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사이먼 벌리 Simon Bur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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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36년 ~ 1388년 5월 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헤레퍼드셔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타워 힐 | |
아버지 | 로저 벌리 | |
형제자매 | 존 벌리 | |
직위 | 기사, 가터 기사단 단원, 도버 성 수비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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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으며, 리처드 2세의 총신으로서 정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388년 청원파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2. 생애
1336년경 잉글랜드 왕국 헤레퍼드셔에서 로저 버리의 세 아들 중 중간 또는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형인 존 버리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우드스톡의 토머스 휘하에서 브르타뉴 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측근이 되었고, 1350년 윈첼시 해전에 참여했으며, 1355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전했다. 1364년 아키텐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367년 에드워드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를 복위시키기 위해 원정을 단행했을 때 참여해 나헤라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 1369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아키텐으로의 공세를 개시하자 이에 맞서 싸웠지만 뤼지냥 성에서 생포된 뒤 며칠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흑태자 에드워드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났다.에드워드는 자신을 위해 성심껏 싸운 그를 신임했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보르도의 리처드의 가정교사로 삼았다. 1377년 10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리처드 2세는 자신을 최선을 다해 가르쳐 준 그를 매우 신임했고, 리처드 2세의 어머니인 켄트의 조앤 역시 그를 매우 존경했다. 그 덕분에, 사이먼은 다수의 토지 보조금과 연금을 받았고, 윈저 성, 위그모어 성, 길퍼드 성의 매 사냥꾼 및 수비대장 직위를 받았다. 1381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1382년 왕실의 부관리자이자 사우스 웨일스의 왕실 소유물 조사관이 되었다. 1384년부터 1387년까지 5개 항구의 보안관이자 도버 성의 수비대장을 맡았다. 웨스트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리처드 2세는 1385년에 사이먼에게 헌팅던 백작 칭호를 부여하려 했지만, 의회가 일을 비준하길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사이먼은 1381년 5월 켄트의 그레이브챈드에 거주하는 로버트 벨링을 자신의 가출 농노로 간주해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그레이브첸드 주민들이 벨링을 가엽게 여겨 자신들이 돈을 대신 줄 테니 그에게 자유를 달라고 요청하자, 사이먼은 은화 300파운드를 요구했다. 이 금액은 벨링과 마을 주민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막대한 금액이었다. 사이먼은 벨링을 체포해 돈이 모금될 때까지 로체스터 성에 가두게 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그레이브첸드에서 7마일 떨어진 거리인 다트퍼드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6우러 6일 로체스터 성을 공력해 벨링을 구출했다. 며칠 후, 와트 타일러가 이 켄트 반군 무리의 지도자로 선출되면서,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사이먼은 당시 해외로 가서 리처드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딸 안나와의 결혼 협상에 임했고, 나중에 안나를 브뤼셀에서 접견한 뒤 런던으로 호위했기에 그레이브챈드에 직접 나타날 수 없었다. 그리고 켄트 지방에서는 농노제가 잉글랜드 내에서 유일하게 적용되지 않았기에 도망친 농노를 잡아들인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렇지만 로체스터 성에 갇혀 있던 로버트 벨링이 구출된 이야기는 다른 연대기들에서도 등장하기에, 학자들은 벨링이 다른 카운티에 있는 벌리의 영지에서 도망쳤을 수 있으며, 다른 관료가 벌리의 이름으로 그레이브챈드에 방문해 벨링을 체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1386년, 사이먼은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차명해 20명의 맨앳암즈와 30명의 궁수를 이끌었다. 이후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 대법관 마이클 드 라 폴과 함께 왕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국정 전반을 이끌었다. 이에 많은 잉글랜드 대귀족들이 자신들의 입장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세 사람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1387년 말,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총신들을 타도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12월 19일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로버트 드 베레를 격파한 뒤 런던에 접근했다.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으로 피신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서, 토머스와 피츠앨런 등이 주도한 청원파는 왕의 미숙함을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법을 위반하고, 개인의 부를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고, 또한 왕이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도록 강요했다는, 왕이 가장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해 많은 비난을 제기했다. 이때 사이먼은 권력 남용을 일삼아 몇년 만에 연간 수입이 20파운드에서 3천 파운드로 급증했으며, 부패한 사법 시스템을 만들었고, 심지어 도버를 프랑스에 매각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의회는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뒤 교수척장분지형을 선고했다. 리처드 2세의 아내인 보헤미아의 안나 왕비가 사이먼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청원파는 이를 묵살했다. 리처드 2세는 그가 사형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단지 처벌을 간단한 참수형으로 대체하는 선에 그쳤다. 결국 사이먼은 1388년 5월 5일에 양팔에 수갑이 묶인 채 런던 전역을 순회한 뒤 타워 힐에서 참수되었다.
리처드 2세는 사이먼의 비참한 최후에 극도로 슬퍼했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청원파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1397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청원파를 권좌에서 밀어낸 뒤 숙청을 단행한 그는 1399년 3월 22일 사이먼에게 내려진 판결을 무효로 처리하고 사이먼의 명예를 신원한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