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용 전투 영어: Battle of Castillon 프랑스어: Bataille de Castill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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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53년 7월 17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가스코뉴 카스티용 | |
원인 | 프랑스군의 가스코뉴 공략과 잉글랜드군의 반격 | |
교전국 |
[[틀:깃발| 가스코뉴 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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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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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탈보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리슬 자작 존 탈보트† 켄달 백작 장 드 푸아 ◎ |
]][[틀:깃발| ]][[틀:깃발| ]] 슈루즈베리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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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뷔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자크 1세 드 샤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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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잉글랜드군 5,300명, 가스코뉴 민병대 3,000명 |
프랑스군 6,000~7,000명 브르타뉴군 1,000명 대포 300문 |
피해 | 4,000명 전사, 나머지 항복 | 100명 |
결과 | 프랑스군의 승리. | |
영향 | 프랑스의 가스코뉴 재정복, 백년전쟁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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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53년 7월 17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의 패권을 놓고 맞붙은 전투. 백년전쟁 최후의 전투로 손꼽히는 회전이다.
2. 배경
1450년 4월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고 그 해 8월 셰르부르를 함락시키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한 프랑스군은 프랑스 내 잉글랜드 세력에 속한 마지막 지역인 가스코뉴로 시선을 돌렸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 장 드 뒤누아, 그리고 팡티에브르 백작이자 리모주 자작인 자크 1세 드 샤반이 각기 군대를 이끌고 가스코뉴로 쳐들어갔다. 1450년 11월 1일 블랑크포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을 격파한 프랑스군은 1450년 겨울 보르도를 포위했고, 프랑스, 브르타뉴, 카스티야 연합 함대는 지롱드 어귀를 봉쇄해 잉글랜드군이 보르도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을 차단했다.보르도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캡탈 드 부흐(Captal de Buch)는 즉시 항복하라는 뒤누아의 요구에 1451년 6월 14일까지 잉글랜드에서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밝혔다. 그때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았지만, 그는 미련을 못 버리고 온갖 핑계를 대며 6월 30일까지 항복을 미뤘다. 그러나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2달 후 가스코뉴의 또다른 대도시였던 바욘 역시 항복하면서, 프랑스 왕국은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가스코뉴를 가져간 지 300여 년만에 가스코뉴를 재정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수백 년간 우호 관계를 맺었던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 주민들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호락호락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잉글랜드에 은밀히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고, 오랫동안 왕실에 막대한 세금을 안겨줬던 가스코뉴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잉글랜드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1452년 10월 17일 30여 년간 프랑스군과 전쟁을 치른 65세의 노장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이 가스코뉴에 상륙하자, 10월 23일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해 수비대를 몰아내고 탈보트를 환영했다.
탈보트는 가스코뉴 주민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몇 주 동안 가스코뉴 서부 일대의 요새화된 마을들을 순조롭게 공략하고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냈다.여기에 도르도뉴 계곡으로 진출해 리부른과 카스티용을 공략함으로써 프랑스군이 보르도를 쳐들어올 때 이를 저지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1453년 4월 말, 탈보트의 넷째 아들인 리슬 자작 존 탈보트가 2,400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 아버지와 합세했다. 탈보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해 군자금을 마련했고, 가스코뉴 민병대를 징발하여 엄격한 훈련을 실시해 다가올 일전을 준비했다.
한편, 탈보트가 가스코뉴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그를 무찌르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샤를은 군대의 전반적인 지휘권을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에게 맡겼고, 포병대 지휘권을 장 뷔로에게, 기병대 지휘권을 팡티에브르 백작 자크 1세 드 샤반에게 맡겼다. 이 중 장 뷔로는 평민계급의 법률가였으나, 늦은 나이에 화약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프랑스 포병대의 개혁을 주도한 프랑스 최고의 포병전문가였다. 1453년 봄 공세를 시작한 프랑스군 15,000명은 보르도로 천천히 진군하면서 잉글랜드군이나 가스코뉴군이 점령한 요새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탈보트는 이에 맞서 도르도뉴 강의 지류인 이슬 강에 있는 프홍삭 요새를 빠르게 공략했지만, 곧 보르도로 철수했다. 그 해 초여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메독에 진을 치고 보르도를 공략할 기회를 노렸다.
6월 21일, 탈보트는 프랑스 사령관들에게 마르티냐에서 한 판 붙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멀리 행군하느라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탈보트가 회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응하지 않았다. 탈보트는 일단 보르도로 돌아간 뒤 적이 자신보다 2배 이상 많은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3개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을 보르도로 최대한 끌어들인 뒤 각개 격파하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1453년 7월 초, 프랑스 중앙군이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작은 성벽 도시인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카스티용 주민들은 즉각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탈보트는 적이 보르도로 좀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보르도 시민들이 조속히 카스티용을 구원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그는 보르도와 카스티용 시민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보르도 당국 조차 그가 프랑스인을 두려워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탈보트는 그들의 뜻에 따라 카스티용을 구원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용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카스티용을 포위한 프랑스군은 보르도에서 달려올 적과 카스티용 수비대의 협공을 피하기 위해 카스티용 동쪽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웠다. 이후 700명의 프랑스 공병들이 4일 동안 쉬지 않고 포대를 건설했고, 그 앞에 3개의 참호를 팠다. 포대의 길이는 약 700야드, 너비는 200야드에 달했다. 프랑스군 숙영지는 도르도뉴 강과 평행하게 형성되었고, 숙영지 북쪽에는 리도아르 강의 비교적 가파른 제방이 위치하여 그 방향에서 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천연 해자 역할을 했다. 또한 잉글랜드 진영 외곽에 흙과 나무를 이용한 방어벽이 설치되었다.프랑스군은 숙영지 내에 6,000~7,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또다른 1,000명의 브르타뉴군은 북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진 리두아르 강 건너편 숲에 주둔했다. 대포는 중포, 경포, 석궁 발사기, 핸드 캐논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총 300문에 달했다. 핸드캐논과 경포는 벽을 따라 장착되었고, 중포는 거점에 집중되었다. 이렇듯 프랑스군은 적의 에상되는 공세에 대비해 난공불락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7월 16일 새벽, 잉글랜드군 5,300명과 가스코뉴 민병대 3,000명이 카스티용으로 출발했다. 탈보트는 5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기마 궁수로 구성된 선봉대와 함께 했고, 대포 수 문을 가진 포병과 수송 부대가 후미에서 따라갔다. 도르도뉴 북쪽 베아을 따라 전진하여 해질녘에 리부른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탈보트의 선봉대는 카스티용으로 향하는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7월 17일 새벽, 잉글랜드군 선봉대가 카스티용에 도착했다. 탈보트가 지나간 숲 속에는 수백 명 가량의 프랑스 궁수대가 배치된 생 로랑 수도원이 있었지만, 어둠을 틈타 이동한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탈보트는 이들의 존재를 나중에 확인한 뒤 수도원을 급습하여 아직 자고 있던 프랑스 궁수병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살아남은 궁수들은 1마일 떨어진 아군 기지로 도주했다.
전초전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둔 탈보트는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부하들이 프랑스인들이 수도원에 쌓아둔 음식을 먹게 했으며, 와인 한 통을 나눠 마시게 했다. 그러는 한편, 프랑스군 위치를 정찰하기 위해 토머스 에버링엄 휘하의 정찰대를 파견했다. 에버링엄은 그날 아침에 돌아와서 적군이 카스티용 동쪽에 설치된 강력한 요새 뒤에 숨어있다고 보고했다. 얼마 후, 한 전령이 탈보트에게 달려와서 많은 마을 주민들이 동쪽에서 큰 먼지구름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포대 안의 수행원들이 수도원에서 도망친 궁수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말을 다른 장소로 옮기면서 생긴 것이었지만, 잉글랜드 장교들은 적이 철수하려 한다고 여겼다.
탈보트는 부하들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공격할 지, 아니면 나머지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지 고심했다. 에버링엄은 본대를 기다리자고 진언했지만, 탈보트는 즉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즉시 출격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사제에게 프랑스군을 완전히 물리친 후에 예배를 드릴 테니 미사를 미루라고 말했다. 탈보트가 이끄는 선봉대는 리두아르 여울목을 통과하여 포대와 도르도뉴 강 사이의 탁 트인 평야로 나아갔다. 이후 말에서 내린 뒤 도보로 이동했지만, 탈보트 본인은 병력 배치를 통제하기 위해 말을 계속 탔다. 일찍이 프랑스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을 때, 탈보트는 다시는 프랑스 왕에 맞서기 위해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갑옷을 입지 않았고 칼도 차고 다니지 않았다.
얼마 후 프랑스군이 철수하지 않고 제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접근을 기다리는 모습을 확인한 탈보트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에버링엄은 이제라도 본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진언했지만, 탈보트는 그 사이에 적이 공격하면 곤란해진다고 여기고, 준비가 덜 되었을 적군을 즉시 공격하여 요새를 무너뜨리거나 프랑스군이 퇴각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그는 병력을 두 개 부대로 나눈 뒤 맨앳암즈들에게 선두에서 진격하게 하고 장궁병들에겐 뒤에서 적진을 향해 화살을 퍼부으라고 지시했다. 그의 군대는 지시에 따라 방벽을 향해 전진하며 "탈보트와 성 조지를 위하여!"라고 외쳤다. 그들은 넓은 도랑을 뛰어넘고 가파른 흙벽을 기어올랐다.
프랑스군은 적이 접근해오자 일제 포격을 가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꿋꿋이 전진했고, 기어이 포대를 보호하는 방벽에 도착한 뒤 다시 한 번 소리를 지으며 기어올라 적병과 교전했다. 에버링엄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방벽으로 먼저 올라간 뒤 요새 입구에 가장 가까운 성벽에 깃발을 꽂았지만, 적병이 쏜 핸드 캐논을 맞고 즉사했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탈보트의 본대는 선두 부대가 이미 전투 중인 것을 보고 즉시 요새로 달려들었다. 프랑스 보병대는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포격을 퍼부어 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포탄 한 발에 잉글랜드인 5~6명이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탈보트는 멀리서 행군한 병사들이 도착하는 즉시 전장에 계속 투입했다. 그러나 절반에 달하는 4,000명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합류하지 못했고, 최후방에서 따라오던 그의 포병 역시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리두아르 강 건너편 숲에 주둔하고 있던 브르타뉴 기병 1,000명이 출격해 잉글랜드군의 우측면을 공격했다. 오랜 행군 후 쉬지 못하고 곧바로 힘겨운 전투를 치르느라 지칠대로 지쳤던 잉글랜드군은 적 기병대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꼼짝 없이 무너졌다. 탈보트는 아직 투입되지 않았던 병사들을 끌어모아 기병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르도뉴 강을 향해 달아났다.
숙영지 안에 있던 프랑스군은 브르타뉴 기병대가 적을 무너뜨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출격해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모조리 사살했다. 탈보트는 이 참혹한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리두아르 강을 건너 서쪽으로 철수하기에는 적이 아군을 남쪽의 도르도뉴 강으로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에 힘들었다. 이에 도르도뉴 강의 건널목을 필사적으로 찾았고, 탈보트의 아들인 리슬 자작은 건널목을 보호할 후방 경비대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 포병대는 적을 향해 인정사정 없이 포격을 가했다.
샤를 드 라리비에르(Charles de Lariviere) 작, <탈보트의 죽음>, 1839년.
이때, 포탄 하나가 탈보트가 타고 있던 말을 강타했다. 이로 인해 낙마한 탈보트는 말 아래에 쓰러져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부하들이 그를 어렵사리 끌어내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 했을 때, 미셸 페루냉(Michel Perunin)이라는 이름의 프랑스 궁수가 탈보트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탈보트의 부하들이 그를 저지하려 했으나 모조리 제압되었고, 페루냉은 말에서 내린 뒤 전투 도끼로 탈보트의 목을 베었다. 동시대의 프랑스 연대기 작가 마티외 데스쿠르시(Mathieu d'Escourcy)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것이 오랜 세월 프랑스의 가장 무시무시한 가시 중 하나였으며, 프랑스인들이 최악의 공포이자 위협으로 여겼던 이 유명하고 명망 높은 인물의 최후였다.
전투는 탈보트가 전사한 후에도 이어졌다. 상당수의 잉글랜드-가스코뉴 병사들이 강에 뛰어들어 건너려다가 익사했다. 탈보트의 아들 리슬 자작은 건널목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찾아냈지만, 곧 프랑스 창기병들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소수의 잉글랜드군이 간신히 도하한 뒤 아직까지 행군 중이던 아군에게 달려가 패전 소식을 전했고, 탈보트의 잔여 병력은 즉시 방향을 돌려 보르도로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그들을 생에밀롱까지 추격했다가 재집결을 위해 멈췄다.
카스티용 시민들은 전투가 끝난 뒤 프랑스군에 항복해 약탈을 모면했다. 탈보트의 시신은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치아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고, 프랑스 장군들은 오래도록 자신들을 괴롭혔지만 나라와 국왕을 위해 오래도록 헌신한 것은 분명했던 이 인물을 슈롭서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보내 매장하도록 했으며, 그가 죽은 자리에 돌 예배당을 세웠다. 이 건물은 300여 년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파괴될 때까지 존속했다. 그 후 전장 북쪽 교차로에 "1453년 7월 17일 가스코뉴가 잉글랜드의 멍에에서 해방되었다"라는 내용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