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22:24:03

슬로이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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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이스 해전
영어: Battle of Sluys
프랑스어: Bataille l'Écluse
파일:BattleofSluys.jpg
시기 1340년 6월 24일
장소 플란데런 백국 슬로이스 항구 앞바다
원인 플란데런을 통한 프랑스 원정에 착수한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한 필리프 6세의 충돌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드워드 3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헌팅던 백작 윌리엄 드 클린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위그 키에레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니콜라 바후셰
병력 전함 120~150척
기사 600명
선원 및 전투병 12,000명[1]
전함 213척
선원 및 전투병 20,000명[2]
피해 400~600명 전사
전함 2척 침몰
16,000~20,000명 사상
전함 166척 나포
전함 24척 침몰
결과 잉글랜드의 대승.
영향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 좌절, 에드워드 3세의 투르네 공세.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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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0년 6월 24일 플란데런 백국의 항구도시인 슬로이스 앞바다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한 이래 거둔 첫번째 대승이다.

2. 배경

1340년 1월 26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6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프랑스 국왕을 옹립하려는 야콥 반 아르테벨데를 비롯한 플란데런인들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헨트 시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플란데런 도시 행정관들과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은 뒤 수많은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으로서 플란데런인들이 선왕들과 맺었던 조약의 의무를 면제하겠다고 선포해 민중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 2월에 프랑스 왕국 전역에 자신이 루이 9세의 선한 법과 관습을 복구할 것이며, 필리프 4세 이후 왕실이 신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해온 화폐 가치 절하를 중단할 것이고, 프랑스 왕들은 앞으로 언제나 왕국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조언을 듣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반포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맞서 에드워드의 포고문의 사본을 소지한 사람은 누구나 반역죄로 처벌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플란데런 도시들을 대상으로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렇듯 프랑스 왕을 자처하는 등 기세를 한껏 끌어올렸지만, 막상 에드워드 3세 앞에 놓인 현실은 매우 가혹했다. 수 년 전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국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국내와 플란데런, 이탈리아의 금융업자들로부터 돈을 마구 빌리면서 빚과 이자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나마도 1340년 초에 이르러 더 이상 돈을 빌릴 곳이 없었고, 약 4만 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가까운 시일 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파산하고 말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게 했으나, 의원들은 에드워드의 총신들이 조세를 수시로 횡령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조사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을 제정할 위원회를 자기들 선에서 구성하려 하니 그럴 권한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총리로서 왕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고 있던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는 이런 중대한 문제를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왕에게 국내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즉시 잉글랜드로 가려 했지만, 돈을 떼일까 두려워한 플란데런 귀족 및 상인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결국 그는 필리파 왕비와 두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서퍽 백작 로버트 우퍼드를 인질로 남겨두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의회의 요구를 허락하고 잉글랜드가 프랑스 왕국과 합병되어서는 안 되며 프랑스 왕의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신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상원과 하원의 청원에도 엄숙히 동의했다. 이에 의회는 4월 3일에 5만 파운드 이상의 전쟁세를 통과시키기로 결의했다.
파일:hywnf1340.jpg
파일:hywnf21340.jpg
4월 연합군의 진격 5월 - 6월 23일 프랑스군의 진격과 연합군의 반격 시도

한편, 플란데런에 잔존한 잉글랜드군과 신성 로마 제국군, 플란데런군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투르네 공세에 착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행군 도중에 지휘관인 솔즈베리 백작과 서퍽 백작이 적 기병의 기습 공격에 생포된 뒤 파리의 샤를레 감옥에 수감되자 안트베르펜으로 퇴각했고, 신성 로마 제국군은 티에라슈에 새로운 프랑스군이 집결 중이라는 잘못된 첩보를 믿고 그들을 기습하려고 그곳에 갔다가 허탕만 치고 인근 마을 수십 곳을 약탈하다가 다른 곳에서 집결을 마친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유일하게 투르네 시에 도착한 플란데런군은 다른 군대가 오지 않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5월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순식간에 에노 백령의 수도인 발랑시엔을 포위하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근처 마을들을 약탈하러 흩어진 사이 23일 새벽 성문 밖으로 나온 주둔군과 민병대의 기습을 받고 패주했다. 캉브레지 북부로 후퇴해서 재정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이제 보급로를 위협하는 국경 지역의 요새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고, 플랑드르 시민 정부와 저지대 군주들이 보낸 지원군을 각각 투르네 근처의 스카르프 강과 툰 레베크 근처의 스헬더 강에서 격퇴한 뒤 6월 23일 툰 레베크를 점령하고 부샹으로 향했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상황이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3세는 서둘러 함대를 끌어모은 뒤 플란데런으로 돌아가서 투르네로 진군하길 원했다. 그러나 함대를 소집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해군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왕은 소수의 배만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그가 더 많은 함대를 끌어모으려면 상선을 임시로 징발해야 했다. 징발된 배와 선장, 선원들은 전쟁 기간 동안 복무하는 대가로 급료를 받았다.[3]

그러나 에드워드 왕이 막대한 빚더미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급료를 지급받긴 커녕 아까운 배나 잃을까 두려워한 상인들이 쉽사리 징발에 응하지 않았기에 함대 규합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출항 날짜가 계속 연기되자, 에드워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340년 6월 4일에 당장 출항할 수 있는 40척의 선박 만으로 출항하기로 했다. 그런데 프랑스에 보내뒀던 첩보원이 중대한 소식을 알려줬다. 프랑스 전함 213척과 2만에 달하는 병력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했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사전에 잉글랜드에 보내둔 첩자를 통해 에드워드가 슬로이스 항구를 통해 플란데런으로 돌아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이를 중도에서 가로막아 궤멸시킨 뒤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끝장을 내려 했다. 당시 프랑스 해군에는 제노바 출신의 선원들이 복무했다. 이들은 평생 바다에서 활동했기에 해상 경험이 풍부했고 해전 수행 역량도 뛰어났다. 다만 필리프 6세가 급료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에 항의한 제노바인 15명을 투옥하자 이에 반발해 대부분의 제노바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버리는 악재가 벌어졌다. 하지만 피에트로 바르바네로(Pietro Barbanero)가 지휘하는 6척의 갤리선과 제노바 선원들은 남아 있었다. 이 인물은 무슬림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오래도록 벌였던 인물이었다.

에드워드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이들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선제공격을 가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포함한 최고 고문들을 소환한 뒤 가능한 한 빨리 출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40척만 이끌고 213척을 상대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에 경악해 왕에게 그런 자살 행위는 하지 말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왕이 고집을 꺾지 않자, 캔터베리 대주교는 잔뜩 흥분한 나머지 뛰쳐나갔고, 얼마 후 "강인하고 강력한 군주와 논쟁을 벌이기에는 너무 늙었다"라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에드워드는 다음으로 제독 로버트 몰리와 몰리의 부관인 잭 크랩베를 불러 자신과 함께 출항하자고 권유했지만, 두 사람 모두 캔터베리 대주교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격분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집에 있어도 좋다! 나는 죽더라도 바다로 떠나겠다!"

하지만 두 제독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지금 당장 바다를 건너기엔 풍향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지적해가며 설득하자, 왕은 곧 진정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전역에 프랑스 대함대가 조국을 침공하기 위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함을 모집하니 조속히 모일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필리프와 내통한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프랑스에 대한 오랜 적개심과 조국을 지키겠다는 애국심, 에드워드 왕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등에 휩싸인 상인들이 앞다퉈 응하면서, 오웰호에 수많은 배가 빠른 시일에 집결했다. 얼마나 많은 선박이 모였는지는 기록이 분명하지 않기에 확실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연대기들의 기록에 근거해 120~150척 정도였을 거라 추정한다. 함대에 탑승할 이들은 백작 10명, 기수 50명, 기사 600명, 전투병을 포함한 선원 12,000명이었다. 이중 7,000명은 장궁병이었다.

1340년 6월 22일 새벽에 출항한 잉글랜드 함대는 다음날 오후에 플란데런 해안에 도착했다. 에드워드는 블랑켄베르크에 정박한 뒤 저녁에 스터버러의 콥함 남작 레이놀드, 존 챈더스, 해군 장성 스티븐 램킨에게 척후선을 이끌고 가서 적 해군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한편, 프랑스 해군 지휘관 위그 키에레 니콜라 바후셰는 에드워드 왕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함대를 끌고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함대를 3개 대열로 나란히 배치하고 작은 나무 발코니인 브레타슈(bretasches)로 배들을 묶어놓은 채 3마일 너비의 항구 입구를 틀어막고 버티기로 했다. 이에 바르바네로가 진언했다.
"영주님들, 부디 제 말을 믿으십시오. 함대 전체가 바다로 이동해야 합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는다면 바람, 태양, 그리고 물의 흐름을 너무 많이 받게 되어 배를 최소한으로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적에게 고스란히 갇히고 말 겁니다."

그러나 바후셰와 키에레는 그를 단순한 평민이자 해적이라며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밀어붙였다. 바르바네로는 자신을 무시한 이들에게 격분해 전투 전날에 휘하 함대와 함께 이탈했다. 이러한 프랑스 함대의 배치 상황을 확인한 척후선들은 6월 23일 밤 늦게 돌아와서 에드워드에게 알렸다. 이에 에드워드는 다음날 전투를 개시하기로 했다. 이때 플란데런인 몇 명이 찾아와서 적의 규모가 잉글랜드 함대보다 우월하니 자신들의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단독으로 프랑스 함대를 무찌르기로 마음먹고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이리하여 슬로이스 해전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340년 6월 24일 새벽에 출항한 에드워드 3세는 기함인 코그 토마스 뷰챔프(Cog Thomas Beauchamp)에 탑승한 채 해안선을 바라봤다. 그날 오전 슬로이스 항구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프랑스 함선 수백척의 돛대가 뺵빽히 서 있는 광경이 드러났다. 왕은 짐짓 모른 척하며 코그 토마스 선장에게 물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선장이 답했다.
"폐하, 저들은 필리프가 여기로 보낸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우샘프턴을 불태우고 폐하의 위대한 배 크리스토퍼를 빼앗아갔습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나는 오랫동안 프랑스인들과 싸우고 싶었다. 이제 하느님과 성 조지의 은총으로 그들 중 몇 명과 싸우겠다. 그들이 나에게 많은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해군이 첫번째로 상대한 프랑스 함대 대열에는 지난날 아르네뮤이덴 해전 당시에 탈취된 크리스토퍼 호가 있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이 모습에 분노해 전의를 다졌다. 잉글랜드군은 조류가 유리하게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조류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자 항구를 향해 행진했다. 그러다가 돌연 방향을 틀어 해안가에서 멀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일부 프랑스 선장들은 적이 수적으로 우세한 아군과 상대하는 게 겁나서 도망친다고 여기고 브레타슈를 끊고 추격하러 나섰다. 하지만 잉글랜드 선박들은 단지 바람을 등지고 더 나은 위치를 자치하기 위해 주위를 돌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일부 적 함선이 뛰쳐나와서 대열이 흐트러진 틈을 타 파고들었다.

잉글랜드군은 지상전을 연상시키는 대형을 갖췄다. 중장병으로 가득찬 각 배는 장궁병으로 가득찬 2척의 배 옆에 있었다. 그들이 접근해오자, 프랑스 선원들은 배에 실린 발리스타를 일제히 발사했다. 잉글랜드 선원들 역시 똑같이 대응했고, 양측은 곧 충돌했다. 한 잉글랜드 갤리선은 너무 빨리 달려들었다가 적의 대열 한 가운데에 고립되었고, 이내 사방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로 인해 선원 전원이 몰살당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전반적으로 잉글랜드군이 상대를 압도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우수한 사거리를 앞세워 화살비를 퍼부었고, 애초부터 수적으로 열세였던 석궁수들은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이후 보병들은 갈고리를 사용해 적 선박이 탈출할 수 없도록 묶어놓은 뒤 적선에 뛰어들어 살육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본인도 격투에 뛰어들었다가 허벅지에 석궁 화살을 맞아 다리와 부츠를 피로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함대의 첫번째 대열은 격전 끝에 궤멸되었고, 잉글랜드군은 크리스토퍼 호를 탈환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시신을 배 밖으로 내던졌다. 프랑스의 두번째 전열과 세번째 전열은 첫번째 전열이 궤멸되는 것을 보고 전의를 급격하게 잃었다. 잉글랜드 함대가 그들 마저 쳐부수러 오자, 많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 선원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플란데런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해온 프랑스에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에 해안으로 헤엄쳐온 프랑스인들을 학살했다.

불타는 배에서 빛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전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프랑스의 함선 라 생 자콥(La Seint Jacob) 호의 선원들은 다른 함선들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항전했다. 잉글랜드인들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배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고, 소탕 과정에서 적병 400명을 처단한 뒤 바다에 집어던졌다. 프랑스 지휘관 위그 키에레는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에드워드에게 끌려가기 전에 목이 베어져 배밖으로 던져졌다. 니콜라 바후셰는 에드워드 앞으로 끌려와서 자비를 호소했지만, 지난날 자신이 아끼던 크리스토퍼호를 빼앗은 데다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수시로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안긴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가차없이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 후 바후셰의 유해는 에드워드 왕이 탑승한 토마스 호의 돛대에 매달렸다고 전해진다.

4. 결과

프랑스 해군은 슬로이스 해전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후방에서 돌파에 성공한 17척만이 빠져나갔고, 166척은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24척은 침몰하거나 불태워졌다. 16,000~20,000명 사이의 병사들이 사살되거나 익사했고, 포로는 거의 없었다. 반면 잉글랜드 쪽에서는 기사 4명과 400~600명이 전사했고, 전함 2척이 침몰했다. 이후 잉글랜드인들은 슬로이스 항구의 물고기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실컷 먹은 프랑스인들에게서 배운 프랑스어를 구사할 거라는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슬로이스 해전은 전략적으로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플란데런에 도착한 뒤 투르네를 향한 공세에 착수했지만 프랑스군에 격퇴되었다. 그 사이에 슬로이스 전투에 참가하지 않거나 무사히 탈출한 함선들을 끌어모은 필리프 6세는 새로운 제독 로베르 드 우데토에게 이들을 지휘하게 했다. 로베르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북해를 누비며 잉글랜드 상인들을 포획하고 와이트 섬, 플리머스, 채널 제도 등 영국 본토와 섬들을 습격했으며, 동맹국인 스코틀랜드에 병력과 군수품을 공급했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에드워드는 1340년 9월 25일 프랑스와 9개월간 휴전을 맺은 뒤 10월 28일 헨트 시민들에게 보내는 사과문을 써둔 채 잉글랜드로 몰래 도주했다.

그렇지만 해전 전문 역사가 그레이엄 쿠시웨이는 슬로이스 해전에 투입된 선박과 선원들을 주로 제공한 노르망디 피카르디가 이 전투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쇠락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노르망디는 슬로이스 해전 이후로 잉글랜드의 침략에 자체적으로 저항할 능력을 상실하여 전란에 휘말렸고,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대한 지배력은 20여 년간 꾸준히 쇠퇴했고 피카르디를 비롯한 일드프랑스의 방위 역시 크게 약화되었다.
[1] 이중 장궁병 7,000명 [2] 이중 석궁수 500명 [3] 선장은 하루에 6펜스, 선원은 3펜스를 받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