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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오스트플란데런, 베스트플란데런 에노 일부 프랑스 노르 데파르트망 서부 네덜란드 제일란트 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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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겐트, 브뤼헤, 릴, 됭케르크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 원수 | 백작 | ||
공용어 |
네덜란드어(
플람스어) 프랑스어( 피카르디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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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로트링겐 공국 | ||
해체 이후 | 프랑스 제1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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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 플란데런 지역에 있던 백국이다. 플란데런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이며, 중세말까지 프랑스 왕국에 봉건적으로 종속되었지만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는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6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으로 전환되었다.15세기까지 플란데런 백작령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 왕국에 속했으나 동쪽 일부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다. 프랑스령 지역은 왕국령 플란데런(Kroon-Vlaanderen), 신성 로마 제국령 지역은 제국령 플란데런(Rijks-Vlaanderen)이라 불리었다.
중세 산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번영을 누리게 되면서 봉건적 지배를 벗어나 자치를 이룩하려는 시민계급과 기존의 봉건관계를 회복하려는 플랑드르 백작, 그리고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며 지방의 봉건적 권리를 침탈해오는 프랑스 왕정과 이 관계 속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영국이 어우러지면서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자는 그 누구도 아닌 부르고뉴 공국이 되었다.
플란데런 지역의 플란데런 공동체 축제일은 매년 7월 11일이다. 이 날은 벨기에에 플란데런 공동체가 설립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1302년 플란데런의 시민들이 황금 박차 전투(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왕국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 역사
언어적, 민족적으로는 주로 저지독일어와 네덜란드어권에 속해 있다. 8세기부터 프랑크 왕국의 무한확장트리에 영토로 편입되었고, 얼마 후 프랑크 왕국의 분열 때 다른 네덜란드(저지대) 지역이 중프랑크 -> 동프랑크 ->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것과 다르게 플란데런만 유일하게 서프랑크 -> 프랑스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862년 샤를 2세의 사위이기도 한 바우데베인이 플란데런 가문을 세우면서 백작령이 되었다. 이후 경건왕 루이 1세 사후 사분오열되던 프랑크 왕국에서 이탈하여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봉건제도로 통치되며 백작에게 통치되면서도 작센, 프리지아, 프랑크, 갈리아 계통이 어지럽게 섞여 통일적인 특징을 잡아내기 힘들었다. 단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일찍이 법치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고 봉건제도에 여러가지로 합치되지 않는 개념인 코뮌을 형성하였다.
전통적으로 이웃에 있는 다른 저지대 영방국가들과 언어적으로나 교역권으로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받았으며, 과거에는 농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곧 길드들이 통치하는 각 도시령들이 느슨한 연맹체 비슷한 것을 구성함과 동시에 상업 쪽으로 갈아타게 된다. 위치상 이곳은 위로는 영국, 독일권은 라인란트, 프랑스권 파리와 부르고뉴, 북유럽 등등의 많은 나라들을 연계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으며, 한자동맹과 경쟁하면서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예술과 학문이 발달하였다.
사실상 프랑스 왕권에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지만 13세기 말에 이르러 프랑스 왕이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플란데런을 복속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이에 플란데런 주민들은 저항했다. 1297년 플란데런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에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프란데런에 대규모 군대를 출병시켜 프랑스-플란데런 전쟁이 발발했다. 플란데런 입장에서 이 전쟁은 독립 전쟁이었기에 Flanders' War of Liberation라고도 불리었다. 플란데런은 당시 저항운동의 구심점이던 아르투아 백작과 플란데런 제도시들의 자치경찰, 길드의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침략자 프랑스와 맞서 싸웠다. 이들은 고덴닥이라 불리는 창과 클럽을 결합한 무기를 사용하여 프랑스 기사대들을 효과적으로 저지해내는데 성공했으며 쿠르트레 전투( 황금 박차 전투)와 같이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 프랑스는 귀족 기사대와 롬바르드 출신 용병대들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저항세력들을 압박해 나아갔다. 한때 프랑스는 플란데런을 완전 정복하는 듯 했으나 곧 또다시 플란데런의 저항 세력이 일어나 확금 박차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필립프 4세는 플란데런 북쪽에 있는 플란데런의 지역 라이벌 홀란드와 연합을 결성, 플란데런을 남북으로 합박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결정적인 전투들에서 프랑스는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결국 플란데런은 프랑스에 휴전을 제의했다. 사실 필리프 4세로서도 재정적, 군사적으로 고갈된 상황이었기에 평화 협상을 받아들였고, 프랑스에 보다 유리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릴, 두아이, 오르치가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플란데란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형식적으로 프랑스의 영지로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또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끝났지만 막대한 배상금 문제 때문에 플란데런에서는 큰 반발이 일어났다. 모직업이 번창했던 플란데런의 도시들은 강대한 프랑스권 군주의 손에서 벗어나 양털 사업이 발달한 잉글랜드와 동맹하였다. 중세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구도는 잉글랜드+플란데런 도시 vs 프랑스+ 스코틀랜드+플란데런 백작이었고, 그중 최고 분수령은 에드워드 3세가 양모 수출을 규제하며 시작한 백년 전쟁.
15세기 초에는 부르고뉴 공국과 정략결혼으로 합쳐지고, 그 이후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정략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와 함께 합스부르크령이 되었다.
이후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리프를 거쳐, 손자 카를 5세 대에 가서 그가 스페인을 아우르는 대제왕이 되는 바람에 자동으로 스페인과 통합, 그리고 카를 5세가 플란데런을 스페인과 같이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었다.
카를 5세를 이어 통치자가 된 펠리페 2세는 플란데런 스페인의 속주처럼 여겼고, 가혹한 세금으로 플란데런을 탄압하며 현지 귀족들을 대놓고 무시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신교도들에 대한 대우에 관한 입장차이였다. 당시 플란데런도 다른 유럽 지방들과 같이 신교도의 수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나[1], 신교도들에 대한 처우 문제로 펠리페 2세와 큰 마찰을 빚었다. 펠리페 2세는 강경진압을 주장하였으나 플란데런인들은 유화적으로 나서길 원했는데, 펠리페 2세의 고압적인 태도가 플랑드르 귀족들의 심기를 크게 어지럽혔다. 때문에 반발이 일어났고,[2] 종국에는 신교도가 많았던 북부 항구도시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플란데런 백국을 포함한 네덜란드어권 대부분의 국가들이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치열한 항쟁 끝에 30년 전쟁을 거쳐 1648년 위트레흐트 동맹은 네덜란드 공화국[3]으로서 새로운 독립국가로 출범했지만, 플란데런 지방은 스페인이 무력진압에 성공하여 네덜란드와 단절되고 이후 이 지역은 1830년 독립한 벨기에의 전신들 중 하나가 된다.
3. 관련 문서
[1]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초대 통령인 오렌지 공 빌럼 1세 또한 가톨릭이었다. 말년에는 칼뱅파로 개종하지만 말이다.
[2]
역사적 아이러니인 것이,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게끔 혁혁하게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플란데런인들이었다.
[3]
이 당시에는 현대의 민주 공화국 개념과 좀 다르긴 했지만 통령(stadhouder)을 국가원수로 둔 공화국이었으며 네덜란드가 정식으로 왕국이 된 것은 1815년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