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AD3F9><colcolor=#000000> 에노 여백작 에노의 자클린 Jacqueline de Haina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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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자클린 드 바비에르 (Jacqueline de Bavière) | |
출생 | 1401년 7월 15일 | |
에노 백국 케누아 | ||
사망 | 1436년 10월 8일 (향년 35세) | |
에노 백국 테일링엔 성 | ||
배우자 | 프랑스의 도팽 장 (1414년 결혼/1417년 사망) | |
브라반트 공작 장 4세 (1418년 결혼/1422년 무효화) | ||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 (1423년 결혼/1428년 무효화) | ||
브랑크 반 보르셀렌 (1434년 결혼) | ||
아버지 | 빌헬름 2세 | |
어머니 |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 |
직위 |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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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왕자비,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지키기 위해 삼촌 요한 3세, 사촌 선량공 필리프를 상대로 사력을 다해 맞섰지만 끝내 패배했다.2. 생애
1401년 7월 15일 에노 백국 케누아에서 니더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 빌헬름 2세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딸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케누아 성에서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1406년 6월 2일 콩피에뉴에서 5살의 나이에 당시 세 살이었던 장 드 투렌과 약혼했다. 약혼식이 끝난 뒤, 자클린과 장은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의 보호 아래 발랑시엔으로 돌아간 뒤 몽스로 이동했다. 이후 프랑스 왕국은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전이 한창 벌어졌지만, 그들은 여기에 휘말리지 않고 케누아에서 즐거운 삶을 보냈다.1411년 4월 22일, 교황으로부터 친족 관계인 장과 자클린의 결혼을 승인하는 특별 허가증이 발부되었다. 1413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장의 결혼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는 서신을 에노 백작 빌헬름 2세에게 보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의 직할지 중 하나인 퐁티외 백국을 지참금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결혼은 1414년경 상리스 평화 협약이 논의되는 중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1415년 12월 18일, 장의 형이자 샤를 6세의 후계자였던 도팽 루이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프랑스 도팽이 된 장은 1417년 1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보호를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해 4월 4일 콩피에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아르마냑파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머리와 목에 난 종양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한때 프랑스 왕비가 될 뻔했던 자클린은 미망인이 된 채 에노로 돌아왔다. 몇 주 후인 1417년 5월 31일, 아버지 빌헬름 2세가 개에게 물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여성 계승이 불가능하지 않았던 에노 의회는 1417년 6월 13일 자클린을 에노 여백작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홀란트와 제일란트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갈고리파(Hoeken)는 자클린을 지지했지만, 대구파(Kabeljauwen)는 자클린의 삼촌인 요한 3세를 지지했다. 요한 3세는 1389년부터 리에주 주교였지만, 사제로 서품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슈트라우빙을 관리했으며, 바이에른은 살리카법으로 남성 상속만 인정했기 때문에 빌헬름 2세가 죽자마자 리에주 주교에서 사임하고 니더바이에른 공작으로 즉위했다.
자클린은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조언에 따라 삼촌에게 "에노 영지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수여하는 것으로 달래려 했지만, 요한 3세는 오히려 그녀의 수중에 넘어간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국까지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이 기회에 저지대 국가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룩셈부르크 왕조의 독일왕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고 에노 침공을 준비했다. 자클린은 이에 대응해 브라반트 공작 장 4세 드 브라반트와 결혼한 뒤 남편의 지원을 받으며 항전하기로 했다. 자클린과 장 4세의 약혼은 빌헬름이 죽은 지 두 달 뒤인 7월 31일에 이뤄졌다. 두 사람은 친족 관계였기 때문에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1417년 12월 교황이 승인을 내렸지만 지기스문트를 포함한 자클린의 정적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에 반대했고 1418년 1월에 취소되었다.
그러는 사이, 요한 3세는 군대를 일으켜 에노로 진격했다. 자클린은 갈고리파의 지원을 받고 군대를 일으켜 고르쿰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얼마 후, 홀란트의 중요한 무역 도시였던 도르도흐트가 요한 3세의 편에 넘어갔다. 게다가 남편 장 4세는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군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데다 심약한 성격이어서 요한 3세를 막는 데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1419년, 자클린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중개한 워르쿰 타협을 받아들여, 도르드레흐트, 고르쿰, 로테르담 일대를 요한 3세에게 넘기는 대가로 장 4세와의 결혼은 합법으로 인정받았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9년 5월 공식적으로 자클린과 장 4세의 결혼을 승인했다. 하지만 요한 3세는 곧 태도를 바꿔 군대를 일으켰고, 장 4세는 자클린의 구원 요청을 묵살하고 1419년 5월 성 마르틴스딕 조약을 체결해 요한 3세에게 12년간 홀란트와 제일란트의 통제권을 넘기는 대신 금전적 보상을 받은 뒤 전쟁에서 이탈했다.
결국 남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자클린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홀란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마지막 도시였던 레이던마저 1421년 초 요한 3세에게 함락당하자 잉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주지 않는 남편 장 4세를 원망했고,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1421년 2월, 자클린은 교황청에 남편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했으며 성적 결합도 이뤄지지 않았으니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는 요청서를 발송한 뒤 새 남편감을 물색했다. 때마침, 베드퍼드 공작 존의 막강한 권세를 질시하고 있던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그녀와 결혼하고 저지대 국가에 진출함으로써 세력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험프리와 자클린은 1423년 2월에서 3월 7일 사이에 에식스주 해들리 마을에서 비밀 결혼을 맺었다. 1423년 10월 20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험프리의 요구에 따라 자클린과 그녀의 후손들이 잉글랜드에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특권을 내렸으며, 글로스터 공작부인으로 인정했다.
일찍이 자클린이 요한 3세와 맞서 싸웠을 때 일정 부분 지원한 적이 있었던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저지대 국가에 잉글랜드가 진출하기를 바라지 않아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험프리, 자클린 부부와 필리프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험프리는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1424년 가을에 자클린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칼레에 상륙한 뒤 11월 말에 몽스에 입성한 후 12월 5일에 몽스에서 에노 백작으로 취임했다. 1425년 1월 3일, 그는 공식 문서에 아래와 같이 서명했다.
"험프리, 신의 은총으로 왕의 아들이자 형제이자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에노 백작, 홀란트, 제일란트, 펨브로크, 프리슬란트의 영주이자 잉글랜드의 시종장."
1425년 1월 6일, 요한 3세가 시종의 독살 시도 여파로 사망했다. 요한 3세는 자식이 없었고, 죽기 1년 전에 필리프를 저지대 국가의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필리프는 요한 3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재빠르게 군대를 보내 두 백작령을 장악하고는, 자클린과 험프리의 결혼은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았기에 간통이며,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자클린의 진정한 남편이니 이 영지들의 주권자라고 선포했다. 이후 험프리와 필리프간의 날이 선 편지가 오갔고, 급기야 양자는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베드퍼드 공작 존이 중재하면서 결투는 취소되었다.
1425년 3월 말, 험프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추밀원에 브라반트 공작과의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궁정은 동맹 세력인 부르고뉴 공국과 갈라서기 싫었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험프리가 그렇게 자리를 비운 사이,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을 받은 브라반트군이 공세를 개시해 5월 중순에 몽스를 포위했다. 몽스 주민들은 처음에는 강경히 맞섰지만 결국 6월 13일 항복했다. 험프리의 지지자 일부는 처형되었고, 자클린은 겐트에 감금되어 부르고뉴군의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자클린은 9월 2일 새벽에 남장을 하고 탈출해 홀란트의 주요 도시인 하우다에 도착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 세력인 대구파의 반대 세력인 홀란트의 지주 귀족들로 구성된 갈고리파가 도시로 모여들어 자클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는 대구파 도시들에서 대규모 민병대를 소집해 자클린을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대구파 민병대는 자클린의 군대의 매복에 걸려 학살당하고 부대 깃발을 전부 빼앗겼고, 자클린파 민병대가 역습에 나서 대구파 도시들을 향한 습격 작전을 벌였다.
1426년 1월, 필리프가 파견한 부르고뉴군이 로테르담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자클린은 험프리가 보낸 소규모 잉글랜드 병사들과 함께 항전했지만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부르고뉴군이 로테르담에서 더 진군하지 않는 사이 군대를 신속하게 재건한 자클린은 6월에 대구파의 주요 도시인 하를럼을 포위했다. 플란데런에 주둔한 부르고뉴군이 하를럼을 구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매복에 걸려 괴멸되었다. 이에 필리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가 하를럼을 구원했고, 자클린 파벌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1427년 4월 17일,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이리하여 부르고뉴 공작은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모든 명분을 상실했다. 그러나 부르고뉴의 법률가들은 험프리와의 재혼이 합법적인 결혼이 아닌 간통임을 자클린이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통치자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필리프가 영주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법적인 근거는 거의 없었지만 부르고뉴의 막강한 권력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에노 백령의 삼부회는 결국 부르고뉴 공작을 영주로 인정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에 있던 험프리는 아내를 돕기 위해 병력을 보내주지 않고 직접 현장으로 가지도 않았다. 이에 자클린은 필리프에게 협상하자고 요청했다. 필리프는 그녀의 남편인 험프리가 자신의 숙적이자 장차 공국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고 지적하며, 그와 이혼하면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자클린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여전히 기대해 이 제안을 거부했고, 필리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홀란트를 다시 침공했다. 자클린은 이에 맞서 처절하게 항전하면서, 남편에게 연이어 서신을 보내 구원을 간청했다.
1428년 3월 3일, 험프리는 잉글랜드 의회에 홀란트로 군대를 파견해 자클린을 구해야 한다는 안건을 제출했지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이에 험프리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클린과의 모든 관계를 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는 1425년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스터브러의 기사 레지날드 코밤의 딸인 엘레노어 코밤을 정부로 삼고 있었다. 그는 자클린과의 결혼을 없던 일로 해버린 뒤 엘레노어 코밤과 결혼했다. 이에 런던의 여성 대표단이 의회에 출석해 자클린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험프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무시당했다. 잉글랜드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원금을 모금해 자클린에게 전달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는 선량공 필리프에게 대항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결국 자클린은 1428년 7월 3일 자신이 가진 모든 영지의 행정권을 필리프에게 양도해야 하며, 앞으로 그의 허락 없이 결혼할 경우 영주권을 몰수당하는 내용의 델프트 조약에 서명했다. 이후 그녀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제일란트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1432년, 그녀는 홀란트와 제일란트의 스타트허우더이자 자신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브랑크 반 보르셀렌과 사랑에 빠졌고, 1432년 7월 필리프의 승인 없이 결혼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필리프는 브랑크를 루펠몽드 성에 가두고 사형을 선고했지만, 형벌을 시행하지는 않고 계속 수감했다. 그러면서 자클린에게 델프트 조약을 위반한 책임을 지고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넘기고 복종한다면 브랑크를 풀어주겠다고 권했다.
자클린은 브랑크를 구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1433년 4월 12일 헤이그 조약이 체결되었다. 자클린과 그녀의 남편은 오스트레반트 백작과 백작부인의 칭호만 유지했으며, 그곳의 연간 수입을 받았다. 그 외에 자클린이 가진 모든 영지는 공식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소유가 되었다. 이리하여 선량공 필리프는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에 대한 통제를 확고하게 하였고, 저지대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추었다. 그 후 그녀는 3년간 조용히 지내다 1436년 결핵에 걸린 뒤 몇 달간 투병 생활을 한 끝에 1436년 10월 8일 테일링엔 성에서 병사하여 헤이그의 비넨호프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생전에 자녀를 낳지 못했고, 남편 브랑크는 그녀 사후에도 34년을 더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