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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르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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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로베르 르콕
Robert Le Coq
생몰년도 1310년 ~ 1373년 9월 12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몽디디에
사망지 나바라 왕국 에스텔라
아버지 우다르 르콕
어머니 잔 드 레송
직위 랑의 주교, 칼라호라 주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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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성직자. 백년전쟁 시기에 에티엔 마르셀과 함께 카를로스 2세와 손잡고 정부 개혁을 단행하려 했으나 샤를 5세에게 밀려 나바라 왕국으로 망명했다.

2. 생애

1310년경 몽디디에에서 출생했다. 부모 모두 오를레앙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도를레앙 밑에서 왕실 장교로 일했다. 그 덕분에 오를레앙 대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민법과 교회법을 익혔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의 사후에 밝혀진 재산에 수많은 저서가 포함되었는데 그중 약 76권의 도서가 법률에 관한 저작물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330년대 즈음에 파리로 들어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호의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리프 6세는 그에게 여러 가지 직위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1347년 10월 17일에 그를 왕의 대변인으로 선임했다.

1350년 필리프 6세가 사망한 뒤에도 필리프 6세의 후계자인 장 2세 밑에서 계속 재직했다. 1350년부터 1351년까지 1년 만에 루앙 교회의 정경 재무관, 아미앵 교회의 설교자, 테루안의 정경, 랑의 주교, 프랑스의 동료이자 왕립 평의회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351년 10월 27일에는 왕위 계승자 샤를 도팽을 대신하여 장 2세와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 사이에서 체결된 빌뇌브레아비뇽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렇듯 출세를 거듭하던 그는, 영향력 있는 왕실 인사들의 질시를 샀다. 프랑스 수상 피에르 드 라 포레, 삼부회 의장 시몽 드 뷔시, 콩트회의 회장 레그노 쇼보가 대표적인 그의 정적이었다. 훗날 르콕의 정적들은 <로버트 르콕에 대한 기소(Acte d'accusation contre Robert le Coq)>을 저술해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기소>에 따르면, 1348년에 르콕의 형제 한 명이 시몬 드 뷔시의 문에서 점원을 살해했다. 뷔시는 왕에게 불만을 제기했지만, 그 형제는 르콕의 비호 덕분에 사면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료에는 교차검증할 기록이 없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르콕은 1353년, 1354년, 1355년에 왕의 의회 의원으로 출석했으며, 1354년 2월 8일 망트에서 기 드 불로뉴,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베르됭 백작 장 6세와 함께 프랑스 무관장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 이후 장 2세와 카를로스 2세간의 평화 협약을 체결하도록 중재했다. 1355년 8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장 2세의 아들 샤를이 도피네의 영주로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부르고뉴의 어린 공작 필리프 1세가 가지고 있으며 장 2세의 섭정을 받고 있는 제국의 영토(부르고뉴 백국)을 자신이 통치할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장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에 공동으로 맞서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장 2세는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고유한 영토라면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도피네를 다스리던 샤를 도팽은 아버지가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에 인접한 자신의 영지가 위협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때 르콕이 장 2세가 그를 도피네에서 배제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 주장하자, 샤를 왕자는 가족에게 살갑게 군 적이 없던 아버지라면 분명 그럴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는 나바라 파벌의 도움을 받아 자신만의 조직을 세웠고, 카를 4세를 찾아가서 경의를 표해 제국군이 도피네를 침공할 위험을 없애려 했다. 나중에 아들의 계획을 눈치챈 장 2세는 아들을 안심시키기로 하고 1355년 12월 7일에 샤를 도팽을 노르망디 공작에 세웠다. 르콕의 정적들은 르콕이 샤를 도팽이 카를 4세의 힘을 빌려 장 2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도록 부추길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헀지만, 신빙성은 없다.

1356년 9월 19일, 장 2세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잉글랜드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이후 1356년 10월 17일에 개최된 삼부회에서, 피에르 드 라 포레는 왕실에 대한 충성을 굳건히 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금을 거두는 쪽으로 회의를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삼부회는 패배를 초래한 장 2세의 측근들을 성토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르콕은 파리 상인의 장관을 맡고 있던 에티엔 마르셀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 당시 장 2세에 의해 두에의 아를뢰 요새에 수감된 카를로스 2세의 추종자들과 결탁했다. 그들은 샤를 도팽에게 통화 가치를 위험한 수준으로 평가절하한 왕실 고문들을 해고하고, 국왕을 돕는 의회를 정기적으로 선출하고 개최하도록 허용하며, 카를로스 2세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삼부회에 참석한 이들 중 10분의 1이 모인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르콕이 이 위원회의 회의를 주관했다.

1356년 11월 3일, 르콕은 요약본이 20페이지에 달하는 장황한 연설을 했다. 그는 각 대표자들이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복사해 사람들에게 알릴 것을 제안했다. 그는 삼부회의 소집으로 이어진 사건을 요약하고, 위원회가 제안한 개혁을 분석하고, 존의 의원들의 정부 운영에 대해 열광적이면서도 신랄한 비난을 전달했다. 그는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를 해방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했고, 화폐 가치를 끊임없이 삭감하는 화폐 대신 화폐 가치를 온전히 지키는 화폐의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그는 국가 체계를 대의회 위주로 개편하고, 국왕의 권력을 대의회의 결정 사항에 위배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사 문제를 독접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또다른 의회의 구성을 제안했으며, 총리를 자신의 직무에만 국한시키고, 모든 행정실을 개혁하며, 왕실 지출을 줄이고, 행정 비리를 조사하자고 주장했다. 르콕은 왕의 부주의한 평의원들, 일에 늦게 와서 평의회 테이블보다 저녁 식사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으른 악당들' 때문에 프랑스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성토했고, 통화정책 수립의 지연, 미루기, 재정행정의 비효율성, 중과실과 어리석음을 비난했다. 그러면서 위원회에 참석한 이들을 프랑스에서 가장 유능하고 명예로운 사람들이며, 그들이 한 일은 왕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다고 추켜세웠다.

샤를 도팽은 현 상황에서 왕권을 다소 통제하는 건 받아들일만 하다고 여겼지만, 카를로스 2세의 석방은 발루아 왕조를 위험에 빠뜨릴 게 분명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제안을 즉시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던 그는 아버지의 의향을 물어봐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응답을 미루다가 삼부회를 해산시켰다. 1356년 12월 10일, 샤를 도팽은 삼부회를 거치지 않고도 금고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통화를 제정한다는 내용의 조례를 반포했다. 이후 그는 현제 루이에게 파리를 맡기고 메츠로 떠났다. 그는 메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접견한 뒤 도피네의 영주로서 카를 4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제국의 지원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파리 상인들은 샤를 도팽가 제정한 조례에 격분했고, 에티엔은 소규모 장인과 직공들을 선동해 시위를 일으키게 했다. 시위대는 파리에 남아있던 루이가 있는 궁정을 에워싸고 칙령을 취소하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루이는 형 샤를에게 결정권이 있으며 자신이 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며 시간을 끌었다. 그 후 파리로 서둘러 돌아온 샤를은 칙령을 취소했다.

1357년 3월, 에티엔은 통제된 군주제와 행정 재편을 위한 광범위한 개혁안인 <1357년 대조례(Grande ordonnance de 1357)>를 작성하고, 샤를 도팽에게 대조례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했다. 샤를 도팽은 그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1357년 3월부터 8월까지 기간 동안, 르콕은 도팽 평의회에서 최고 권력을 유지했다. 장 2세는 런던에서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은 후 귀족들이 투표한 새로운 보조금을 인상해서는 안 되며, 귀족들이 다시 만나서는 안 된다는 지령을 파리에 보냈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납득할 수 없다며 시위를 벌였고, 도팽은 르콕과 에티엔의 위협에 굴복하여 아버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귀족들이 다시 모여야 한다고 선언해야 했다. 떠힌 르콕이 포함된 감독 위원회가 설립되어 잘못을 저지른 공무원, 특히 부도덕한 세금 징수원들을 해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샤를 도팽의 고문 9명이 해고되었다. 여기에 6명의 대표가 왕의 평의회에 참여해 국정을 함께 논의하게 되었으며, 재정, 특히 금전적 변화와 특별 보조금은 위원회에 의해 통제되도록 했다. 이제 프랑스에는 샤를 도팽이 이끄는 섭정 정부와 삼부회의 2개 국가 기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1358년 1월 14일, 삼부회는 통제된 왕권 문제와 새로운 세금 부과에 대해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이에 여론은 삼부회를 무능하다고 질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357년 대조례의 집행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삼부회가 임명한 세금 징수원들은 가난한 농민과 장인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감독 위원회에 들어간 6명의 대표는 지극히 소수였으며, 도팽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통제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자연히 공무원들은 그들 대신 샤를 도팽을 지지했다. 또한 당시에는 여행길이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했기 때문에, 지방 의원들이 파리로 가는 건 매우 힘들었다. 결국 프랑스 각지에서 뽑은 의원이 삼부회를 구성한다는 기존의 발상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고, 곧 파리의 부르주아들만이 삼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런던에 억류되어 있던 장 2세가 1357년 대조례의 적용을 금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생포되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잉글랜드에 끌려가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그의 지시는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여기에 장 2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평화 협정에 합의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에티엔은 카를로스 2세의 부추김을 받고 1358년 2월 22일 정변을 일으켜 샤를 도팽이 있던 팔레 드 라 시테 궁전으로 쳐들어가 샤를 도팽을 따르던 장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샤를이 있던 방에 난입한 뒤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을 참살했다. 르콕은 상파뉴 원수와 노르망디 원수는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완패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부정부패를 자행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신하들이었기에 마땅히 처단되었다고 선언했다. 그 후 르콕과 에티엔은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방 정부에 서신을 보냈지만, 오직 아미앵과 아라스만이 지지를 표했다.

이제 샤를 도팽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에티엔 마르셀이 주도하는 삼부회가 행정과 재정을 주관했다. 여기에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평화 협약은 무효로 간주되었다. 이 새로운 조례를 비준하려면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파리에서 모이기를 거부하고 상리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샤를 도팽은 이들과 회담을 가진 후 파리로 돌아올 테니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에티엔은 10명의 부르주아를 대표단으로 선임하고 그들의 감시를 받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파리에서 나온 샤를 도팽은 4월 9일 프로뱅에서 열린 상파뉴 삼부회에 참석해 그곳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던 10명의 대표단을 구금했다. 이후 샤를을 추종하는 기사단은 몽뜨호와 모 요새를 점거했다.

이후 르콕과 에티엔 마르셀은 파리의 지배권을 놓고 샤를 도팽과 대결했다. 1358년 6월 29일, 에티엔은 카를로스 2세 진영에서 이탈한 기사들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잉글랜드 궁수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파리를 방어하는 잉글랜드 용병들은 파리 시민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1358년 7월 21일, 파리의 한 술집에서 벌어진 사소한 싸움이 시가전으로 변질되면서 34명의 잉글랜드 궁수들이 학살당했다. 다음날, 에티엔과 로베르 르콕, 카를로스 2세는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플레이스 드 글레브에 군중을 집결시켰다. 군중들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때, 동료를 살해한 파리 시민들에게 분노한 용병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을 가하면서 시가전이 또 벌어졌다. 이로 인해 600~700명이 피살당했고, 파리 시민들은 카를로스가 용병들에게 자신들을 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카를로스의 형제인 필리프가 10,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은 도시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1358년 7월 31일, 파리 군중이 폭동을 일으켜 친 잉글랜드, 친 나바라 성향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르콕은 카를로스 2세와 함께 파리 외곽의 생드니 수도원에 숨었다가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이후 르콕은 샤를 도팽에 맞서 카를로스 2세의 대의를 공개적으로 옹호했지만, 그의 가장 큰 무기인 삼부회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계에 더 이상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1358년 8월 11일, 샤를 도팽은 "왕과 우리와 왕국에 반항하고 불순종했으며, 적과 반역자에게 조언과 위로와 도움을 준 혐의"로 르콕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그는 랑의 주교직을 바탈당했고, 1360년에 체결된 브레티니 평화 협약에 명시된 사면 대상자에서도 제외되었다. 이후 카를로스 2세가 다스리는 나바라 왕국으로 망명한 그는 카를로스 2세의 고문을 맡았고, 1364년 봄 아키텐 공국을 다스리던 흑태자 에드워드와 접견했다. 그는 이후로 칼라호라의 주교를 맡아 그곳에서 조용히 집무를 보다가 1373년 9월 12일 에스텔라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