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10:04:18

블랑크포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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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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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50년 11월 1일,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을 격파한 전투.

2. 상세

1450년 4월 15일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키고 그해 8월 노르망디 재정복을 완수한 샤를 7세는 1152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결혼 이래로 잉글랜드 왕국의 영지였던 가스코뉴를 공략하기로 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 장 드 뒤누아는 왕의 명령에 따라 생통주의 코냐크와 생메그랭을 점거했고, 팡티에브르(Penthièvre) 백작이자 리모주 자작인 자크 1세 드 샤반은 베르주라크(Bergerac)를 포위해 며칠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들의 계획은 각자의 진로로 이동하여 가스코뉴의 수도 보르도 인근에 집결한 뒤 보르도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 전역의 친잉글랜드 영주들과 잉글랜드군은 보르도에 대거 집결했다. 당대 연대기들은 잉글랜드 출신의 보르도 시장 가디페르 쇼트호세가 이끄는 이들 잉글랜드 맨앳암즈, 가스코뉴 기사단, 가스코뉴 민병대의 규모가 7,000~10,000명이었다고 밝혔는데,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가스코뉴 당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동원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보르도에서 출발해 프랑스군을 상대하러 북상하던 중 블랑크포르(Blanquefort) 마을 인근에서 오발 영주 아마니외 달브레(Amanieu d'Albret)와 스코틀랜드 용병대장 로빈 페틸로우(Robin Pettilow)가 이끄는 프랑스 선봉대 3,000명과 조우했다.

양측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이때 프랑스군이 병력 열세를 두려워하여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향해 후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가디페르는 적을 추격해 섬멸하기로 하고 그들을 추격했다. 보르도에서 장시간 행군하느라 지쳤던 장병들은 가디페르의 독촉을 받으며 적병을 쫓느라 탈진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다가 그들이 다리에 도착했을 때, 인근 숲에 매복해 있던 프랑스군이 로빈 페틸로우의 지휘를 받으며 적의 후방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해 다리를 건너 도주하려 했지만, 다리를 미리 건넌 프랑스군이 뒤돌아서서 그들을 다리 인근의 습지대로 몰아넣었다. 그 바람에 퇴로가 끊긴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이날 1,500~1,80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600명이 생포되었고, 나머지는 보르도로 도주했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미미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샤르티에는 가디페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패전을 초래한 인물은 앞서 언급한 보르도 시장이었다. 그는 전방에 배치한 보병을 모두 버리고 도망쳤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수레에 실려 보르도로 옮겨졌고, 부상병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시내로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몹시 통곡했고, 보르도 대주교는 48시간 동안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기도했다. 훗날 보르도 시민들은 수많은 가족과 친지를 잃은 이 날을 '말레 요르나드'(Male Journade: 나쁜 날)라고 지칭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전역을 휩쓸었고, 1451년 6월 30일 보르도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수백 년간 우호 관계를 맺었던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 주민들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호락호락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잉글랜드에 은밀히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고, 오랫동안 왕실에 막대한 세금을 안겨줬던 가스코뉴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잉글랜드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1452년 10월 17일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이 가스코뉴에 상륙하자, 10월 23일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해 수비대를 몰아내고 탈보트를 환영했다. 그 후 서부 가스코뉴 대부분이 잉글랜드로 돌아서자, 샤를 7세는 토벌군을 급파했다. 이리하여 1453년 7월 17일 백년전쟁 최후의 전투로 일컬어지는 카스티용 전투가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