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콘월 John Cornw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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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443년 12월 11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콘월 마운트 베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베드퍼드셔 암트힐 | |
아버지 | 존 콘월 | |
아내 | 필리파 아룬델,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 | |
자녀 | 존, 콘스탄스 | |
직위 | 펜호프 남작, 가터 기사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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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 대적했다.2. 생애
1364년경 잉글랜드 왕국 콘월 마운트 베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인 존콘월은 슈롭셔에 토지를 소유한 기사였으며, 어머니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조카라고 전해지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가 1396년에 이미 기사 작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늦어도 1370년대 중반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396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회담을 갖기 위해 바다를 건넌 리처드 2세를 호위했으며, 1399년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이러한 봉사에 대한 보담으로 리처드 2세로부터 190마르크의 연간 연금을 받았으며, 기사 에드먼드 아룬델[1]의 딸인 필리파 아룬델과 결혼하면서 아내가 소유한 콘월 백국 내 영지 및 유아 상속인 세르지오의 후견인 자격을 확보했다.
1399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한 뒤, 그는 새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좋은 관게를 가졌다. 1399년 9월 아내 필리파가 사망한 뒤 그녀의 지참금과 세르지오에 대한 양육권을 상실했지만, 1400년 6월 요크에서 열린 토너먼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 헨리 4세의 누이이며 존 홀랜드의 미망인인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헨리 4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했고, 그 결과 일개 기사였던 그는 잉글랜드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새 아내는 왕으로부터 연간 1,000 마르크의 연금을 받았으며, 1404년에는 이전에 압수되었던 전 남편 존 홀랜드의 지참금 일부를 받았다. 1409년, 존 콘월은 아내보다 오래 살 경우 연간 400마르크를 왕실로부터 지급받을 것을 보장받았다.
1402년과 1407년에 슈롭셔의 기사로서 의회에 참석했으며,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헨리 4세의 원정에 동행한 뒤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발탁되었다. 1412년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지휘하에 프랑스 원정에 참여해 군사 활동을 벌였으며, 1415년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해 아쟁쿠르 전투에서 선봉대를 이끌고 활약해 승리에 기여하고 방돔 백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사로잡았다. 1418~1419년 헨리 5세의 노르망디 정복에 참여했다. 1421년 모 공방전을 수행하던 중 외아들 존 콘월이 전사하자 깊은 상심에 빠져 군 복무를 중단했다.
1425년 두번째 아내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뒤 아내가 수령하던 연금을 잃었지만, 프랑스에서 사로잡은 고귀한 포로들과 토너먼트에서의 승리 덕분에 많은 돈을 받았고, 이 자금으로 잉글랜드의 여러 부동산, 특히 베드퍼드셔에 대규모 토지를 구입했으며, 암트힐 성을 건설했다. 1429년부터 1432년까지 잉글랜드의 포로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1432년 펜호프 남작에 선임되었다. 1430년대에 베드퍼드셔의 사법 행정 통제권을 놓고 라틴의 제3대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와 큰 불화를 겪은 끝에 무력 충돌을 벌여 1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이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1443년 12월 11일에 베듭퍼드셔 암트힐에서 사망했고, 런던에 세운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로부터 아들 존과 딸 콘스탄스를 낳았다. 아들 존은 1421년에 모 공방전에서 전사했고, 콘스탄스는 14대 아룬델 백작 존 피츠앨런과 결혼했지만 1429년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펜호프 남작 작위와 영지는 왕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