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시몽 모히어 Simon Morh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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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90년경 ~ 1449년 7월 4일에서 1452년 10월 31일 사이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노장르루아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디에프 | |
아버지 | 에티엔 모히어 | |
어머니 | 고티에 르 베르니에 | |
아내 | 블랑슈 드 포팽쿠르, 잔 드 라니, 카트린 드 아브르데스코네 | |
자녀 | 장, 이자벨 | |
직위 | 파리 시 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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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의 귀족. 1차 파리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퇴했다.2. 생애
1390년경 프랑스 왕국 노장르루아에서 그곳의 기사이자 부르주아인 에티엔 모히어와 고티에 르 베르니에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프랑스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청지기로 발탁되었고, 1420년 부르고뉴군이 파리를 장악한 뒤 부르고뉴 측에 협력했다. 1422년 헨리 6세가 잉글랜드 겸 프랑스 국왕이 된 된, 헨리 6세의 숙부인 랭커스터의 존이 섭정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잉글랜드 왕실의 지배에 적응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부르고뉴 당파들을 여러 요직에 임명했다. 142년 12월 1일, 그는 이러한 정책에 따라 파리 시 장관에 선임되었다.1425년 5월 31일, 아라곤에 대한 외교 활동에 참여한 공으로 헨리 6세의 군정으로부터 생피아, 몽루에, 탈부아신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이중 생피아는 그의 조상인 기욤 모히어의 토지가 있던 곳이었다. 1430년 7월 23일, 그는 문서에 메닐의 영주로 기록되었다. 또한 1431년 8월 11일에는 후당 성에 선임되었다. 한편, 그는 1427년 몽타르지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프랑스군에 생포된 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429년 2월 존 파스톨프와 함께 오를레앙 공방전을 치르는 잉글랜드군에게 보급 물자를 전달하러 가던 중 루브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급습을 격파했다. 이때 루브레 전투에서 전사한 잉글랜드 측 인사 중에는 그의 조카도 있었다.
1429년 9월, 그는 파리 시 장관으로서 파리 총독을 맡은 장 빌리에 드 릴라당과 함께 4,000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잔 다르크를 따르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선 끝에 격퇴했다. 1432년 프랑스군이 파리 인근의 샤르트르를 공략하자, 이를 탈환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1433년 또는 1434년 몽레리 수비대장이 되었으며, 1435년 코탕탱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435년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샤를 7세와 아라스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포기한 뒤에도, 그는 잉글랜드 측에 충실했다. 1436년 프랑스군이 2차 파리 공방전에서 파리를 공략했을 때 생포되었다. 그는 르 메닐 오브리와 몽탕로의 토지를 프랑스 측에 넘기는 대가로 석방되었고, 잉글랜드 수비대와 함께 파리를 떠났다. 헨리 6세는 자신에게 충성을 유지하는 그에게보답하고자 넉넉한 연금을 제공했으며, 1437년 6월 24일 프랑스와노르망디 대 평의회 회원으로 선임했다. 1438년 3월부터 1445년 11월 또는 1446년 2월까지 프랑스와 노르망디의 재무관을 역임했으며, 드뢰, 라로슈기용 및 생로의 수비대장을 역임했고, 1439년 모 공방전, 1441년 크레유 및 퐁투아즈 공방전에 참여했으나 프랑스군이 세 요충지를 공략하는 걸 막지 못했다.
1449년 2월 25일, 토르시르그랑에서 디에프의 프랑스 수비대의 습격으로 생포되었다. 이후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가 기록에 등장하는 마지막 날짜인 1449년 7월 4일에서 아내 카트린 드 아브르데스코네가 과부로 묘사되는 날인 1452년 10월 31일 사이에 사망했을 것이다.
3. 가족
- 블랑슈 드 포팽쿠르(? ~ 1422): 르 메닐 오브리의 여성 영주.
- 마르그리트 모히어: 기사 장 비파르의 부인.
- 잔 드 라니(? ~ 1436)
- 이자벨 모히어(1425 ~ 1506년 이후): 기 2세 드 보텔르의 부인.
- 카트린 드 아브르세드코네(1385 ~ 1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