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3:03:03

나폴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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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no di Sicilia Citeriore
Regnum Siciliae citra Pharum
나폴리 왕국
Regno di Napoli | Regno 'e Nap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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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1442-1516)[2] 국장
Noxias herbas
해로운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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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왕국의 강역
1282 ~ 1799, 1799 ~ 1816
성립 이전 통합 이후
시칠리아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지위 프랑스 왕국 동군연합(1501~1504)
아라곤 왕국 동군연합(1504~1516)
스페인 왕국의 동군연합(1516~1713)
합스부르크 제국 동군연합(1713~1735)
프랑스 제1제국 종속국(1806~1808)
위치 이탈리아 남부
수도 나폴리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언어 이탈리아어, 나폴리어
민족 나폴리인
인구 3,000,000명 (1600년)
종교 로마 가톨릭
통화 두카트, 나폴리 리라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282년 시칠리아 왕국으로부터 독립( 시칠리아의 만종)
1381년 두라초, 앙주가의 내전
1435년 발루아-앙주 가문의 승리
1442년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가 정복
1501년 프랑스 왕국의 루이 12세가 정복
1504년 스페인 왕국의 정복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지배
1735년 부르봉 왕조의 복위
1806년 프랑스 제1제국의 정복
1815년 부르봉 왕조의 재 복위
1816년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
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Regno di Napoli
나폴리어 Regno 'e Napule
라틴어 Regnum Neapolitanum / Neapolis
카탈루냐어 Regne de Nàpols
스페인어 Reino de Nápoles
프랑스어 Royaume de Naples

1. 개요2. 역사3. 역대 군주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반도 남부에 존속했던 왕국이다.

2. 역사

역대 국기 출처
파일:나폴리 왕국 국기(1282-1442).svg
1282년 ~ 1442년
파일:나폴리 왕국 국기.svg
1442년 ~ 1516년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1516년 ~ 1700년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1714년 ~ 1734년
파일:양시칠리아 왕국 국기(1816-1848, 1849-1860).svg
1734년 ~ 1799년, 1799년 ~ 1806년[3]
파일:파르테노페아 공화국 국기.svg
1799년( 파르테노페아 공화국)
파일:나폴리 왕국 국기(1806-1808).svg
1806년 ~ 1808년
파일:나폴리 왕국 국기(1808-1811).svg
1808년 ~ 1811년
파일:나폴리 왕국 국기(1811-1815).svg
1811년 ~ 1815년

2.1. 건국 배경

프랑스 왕국의 봉신국인 앙주 백국의 군주이자 루이 8세의 아들이며 '성왕(聖王)' 루이 9세의 동생인 샤를은 뛰어난 무예와 지도력을 갖추고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돌격할 정도로 용맹하면서도 형의 십자군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만큼 가톨릭 신앙심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는 더 많은 명예와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다. 그러던 1263년, 교황 우르바노 4세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며 오랫동안 교황청과 마찰을 벌여 3차례나 파문당한 만프레디를 축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기회에 시칠리아 왕위를 쟁취하기로 마음먹고,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샤를은 1265년 5월 23일 로마에 도착한 뒤 그 사이에 사망한 우르바노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4세의 영접을 받고 공식적으로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로 선포되었다. 이후 1266년 2월 26일 베네벤토에서 시칠리아 왕국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만프레디를 전사시킨 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전역을 순식간에 공략하고 나폴리를 수도로 삼았다.

카를루 1세는 만프레디가 속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들과 추종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시칠리아 백성들에게 이전보다 30배에 달하는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도시들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또한 시칠리아 정부에 자신과 함께 남하한 프랑스 관료들로 채웠고, 프랑스 군인들을 시칠리아 각지에 배치해 시칠리아 귀족 및 백성들을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 또한 시칠리아를 공략한 여세를 몰아 지중해 각지에 세력을 뻗쳐 '앙주 제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즉위 직후부터 대외 원정을 잇따라 감행했다. 1277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을 칭했으며, 1278년에 라틴 제국의 최후의 황제 보두앵 2세로부터 아카이아 공국의 주권을 양도받은 뒤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발칸 반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281년 4월 10일,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를 파문하고 카를루 1세에게 동로마 제국을 침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카를루 1세는 즉각 '콘스탄티노폴리스 십자군'을 선포하고 대규모 함대를 마르세유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집결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항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을 공략해 앙주 제국을 세우려는 그의 야망은 곧 한계에 부딪쳤다. 카를루 1세는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벌이면서, 이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이전보다 30배에 달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등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다. 이에 시칠리아 민중의 분노는 갈수록 불거졌고, 프랑스인들이 요직을 장악하는 바람에 정치에 참여할 길이 막혀버린 귀족들 역시 만감을 품었다.

일전에 만프레디의 딸 쿠스탄차와 결혼했던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에서 앙주 왕조에 대한 반감이 극렬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시칠리아에서 망명 온 호엔슈타우펜 가문 구성원 및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며 장차 카를루 1세를 시칠리아에서 타도하고 왕위를 가로챌 기회를 노렸다. 여기에 카를루 1세가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도모하려 드는 것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도 아라곤 왕국에 군자금을 지원해 함대를 조직하게 하고, 시칠리아에 공작원들을 잠입시켜 귀족과 민중을 선동했다.

1282년 3월 말, 팔레르모에서 민중이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병사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4명의 "사람들의 대장(capitaines du peuple)"과 5명의 "고문(conseillers)"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임시 의회를 열었다. 이후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한 코를레오네(Corleone)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후 자체적으로 의회를 세웠고, 팔레르모에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가 힘을 합쳐 결성한 롬바르디아 연맹을 따라서 시칠리아 도시 연합인 시칠리아 연합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바 디 노토(Val di Noto: 시칠리아 남동부), 바 데모네(Val Demone: 시칠리아 북동부) 등지에서도 봉기가 잇따라 일어났고, 4월 중순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의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4월 28일, 봉기군은 메시나를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함대를 파괴했고, 카를루 1세의 대리인으로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오를레앙의 에르베르를 칼라브리아로 축출했다.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카를루 1세는 즉각 시칠리아로 진군해 메시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사전에 튀니지에 가서 대기하고 있던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인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칠리아 왕국은 카를루 1세의 앙주 가문이 다스리는 나폴리 왕국과 페드로 3세가 다스리는 시칠리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2.2. 앙주 왕조

2.2.1.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

카를루 1세 페드로 3세가 팔레르모에 입성하여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자 일단 나폴리로 철수했다. 이후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도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로지에르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카를루 1세는 페드로에게 " 결투로 분쟁을 해결하자"고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양자는 6월 1일 보르도에서 100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또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결투를 중재하기로 했다. 페드로는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공동 여왕인 쿠스탄차 2세에게 시칠리아를 맡긴 뒤 아라곤으로 돌아간 후 변장한 채 보르도로 잠입했다. 그러나 결투는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고, 페드로는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한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칼라브리아 해안지대를 공략한 뒤 몰타를 공략하고 몰타 인근의 앙주-프랑스 연합 함대를 섬멸했다. 이후 카를루 1세가 칼라브리아 등지의 반란 진압에 애를 먹느라 시칠리아 원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1284년 6월 5일, 아라곤-시칠리아 함대 사령관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나폴리 항구로 침입했다. 카를루 1세는 아들 샤를에게 자기가 돌아오기 전꺄지 나폴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샤를은 이를 어기고 함대를 이끌고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여러 나폴리 귀족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구원군을 이끌고 나폴리 근교 가에타에 도착한 카를루 1세는 아들이 크게 패하고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이 일을 망쳤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샤를을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아라곤 왕국에서 프랑스의 침공을 저지하는 페드로 3세를 대신해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여왕 쿠스탄차 2세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카를루 1세는 아풀리아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1285년 1월 7일 포자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카를루 1세의 아들 샤를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로 선임되었지만 감옥에 계속 갇혀 지내야 했고, 카를루 1세의 조카 아르투아의 로베르 2세가 섭정을 맡아 아풀리아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

1285년 11월 11일 페드로 3세가 사망한 후 시칠리아 국왕이 된 하이메 2세는 마침 앙주 편만 들던 마르티노 4세가 사망하고 새 교황 호노리오 4세가 즉위하자 로마에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를 교황에 봉헌하겠으니 아라곤 왕국 전체에 내린 파문을 취소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단호히 거부하고 하이메 2세와 시칠리아 군주 즉위식을 주재한 주교들을 파문했다. 여전히 포로로 잡혀있던 카를로 2세는 석방과 평화 조약에 대한 대가로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양보하려 했지만, 교황은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287년 봄, 교황과 앙주, 프랑스 귀족들이 소집한 원정군이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3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 제독이 이끄는 시칠리아 함대가 원정군을 섬멸했고, 많은 프랑스와 프롱방스 귀족들이 체포된 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교황 호노리오 4세는 사망했고, 새 교황으로 니콜라오 4세가 선출되었다. 1287년 7월, 카를로 2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힘입어 아라곤 국왕 알폰소 3세와 울모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해 10월, 카를로 2세는 막대한 몸값, 아들 3명을 포함한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나폴리에 돌아온 카를로 2세는 1289년 5월 29일 리에티 대성당에서 교황 니콜라오 4세로부터 시칠리아 국왕에 선임되었다. 교황은 파문당한 자와 약속한 것은 무효라며 석방을 위해 하이메 2세와 맺었던 약속을 준수할 의무를 면제하고 시칠리아를 한시바삐 정벌하라고 독촉했다. 그러면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청에 들어오는 세입 중 10분의 1을 그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역시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교황의 결정에 항의했고, 카를로 2세와 알폰소 3세 사이의 중재를 지속했다.

알폰소 3세는 에드워드 1세의 요청에 따라 인질로 잡았던 카를로 마르텔을 카를로 2세의 다섯번째 아들 레몽 베렝가르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이후 알폰소 3세와 카를로 2세간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에드워드 1세는 일전에 맺은 평화 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니콜라오 4세는 아라곤과 나폴리 왕국의 화해를 막기 위해 2명의 추기경을 보냈지만, 두 왕은 교황보다는 에드워드 1세 쪽을 따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2년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한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카이아 공국을 직접 통치하기엔 벅차다고 여긴 카를로 2세는 전임 공작 빌라르두앵의 기욤 2세의 딸인 빌하르두앵의 이사벨라를 아버지의 부관이었던 에노의 플로렌스와 결혼시킨 뒤 1289년 9월 아카이아 공작 직위를 그들에게 줬다. 다만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고, 플로렌스가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이사벨라는 자신의 동의없이는 재혼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1290년 5월 19일, 카를로 2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센리스에서 협약을 맺었다. 카를로 2세는 자신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시켰고, 아라곤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필리프 4세에게 넘기는 대가로 앙주와 마인의 통치권을 지참금 형식으로 받아냈다. 필리프 4세는 알폰소 3세와 교황청이 화해하는 대로 아라곤과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프랑스, 나폴리 왕국, 아라곤 왕국, 교황의 사절단은 페르피냥에서 잉글래드 대표단의 중재하에 협상을 벌였다.

1290년 7월 10일, 카를로 2세의 처남인 라슬로 4세가 살해되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라슬로 4세의 사촌인 언드라시 3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카를로 2세의 아내 마리어는 자신이야말로 라슬로 4세의 합법적인 후계자라 여겼고, 남편을 설득해 아들 카를로 마르텔이 헝가리 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했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카를로 2세의 언질을 받고, 헝가리가 교황청의 영지이며 헝가리를 마리어의 아들 카를로 마르텔에게 주겠다고 선언했다. 바보니치, 프랑코판, 슈비치 등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주요 귀족 가문들이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여 카를로 마르텔을 모시면서 언드라시 3세에 대항했다. 그러나 다른 헝가리 귀족들이 언드라시 3세를 지지한 데다, 시칠리아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급했기에 헝가리 왕위를 아들에게 주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카를로 마르텔이 1295년경에 요절하자, 더 이상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교황청은 알폰소 3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약속하자 조약을 승인했다.

1291년 6월 18일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형이 맺었던 조약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페데리코를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일대의 통치자로 세웠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은 지속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사망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카를로 2세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재차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302년, 샤를 드 발루아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내려와서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조약의 비준으로 시칠리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두 개로 분할되었다. 나폴리 왕국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 앙주 가의 왕국은 공식적으로 시칠리아 왕국으로 명명되었고, 등대 옆의 시칠리아 왕국(Regnum Siciliae citra Pharum)으로 불렸다.[4] 반면 시칠리아 섬을 장악한 프리드리히 3세의 왕국은 트리나크리아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5]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으며 두 개의 시칠리아 왕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질 것이 약속되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은 막을 내렸다.

2.2.2. 로베르토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이 끝난 뒤 6년간 나라를 다스리던 카를로 2세는 1309년 5월 나폴리에서 사망했고 아들 로베르토가 나폴리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1310년 교황청으로부터 로마냐의 교황 대리자로 선임된 그는 13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 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차지하고 롬바르디아 일대를 복종시킨 뒤 1312년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향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구엘프 파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7세는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도시 내에 아직 남아 있던 기벨린 파벌과 함께 구엘프파를 공격했다. 로베르토는 이를 막기 위해 부관 조반니 디 그라비나에게 400명의 기병을 맡겨 로마로 파견했지만, 하인리히 7세는 이를 물리치고 구엘프 파를 로마에서 축출한 뒤 6월 29일 아비뇽에 가 있는 교황을 대신해 로마를 다스리던 추기경들에 의해 황제의 관을 썼다.

하인리히 7세는 토스카나의 구엘프 파벌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토스카나로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 그는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지만 구엘프 지도격의 도시였던 피렌체는 함락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후 자신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 피사에 한동안 머무른 뒤 나폴리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하고자 로마로 향했지만 말라리아에 걸려 1313년 8월 24일 부온콘벤토에서 병사했다. 하인리히 7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구엘프 파는 환호하면서 로베르토를 가리켜 "이탈리아 왕국의 훌륭한 왕 로베르토"이라고 칭송했다.

한편,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는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남하했을 때 황제와 동맹을 맺고 나폴리 왕국과 전쟁을 벌여 레지오를 공략했다. 이후 나폴리로 남하하려는 황제와 합세하고자 토스카나로 진군했지만, 얼마 후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로베르토는 이에 보복하고자 시칠리아를 여러차례 습격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 또한 구엘프 파가 로마에 복귀하고 기벨린 파와 전쟁을 이어가는 것을 지원했다.

1315년 로베르토의 형제인 타란토 공작 필리포 1세가 이끄는 구엘프 파가 몬테 카티니 전투(8월 29일)와 알토파시아 전투(9월)에서 참패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구엘프 파를 꿋꿋이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1317년 로마 원로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1318년에는 제노바의 영주가 되어 1334년까지 제노바의 종주권을 가졌다. 1319년에는 브레시아의 주권자가 되었다. 1325년 11월 25일에는 로베르토의 장남 카를로가 피렌체 공작으로 선포되었다. 카를로는 3년간 구엘프 당을 이끌고 기벨린 파의 전쟁을 이끌었다.

1325년, 로베르토의 아들 카를로 휘하의 앙주 육군과 함대가 시칠리아로 쳐들어갔지만 조반니 데 키아라몬테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에게 팔레르모 인근에서 패배했다. 1326년과 1327년에 앙주군이 시칠리아를 잇따라 공격해 타격을 입혔으며, 시칠리아 항구들을 봉쇄해 시칠리아의 경제가 곤궁해지게 만들었다. 1328년 루트비히 4세의 이탈리아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롬바르디아 연맹을 지원했으며, 1330년에는 보헤미아 군주이자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얀 루쳄부르스키가 북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롬바르디아 연맹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얀이 보헤미아로 돌아가게 했다.

1336년 만프레디 5세와 조카 토마스 2세 사이의 살루초 변경백의 계승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토마스가 대표적인 기벨린 파인 비스콘티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자, 로베르토는 만프레디를 돕기로 하고 살루초로 진군해 공략에 성공한 뒤 도시를 파괴하고 토마스를 감옥에 가뒀다가 토마스가 몸값을 지분한 후에야 풀어줬다. 1337년 페트루 2세가 시칠리아 국왕이 되자, 로베르토는 시칠리아 왕위가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던 칼타벨로타 조약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 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에 속했던 리파니(1339년), 밀라초(1342년)를 공략하는 등 공격을 퍼부었다.

1343년 1월 20일, 로베르토는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력한 후계자였던 아들 카를로는 1328년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 루이지는 1310년에 요절했기에, 남은 후계자는 카를로의 딸 조반나 뿐이었다. 조반나는 헝가리 왕국의 앙주 가문 출신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의 차남인 언드라시와 결혼한 바 있었다. 로베르토는 유언장에서 손녀 조반나의 왕위 계승을 명시하면서 언드라시가 나폴리 왕이 될 자격을 박탈하고 그 대신 살레르노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조반나가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조반나의 여동생 마리아와 마리아의 합법적인 후손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그리하여 조반나가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로서 등극했다.

2.2.3. 조반나 1세

할아버지 로베르토의 뒤를 이어 나폴리 여왕에 오른 조반나 1세는 계모인 마요르카의 산치아, 카비용 주교 필리포 드 카바솔레스, 장관 대리 필리포 드 상가네토, 프로방스 로베르토 왕의 사생아이자 궁정 관료였던 카를로 아르투아 등의 섭정을 받았다. 교황청에서도 교황 특사 아이메리 드 샤텔루스를 파견해 나폴리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로베르토의 유언을 전해들은 헝가리 왕실은 분개했다. 언드라시의 형이자 헝가리 국왕인 러요시 1세는 동생이 상속권을 되찾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모라비아의 카렐에게 사절을 보내 나폴리 왕국을 공동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또한 러요시의 어머니인 엘즈비에타는 1343년 여름에 막대한 금과 은을 가지고 나폴리로 가서 7개월 동안 조반나 1세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언드라시가 나폴리의 공동 왕이 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교황은 중재에 나섰고, 1344년 8월 28일 조반나 1세가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언드라시가 이에 참석하여 왕의 칭호를 받게 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이후에도 정치에 일절 관여할 수 없었다.

언드라시는 이에 불만을 품은 데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엘즈비에타에게 나폴리에서 도망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엘즈비에타는 교황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며 언드라시 역시 별도의 대관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클레멘스 6세는 조반나 1세에게 언드라시의 대관식을 거행하라고 권고했다. 다만 언드라시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그녀의 대관식만이 '신의 축복'을 받을 거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폴리의 단독 국왕이 되고 싶었던 조반나 1세는 언드라시의 대관식 거행을 차일피일 미뤘다.

1344년,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2세는 여왕의 즉위로 나폴리 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알렉산드리아, 아스티, 트리토나, 브라, 알바를 공략했다. 조반나 1세는 롬바르디아의 앙주 가문 영지 관료였던 레포르체 다굴트에게 몬페라토를 응징하게 했다. 그러나 레포르체는 1345년 4월 23일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조반니 2세에게 참패하고 전사했다. 이후 조반니 2세는 조반나 1세를 지지했던 피에몬테의 자코모의 영지 내에 있는 키에리를 공략했다.

1345년 여름 조반나가 병에 걸렸을 때, 언드라시는 그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피피니 형제를 석방했다. 그들은 살인, 강간, 약탈, 반역 등 여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로베르토 왕에 의해 감금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다른 귀족들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언드라시가 피피니 형제를 풀어주고 빼앗은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귀족들은 자연히 언드라시에게 적의를 품었다. 그들은 곧 언드라시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345년 9월 18~19일, 조반나 1세와 언드라시 부부는 아베르사에서 사냥했다. 그날 밤, 언드라시는 한방중에 음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방에서 뛰쳐나와 궁궐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하인이 문을 걸어잠가서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여왕에게 구원을 호소하고자 그녀의 침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중에 음모자들에게 다시 습격을 받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여왕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조반나 1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언드라시는 끝내 제압당한 뒤 밧줄로 목이 졸려 죽은 뒤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언드라시의 헝가리 간호사였던 이졸데는 언드라시의 비명 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와서 그의 시신을 수습해 수도사들의 교회로 가져갔다. 다음날 헝가리 기사들이 도착하자, 그녀는 헝가리어로 이 사실을 알렸다. 기사들은 언드라시의 유해를 가지고 헝가리로 돌아가 러요시 1세에게 보고했다. 조반나 1세는 사건 후 교황과 유럽의 군주들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그녀가 이 암살을 직접 지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건 당시 남편을 구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후 조반나 1세는 1345년 12월 25일 언드라시의 유복자인 카를로 마르텔을 낳았다. 카를로 마르텔은 1346년 12월 11일에 나폴리 왕국의 후계자로서 칼라브리아 공작과 살레르노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타란토 공작 필리프 1세의 둘째 아들이었던 루이지와 재혼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인물은 언드라시 살해에 깊이 관여한 데다 조반나 1세와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세간의 시선이 매우 좋지 않았고 교황도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조반나 1세와 루이지는 이를 무시하고 1347년 8월 22일 결혼식을 거행했고, 루이지는 두라초 공작 카를로[6]와 함께 왕국의 공동 수호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반나 1세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외세는 조반나 1세가 이대로 자리잡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347년 7월, 피에몬테의 자코모는 사촌이자 사보이아 백작인 아메데오 6세와 손잡고 몬페라토를 공격하여 잃어버렸던 영지를 상당수 회복했다. 이에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2세는 살루초 후작 토마스 2세와 빈 공작 훔베르트 2세와 연합해 다시 공세를 개시하여 롬바르디아 일대의 나폴리 왕국 영토를 거의 빼앗았다. 한편, 언드라시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접한 러요시 1세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남편을 살해한 여왕을 폐위시키고 언드라시의 아들(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마르텔)을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조카의 섭정을 맡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이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자, 러요시는 나폴리 왕국의 본토인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군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1347년 4월 24일 바사리 미클로시(Vásári Miklós ?~1358)가 지휘하는 선봉대를 이탈리아로 파견하고, 여러 분견대를 잇따라 파견했다. 헝가리군은 연전연승하며 우디네, 베로나, 모데나, 볼로냐, 우르비노, 페루자를 거쳐 라퀼라까지 진격했다.

조반나 1세는 헝가리군과의 전쟁에 온 힘을 집중하고 싶었기에 선왕 로베르토 시절부터 이어져온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고 여겼다. 시칠리아 왕국 역시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고 흉흉한 민심을 달래야 했다. 그리하여 양자는 수년간 평화 협상을 가졌고, 1347년 11월 7일 카타니아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시칠리아 왕국의 독립은 유지되었지만, 루이지는 시칠리아 왕이 아니라 시칠리아의 고대 이름인 트리나크리아(Trinacria)의 왕을 칭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황청과 여러번 갈등을 벌인 시칠리아 왕국을 이대로 끝장내고 싶었기에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시칠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전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헝가리군은 조반나 1세가 파견한 군대를 모조리 격파하고 1348년 1월 11일 베네벤토에 입성했다. 이에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15일 몇몇 측근과 함께 갤리선 2척을 타고 마르세유로 도주했다. 루이지는 다음날 다른 갤리선을 타고 아내를 따라갔다. 조반나 1세의 친척인 타란토 공작 로베르트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는 러요시를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 러요시는 이들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들의 형제이며 여전히 헝가리에 맞서고 있는 타란토의 필리포와 두라초의 루도비코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시키는 대로 형제들을 설득한 뒤 함께 귀순하자, 러요시는 태도를 싹 바꿨다. 그는 남동생 언드라시가 살해된 일에 대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현장에서 체포했다. 다음날인 1348년 1월 23일, 두라초 공작 카를로는 러요시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되었다. 다른 인사들은 러요시의 어린 조카 카를로 마르텔과 함께 헝가리로 이송되었다.

1348년 2월, 러요시는 나폴리로 진격했다. 나폴리 시민들이 공물을 바치겠으니 군대를 입성시키지 말고 그와 수행원들만 도시에 들어와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공물을 더 바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병사들이 도시를 철저히 약탈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거절했다. 그는 역대 나폴리 왕들의 칭호인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 풀리아 공작과 카푸아 공작"을 왕호에 덧붙였고, 여러 요충지에 용병들을 주둔시키는 등 남부 이탈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여기에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모든 공범을 잡기 위해 의심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처음에 러요시에게 복종했던 이탈리아 귀족들은 그의 이같은 강압 정책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헝가리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해버리면 너무 강해져서 교황령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해 그가 나폴리를 통치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러요시 1세는 더 많은 병력을 이탈리아에 상륙시켜서 이탈리아 귀족들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때마침 중세 흑사병이 돌면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1348년 5월 헝가리로 철수했다.

한편,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20일 마르세유에 도착한 뒤 마르세유 시의 특권을 지키겠다고 맹세해 주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다. 이후 프로방스로 가서 지지를 호소한 뒤 3월 15일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6세와 면담했다. 교황은 언드라시 살인 사건에 아무 관련이 없다는 조반나 1세의 호소를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하고, 언드라시 살인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을 조사할 위원회를 설립했으며, 조반나 1세와 타란토의 루이지의 결혼을 허가했다. 그 대가로, 아비뇽을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8만 플로린에 사들였다.

러요시 1세가 나폴리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반나 1세는 7월 21일 아비뇽을 떠나 마르세유에 잠시 머물다가 7월 30일 사나리수르메르, 7월 31일 브레간송 요새로 이동한 후 1348년 8월 17일 나폴리로 향했다. 러요시 1세는 떠나기 전에 울리히 볼프하르트(Ulrich Wolfhardt)를 나폴리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울리히는 조반나 1세가 9월에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폴리에 돌아온 그녀의 권력은 이전보다 훨씬 약화되었다. 1349년 초부터 나폴리 왕국의 모든 문서에는 그녀와 남편 루이지의 이름이 동시에 새겨졌으며, 모든 군사 요새와 군대는 루이지의 통제를 받았다. 왕국에서 발행된 동전들 역시 루이지의 이름이 조반나의 이름보다 우선적으로 새겨졌다. 이렇듯 권세가 갈수록 강해진 루이지는 조반나 1세의 지지자들을 궁정에서 축출했다. 특히 조반나 1세가 마르세유로 망명했을 때 함께 따라가는 등 여왕의 곁에 항상 함께 있어서 여왕의 애인이란 소문에 휩싸였던 엔리코 카라촐로를 처형했다.

1350년 4월, 러요시 1세가 또다시 이탈리아로 친정했다. 그는 바를레타(Barletta)에서 용병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각지를 진군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해 누구도 감히 원정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은 이에 두려움을 품긴 커녕 격렬하게 저항했고, 원정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고, 요새를 공략할 때 친히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갈 정도로 분투했다. 8월 3일 나폴리 왕국의 핵심 요새인 아베르사가 함락되자, 조반나 1세는 또다시 나폴리에서 마르세유로 망명했다. 그러나 아베르사를 공략하던 중 왼쪽 다리에 화살이 박혀 중상을 입은 데다,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군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었던 러요시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 후 러요시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나폴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교황은 러요시에게 조반나 1세가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얼만큼 관여했는지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헝가리로 끌고 갔던 공작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30만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러요시 1세는 여전히 자신을 살레르노의 공작이자 산탄젤로의 영주라고 칭하며, 조부인 카로이 마르텔 이래로 나폴리 왕국에 지분이 있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교황의 언드라시 암살 사건 조사는 얼마 안가 흐지부지되었다.

1352년 3월 23일, 루이지는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나폴리의 공동 왕이라는 인정을 받은 뒤 5월 27일 브라가 대주교의 주관하에 루이지 1세로서 조반나 1세와 함께 나폴리 왕관을 썼다. 1356년 루이지 1세와 조반나 1세는 시칠리아 탈환 전쟁을 단행했다. 루이지 1세가 이끄는 나폴리군은 메시나에 상륙해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카타니아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나폴리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였다. 얼마 후 카탈루냐 출신 귀족들이 동원한 용병대가 나폴리군을 격파했고, 아시레알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나폴리 함대가 시칠리아 함대에게 참패했다. 결국 루이지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나폴리로 철수했다. 1357년 7월 13일, 아르노 드 세르볼의 용병부대가 두랑 강을 건너 프로방스를 약탈했다. 루이지의 동생이자 조반나 1세의 여동생 마리아의 세번째 남편인 타란토의 필리포 2세는 프로방스 총대리로서 이들과 맞섰다. 그는 아르마냐크 백작의 지원을 토대로 이들을 몰아붙인 끝에 격퇴했다.

1362년 4월, 루이지 1세는 목욕하던 중 감기에 걸렸다. 그의 병세는 한 달간 악화되다가 1362년 5월 25일에 병사했다. 그리하여 권력을 되찾은 조반나 1세는 남편의 심복들을 궁정에서 내쫓고 자신의 사람들을 선임했다. 이후 1362년 12월 14일 마요르카의 명목상 왕인 하이메 4세와 세번째로 결혼했다. 결혼식은 1363년 5월 카스텔누오보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하이메 4세는 과거에 아라곤 왕 페로 4세에 의해 철창에 14년간 갇혀 지내야 했던 일이 있었기에 정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여기에 조반나 1세가 루이지 1세에게 권력을 철저하게 박탈당했던 일을 교훈삼아 어떤 권력도 남편에게 주지 않자, 하이메 4세는 환멸을 느끼고 1366년 1월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마요르카 탈환을 시도했으나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에게 체포된 뒤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넘겨져 몽필리에에 연금되었다. 1370년 조반나 1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갔지만 얼마 후 그녀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다시 떠나 1375년 루시용과 체르다냐를 공략하려 했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소리아로 도피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365년 6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에미아 왕인 카를 4세가 아비뇽으로 가서 아를의 왕으로 즉위해 옛 아를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조반나 1세의 권리를 보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동생인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프로방스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손잡고 공세를 개시해 아를과 타라스콘을 포위 공격했다. 아를은 곧 함락되었지만, 타라스콘은 프로방스 군대에 의해 19일 만에 구출되었다. 나폴리 궁정 관료 레몽 2세 달굴트가 반격에 나섰지만 세레스테에서 패배했다.

1368년,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인근까지 약탈을 자행하는 앙주 공작과 게클랭에게 분노해 파문을 선언했다. 여기에 샤를 5세가 게클랭을 소환하면서 믿었던 아군이 사라지자, 루이 1세는 1370년 1월 조반나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 1371년 4월 타라스콘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조반나 1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용병대장 오토[7]의 활약 덕분에 피에몬테의 영지를 회복했다.

이 무렵, 조반나 1세의 여동생인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의 막내 딸인 두라초의 마르게리타와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의 아들 카를로의 결혼이 논의되었다. 조반나 1세는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를 반역 혐의로 처형한 적이 있었기에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러요시 1세가 강하게 추진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 결혼은 사촌간의 결혼이었기에 교황청의 승낙이 필요했는데, 1369년 6월 15일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승인이 내려지면서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1370년 1월 24일, 카를로와 마르게리타는 나폴리에서 결혼식을 거행한 뒤 9월 16일 자다르로 떠났다.

1373년 3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아베르사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자신을 교황과 조반나 1세의 가신으로 칭하면서도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시칠리아의 고대 지명)의 왕으로서 시칠리아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용인되었으며, 자기가 죽으면 유일한 자식인 마리아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가문의 왕족과 결혼하도록 하겠다고 약조했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 4세와 화해하고 1321년부터 바르셀로나 왕조에 가해지던 파문을 해제했다.

그리하여 모든 전쟁을 종식하고 안정을 되찾은 후, 조반나 1세는 왕국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의 승인없이 어떤 법이나 칙령을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은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결재 서류를 처리했다. 지역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통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화폐 개혁을 단행했고, 왕국의 수도인 나폴리의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건축 사업을 단행했다. 조반나 1세의 통치 하에서 사회는 안정되었고, 범죄는 크게 줄어들었다.

1375년 12월 25일, 조반나 1세는 피에몬테의 영지 확보에 큰 공을 세운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와 4번째로 결혼했다. 결혼식은 3개월 후인 1376년 3월 25일 카스텔누오보에서 거행되었다. 이번에도 오토의 정치참여는 배제되었고, 조반나 1세는 나폴리의 유일한 군주로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오토 사이에 후계자가 태어나면 왕국을 그 아이에게 넘기고, 자식을 끝내 보지 못하면 오토가 왕권을 행사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1378년 9월 20일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들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우면서 서방교회 대분열 시대가 개막했다. 러요시 1세는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그런데 조반나 1세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고, 우르바노 6세는 그녀를 파문에 처한 뒤 러요시의 궁정에 머물고 있던 카를로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아들은 없고 딸만 있던 러요시 1세는 카를로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웠다가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헝가리 국왕으로까지 즉위하려 할 것을 걱정했다. 이에 카를로는 러요시 1세가 죽더라도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으며 그의 딸이 헝가리 국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는 1380년 여름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호르바트 야노시가 이끄는 9,000명의 헝가리군과 이탈리아 용병대가 그와 함께 했다. 1380년 11월 11일 로마에 도착한 그는 1381년 6월 2일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반나 1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피렌체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그들은 중재할 의사는 있지만 헝가리 국왕과 교황이 지원하는 인물을 대적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카를로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용병대를 고용한 뒤 나폴리 왕국으로 행진했다.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는 그를 막기 위해 출진했지만 아리엔초 인근에서 참패했다. 이후 카를로는 나폴리를 포위해 한 달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281년 8월 25일 조반나 1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조반나 1세는 처음에는 카스텔 누오보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는 노체라 요새로 보내졌다. 조반나 1세는 순순히 퇴위하기로 했지만 비밀리에 추종자들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 카를로는 이 사실을 적발한 뒤 1382년 5월 22일 무로 로카노 인근의 산필레 요새에서 조반나 1세를 살해했다.

2.2.4. 카를로 3세

조반나 1세를 시해한 카를로는 나폴리 국왕 카를로 3세로 군림한 뒤 조반나 1세의 원수를 갚고 진정한 나폴리 국왕이 되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침공에 직면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선전했다. 그러던 1382년 9월 10일 러요시 1세가 사망했다. 그 직후 러요시 1세의 딸 마리어가 헝가리 여왕에 올랐지만, 많은 헝가리 귀족들은 여자를 왕으로 섬길 수는 없다고 여겼고 카를로 3세를 왕으로 섬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카를로 3세는 138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러요시 1세에게 자신을 지원하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고, 루이 왕자와 대결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마리어의 즉위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384년 9월, 루이 1세가 바리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내전이 끝나자, 카를로 3세는 비로소 헝가리 국왕이 될 야심을 품었다. 마침 마리어 여왕과 모후이자 섭정인 엘리자베타에게 불만이 가득했던 헝가리 귀족들은 팔 호르바티(Pál Horváti) 주교와 호바트 야노시를 필두로 카를로 3세에게 헝가리로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센(Senj)에 상륙한 뒤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엘리자베타는 일찍이 마리어의 약혼자로 예정되었다가 취소되어버렸던 지기스문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지기스문트는 1385년 10월 부더에 도착한 뒤 마리어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그를 헝가리의 공동 왕으로 세우기를 거부했고, 어떠한 정치적 실권도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지기스문트는 부더를 떠나버렸고, 카를로 3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더로 진격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카를로에게 귀순하자, 엘리자베타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1385년 12월 초 딸 마리어와 함께 그를 마중한 뒤 함께 부더에 들어갔다.

이후 마리어는 카를로가 자신을 죽일 것을 우려해 12월 중순에 퇴위했고, 카를로는 처음에는 총독이라는 칭호를 칭했지만 의회에서 왕으로 등극해줄 것을 요청하자 1385년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카로이 2세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를 감금하지 않고 두 사람이 부더의 왕궁에서 살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어떻게든 딸이 왕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여기고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와 함께 카로이 2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은 컵을 가지고 다니는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에게 왕을 죽여주면 기메스(Gimes, 현재 슬로바키아 옐레넥)를 주겠다고 설득했다. 블레즈는 이에 눈이 돌아가서 엘리자베타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386년 2월 7일, 카로이 2세는 엘리자베타의 요청에 따라 부더 궁정을 방문했다. 이후 엘리자베타와 카로이 2세가 대화를 나누던 중, 벌라주가 둔기로 왕의 머리를 가격해 중상을 입혔다. 카로이는 비셰그라드로 실려간 뒤 2월 24일에 사망했다.

2.2.5. 라디슬라오

카를로 3세가 헝가리에서 살해된 뒤, 9살 아들 라디슬라오가 나폴리 국왕에 즉위했고 어머니 마르게리타가 섭정했다. 마르게리타는 조속히 나폴리의 명목상 군주인 교황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당시 교황청은 서방교회 대분열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었다.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는 라디슬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어린 왕을 통제하고 싶었기에 대관식 거행을 쉽사리 허락해주지 않았다.

한편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주요 지지자였던 조반나 1세가 카를로 3세에게 폐위당한 것에 분노했고, 앙주 공작을 나폴리의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처음에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카를로 3세와 대적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384년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그의 아들 루이 2세는 어머니 발루아의 마리의 섭정을 받았다. 클레멘스 7세는 루이 2세를 나폴리 왕으로 세움으로써 로마 교황을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압박하려 했다.

나폴리 왕국 내에서도 두 정파가 갈등을 벌였다. 한 정파는 카를로 3세를 지지했던 이들이 주류였지만, 다른 정파는 나폴리 왕국의 본류인 앙주 공국에서 새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여겼다. 헝가리 귀족들은 라디슬라오를 새 왕으로 받들려 하니 라디슬라오나 섭정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마르게리타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거절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이 카로이 2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 '라슬로 5세'로 즉위했다고 선포하는 등 아들의 위신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1387년 7월, 친 앙주파가 나폴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게리타는 라디슬라오와 조반나를 데리고 가에타 요새로 도주했고, 나폴리는 조반나 1세의 네번째 남편으로 카를로 3세와 맞서다가 패배한 뒤 숨어지냈던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에 의해 장악되었다. 오토는 앙주 공작 루이 2세를 나폴리 국왕 루이지 2세로 받들었고, 앙주 공국에서는 총독을 파견해 나폴리 왕국을 대리 통치하게 했다. 교황 우르바노 6세는 레이몬트 오르시니에게 나폴리를 라디슬라오의 지배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했지만, 레이몬트의 공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직 가에타, 아베르사, 카푸아만이 라디슬라오를 지지했고, 일부 도시는 아예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던 1389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하고 피에로 토마첼리 추기경이 보니파시오 9세로서 새 교황에 즉위했다. 그는 나폴리 왕국을 교황청의 수중에 온전히 돌려놓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라디슬라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마르게리타는 시칠리아의 유력 귀족인 만프레디 치아라몬테의 딸 쿠스탄차를 며느리로 삼음으로써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앙주 세력 역시 치아라몬테 가문에 루이지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만프레디는 라디슬라오를 택하기로 하고 1389년 9월 초 4척의 갤리선을 가에타로 파견해 라디슬라오를 지원했다.

1389년 11월 1일, 클레멘스 7세는 루이지 2세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1390년 봄, 보니파시오 9세는 피렌체의 수석 추기경 안젤로 아치아올리에게 라디슬라오를 시칠리아, 예루살렘, 헝가리의 왕으로 즉위시키라고 지시했다. 안젤로 아치아올리는 가에타에 도착한 뒤 1390년 5월 29일 라디슬라오의 대관식을 거행했고, 마르게리타와 함께 라디슬라오 왕의 후견인이 되었다. 1390년 7월, 당시 13세였던 루이지 2세는 나폴리로 향했다.

이후 라디슬라오 세력과 루이지 2세 세력은 나폴리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루이지 2세가 내전에서 승기를 잡는 듯했다. 앙주 가문의 대규모 함대는 나폴리로 향해하면서 산텔모 성, 누오보 성 등 여러 해안 요새들을 공략했다. 1392년 아말피와 라벨로를 추가로 점령했고, 대부분의 칼라브리아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런데 루이지 2세를 물신양면으로 돕던 샤를 6세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국정운영이 불가능해지고 아우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프랑스의 최고 권력을 놓고 심한 갈등을 벌이면서, 프랑스 왕국의 지원이 끊어졌다.

게다가 1394년 클레멘스 7세가 병사하면서 아비뇽 역시 지원을 꾸준히 보내기 힘들어졌다. 프랑스 측은 클레멘스 7세를 따랐던 추기경들에게 새 교황을 선출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베네딕토 13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루이지 2세는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와 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여기에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정치 공세에 넘어간 귀족들이 라디슬라오 편을 든 데다 시칠리아의 유력 가문인 치아라몬테 가문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라디슬라오 세력이 용병을 대거 고용해 반격해오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393년 즈음에 이르러 친 앙주 세력은 나폴리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1399년, 라디슬라오는 오르시니 가문의 지원에 힘입어 나폴리를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봉쇄했다. 결국 나폴리는 항복했고, 루이지 2세는 앙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라디슬라오는 나폴리 왕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고, 이와 동시에 친정을 시작했다.

라디슬라오는 아버지가 한때 차지했던 헝가리 왕위를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크로아티아-달마티아-헝가리 남부 영주들을 포섭해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지기스문트는 이에 맞서 브렌덴부르크를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자 자신의 사촌인 요프스트에게 저당잡히는 대가로 군자금을 지원받은 뒤 나폴리 왕국 및 반란자들을 상대로 투쟁했다. 그러나 보유한 군사력이 반란군을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데다 보스니아 왕국 트브르트코 1세가 반란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자, 막강한 사병과 드넓은 영지를 보유한 치릴레이(Czillei)-가라이(Garai) 가문 연합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왕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양도해야 했다.

1390~1391년, 가라이 미클라시가 이끄는 왕실군이 트브르트코 1세 휘하의 보스니아군을 격파하면서 보스니아 왕국이 반란군을 더 이상 후원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반란군의 위세는 점차 약화되다가 1394년 7월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에 라디슬라오는 나폴리 왕국의 봉신이었지만 이미 아차이올리 가문에게 넘어가고 있던 아테네 공국을 1394년에 정식으로 아차이올리 가문에 넘겨 그들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또한 북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국가 중 하나인 제노바를 자기 편으로 포섭했다.

문제는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이들은 나폴리 왕국과 헝가리 왕국이 한 군주에 의해 통치된다면 아드리아 해에 대한 자신들의 패권이 흔들릴 거라고 여겼다. 라디슬라오는 1402년 30,000 두카트를 받고 코르푸를 베네치아에 넘김으로써 그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자 했지만, 베네치아는 여전히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9세 역시 굳이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와 적대할 이유는 없다고 봤기에 헝가리 왕이 되려는 그의 야심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렇듯 베네치아와 교황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성공 가능성은 불확실했지만, 라디슬라오는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1403년,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로 간 틈을 타 나폴리군이 헝가리로 출격했다. 그들은 자다르를 공략한 뒤 헝가리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받들라고 요구했다.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달마티아 전역이 라디슬라오의 수중에 넘어갔다. 지기스문트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헝가리 귀족 가라이 미클로시와 마로티 야노시가 반격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3년 4월 말, 보니파시오 9세는 대세가 라디슬라오 쪽으로 넘어갔다고 여기고 라디슬라오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다는 뜻을 전 유럽에 알렸다. 6월 1일 앙겔로 아차이올리 추기경은 헝가리로 가서 그곳의 주교들에게 새 국왕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7월 14일, 라디슬라오 본인이 7척의 갤리선과 5척의 소형 선박과 함께 비에스티에서 출발해 7월 19일 자라에 상륙한 후 이틀 늦게 도착한 헝가리 귀족들을 성문 앞에서 말을 탄 채 맞이했다. 이후 영주들과 협상을 벌인 끝에 그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1403년 8월 5일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대관식을 치른 뒤 달마티아 도시의 특허를 확인하고 헝가리 본토를 향해 북상했다.

한편, 보헤미아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가라이 미클로시의 구원 요청을 받자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1403년 7월 하반기에 군대를 소집한 뒤 헝가리로 출발했고, 7월 24일 브라티슬라바 부근에서 헝가리 지지자들과 합세한 뒤 군대를 3개 분대로 나누고 달마티아 공세를 개시했다. 지기스문트 본인은 에스테르곰으로 이동했고, 스티보르츠의 스티보로가 이끄는 주력군은 죄르를 포위했으며, 페레니 페테르와 로즈고니 시몬이 이끄는 또다른 분견대는 티서 강변을 따라 이동했다. 스티보로는 죄르 공략에 성공한 뒤 가라이 미클로시와 연합한 후 라바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여 라디슬라오의 주력군을 섬멸하고자 했다.

라디슬라오는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라바 강 서쪽의 세베스 인근에 진을 치고 있던 헝가리와 이탈리아 군대를 라바 동쪽으로 옮겼다. 이후 파포치 인근에서 스티보로와 가라이 미클로시가 이끄는 적군과 맞붙었으나 참패를 면치 못했고, 그가 가지고 온 군대 장비 대부분을 상실했다. 라디슬라오는 자다르로 도주했고, 지기스문트의 추종자들은 공세를 이어가 달마티아 각지를 약탈하고 에스테르곰을 공략한 뒤 그곳의 교회를 약탈했다. 교황은 대교구 재산을 파괴한 자들에게 천벌이 내려질 것이라고 비난하고, 지기스문트 편에 선 주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자다르로 돌아온 라디슬라오는 자신을 따랐던 헝가리 귀족과 주교 대부분이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했다는 소식을 듣자 11월 7일 교황 특사와 함께 나폴리로 도주했다. 자그레브의 세페치 야노시 주교(이후 나폴리 대주교), 컬로처의 크리조곤 대주교, 에스테르곰의 죄르지 주교도 헝가리를 떠나 나폴리로 망명했다. 이후 라디슬라오는 아직 자신을 따르는 달마티아 도시들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100,000 두카트에 팔았다. 이후에도 헝가리 각지에서 발발한 반란에 시달리던 지기스문트는 부더에 소집된 의회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선언해 내전을 어느정도 잠재웠다.

하지만 라디슬라오는 여전히 헝가리 왕이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1404년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의 후견인을 맡던 빌헬름과 자신의 누이 조반나의 결혼을 주선했고,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와도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사방에서 공격당할 위기에 직면한 지기스문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405년 첼레 백국의 백작 헤르만 2세의 막내딸 바르바라와 결혼해 당시 상당한 군사력과 부를 갖추고 있던 첼레 백국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중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라디슬라오가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게 했다. 1407년 보스니아 일대가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자, 지기스문트는 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보스니아로 진군해 1408년 도보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스니아 귀족 200여 명을 학살했다.

헝가리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라디슬라오는 이탈리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 반란을 도모했던 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어머니와 누이를 가에타 요새에서 나폴리의 카스탈 누오보로 데려왔다. 이후 보니파시오 9세의 권유에 따라 1403년 2월 키프로스 공작 자크 드 뤼지냥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마리아는 1404년 9월 4일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1404년 보니파시오 9세가 사망하자, 로마의 추기경 8명이 베네딕토 13세에게 교황직에서 물러나준다면 아비뇽과 로마 추기경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새 교황을 추대하는 데 동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3세의 사절단이 그를 대신해 거부하자, 로마 추기경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7세를 선출했다. 인노첸시오 7세는 강성 구엘프파(친 교황파) 지지 지역인 나폴리 왕국의 술모나 출신이었기에, 기벨린파(친 황제파)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지만, 라디슬라오가 파견한 군대가 이들을 진압했다.

1405년 로마로 향한 라디슬라오는 일부 로마 귀족들로부터 로마의 영주권을 가지라는 제안을 받았다. 라디슬라오가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치자, 교황 인노첸시오 7세는 위협을 느끼고 1406년 1월 9일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라이몬드 오르시니에게 나폴리에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라이몬드 오르시니는 곧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했지만, 아내 마리아 드 엥기엔은 반란을 이어갔다. 1406년 봄 라디슬라오가 이끄는 나폴리군이 마리아가 있는 타란토를 포위했지만, 마리아는 2개월간 항전한 끝에 격퇴했다. 1406년 7월, 라디슬라오는 교황 인노첸시오 7세와 로마를 다시는 노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평화 협정을 맺고 나폴리 왕으로 인정받았다. 마리아는 이후에도 항전을 이어갔지만, 1407년 4월 23일 라디슬라오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와 결혼함으로써 반란을 끝냈다.

1406년 11월 6일 인노첸시오 7세가 사망했다. 뒤이어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2세가 교황령 통제에 애를 먹자, 라디슬라오는 1407년 교황령을 침공해 아스콜리피케모와 페르모를 공략했다. 1408년에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하는 도시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오스티아를 포위했다. 짧은 공성전 끝에 교황군 사령관 파올로 오르시니에게 뇌물을 줘서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4월 25일 로마에 입성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페루자 역시 손아귀에 넣었다. 1409년, 라디슬라오는 토스카나를 침공해 그곳의 군주 게라르도 아피아니로부터 코르토나와 엘바 섬을 빼앗았다. 뒤이어 피렌체를 공격했지만 피렌체가 고용한 용병대장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격파당하자 퇴각했다. 하지만 그는 북부 이탈리아를 공략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를 압박해 가에타로 이송시켰다.

시에나 공화국과 피렌체 공화국, 그리고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는 그의 야심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피사의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라디슬라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앙주의 루이지 2세에게 나폴리를 다시 정복하라고 권고했다. 루이지 2세는 1409년 7월 말 1,500명의 기병과 함께 피사에 도착한 뒤 나폴리 왕관을 썼다. 여기에 무치오 아텐돌로, 브라초 다 몬토네가 이끄는 동맹군이 라디슬라오의 통제 아래 있던 교황령을 침공하고 로마로 이동했다. 라디슬라오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2,000명의 병력을 줘서 로마를 지키게 했지만, 그들은 적군이 로마로 접근하자마자 항복했다. 그러나 동맹군은 바티칸과 트라스테베레 구역만 공략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친 나폴리 세력이 여전히 강성했다. 코사 추기경과 루이지 2세는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로마 공략을 맡기고 추가 지원을 얻고자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로 이동했다.

1410년, 라디슬라오는 제노바의 반 프랑스 반란을 이용해 제노바의 지지를 얻어냈다. 동맹군은 그해 1월 2일에 로마를 접수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로방스에서 새 병력을 싣고 항해하던 루이지 2세의 함대는 토스카나 해안에서 나폴리 해군의 급습으로 6,000명의 병력과 60만 두카트 가치의 보물을 상실했다. 그 동안 알렉산데르 5세는 사망했고, 발다사레 코사가 요한 23세로서 교황에 즉위했다. 요한 23세는 라디슬라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이를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 판매를 승인했다.

라디슬라오는 적이 주춤한 사이 피렌체, 시에나와 평화 협약을 맺고 병력을 집결시켰다. 1411년 5월 19일 무치오 아텐돌로가 이끄는 군대와 로카세카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나폴리군이 패배했지만, 무치오는 라디슬라오가 산게르마노에 설치한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병력과 물자가 소진된 루이지 2세는 앙주로 돌아갔고, 1412년 라디슬라오에게 고용된 용병대장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가 안코나 변경백의 일부 영역을 공략했다. 대세가 라디슬라오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눈치챈 무치오는 라디슬라오에게 귀순했다. 결국 1412년 6월 14일, 요한 23세는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75,000플로린을 배상했다. 라디슬라오는 그 대신 그레고리오 12세를 가에타에서 리미니로 이주시키고 그를 교황으로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요한 23세가 배상금 75,000플로린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고, 피렌체가 지기스문트와 연합해 다시 나폴리 왕국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라디슬라오는 1413년 5월 중순에 군대를 일으켜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해 6월 8일, 그의 군대는 로마를 공략한 뒤 약탈을 자행했고, 요한 23세는 피렌체로 달아났다. 라디슬라오는 뒤이어 움브리아와 라티움 북부로 향했다. 피렌체는 라디슬라오의 공세를 두려워해 그가 교황령을 정복하는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불가침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이탈리아 북부를 향한 대규모 원정 준비에 1413년 후반기를 보낸 라디슬라오는 1414년 4월 로마를 떠나 볼로냐로 진격했다.

요한 23세는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라디슬라오를 막아설 동맹이 없자 지기스문트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얻지 못했다. 시에나, 아시시, 볼로냐 등이 잇따라 라디슬라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호소했다. 이제 이탈리아 전체를 손아귀에 쥐려는 그의 야망은 곧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가 이탈리아 전체의 군주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토디 공방전을 치르던 중 병에 걸린 라디슬라오는 페루자와 로마를 거쳐 나폴리로 돌아갔고, 1414년 8월 6일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했다. 라디슬라오의 원정 당시에 굴복했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라디슬라오의 사망 소식을 듣자 곧바로 독립했다.

2.2.6. 조반나 2세

라디슬라오는 사망 당시에 사생아를 몇 명 뒀지만 적법한 후계자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누나 조반나 2세가 나폴리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나폴리 왕실 관료와 귀족들은 일전에 나폴리 왕위를 놓고 라디슬라오와 내전을 벌였던 루이지 2세가 또다시 나폴리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여왕에게 조속히 재혼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조반나 2세는 고심 끝에 라마르슈 백작 장 1세의 장남인 라마르슈 백작 자크 2세와 결혼하기로 했고, 결혼식은 1415년 8월 10일에 거행되었다. 조반나 2세는 남편에게 타란토 공작과 칼라브리아 공작의 칭호를 부여했지만, 왕권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자크 2세는 여왕에게 끌려다니는 남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폴리에 도착하자마자 여왕의 애인인 판돌펠로를 체포한 뒤 그해 9월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데려온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나폴리를 통제했으며, 여왕을 별궁에 가두고 자신을 나폴리 왕으로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나중에 별궁에서 겨우 빠져나온 조반나 2세는 나폴리에 오자마자 오만하게 행동하는 남편에게 격분했고, 나폴리 귀족들 역시 자기들을 몰아내고 프랑스 귀족들을 정계의 핵심으로 삼아버린 것에 불만을 품었다. 1416년 9월, 조반나 2세로부터 은밀한 지시를 받은 귀족들은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제압된 자크 2세는 프랑스 측근들을 돌려보내고 작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조반나 2세는 조반니 카라촐로(Giovanni Caracciolo. 조반니의 애칭인 '잔니(Gianni)' 카라촐로로 불리기도 한다.)를 새 애인으로 두고, 그를 시니스칼코(siniscalco: 재상), 아벨리노 백작, 카푸아, 멜피, 베노사 등 캄파니아와 풀리아의 여러 영지의 영주로 삼았다. 1418년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된 자크 2세는 나폴리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고, 1438년 사망할 때까지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었다.

1419년 10월 19일, 조반나 2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해 나폴리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주권자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교황 마르티노 5세와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교황은 명목상 나폴리 왕국의 주권자였는데, 마르티노 5세는 이 점을 근거삼아 교황군을 재건하기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반나 2세는 조반니 카라촐로의 부추김을 받고 이를 거부했다. 마르티노 5세는 이에 분노해 앙주 공작 루이 3세를 나폴리 왕으로 삼아 나폴리를 공격하게 했다. 루이 3세는 라디슬라오와 나폴리 왕위를 놓고 전쟁을 치른 루이 2세의 아들이었다.

1420년, 루이 3세는 캄파니아 해안에 상륙한 뒤 나폴리로 진군했다. 조반나 2세는 이에 맞섰지만 여의치 않자 1421년 아라곤 왕국-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알폰소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코르시카 섬에서 보니파치오 시를 포위 공격하던 중이던 알폰소 5세는 보니파치오 시 포위를 풀고 나폴리로 진군해 나폴리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루이 3세를 몰아냈다. 당시 아들이 없었던 조반나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칼라브리아 공작에 지명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5세가 나폴리 국왕을 자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알폰소 5세는 아라곤 통치를 아내 마리아에게 위임한 뒤 나폴리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용병대장으로 고용해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3세와 밀라노 귀족 아텐돌로 스포르차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했다.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스포르차를 지원하자, 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받들기로 하고, 당시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파문된 뒤 입지가 위태롭던 베네딕토 13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얼마 후 전세가 불리해진 스포르차 가문이 루이 3세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하면서, 알폰소 5세의 입지는 굳건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알폰소 5세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조반나 2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을 철회하려 했다. 알폰소 5세는 낌새를 눈치채고 1423년 5월 잔니 카라촐로를 체포하고 여왕 역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텐돌로 스포르차에게 아라곤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스포르차는 군사를 일으켜 아라곤군을 기습공격해 크게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의 요새인 카스텔 누오보로 피신했다. 그 후 조반나 2세는 카스텔 누오보를 포위 공격했지만 아라곤군의 반격으로 패배한 뒤 아베르사 요새로 퇴각했고,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들였던 것을 취소하고 앙주의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알폰소 5세는 라퀼라에서 조반나 2세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던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카스티야 내전이 동생 후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일단 귀국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하던 중 루이 3세가 소유한 마르세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1423년 말, 제노바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반 알폰소 동맹에 가담한 뒤 남부 티레니아 해로 진군해 가에타, 프로키다, 카스텔람마레, 소렌토를 공략했다. 형 알폰소 5세를 대신하여 나폴리 내 아라곤 영토를 지키고 있던 페드로는 1424년 제노바와 나폴리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카스텔 누오보에서 저항했지만, 1424년 8월 요새가 함락되려 하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아라곤군은 나폴리 왕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아라곤 왕국군을 축출한 후, 후계자로 지명된 루이 3세는 왕위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칼라브리아 영지에서 살았다. 여왕은 나폴리에서 통치를 행사했지만, 실권은 잔니 카라촐로에게 있었다. 잔니 카라촐로의 통치 하에 한동안 평온했다. 그러나 애인의 권세가 점점 강해져 나중에는 왕위까지 노릴 기미가 보이자, 조반나 2세는 1432년 8월 19일 암살자들을 고용해 잔니 카라촐로를 카스텔 카푸아노 성채에서 처단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알폰소 5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시가 군사 동맹을 맺고 그를 압박해오자, 어쩔 수 없이 1433년 조반나 2세와 10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1434년 11월, 나폴리 왕이 곧 되는 듯했던 루이 3세가 코센차에서 병사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자신이 죽으면 나폴리 왕위를 루이 3세의 동생인 앙주의 르네에게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435년 2월 2일, 여왕은 62세의 나이로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카를루 1세 이래 153년간 나폴리 왕위를 이어가던 앙주 카페 왕조는 단절되었다.

2.3. 레나토 알폰소 1세의 전쟁

조반나 2세 사후 앙주 공작 루이 3세의 아들 르네가 레나토로서 나폴리 국왕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당시 르네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의 전쟁을 치르던 중 부르고뉴군에 사로잡힌 뒤 프랑스콩테의 돌(Dole) 성채에 감금되어 있어서 나폴리로 곧바로 갈 수 없었고, 아내 이자벨이 둘째 아들 루이와 함께 나폴리로 간 뒤 남편을 대신해서 왕국을 이끌었다.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나폴리 왕위를 가로채고자 전쟁을 단행했다. 이자벨은 앙주-로렌에서 데려온 병사들과 이탈리아에서 고용한 용병대와 함께 알폰소 5세에 맞서 싸웠다. 여기에 바리 공작 자코포 칼도라도 이자벨의 편에 서서 아라곤 왕국에 대항했다. 그러나 전세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1436년 2월 카푸아가 알폰소 5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1437년 2월 7일, 레나토는 여러 영지를 필리프 3세에게 넘겨주고 백상금 납부를 지속하며, 자신의 아들 장과 필리프 3세의 조카인 부르봉의 마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풀려났다. 그는 석방된 직후 로렌으로 돌아간 뒤 로렌과 바르의 관리를 두 명의 주교에게 맡겼으며, 장남 장을 칼라브리아의 지도자로 세웠다. 이후 1437년 7월에 샤를 7세가 거주하던 기엔의 여름 별궁으로 가서 왕을 알현했고, 앙투안 드 보데몽과 화해했다. 그해 11월에 장과 며느리 마리아와 함께 앙주 공국으로 가서 1437년 12월 7일 앙제 성에 입성했다. 이자벨은 남편에게 한시바삐 나폴리로 와서 알폰소 5세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레나토는 병력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출발을 미뤘다.

1438년 4월 15일, 레나토는 제노바로부터 7척의 함선을 고용한 뒤 그곳에 자기가 모집한 병력을 싣고 나폴리로 항해했다. 438년 5월 19일 나폴리에 도착한 그는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했다. 알폰소 5세는 1439년 9월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동생 페드로가 전사했다. 그 후 레나토가 이끄는 앙주 용병들이 맹공을 가하자 아라곤군은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1439년 11월 콜레 산니타 시를 포위 공격하던 자코모 칼도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칼도라의 아들 안토니오가 알폰소 5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레나토의 군세는 급격히 약해졌다.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해 아베르사, 살레르노, 베네벤토, 만프레도니아, 비톤토를 공략했다.

교황청은 1만 병력을 파견해 레나토를 도왔지만, 알폰소 5세는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비텔레스 추기경을 매수해 교황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1441년 11월 10일 나폴리를 포위한 아라곤군은 수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1442년 6월 2일 공략에 성공했다. 레나토는 주로 도피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에 입성한 뒤 나폴리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이래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왕국에 의해 통합되었다.

2.4. 트라스타마라 왕조

2.4.1. 알폰소 1세

경쟁자 레나토를 몰아내고 나폴리의 단독 군주가 된 알폰소 5세는 나폴리 왕 '알폰소 1세'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그는 마요르카의 건축가 기옘 사그레라(Guillem Sagrera)에게 카스텔 누오보 요새에 궁정을 세우게 한 뒤, 다시는 아라곤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폴리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또한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나폴리에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1443년 나폴리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카스텔 누오보 정문에 웅장한 개선문을 세웠다. 또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를 즐겨 읽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사를 매일 읽는 등 고전 문학을 탐독했다. 또한 시칠리아 최초의 대학인 시치랄레 스투디움 제네날레(Siciliae Studium Generale)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도 신경썼다. 그리고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조반니 폰타노(Giovanni Pontano), 안토니오 베카델리(Antonio Beccadelli) 등 인문주의자들을 보호하는 등 이탈리아 문인들을 후원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던 알바니아 지도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를 주목하고, 자신의 봉신으로 삼고 막대한 지원을 해줬다. 여기에 보스니아 공작 스테판 부치치 코사차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 그가 보스니아의 지배를 확고히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이렇듯 발칸 반도의 군소 세력을 봉신으로 끌여들이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장차 발칸 반도로 영역을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1454년 제노바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4년간의 전쟁을 치렀지만 승패가 쉽사리 가려지지 않자, 알폰소 1세는 1458년 6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해 제노바를 향한 공세에 착수하려 했다. 그러나 돌연 중병에 걸렸고, 6월 27일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했다. 동생 추안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아라곤,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고, 알폰소 1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 1세가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2.4.2. 페르디난도 1세

알폰소 1세는 생전에 사생아 페르디난도 1세가 탁월한 지성과 용맹을 갖추고 자신을 극진히 섬기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를 후계자로 삼고자 마음먹었다. 일찍부터 시칠리아 왕국군 사령관으로 선임해 전장에서 공적을 세우게 했고, 1440년 2월 17일에는 페르디난도를 자신의 친자식이자 나폴리 왕위 계승자로 선포했고, 1441년 1월 베네벤토에 소집한 회의에서 귀족들로부터 페르디난도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1443년 3월 산 리구오로 수도원에서 페르디난도에게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1443년 7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교령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다(Regnans in altissimis)>는 페르디난도가 나폴리 차기 국왕으로 선임되는 것을 용인했다. 1451년 즉위한 신임 교황 니콜라오 5세 역시 페르디난도의 즉위를 승인했다. 페르디난도는 1444년 코페르티노 백작 바르톨로뮤 '트리스탄' 드 클레르몽의 장녀이며 나폴리 전임 국왕 라디슬라오와 뤼지냥의 마리아의 손녀인 이자벨과 결혼했다. 1458년 6월 27일 제노바를 향한 원정에 착수하려던 아버지가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한 뒤, 나폴리 왕국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알폰소 1세 생전에는 페르디난도의 나폴리 왕 즉위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던 이들은 정작 페르디난도가 등극하자마자 "사생아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문제삼기 시작했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1458년 7월 12일 칙서에서 페르디난도를 "무어인 하인의 아들"이라고 깎아내리며 나폴리의 왕좌가 비었으니 새 국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갈리스토 3세는 한 달 후인 1458년 8월에 세상을 떠났고, 새 교황 비오 2세는 페르디난도를 왕으로 인정하고 1459년 2월 4일 바를레타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폴리 귀족들은 여전히 그의 집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타란토 공작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발초,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 크로토네 후작 안토니오 센텔레스, 아티 공작 지오시아 아쿠아비바, 컨버사노 백작 줄리아 안토니오 아쿠아비바는 아라곤-시칠리아 국왕 후안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나폴리로 와서 사생아를 쫓아내고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디난도는 그들의 동태를 눈치채고 투르코 치치넬로, 안토니오 달레산드로를 아라곤으로 보내 후안 2세에게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안 2세는 내심 나폴리 왕국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었지만, 카탈루냐, 아라곤, 나바라 등지에서 발발한 대규모 반란을 수습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어서 나폴리에 군대를 보낼 수는 없었기에 일단 페르디난도의 집권을 용인하기로 했다.

후안 2세가 요청에 응하지 않자, 귀족들은 로렌 공작이자 알폰소 5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나폴리 왕위를 잃어버린 레나토의 장남이었던 장 2세를 추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장 2세는 귀족들의 요청을 받고, 지금이야말로 아버지가 잃어버린 왕좌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1460년 마르세유에서 대규모 함선을 이끌고 나폴리로 항해했다. 페르디난도는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전국의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렸지만 이에 응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많은 귀족들은 앞다퉈 장 2세에게 투항했다. 이때 타란토 공국, 시트라 공국,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크로토네 일대가 장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장 2세는 내친김에 나폴리를 공략하려 했지만, 다른 곳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나폴리 수비를 맡은 이자벨 왕비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는 아예 페르디난도를 죽이고 수급을 장 2세에게 바쳐서 신임을 독차지하기로 마음먹고 페르디난도를 함정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는 페르디난도의 스승이었던 카탈루냐 출신 인문학자 그레고리오 코레글리아에게 국왕과 화해하고 그의 은총을 빌고 싶으니 국왕과 대면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춘 귀족 중 한 명인 로사노 공작이 귀순하겠다고 제안한 것에 반색하며 1460년 5월 29일 테아노 근처 토리첼라에 있느 작은 교회에서 만나기로 각각 2명의 동반자를 데리고 만나기로 했다. 이후 마리노와 만난 페르디난도는 프랑스군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며 좀더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마리노의 제안을 수상하게 여기다가, 마리노와 함께 온 데이포보가 손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보고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었다. 마리노와 데이포보는 페르디난도의 압도적인 용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부상을 입은 채 도주했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장 2세의 프랑스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사르노에서 맞붙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고, 적에게 포위되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 이때 조수에(Giosuè)와 마리오 롱고(Marino Longo)가 이끄는 카바 데 티레니(Cava de' Tirreni) 시 의용병 및 징집병 부대가 전장에 도착한 뒤 산을 올라 프랑스군을 요격하자, 장 2세는 새로운 적의 출현에 놀라 물러섰다. 페르디난도는 그 덕분에 포위망을 뚫고 놀라를 통해 나폴리로 후퇴했다. 이후 로렌 공작이 나폴리 왕국을 삼키면 자기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페르디난도를 돕기로 마음먹고, 형제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와 조카 로베르토 산세베리노에게 병력을 맡겨 나폴리로 파견했다.

칼리초 백작 로베르토 산세베리노는 페르디난도에게 반란을 일으킨 마르시코 백작과 산세베리노 백작의 친척인 점을 살려 두 사람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왕자'라는 칭호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할 수 있는 등 많은 혜택을 주겠다는 페르디난도의 제안에 따라 페르디난도를 지지하기로 했다. 여기에 교황령 북쪽과 남쪽에 단일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비오 2세 역시 페르디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자, 장 2세를 지지했던 나폴리 귀족들 상당수가 페르디난도 쪽으로 도로 귀순했다. 게다가 알폰소 5세의 봉신을 자처한 이래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던 알바니아의 군주 제르지 카스트리오티가 페르디난도를 돕기 위해 수많은 수송선과 700명의 기병, 1,000명의 베테랑 보병을 파견하자, 전세는 페르디난도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1462년 8월 18일, 페르디난도와 알레산드로 스포르차는 트로이아 전투에서 로렌 공작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463년 9월 세사에서 포위된 타란토와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는 항복 후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고, 장 2세는 이스키아 섬으로 피신했다. 그해 11월 16일, 가장 강력한 반 페르디난도 세력 지도자였던 타란토 공작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바조가 병사하면서, 반란군은 지리멸렬해졌다. 페르디난도는 장 2세가 도망친 이스키아 섬을 제외한 왕국 전역을 회복한 뒤 아풀리아 영지를 왕비 이자벨에게 양도했다.

장 2세가 이스키아 섬에서 버티면서 나폴리 만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자, 페르디난도는 아라곤 국왕 후안 2세에게 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464년 봄 카탈루냐 함대가 이스키아 섬으로 다가와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자,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장 2세는 2척의 갤리선과 함께 프로방스로 달아났다. 니콜라 디 캄포바소 백작, 자코모 갈레오타, 로팔로 델 주디체 등이 장 2세를 따라 망명했다. 페르디난도는 카탈루냐 함대에 막대한 보물을 하사하고 돌려보냈고, 장 2세가 아버지 레나토의 지시에 따라 아라곤으로 쳐들어가자 나폴리 민병대를 아라곤으로 보내 후안 2세를 도왔다.

이리하여 로렌 공작의 침략과 귀족들의 반란을 극복한 페르디난도는 왕국이 전쟁의 참화로부터 회복될 시간을 벌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했다. 장남 알폰소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딸 이폴리타 마리아 스포르차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큰딸 엘레오노라를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결혼시켰으며, 작은딸 베아트리체를 헝가리 왕국의 국왕 마차시 1세와 결혼시켰다. 1465년 3월 30일 장 2세의 침략으로부터 나폴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등 페르디난도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자식을 6명이나 낳아줬던 왕비 이자벨이 사망하자, 그는 장례식을 정성껏 치르고 유해를 산 피에트로 마르티레 성당에 안장했다. 이후 12년간 홀아비로 지내다가 1477년 후안 2세의 딸인 후안나와 재혼했다.

한편, 페르디난도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숙청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한 뒤 자신에게 충성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또한 귀족들이 언제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기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평민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1466년 농부들이 그들의 생산물을 지역 영주에게 정해진 가격에 팔아야 하는 의무에서 해방시켜, 귀족들이 이전보다 비싼 값을 치르게 만들었다. 또한 국가 소유의 도시들에게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도시 귀족들에게 특혜를 줌으로써 기존의 봉건 귀족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도구로 키웠다.

또한 토지를 사재기하는 귀족들을 견제하고자 농부들이 그 토지에서 나는 과실을 판매하는 것에 대해 귀족이 간섭할 수 없게 했으며, 1469년에는 교회의 면책권을 재조사해 실제로 예배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만 면책권을 맡겼다. 또한 산업, 특히 비단과 양모 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여 왕국의 국력 증진에 보탬이 되게 했다. 페르디난도의 이같은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어,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나폴리 왕국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국고는 충실해졌다. 그는 재원이 풍족해지자 예술가, 인문학자, 철학자, 법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그는 나폴리에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실시하고 주변 지역의 실업자들을 나폴리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고, 나폴리는 이를 통해 남부 이탈리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그는 나폴리 대학교에 막대한 지원을 했으며, 명망높은 교수들을 초빙해 학생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게 했다.

1464년 8월 19일, 페르디난도를 성심껏 도왔던 교황 비오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새 교황에 즉위한 바오로 2세는 페르디난도에게 그동안 보내지 않은 십일조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페르디난도는 지난 전쟁으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피폐해져서 돈을 지불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칠리아는 삼촌인 후안 2세가 지배하고 있고 자신은 나폴리만 다스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이 한 나라였을 때 부과된 십일조 전부를 자신만 지불하는 것은 부당하니 감면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바오로 2세는 그가 전임 교황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해야 한다며 묵살했다. 여기에 알폰소 5세가 교황청에 양도했던 영토를 돌려달라는 페르디난도의 요구에 교황청이 난색을 표하면서, 양자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1471년 7월 26일 바오로 2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 식스토 4세가 교황에 올랐다. 나폴리 왕국과 갈등을 벌여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식스토 4세는 1475년 나폴리 왕국에 인구 조사를 벌이는 것을 중단하면서도 매년 잘 손질된 백마를 로마에 보내게 했다. 페르디난도는 이에 보답하고자 소라 공국을 식스토 4세의 친족인 레오나르도 델라 로베레에게 양도했다.

페르디난도는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 피렌체, 밀라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1470년 3월 밀라노 공국이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동맹을 맺으면서 왕국의 안위가 위험해지자, 그는 밀라노를 지배하는 스포르차 가문이 본래는 제노바 출신인 것에 많은 밀라노인들이 반감을 품고 있다는 점을 활용해 주빈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1471년에는 잉글랜드 왕국, 부르고뉴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에게 해에서 위협을 가하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아드리아 해 에게 해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는 베네치아를 질시한 식스토 4세의 권고에 따라 1473년 베네치아와 동맹을 끊었고, 1474년 11월 2일 밀라노, 피렌체 등이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자 1475년 1월 교황령과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147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앙주를 차지하면서 나폴리 왕위에 대한 앙주 공국의 권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조카딸 안 드 사보이아와 페르디난도의 아들 페데리코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프랑스의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우려한 페르디난도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1476년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죽자, 페르디난도는 교황 식스토 4세와 손잡고 밀라노 공국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다. 그는 제노바와 스위스를 선동해 밀라노를 공격하게 했고, 밀라노의 지배를 받던 제노바와 사보나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여기에 더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쿠니쿤데를 페데리코와 결혼시킴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북이탈리아 공략을 도와주기를 희망했지만,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이탈리아 정세에 뛰어들기를 꺼린 프리드리히 3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제노바 공화국은 페르디난도의 지원에 힘입어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에서 독립했지만, 사보나는 독립에 실패했다. 여기에 밀라노가 스위스의 공세를 어렵사리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교황 식스토 4세 마저 입장을 바꿔 밀라노 편을 들어버리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앙심을 품은 페르디난도는 교황령에 속한 치타 디 카스텔로에서 교황을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니콜로 비텔리(Niccolò Vitelli)를 은밀히 지원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설 동맹을 찾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메흐메트 2세는 골치거리인 베네치아를 견제할 동맹을 찾은 것에 기뻐하며 나폴리 상인들이 시리아, 이집트, 튀니지 등지에서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줬다. 또한 페르디난도는 1478년 루이 11세의 제안에 따라 페데리코와 안 드 사보이아를 결혼시켰다.

1478년 4월 26일, 파치 가문이 교황 식스토 4세, 살비아티 가문, 그리고 리아리오 가문과 함께 피렌체의 통치 가문으로 군림하던 메디치 가문을 처단하기 위해 벌인 '파치 음모(Congiura dei Pazzi)'가 발발했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이때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피렌체를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그의 동생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살해되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이 사건에 분노해 공모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즉결 심판을 통해 교수형에 처했는데, 그 과정에서 식스토 4세의 심복이자 피사 대주교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시민들에 의해 효수되었다. 식스토 4세는 이에 분노해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시, 토스카나 전역에 파문을 선고하고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여기에 더해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고, 피렌체 정부에게 로렌초를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피렌체 시가 거부하자, 식스토 4세는 페르디난도 1세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에 전쟁을 선포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이 전쟁을 영토 확장의 기회로 보고 아들 알폰소에게 군대를 맡겨 피렌체를 공격하게 했다. 피렌체는 나폴리-교황 연합군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연전연패했고, 무역 활동이 끊겨 경제가 쇠퇴하고 역병마저 창궐해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자 시민들이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에 로렌초는 1479년 12월 단신으로 나폴리로 가서 페르디난도 1세와 평화 협약을 교섭했다. 그는 교황이 바뀔 때마다 교황청의 정책이 계속 바뀌니 그들을 신뢰할 수 없으며, 피렌체 만큼 나폴리 왕국에 가치있는 우방이 없다는 점 등을 들며 페르디난도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처음에는 로렌초의 주장을 거들떠 보지 않고 피렌체 공략을 이어갔지만, 3개월 만에 마음을 바꿔먹고 "전쟁 배상금을 나폴리 왕국에 지불하고 파치 가문 인사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삭스토 1세는 이에 분노해 전쟁 지속을 천명했지만, 나폴리가 이탈한 상황에서 피렌체를 꺾을 길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어쩔 수 없이 피렌체에 대한 성무금지령을 철회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마지막 군주 레오나르도 3세는 1477년 페르디난도의 조카 프란체스카 마르자노와 결혼했다. 그는 이를 통해 나폴리의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페르디난도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나폴리의 영향력이 자칸토스 제도에 미치기를 바라지 않았던 베네치아의 반감만 사, 이후로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1479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상실하고 나폴리로 망명한 레오나르도 3세는 페르디난도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칼라브리아의 브라이티코와 칼리메라를 영지로 부여받았다. 하지만 자칸토스 제도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480년, 메흐메트 2세가 파견한 오스만군이 오트란토 시를 기습 공격해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페르디난도는 급히 브린디시를 요새화하여 오스만군의 북상을 저지한 뒤 유럽의 모든 군주들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한편 피렌체에게 일전의 전쟁에서 빼앗아갔던 모든 영토를 돌려주는 대가로 자신을 도울 병력을 보내게 했다. 얼마 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장인을 돕기 위해 파견한 1,7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이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교황 역시 22척의 제노바 갤리선과 함께 추기경을 파견했으며, 피렌체에 내렸던 파문을 취소하고 오스만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 기독교인간의 전쟁을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오스만군은 북상을 시도했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치자 오트란토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다가 1481년 5월 3일 메흐메트 2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철수했다. 이후 페르디난도는 레오나르도 3세에게 12,000두카트의 돈을 빌려줘서 자칸토스 섬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공략하게 했으며, 1483년 로도스가 바예지트 2세가 파견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즉시 구원군을 보내 그들을 격퇴했다. 로도스를 지키던 구호 기사단은 자신들을 구원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페르디난도를 기사단장으로 추대했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맹을 맺고 페르디난도의 사위인 페라리 공작 에스콜레 데스테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했다. 페르디난도는 오스만군의 침략으로 벌어진 오트란토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컸기에 페라라 공작을 섣불리 돕지 못했다. 그러다 페라라 공국의 영토 대부분이 교황-베네치아 연합군에게 짓밟히자, 베네치아와 교황령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위를 돕기로 했다. 나폴리 왕국이 페라라를 도우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교황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세는 점점 약해졌다. 이에 삭스토 4세는 1483년 돌연 방침을 바꿔 나폴리와 평화 협약을 맺고 베네치아인들에게 그들이 점령한 모든 것을 페라라 공작에게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베네치아인들이 거부하자, 교황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며 전쟁을 이어갔다.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를 굴복시켜야 전쟁이 끝날 것임을 깨닫고 교황을 설득해 베네치아인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이탈리아 각 도시들에게 베네치아 상인들을 추방하라고 권고하게 했다. 이후 아들 페데리코에게 50척의 갤리선을 줘서 안코나 해안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는 거센 반격을 해 이들을 격파했고, 1484년 봄 로렌 공작 르네 2세가 지휘하는 120명의 프랑스 기사와 베네치아 보병대로 이뤄진 군대를 바다를 거쳐 이동시켜 갈리폴리, 나르데, 모노폴리 등 오트란토 일대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공략했다.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를 무력으로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484년 8월 27일 베네치아에 평화를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나폴리 왕국이 빼앗아간 베네치아의 영토와 베네치아인들이 빼앗아간 오트란토 일대의 영토를 맞교환하며, 페라라는 일전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돌려받는 대신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1484년 8월 12일 삭스토 4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에 즉위한 인노첸시오 8세는 전임 교황이 베네치아에 선고했던 파문을 해제한 뒤 나폴리 왕국에서 인구 조사를 벌여서 인두세를 거두려 했다. 1485년 6월 29일, 페르디난도는 안토니오 달레산드로를 로마에 보내 교황에게 백마를 바쳤지만, 교황은 이를 받기를 거부했다. 교황이 페르디난도와 마찰을 벌이자, 페르디난도의 귀족 억압 정책에 불만을 품어왔던 귀족들은 교황청에 전령을 보내 교황청이 나폴리 왕국에서 인구 조사를 벌이도록 할 의향이 있으니 자신들이 페르디난도를 축출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게 로렌 공작 르네 2세를 보내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얼마 후, 귀족들의 음모를 포착한 칼라브리아 공작이자 페르디난도의 장남 알폰소가 놀라 백작령을 기습 공략해 놀라 백작의 아내와 두 자녀를 나폴리에 있는 카스텔 누오보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자, 다른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것을 두려워해 곧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페르디난도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협상하기 위해 차남 페데리코를 사절로 보냈다. 페데리코는 반란군의 본거지인 살레르노에 들어가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귀족들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알폰소를 몰아내고 왕위 후계자가 되라고 꼬드겼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모든 자연법과 아버지의 뜻, 그리고 동생으로서의 도리를 볼 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귀족들은 페데리코를 반란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감옥에 가둔 뒤 교황의 깃발을 성루에 내걸었다.

그제야 귀족들의 반란의 배후에 교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페르디난도는 몹시 격분해 알폰소에게 대규모 병력을 주고 교황령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알폰소는 교황령과의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로마에 사절을 보내 "나는 교황과 사도의 순종적인 아들이므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반역자들의 올가미에서 왕국을 해방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라며,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나폴리 왕국의 대주교, 주교, 성직자들에게 15일 이내에 나폴리로 와서 왕을 알현하고 담당 교구에 거주하라고 덧붙였다. 로마에 있던 살레르노 대주교와 밀레투스 주교, 테아노 주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수입을 박탈당했다. 페르디난도는 또다른 군대를 모아 조카이자 알폰소의 장남인 카푸아 공작 페르디난도에게 맡기고 알폰소를 돕게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나폴리 왕국군이 금방이라도 교황령으로 쳐들어 오려 하자 겁에 질려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교황청을 돕기를 거부했고, 그 사이에 나폴리군이 교황령에 쳐들어가 교황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 뒤 로마를 포위했다. 인노첸시오 8세는 3개월간 로마에 꼼짝없이 틀어박혀 있다가 르노 2세는 올 기미가 없고 베네치아도 돕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나폴리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나폴리 귀족들에게 페르디난도와 화해하라고 지시했다. 이리하여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의 중재하에 나폴리 국왕과 교황-나폴리 귀족들간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페르디난도는 로마 교황을 인정하고 그에게 일정한 교회수입과 십일조를 지불하며, 귀족들을 괴롭히는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 대신 교황은 나폴리 왕국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귀족들은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귀족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페르디난도는 살레르노 백작의 아들인 마르코와 자신의 조카인 아말피 공작의 딸과의 결혼식 행사를 카스텔 누오보 성당에서 열게 한 뒤,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모조리 체포한 뒤 모든 명예와 직위를 박탈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 장남 알폰소의 주관하에 모든 시신을 자루에 담은 뒤 바다에 내던졌다. 이 사건이 나중에 유럽 각지에 알려지자, 왕이 약속을 위반한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페르디난도와 알폰소는 귀족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치를 내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노첸시오 8세는 샤를 8세에게 나폴리 왕국을 침략하라고 촉구했지만, 당시 샤를 8세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를 중심으로 뭉친 귀족들의 반란에 시달렸기 때문에 나폴리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한편, 페르난도 2세는 자기가 중재한 평화 협정을 위반한 것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이를 빌미삼아 나폴리 왕국을 집어삼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페르디난도는 조반니 나쿠클레리오를 바르셀로나에 보내 협약을 위반한 것에 사과하면서, 알폰소의 장남 페르디난도와 페르난도 2세의 딸들 중 한 명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양국간의 협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아라곤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토후국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나폴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나폴리 왕국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1493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밀라노 공작이 되기 위해 나폴리 왕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에 따라 나폴리 왕국을 향한 원정을 준비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페르디난도는 프랑스 왕국군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오면 장차 나폴리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 여기고 이탈리아 각국의 군주들에게 하나로 뭉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나폴리 왕국의 앞날을 근심하다가 1494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2.4.3. 이탈리아 전쟁

페르디난도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알폰소 2세는 여동생 이사벨라의 남편이자 밀라노 공작인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에 맞서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루도비코의 영지인 바리 시를 공략했다. 이에 루도비코는 샤를 8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샤를 8세는 1494년 9월 프랑스군 25,000명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프랑스군은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로마를 지나친 뒤 나폴리 왕국을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495년 초, 샤를 8세는 포르투 베네레에서 알폰소 2세의 동생 페데리코가 이끄는 피렌체-나폴리 연합 함대를 격파한 뒤 나폴리로 접근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알폰소 2세는 이 무렵 자신에게 죽은 희생자들이 꿈속에 나타나 저주를 퍼붓자 심한 두려움에 떨었고, 나폴리로 접근하는 프랑스군을 막을 의지가 없었다. 결국 1495년 1월 23일 아들 페르디난도 2세에게 양위한 뒤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페르디난도 2세는 샤를 8세에게 누가 나폴리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판가름하자며 결투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나폴리 귀족들이 앞다퉈 프랑스군에 귀순하면서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나폴리 시민들을 불러모아 곧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올 테니 프랑스인들의 압제를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당부한 뒤 일가족과 4,000명의 스위스 용병, 14척의 겔리선을 이끌고 이스키야 섬으로 피신했다.

이스키야 섬에 도착한 페르디난도 2세는 그 곳에 수비대장 유스토 델라 칸디다(Justo della Candida)가 성채를 굳게 닫아서 먼저 도착한 가족들을 연금하고 자신의 입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내 약혼자 조반나만이라도 데리고 나올 수 있도록 나 혼자 성채에 들어가게 해달라"라고 요청했다. 유스토는 그가 혼자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원하는 대로 해줬다. 페르디난도 2세는 성안에 들어가서 유스토와 마주치자마자 단검을 뽑고 달려들어 유스토를 찔러 죽인 뒤 수급을 베고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 이리하여 가족과 성채, 수비대를 되찾은 그는 이스키야 요새 수비를 굳건히 했다.

한편, 샤를 8세는 1495년 2월 22일 나폴리에 입성한 뒤 '카를로 4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페르디난도 2세의 삼촌인 페데리코를 불러서 섬에서 농성중인 조카를 설득해 나폴리 왕국의 계승권을 포기하게 한다면 프랑스에 있는 많은 영지와 보물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그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왕으로서 살고 죽기를 서원했다"라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샤를 8세는 설득을 포기하고 이스키야 섬을 공격했지만, 페르디난도 2세가 굳건히 버텨서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폴리 귀족들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프랑스 귀족들을 고위 관직에 선임했으며, 나폴리를 약탈했다. 이에 프랑스군의 기세가 두려워서 항복했던 나폴리 귀족과 백성들은 점차 프랑스 국왕에게 불만을 품었다.

1495년 3월,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군이 나폴리까지 밀고 내려와 약탈을 자행한 것에 깊은 경계심을 품고 '베네치아 동맹'을 결성했다. 여기에 샤를 8세가 밀라노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루도비코 스포르차 역시 가담했다. 1495년 5월 초, 제노바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라팔로 해전에서 궤멸시켰다. 이로 인해 섬 공략에 필요한 중포와 전쟁 물자 등을 가득실은 수송선들이 모조리 침몰해버렸고, 수송로는 모조리 끊겨버렸다. 이에 샤를 8세는 길베르 드 몽펜시에, 버나드 스튜어트 등이 인솔하는 주둔군을 나폴리에 남긴 채 프랑스로 돌아가고자 북상했고, 귀국로를 가로막는 동맹군을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가까스로 격파한 뒤 프랑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매독이 창궐해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악재를 겪었다.

한편, 페르디난도 2세는 이스키야에서 메시나로 향한 뒤 시칠리아와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스페인 장군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600명의 창기병과 1,500명의 보병대가 스페인에서 메시나로 이동했다. 페르디난도 2세는 1495년 5월 24일 곤살로와 합세한 뒤 칼라브리아로 무혈 입성한 후 레지오로 진출했다. 이후 1495년 6월 28일 세미나라에서 샤를 8세가 남겨둔 프랑스군과 격돌했다. 이때 곤살로는 적의 기세가 예상보다 드높은 걸 보고 전투를 미루려 했지만, 페르디난도 2세는 "저놈들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을 백성들을 한시바삐 구해야 한다"라며 전투를 속행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어진 전투에서 히네테, 로델레로 등 경장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스페인군 장다르메 스위스 용병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군에게 대패했고, 페르디난도 2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프랑스의 압제에 분노한 민중들이 몰려든 덕분에 군세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곤살로와 함께 프랑스 주둔군의 보급로를 틀어막고 유격전을 전개한 결과 칼라브리아를 조금씩 탈환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에 복무하던 많은 용병들은 급료를 받지 못하자 무단 이탈했고, 나머지 병사들은 적의 유격 전술에 시달린 끝에 하나둘씩 귀순했다. 1495년 7월 7일, 프랑스군을 나폴리에서 축출한 페르디난도 2세는 나폴리에 입성해 백성들의 진심어린 환영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군을 나폴리 왕국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공세를 이어가다가 1496년 8월 말에 소마 베수비아나에서 조부 페르디난도 1세와 아라곤의 후아나 사이의 딸이자 자신의 나이 어린 이모인 조반나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당시 왕국에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1496년 9월 7일 소마 베수비아나에서 병사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알폰소 2세의 동생 페데리코가 왕위에 올랐다.

페데리코는 샤를 8세가 또다시 나폴리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여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1500년 11월 11일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그라나다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를 포함한 북쪽의 아브루치, 캄파냐를 영유하고,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은 남쪽의 칼라브리아, 풀리아를 점유하기로 했다.

1501년 프랑스 왕국군이 나폴리 왕국의 변경지대에 접근하자, 그라나다 비밀 협약이 맺어진 것을 까맣게 몰랐던 페데리코는 페르난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페르난도 2세가 즉시 함대를 이끌고 오자, 페데리코는 칼라브리아 요새들을 개방했다. 그러나 그라나다 협약 내용이 곧 공개되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나폴리 왕국을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협공하자, 친족의 배신에 깊은 충격을 받은 페데리코는 프랑스군에 귀순한 뒤 메인 백작에 선임된 후 프랑스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이 나폴리 왕국을 양분하는 형태로 종결되는 듯했지만, 1503년 페르난도 2세가 곤살로 데 코르도바 장군을 앞세워 프랑스군을 요격해 체라놀라 전투,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결국 루이 12세는 1504년 1월 나폴리 왕국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게 양도하되 밀라노 공국의 소유를 인정받는 내용의 리옹 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리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했다. 이 무렵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자 페르난도 2세의 아내였던 이사벨 1세가 사망하고 그녀를 이은 딸 후아나를 섭정하여 사실상 스페인 전역의 단독 통치자가 된 페르난도 2세는 나폴리 왕관을 스페인 왕관에 병합하고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부왕령으로 삼았다.

2.5. 스페인의 지배

이탈리아 전쟁 후, 나폴리와 남부 이탈리아는 시칠리아와 함께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나폴리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휩쓸리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왕국에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동력을 제공했다. 스페인 제국은 유럽과 신대륙, 태평양, 대서양, 지중해 등지에서 전쟁을 치르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국방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폴리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고 수많은 장정을 징집했다. 여기에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에 주둔한 스페인 수비대의 주둔 비용을 매년 지불해야 했다. 이로 인해 당시 나폴리 왕국 수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800,000 두카트가 매년 마드리드로 보내졌다.

이러한 부담은 1635년부터 1659년까지 이어진 프랑스-스페인 전쟁 시기에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불어났다. 나폴리는 1630년부터 1643년까지 매년 10,000명의 병력과 1,000마리의 말을 지원했고, 전쟁 노력을 위한 연간 1백만 두카트의 보조금과 왕국의 수비대와 해군을 위한 더 많은 자금과 병사들을 제공했다. 또한 세금은 3배로 늘어났고, 공공 부채는 5배로 늘었으며, 왕국 수입의 57%가 이자 지불에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나폴리 왕국의 경제는 망가졌고, 빈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다만 나폴리 귀족들은 스페인 정부로부터 방대한 자치권을 부여받아 자기 영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스페인의 지배에 만족했다.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나폴리 왕국은 라슈타트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6세에 넘겨졌다. 하지만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때 스페인군이 도로 빼앗았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아들 파르마 공작 카를로가 175년부터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임되었다. 1759년 카를로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선임된 뒤, 그의 아들 페르디난도 1세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한창이던 1798년 프랑스군이 나폴리로 쳐들어오자,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를 떠나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로 피신했다. 1799년 나폴리 성직자들의 선동을 받은 농민들이 반혁명을 일으켜 프랑스군이 세운 파르테노페아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페르디난도 1세를 복위시켰지만, 프랑스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1801년 시칠리아로 재차 피신했다. 그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매부 조아킴 뮈라가 잇따라 나폴리 국왕이 되었다가,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페르디난도 1세가 나폴리에 귀환했다. 1816년 12월,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정식으로 통합해 양시칠리아 왕국을 수립했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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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주 왕조
카를로 1세 카를로 2세 로베르토 조반나 1세 카를로 3세
루이지 1세
앙주 왕조 발루아앙주 왕조 트라스타마라 왕조
라디슬라오 조반나 2세 레나토 알폰소 1세 페르디난도 1세
발루아앙주 왕조
루이지 2세
트라스타마라 왕조 발루아오를레앙 왕조 트라스타마라 왕조
알폰소 2세 페르디난도 2세 페데리코 루이지 2세 페르디난도 3세
트라스타마라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
조반나 3세 필리포 2세 필리포 3세 카를로 5세
압스부르고 왕조
카를로 4세 필리포 1세
보르본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보르본 왕조 보나파르트 왕조
필리포 4세 카를로 6세 카를로 7세 페르디난도 4세 주세페
뮈라 왕조 보르본 왕조
조아키노 1세 페르디난도 4세
시칠리아 국왕 · 양시칠리아 국왕 }}}}}}}}}

4. 관련 문서



[1] 나폴리 왕국의 공식 명칭은 처음에는 시칠리아 왕국이었다가 1442년에 [2] 국기와 국장 모두 아라곤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던 시절의 것이다. [3]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기이기도 하다. [4] 등대 옆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명칭은 1442년 아라곤의 알리폰소 5세가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위에 오르면서 공식화한다. [5] 트리나크리아 왕국은 비공식적으로 시칠리아 왕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했고, 알리폰소 5세 치하에서 공식적으로 등대 너머의 시칠리아 왕국(Regnum Siciliae ultra Pharum)으로 공식 명칭이 정해진다. [6] 조반나 1세의 여동생 마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다. [7] 이후 조반나 1세의 네번째 남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