 왕국 건국 유럽 열강들이 벨기에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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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네덜란드 연합왕국 |
벨기에 저항세력 프랑스 왕국(1831년)[5] |
지휘관 | |
빌럼 1세 오라녀 왕자 |
쉬를레 드 쇼키에 샤를 로지에[6] 후안 반 할런[7] 에티엔 모리스 제라르[8] |
[clearfix]
네덜란드어: Belgische Revolutie, Belgische Omwenteling 혹은 Belgische Opstand
프랑스어: Révolution belge
독일어: Belgische Revolution
영어: Belgian Revolution
1. 개요
벨기에와 네덜란드 (1831년) |
혁명 마지막 날인 7월 21일은 벨기에의 국경일로 지정되어 매년 기념식 등의 행사를 열고 있다.
2. 배경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유럽 체제를 재편성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를 통하여 유럽 각국들은 같은 저지대 국가인 네덜란드[9]와 벨기에 지역[10]을 하나로 통합하여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세우고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왕좌에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칼뱅파가 우세하며 오랜 독립의 역사를 지닌 네덜란드 지역과 가톨릭 성향이고 독립의 역사가 없었던 벨기에 지역을 하나로 합치는 것과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희대의 굇수에게 질릴대로 질려있었던 동맹국들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통합을 밀어붙였다.그리고 이러한 무리수는 오래지 않아 결국 파국을 맞이했다. 당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인구에서 절반 이상[11]이 벨기에에 거주했음에도 벨기에는 모든 면에서 네덜란드에게 불이익을 받아야했다. 인구비례는 온데간데 없이 의회의 의석 수는 남부와 북부가 50대50으로 동률이었고 그나마도 동률을 지키지 않은 채 기득권을 쥔 북부 출신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이제 막 싹을 트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은 주로 네덜란드 지방에 집중되었다.[12] 여기에 네덜란드가 공업 성장을 장려하기 위해 관세를 낮춰버림에 따라 농업이 주력이었던 남부 벨기에 지역은 값싼 곡물이 대거 수입되면서 강한 타격을 입는다.
안 그래도 타오르는 불길에 제대로 기름을 끼얹은 것은 국왕 빌럼 1세의 언동이었다. 북부 출신이었던 빌럼 1세는 벨기에 지역의 자치 요구를 무시했고, 여기에 한 술 더떠서 1823년에는 남부 네덜란드의 네덜란드어권 다수지역의 공식 언어를 네덜란드어 하나만 지정한다.[13] 이 당시 벨기에를 좌우하는 상/중류층의 언어는 프랑스어였기에 이러한 언어 정책에 격렬히 반발했고[14] 1828년, 1829년의 두번에 걸친 청원 끝에 결국 빌럼 1세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여 1830년 6월에 네덜란드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정책을 폐지해야만 했다.[15] 1830년 7월에도 빌럼 1세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론의 자유, 교육의 자유, 내각 책임제 적용이었다. 그리고 가톨릭 전통이 깊었던 남부 지역에서[16] 빌럼 1세가 반노골적으로 칼뱅파 개신교를 싸고 돈 것이 커져가는 벨기에인들의 분노를 터뜨리는 데 결정타를 날렸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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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리치의 벙어리 처녀와 벨기에 혁명 |
브뤼셀에 도착한 샤를 로지에가 이끄는 리에주 의병
1830년 바로 옆나라였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벨기에인들은 크게 고무된다. 이러한 양측의 긴장감을 반영하듯 빌럼 1세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을 때 공공장소에서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럼 1세는 축제를 하기로 결정했다.[17] 같은 해 8월 25일, 브뤼셀에서는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가 상연됐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나폴리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오페라는 벨기에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켰고, 오페라가 끝날 무렵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은 없었다. 그리고 자유 만세!,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우발적으로 벨기에 혁명은 시작된다. 혁명군은 빠르게 브뤼셀 지역의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당황한 빌럼 1세와 네덜란드 정부 측은 왕자 프레더릭에게 군사 지휘권을 주고 브뤼셀로 파견시킨다. 이러한 파병은 벨기에 인들의 분노를 더욱 거세게할 뿐이었고, 벨기에인들은 네덜란드로부터의 '행정적인 분리'를 요구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독립' 대신에 '자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빌럼 1세는 '브뤼셀 점령과 반란군 진압'이라는 강경책을 선택했고 9월 말 사흘에 걸친 시가전 끝에 네덜란드 군은 패퇴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10월 4일 마침내 벨기에인들이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해 11월 4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이 런던에 모인다. 1815년 빈 회의 당시 압도적으로 벨기에의 네덜란드 병합을 찬성했던 것과는 사뭇 달리 소수민족
다소간의 협상을 거쳐 1831년 1월 벨기에의 독립과 관련한 의정서가 채택되었지만 당사자인 벨기에가 이를 거부해버린다. 이 의정서에 의하면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네덜란드-벨기에 통합 왕국 영토 중 상당수가 네덜란드에게 넘어가야 했으며 벨기에는 독립의 대가로 네덜란드의 국채 중 절반 가량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트를 레오폴드 1세로 국왕(정확한 명칭으로는 ' 벨기에인의 왕')에 추대한다. 레오폴드 1세의 즉위일인 7월 21일은 벨기에의 독립 기념일이다.
4. 저항세력의 구성
존 W. 루니 2세가 몇가지 명단[18]을 가지고 분석을 거친 결과 저항세력의 대부분은 노동자였고 그 중 일용직 노동자가 가장 많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플람스 방언 구사자였다. 저항세력의 거주자 분포는 브뤼셀이 가장 많았지만(74.7~81.6%), 출신지가 브뤼셀인 경우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53~55.9%)이었고 노동자로 한정하면 오스트플란데런과 베스트플란데런 출신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왔다. 이러한 점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었으나, 해당 논문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볼만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다른 학자들의 비슷한 비판을 인용했다.리에주 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샤를 로지에가 리에주 의병 500명을 이끌고 1830년 9월에 브뤼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위의 자료상으로는 집계가 되어있지 않다.
브뤼셀의 사용언어 통계(1866~1947)[19] |
5. 혁명 이후의 전투
레오폴드 1세가 '벨기에의 영토 확장'을 주장함에 따라 네덜란드와 벨기에 사이의 긴장이 다시 증폭된다. 1831년 8월에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고 이번에는 네덜란드군이 벨기에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프랑스가 개입했기 때문에 전황은 다시 미궁으로 빠지고 만다.프랑스와 영국은 네덜란드에 벨기에에서 뺏어간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빌럼 1세는 거부했고, 영국은 경제봉쇄로, 프랑스는 네덜란드 영토 폭격으로 대응한다. 이후로도 이런 긴장관계는 수년동안 이어지다가 1839년에야 네덜란드가 벨기에의 독립을 최종 승인하면서 해소된다.
6. 전투 목록
- 발럼 전투
- 베르헴 전투
- 보르헤르호우트 전투
아래의 전투는 혁명 이후에 일어난 전투이다.
- 10일 작전
- 안트베르펜 포위전
7. 참고 문서
- 벨기에의 역사 - 벨기에 정부(영어)
- 벨기에 혁명 사건 순서(네덜란드어 위키피디아)
- 1839년 런던조약 전문
- be1830.be 퍼블릭 도메인이 된 벨기에 혁명 관련 프랑스어 서적을 열람할 수 있다.
- Le 27 septembre : une fête nationale avant d’être celle de la Communauté française ? - RTBF
- 1830년도 전사들의 모습, 존 W. 루니 2세
- 뤽상부르(벨기에)[20]
- 네덜란드 연합왕국
- 룩셈부르크[21]
- 벨기에/역사
8. 둘러보기
[1]
1831년 8월 2 ~ 8월 12일(10일 작전)
1832년 11월 15일 ~ 12월 23일(안트베르펜 포위전)
벨기에 혁명 자체는 1831년 7월 21일 벨기에 건국으로 끝났지만, 안트베르펜에 주둔한 네덜란드 군대를 몰아내는 과정까지 벨기에 혁명의 주요사건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2] 주요 전장은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수도 중 하나였던 브뤼셀. [3] 1826년~1830년 유럽 불황 때 남네덜란드가 직격타를 맞았다. [4] 네덜란드가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한 시점은 1839년이다. 1839년 이전에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벨기에 지역에 군사 개입을 시도했다. [5] 벨기에 임시정부 수립까지는 자력으로 이뤘다. [6] 프랑스 출신의 벨기에 개국 공신 중 한 명이지만, 생전에 쓴 편지에서 네덜란드어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행적 때문에 플란데런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다. 샤를 로지에는 역대 벨기에 총리 중 재임기간이 5,614일(약 15년 4개월)로 가장 길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7] 아버지가 네덜란드 남부(벨기에)사람이고 어머니가 스페인 사람이다. 주로 활동했던 곳은 스페인이지만 벨기에 혁명 초기에 참여하여 벨기에의 독립을 지지했다. [8] 1831년 10일 작전과 1832년 안트베르펜 포위전에 북의 군대(Armée du Nord)를 파병. [9] 17세기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한 이후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독립국이자 공화국이었다. [10] 혁명전쟁 이전까지 계속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로 남아있었다. [11] 정확히는 62% 정도. 지금이야 네덜란드가 벨기에보다 인구가 많지만 당시엔 상황이 달랐다. 이렇게 된 이유는 20세기 초중반에 벨기에가 상대적으로 출산율이 낮았고(벨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네덜란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 반해 네덜란드의 출산율이 벨기에보다 높았기 때문에 1930년대에 인구가 역전되었고, 이게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12] 벨기에는 제조업과 탄광이 발달했기 때문에 빌럼 1세가 이 지역도 발전시키려고 신경을 썼다. 문제는 특정계층만 잘나갔고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살기가 어려웠다. [13] 프랑스어권 화자가 다수인 남 브라반트주의 남부도 네덜란드어 단일화 정책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반발이 컸다. [14] 이 때의 트라우마인지 훗날 독립국가 벨기에에서는 네덜란드령 시절과는 반대로 프랑스어만을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물론 벨기에도 나중에는 네덜란드어를 프랑스어와 같은 공식 언어로 지정했지만... [15] 4~5쪽의 III(PDF뷰어의 3쪽). [16] 남부이고 가톨릭 우세라고 해서 모두 분리 여론이 있던 건 아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일찌감치 네덜란드령이 된 옛 브라반트 공국의 북부 절반과 림뷔르흐 북부는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했으나 벨기에 혁명 당시에도 독립에 반대해서 오늘날에도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와 림뷔르흐주로 이어지고 있다. [17] 원래 축제는 8월 22일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찮자 오페라만 남겨두고 나머지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다. [18] 1830년 9월 전투를 집계한 것이다. [19] 참고 자료 통계 이전인 1830년에는 플람스 방언의 사용인구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아를롱과 주변지역은 이후 벨기에에 잔류하기를 원하여 현재 벨기에의 뤽상부르주가 됐다. [21]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룩셈부르크시와 주변지역은 네덜란드에 남았다가 나중에 살리카법으로 인해 네덜란드와의 동군연합이 해체되자 현재의 룩셈부르크가 되었다.
1832년 11월 15일 ~ 12월 23일(안트베르펜 포위전)
벨기에 혁명 자체는 1831년 7월 21일 벨기에 건국으로 끝났지만, 안트베르펜에 주둔한 네덜란드 군대를 몰아내는 과정까지 벨기에 혁명의 주요사건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2] 주요 전장은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수도 중 하나였던 브뤼셀. [3] 1826년~1830년 유럽 불황 때 남네덜란드가 직격타를 맞았다. [4] 네덜란드가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한 시점은 1839년이다. 1839년 이전에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벨기에 지역에 군사 개입을 시도했다. [5] 벨기에 임시정부 수립까지는 자력으로 이뤘다. [6] 프랑스 출신의 벨기에 개국 공신 중 한 명이지만, 생전에 쓴 편지에서 네덜란드어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행적 때문에 플란데런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다. 샤를 로지에는 역대 벨기에 총리 중 재임기간이 5,614일(약 15년 4개월)로 가장 길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7] 아버지가 네덜란드 남부(벨기에)사람이고 어머니가 스페인 사람이다. 주로 활동했던 곳은 스페인이지만 벨기에 혁명 초기에 참여하여 벨기에의 독립을 지지했다. [8] 1831년 10일 작전과 1832년 안트베르펜 포위전에 북의 군대(Armée du Nord)를 파병. [9] 17세기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한 이후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독립국이자 공화국이었다. [10] 혁명전쟁 이전까지 계속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로 남아있었다. [11] 정확히는 62% 정도. 지금이야 네덜란드가 벨기에보다 인구가 많지만 당시엔 상황이 달랐다. 이렇게 된 이유는 20세기 초중반에 벨기에가 상대적으로 출산율이 낮았고(벨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네덜란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 반해 네덜란드의 출산율이 벨기에보다 높았기 때문에 1930년대에 인구가 역전되었고, 이게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12] 벨기에는 제조업과 탄광이 발달했기 때문에 빌럼 1세가 이 지역도 발전시키려고 신경을 썼다. 문제는 특정계층만 잘나갔고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살기가 어려웠다. [13] 프랑스어권 화자가 다수인 남 브라반트주의 남부도 네덜란드어 단일화 정책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반발이 컸다. [14] 이 때의 트라우마인지 훗날 독립국가 벨기에에서는 네덜란드령 시절과는 반대로 프랑스어만을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물론 벨기에도 나중에는 네덜란드어를 프랑스어와 같은 공식 언어로 지정했지만... [15] 4~5쪽의 III(PDF뷰어의 3쪽). [16] 남부이고 가톨릭 우세라고 해서 모두 분리 여론이 있던 건 아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일찌감치 네덜란드령이 된 옛 브라반트 공국의 북부 절반과 림뷔르흐 북부는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했으나 벨기에 혁명 당시에도 독립에 반대해서 오늘날에도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와 림뷔르흐주로 이어지고 있다. [17] 원래 축제는 8월 22일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찮자 오페라만 남겨두고 나머지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다. [18] 1830년 9월 전투를 집계한 것이다. [19] 참고 자료 통계 이전인 1830년에는 플람스 방언의 사용인구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아를롱과 주변지역은 이후 벨기에에 잔류하기를 원하여 현재 벨기에의 뤽상부르주가 됐다. [21]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룩셈부르크시와 주변지역은 네덜란드에 남았다가 나중에 살리카법으로 인해 네덜란드와의 동군연합이 해체되자 현재의 룩셈부르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