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데버루 John Devereu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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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37년경 ~ 1393년 2월 22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
아버지 | 존 데버루 | |
아내 | 마가렛 베레 | |
자녀 | 존, 조앤 | |
직위 | 데버루 남작,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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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2. 생애
1337년생으로 알려졌지만 출생지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조부 또는 증조부 윌리엄 데버루는 헤레퍼드셔의 영주로서 1299년부터 1314년까지 왕실 의회에서 활약했지만, 이후 데버루 가문은 영지를 잃고 몰락했다. 아버지 존 데버루는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기사가 된 뒤 크레시 전투에 참전했지만 그 직후에 사망했다.1365년 레콩키스타에 참여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갔지만, 도중에 계획을 바꿔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를 놓고 페드로와 싸우고 있던 엔리케 2세의 편에 서서 그가 페드로를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1366년 흑태자 에드워드에 의해 아키텐으로 소환되었고, 1367년 에드워드의 페드로 왕을 복위시키기 위한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해 나헤라 전투에서 최전선에 싸워 승리에 일조했다. 1370년 리모주 공방전에 참여했고, 1372년 라로셸의 세네샬에 선임되었다.
1373년 3월 프랑스군 사령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푸아투의 요충지인 시세를 포위하자, 그는 니오르 주변에 분산된 800명의 기사와 300명의 장궁병들을 규합하여 시세를 구원하고자 출진했다. 이들은 야밤에 숲길을 통해 이동해 적의 감시를 회피했고, 3월 21일에 시세 인근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게클랭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요구했다. 게클랭이 이에 응하면서 벌어진 시세 전투에서, 존 데버루는 크게 패배해 600명이 사살당하고 500명이 생포되는 피해를 입고 생포되었다. 아군이 궤멸되는 모습을 목도한 시세 수비대는 곧바로 항복했다.
그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그는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수행원이 되었고, 1375년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함께 브르타뉴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장 4세는 그 대가로 그에게 평생 100 파운드의 연금을 지불하기로 서약했다. 그는 1380년까지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 참여했고, 1382년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으며, 1383년 플란데런 백국에서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한편 1377년 리처드 2세를 보좌하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발탁되었으며, 1378년 켄트에 있는 리즈 성의 수비대장을 맡았고, 1380년부터 칼레의 보안관으로 근무했다. 1386년 왕실 청지기가 되었고, 1388년에는 도버 성의 수비대장이자 5개 항구의 수호자가 되었다.
1384년 데버루 남작에 선임되었고, 1388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이후 그동안 모은 재산을 토대로 영지를 사들인 결과 가문의 옛 영지였던 헤레퍼드셔를 구입했고, 그 외에도 켄트 및 버크셔에 있는 여러 성을 구입했다. 구로돈 1393년 2월 22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런던의 그레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가렛 베레(1340 ~ 1398): 제7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의 딸. 존 데버루와 결혼하기 전에 제 3대 보몽 남작 헨리 드 보몽과 처음 결혼했고, 두 번째로 기사 니콜라스 드 러베인과 결혼했다.
- 존 데버루: 제2대 데버루 남작
- 조앤 데버루: 제4대 피츠월터 남작 월터 피츠월터와 초혼, 제2대 버넬 남작 휴 버넬과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