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4:10:25

푸울 멜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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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울 멜린 전투
영어: Battle of Pwll Melyn
시기 1405년 5월 5일
장소 웨일스 공국 우스크 인근 푸울 멜린
원인 우스크 성을 둘러싼 잉글랜드군과 웨일스 반란군의 대결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반란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처드 그레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올드캐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다피드 감
그루퍼드 압 오와인 글린두르
튜더 압 그루퍼드†
병력 미상 미상
피해 |미미함 300 ~ 1,500명
결과 잉글랜드 왕국군의 승리.
영향 오와인 글린두르 세력의 쇠락.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1405년 5월 5일, 웨일스 우스크 인근의 푸울 멜린 연못가에서 잉글랜드군과 웨일스 반란군이 격돌한 전투. 한때 웨일스 전역을 평정했던 오와인 글린두르가 쇠락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상세

1405년 3월경, 오와인 글린두르의 최측근인 리스 게린이 8,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그로스몬트로 진군해 마을을 파괴했다. 이에 웨일스 반란 평정 임무를 아버지 헨리 4세로부터 부여받은 몬머스의 헨리 왕자 존 탈보트, 윌리엄 뉴퍼트, 존 그레이더가 이끄는 진압군을 해리퍼드에서 파견해 적군을 요격하게 했다. 그들은 웨일스군을 요격해 적병 800~1,000명을 사살하고 오와인 글린두르의 비서인 오웬 압 그루퍼드와 글린두르의 처남인 존 헨머를 생포해 런던 탑에 가뒀다. 리스 게린의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데, 이때 전사했을 수 있으나 불확실하다.

그 후 웨일스 반군은 북부 궨트 지역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뒤, 1405년 5월경 오와인 글린두르의 장남인 그루퍼드 압 오와인 글린두르의 지휘하에 우스크 성을 기습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반란군이 북쪽으로 퇴각하자, 코드너의 초대 그레이 남작 리처드 그레이, 헤러퍼드셔 기사 존 올드캐슬, 웨일스 출신이지만 헨리 4세에게 충성을 끝까지 다하면서 오와인 글린두르에 맞서 싸운 다피드 감[1]이 이끄는 우스크 성 수비대가 그들을 추격했다. 5월 5일, 잉글랜드군은 우스크 성 북동쪽 있는 연못인 푸울 멜린 인근에서 웨일스군을 따라잡고 공격을 퍼부었다. 웨일스의 사제, 교회법학자이자 연대기 작가인 우스크의 아담에 따르면, 잉글랜드인들은 많은 이들을 불과 칼날로 죽였고, 몽크스우드 숲으로 몰아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1,5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이 전투에서 발생했다고 하며, 우스크의 아담에 따르면 전투 후 우스크 성 앞에서 포로 300명이 한꺼번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오와인 글린두르의 동생인 튜더 압 그루퍼드도 전사했고, 장남 그루퍼드 압 오와인 글린두르는 생포된 뒤 런던 탑에 압송되었다. 오와인 글린두르의 저명한 지지자였던 란타남 시토회 수도원장 존 압 하이웰도 이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수습하던 중 잉글랜드 병사에게 사살되었다. 우스크의 아담은 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오와인의 운명은 쇠퇴했다고 기술했다.

1405년 7월, 장 2세 드 리외가 이끄는 3,000 가량의 기사 및 맨앳암즈로 구성된 프랑스-브르타뉴군이 브레스트를 떠나 웨일스 서부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한 식수를 못해 많은 말이 갈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장 2세 드 리외는 오와인에게 우수한 공성 장비를 제공했고, 오와인은 이를 토대로 헤이버포드웨스트 시를 공략했지만 성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웨일스-프랑스 연합군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글래머건과 궨트를 통과했고, 뒤이어 헤러퍼드셔를 지나 우스터셔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은 우스터 시에서 10마일 떨어진 그레이트 위틀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마주쳤다.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에버리 힐에 진을 쳤고, 오와인은 이에 맞서 반대편 언덕에 진을 쳤다. 이후 그가 진을 친 언덕은 '오와인 언덕'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양군은 8일간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않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양측 모두 철수했다. 일부 학자들은 오와인이 전투를 벌이지 않고 철수한 건 푸울 멜린 전투로 인해 뛰어난 지휘관과 정예병을 대거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1406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평화 조약 체결이 임박하자, 장 2세 드 리외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웨일스에서 철수했다. 여기에 몬머스의 헨리 왕자는 원정을 감행했다가 오와인의 유격전에 시달리는 대신 웨일스에 대한 경제적 봉쇄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는 웨일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성들의 도움을 받으며 반란군의 무역로와 무기 및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그 결과 오와인 글린두르를 따르던 웨일스 영주들은 하나둘씩 잉글랜드군에 항복했고, 1409년 오와인의 글거지였던 할레치 성 마저 함락되었다. 하지만 오와인은 웨일스 산맥 깊숙이 숨어서 투항 권유를 뿌리치고 죽을 때까지 항전했다.
[1] 전승에 따르면, 다피드 감은 1415년 아쟁쿠르 전투 때 프랑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위기에 처한 헨리 5세를 구하고 대신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헨리 5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