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9 21:45:02

앙게랑 7세 드 쿠시

파일:Enguerrand VII.jpg
이름 앙게랑 7세 드 쿠시
Enguerrand VII de Coucy
출생 1339년
프랑스 왕국 쿠시
사망 1397년 11월 18일
오스만 술탄국 부르사
아버지 앙게랑 6세 드 쿠시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누이
아내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이자벨 드 로렌
자녀 마리, 필리프, 이자벨
직위 쿠시 영주, 수아송 백작, 엘버말 백작, 베드퍼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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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시 영주. 수아송 백작, 베드퍼드 백작.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가담해 잉글랜드 왕국에 맞섰고, 유럽 대륙 각지를 돌면서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줬다. 그러나 니코폴리스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된 뒤 1년간 포로로 지내다가 사망했다.

2. 생애

1339년경 프랑스 왕국의 쿠시에서 쿠시 영주 앙게랑 6세 드 쿠시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1세의 딸인 카타리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잔[1]이 있었다. 아버지가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아직 7세였던 그는 어머니의 후견을 받았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 기사 신분으로 참가했다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런던으로 끌려간 그는 에드워드 3세의 총애를 받고 수아송, 엘버말 백작, 베드퍼드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의 딸인 이사벨라와 결혼한 뒤 자유의 몸이 되었다.

1358년 자크리의 난 진압에 크게 기여했으며, 뒤이어 군대를 이끌고 외할아버지 레오폴트 1세가 스위스 연맹과 전쟁을 치르는 걸 도우려 했다. 그러나 베른 공략 작전이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귀환했다. 이후 영지 관리에 전념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에서 중립을 고수했고, 양국간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다가 1377년 장인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참여했고, 1380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사망한 뒤 프랑스 무관장 제의를 받았지만 거부했고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이 그 대신 프랑스 무관장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대관식에 참여한 뒤 스코틀랜드로 파견된 프랑스 원정대 지휘관을 맡아 스코틀랜드군과 함께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성공적인 습격 작전을 벌였다.

1382년 프랑스로 돌아온 뒤 파리에서 발발한 민중 봉기를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며, 1390년 제노바 공화국의 튀니지의 무슬림 해적에 대한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1396년 헝가리 십자군에 참여한 그는 니코폴리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중기병 500기와 승마궁수 500기를 이끌고 정찰을 나갔다가 오스만군과 조우하자, 200기의 기병으로 오스만군을 유인한 뒤 나머지 주력으로 적 후방을 급습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그와 함께 십자군에 가담한 외 백작 필리프 다르투아는 이를 시기해 앙게랑이 전공을 가로채려고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무모한 행동을 해 전군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 후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미르체아 1세가 튀르크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낸 뒤 그동안 그들과 수많은 격전을 치러봤던 왈라키아 보병대가 전방에서 적을 묶어두는 동안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기사단이 출격해 적의 측면과 후방을 강타하는 전술을 제시했을 때, 그는 이 조언을 따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필리프 다르투아를 비롯한 대다수 프랑스 기사들은 자기들이 먼저 튀르크군의 정면으로 돌격하겠다고 고집했고, 급기야 미르체아 1세와 지기스문트가 공적을 빼돌리려 든다는 비난을 가했다. 결국 작전은 프랑스 기사단의 뜻대로 결정되었고, 뒤이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이 완패했다. 이때 사로잡힌 앙게랑은 부르사로 끌려갔고, 1397년 11월 18일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3. 가족

  • 잉글랜드의 이사벨라(1332 ~ 1379):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 에노의 필리파 왕비의 딸.
    • 마리 드 쿠시(1366 ~ 1405): 쿠시 여성 영주, 말의 영주 앙리 드 바의 부인. 1397년 남편이 사망한 뒤 상속 영지를 놓고 시어머니인 마리 드 발루아[2]와 치열한 소송전을 벌였지만 결판을 내지 못했다. 1404년 막대한 법적 비용으로 인한 빚더미에 시달린 끝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에게 영지를 400,000 리브르에 판매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루이 1세가 돈을 제대로 주지 않자 그를 상대로 최소 11건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1405년 한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루이 1세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사후 마리의 아들 로베르가 소송전을 이어갔지만, 결국 쿠시 영지는 프랑스 왕실에게 넘어가고 수아송 백국이 루이 1세와 그의 후손들에게 넘어가는 걸 막지 못했다.
    • 필리프 드 쿠시(1367 ~ 1411): 옥스퍼드 백작, 아일랜드 공작 로버트 드 베레의 부인.
  • 이자벨 드 로렌(? ~ 1410): 로렌 공작 장 1세 드 로렌의 딸.


[1] 수뱅, 간델루의 영주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인 샤를 드 샤티용의 부인. [2]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