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아르눌 도드랭 Arnoul d'Audreh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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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370년 12월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볼로네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소뮈르 | |
아버지 | 보두앵 도드랭 | |
아내 | 잔 드 하멜랭쿠르 | |
직위 | 프랑스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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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섰다.2. 생애
프랑스 왕국 볼로네 출신이며, 아버지 보두앵이 기사였다는 것 외엔 그의 가족과 초기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에게는 1356년에서 1359년 사이에 원수 대행을 맡았고 1368년까지 그 밑에서 복무한 장 드 누빌이라는 조카가 있었다. 1332년 프랑스 궁정 기록에 기사로서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1335년부터 1337년까지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를 잉글랜드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원정에 참여했다. 1340년 7월에 두번째로 스코틀랜드에서 군사 작전을 벌였고, 1341년 5월에 3번째로 군사작전에 참여해 스코틀랜드군이 뉴캐슬을 포위하고 더럼을 공략하는 데 기여했다.1342년 중반에 스코틀랜드를 떠난 뒤 프랑스에 귀한한 직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의해 브르타뉴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플로에르멜을 잉글랜드군의 공세로부터 사수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이곳이 1342년 말에 투항하는 걸 박지 못했다. 1346년 1월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계승자인 장 왕자가 단행한 에기용 공방전에 참여했다. 이후 아르투아와 피카르디 출신 기사들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칼레에 바닷길을 통해 들어가서 방어에 참여했다. 1347년 8월 3일 칼레 시가 항복하면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보내 진 뒤 1년 반 만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49년 10월 앙굴렘 보안관에 선임되었고, 프랑스의 신임 국왕이 된 장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351년 4월 생장달젤리에서 잉글랜드군과 교전하다가 또다시 생포되었지만 곧 풀려나 5월 25일 파리에 있었고, 6월 6일 생오메르 인근에서 500명의 잉글랜드군과 교전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351년 6월 21일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1351년 7월 1일에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와시니 영지를 받았다. 하지만 장 2세는 1352년 2월 27일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운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샤를 드 블루아에게 와시니를 넘기게 했다.
1352년 7월 조프루아 드 샤르니가 칼레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프레툰을 기습 공격해, 그곳에 새로 건설된 탑을 지키고 있던 파비아의 아이머리를 체포해 처형하게 했으며, 푸아투, 생통주, 리무쟁, 앙구무아, 페리고르 및 루아르와 도르도뉴 강 사이의 영역에서 보안관을 역임했다. 이후 생장당젤리, 생트, 앙굴렘, 리모주의 방어 개선을 감독했다. 1353년 6월 노르망디 보안관으로 이명되어 퐁토르송에 머무르면서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재개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수단의 집결을 감독했다. 7월 8일 리모주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 신세가 될 뻔했으나 겨우 회피했다. 이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는 퐁토르송으로 가서 아네킨 영주 보두앵 드 랑스가 주관하는 마상창시합을 참관했다.
1354년 백년전쟁이 재개되자, 그는 그해 4월에 기습적으로 브루알랑의 랑달 성을 공략했다. 이후 베세렐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콩부르에 이르렀는데, 이때 베세렐의 잉글랜드 수비대가 몰래 그를 추격해, 프랑스군이 쉬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콩부르 시에 들어와 프랑스군 일부를 사살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아르눌은 겨우 탈출한 뒤 퐁토르송으로 후퇴했다. 이후 아르눌이 콩부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잉글랜드군이 그를 잡으려고 이동했지만, 도중에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민병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아르눌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게클랭을 도우러 달려왔고, 많은 잉글랜드인이 살해되거나 생포되었다. 이때 잉글랜드의 유명한 기사 휴 칼블리도 생포되었다. 게클랭은 이 공적을 인정받아 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55년 9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칼레에 상륙한 뒤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아르눌은 에드워드 3세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11월 11일 프랑스 국왕 장 2세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군이 국경 요충지인 베릭을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장 2세와 대결하지 않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56년 4월, 루앙에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과된 과도한 세금에 분노해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장 2세와 함께 루앙 시에 대한 원정대를 이끌어 루앙을 공략하고 선동가들을 처형했다. 이후 그가 단독으로 폭동이 일어난 아라스로 가서 주모자 14명을 처형했다. 또한 그는 루앙에서 카를로스 2세, 장 5세 다르쿠르를 긴급 체포하는 데 일조했으며, 카를로스 2세의 추종자들로부터 에브뢰와 브레퇴유를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드 클레르몽과 함께 300명의 기사로 구성된 선봉대를 지휘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로 끌려간 그를 대신해 조카 장 드 누빌이 프랑스 원수를 대행했다. 그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해 1360년까지 잉글랜드에 남아 있다가 그해 브레티니 평화 협약이 맺어지면서 마침내 돌아올 수 있었다. 1361년 왕실 대장이자 랑그독 세네샬로 선임된 뒤 약탈을 일삼는 자유 용병대에 맞섰다. 1366~1367년 이베리아 원정을 벌인 게클랭 군대의 사령관이 되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 페드로와 맞서고 있던 엔리케 2세를 도왔다.
1367년 나헤라 전투에서 게클랭과 함께 흑태자 에드워드의 잉글랜드군에게 사로잡혔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푸아티에 전투 때 사로잡힌 후 책정된 몸값을 다 주지 않았으면서 잉글랜드군과 맞선 것에 대해 추궁하자, 그는 자신이 잉글랜드와 싸운 것이 아니라 페드로와 싸운 것이라고 답했다. 이후 일전에 카스티야군에게 사로잡혔던 토머스 펠튼과 교환하고 몸값을 잉글랜드에 마저 지불하는 조건으로 풀려났고, 같은 해에 노령으로 인해 프랑스 원수직에서 물러났고 2,000리브르의 연금이 책정되었다. 1370년 12월에 소뮈르에서 사망했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명령으로 파리의 셀레스티야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기사 가르니에 드 하멜랭쿠르의 딸인 잔과 결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뒤 아내 잔이 재산을 물려받았고, 잔이 사망한 뒤에는 그의 조카인 장 드 누빌이 재산을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