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21:08:37

앙게랑 드 부르농빌

성명 앙게랑 드 부르농빌
Enguerrand de Bournonville
생몰년도 1368년경 ~ 1414년 5월 26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 주 불로네
사망지 프랑스 왕국 수아송
아버지 로베르 드 부르농빌
어머니 잔 드 크라마이유
형제 알레움 드 부르농빌
아내 줄리엔 드라모트
자녀 앙투안, 베아트리스
직위 리앤의 영주, 부르고뉴군 지휘관, 수아송 대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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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의 군인.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의 일원으로서 아르마냑파에 대적했으나 수아송 공방전에서 생포된 뒤 처형되었다.

2. 생애

1368년경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 주 불로네 출신인 부르농빌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로베르 드 부르농빌이며, 어머니는 크레마이유의 영주 장의 딸 잔이다. 형으로 알레움 드 부르농빌이 있었고, 사촌으로 리옹넬 드 부르농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할머니 마호트 드 파인즈를 통해 프랑스 무관장 로베르 드 파인즈의 조카였다. 형 알레움이 부르농빌 영지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동안, 그는 1403년 리앤의 영주가 되었다.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마구간 종자로 발탁되었으며, 1405년 5월 리니 백작 발레랑 3세 드 릭상부르리니의 지시에 따라 잉글랜드군과 교전했으나 생포되었다가 6월에 용맹공 장이 몸값을 지불해준 덕분에 풀려났다. 1405년 9월 1일 148명의 부르고뉴군 기사로 발탁되어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에 대적하는 용맹공 장을 도왔다. 1406년, 용맹공 장과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일시적으로 화해한 뒤 피사 시에 대한 공동 영주권을 확립하기로 결의한 뒤 피렌체 시와 분쟁을 벌였다. 용맹공 장은 앙게랑을 파견해 피사에서 피렌체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1406년 10월에 피사 시민들이 항복했고, 피렌체군은 도시에 입성한 후 앙게랑을 생포했다. 이후 앙게랑은 용맹공 장이 또다시 몸값을 지불해준 덕분에 풀려나 부르고뉴로 귀환했다.

1408년부터 용맹공 장의 경호를 맡았으며, 용맹공 장이 자신의 주요 동맹자인 리에주 주교 요한 3세 폰 바이에른을 돕기 위해 리에주 반군을 쳐부수러 출진할 때 동행했다. 1408년 9월 23일 오테 전투에서, 그는 1,400명의 기병을 지휘해 리에주 반란군을 궤멸시키는 데 일조했다. 용맹공 장은 그의 활약에 만족을 표해 상당한 재정적 보상을 제공했으며, 아라스에서 짜여진 오테 전투를 기념하는 태피스트리에 그를 포함시켰다. 1409년 부르고뉴 공작의 시종관에 선임되었다. 1409년 여러 프랑스 귀족들과 함께 제노바로 파견되어 제노바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장 2세 르 맹그르를 도우려 했지만, 그 사이에 장 2세 드 맹그르가 제노바 반란군에 의해 도시의 통제권을 잃어버리면서 실패했다.

1410년 초 프랑스로 돌아온 뒤 파리에 머물면서 공식적으로 용맹공 장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410년 11월 2일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 간의 비세트르 평화 협정이 체결된 후, 그는 도팽 루이의 경비 대장이 되었다. 1411년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용맹공 장의 핵심 장성으로서 아르마냑파에 앞장서서 대적했다. 1411 ~ 1412년 파리 인근, 상리스, 라 샤펠, 생클로드 등지에서 전쟁을 치렀으며, 푸아투, 베리, 에탕프 등지에서도 아르마냑파를 대적했다. 여기에 던쉬르아론을 공략했으며, 부르주 공방전에 참여했다. 1412년 6월 용맹공 장과 오를레앙 공장 샤를 1세 도를레앙 간의 오세르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1412년 11월부터 1413년 8월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이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대재무관인 피에르 데 에사르를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해 세인의 비난을 받았지만 용맹공 장의 비호 덕분에 무마되었다.

1414년, 용맹공 장은 1413년 가을에 부르고뉴인들이 아르마냑파에 의해 추방된 파리를 탈환하려 시도했다. 이때 그는 앙게랑과 앙투안 드 크라옹, 장 드 모레이를 수아송으로 보내 그곳을 장악하도록 했다. 수아송 공략이 성공한 후, 1414년 2월 중순에 파리 공략을 실패한 뒤 아르투아로 퇴각한 용맹공 장으로부터 수아송 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성벽에 너무 가까이 위치한 건물을 무너뜨리과, 거리를 사슬로 막고, 주변 시골을 약탈해 보급품을 마련하는 등 농성 준비에 착수했다. 1414년 5월, 아르마냑파와 이들을 지원하던 잉글랜드군이 수아송에 이르렀다. 그는 항복을 요구받았지만 거부했다.

이후 벌어진 수아송 공방전에서, 그는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5월 21일에 프랑스 왕실군 포병대에 의해 성벽이 돌파당하자 급히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크레시 영주이자 부관인 시몽 드 크라옹이 도중에 배신하는 바람에 생포되었다. 수아송은 철저히 약탈되었고, 주민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으며, 여인들은 강간당했다. 이후 앙게랑은 1414년 5월 26일에 아르마냑파와 함께 하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앞으로 끌려간 뒤 사형을 선고받고 수아송 시장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수급은 창에 꽂혔고, 몸통은 생크레팽앙샤예 평야에 설치된 교수대에 매달렸다.

앙게랑은 생전에 페네스, 하벤케르케, 휘플랑드르의 여성 영주이며 로베르 드 크루테스의 미망인인 줄리엔 드라모트와 결혼해 아들 앙투안과 딸 베아트리스를 낳았다. 앙투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파 핵심 장성이 되었고, 잔 다르크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생포하는 데 일조했다. 베아트리스는 플로랑 드 칼론의 부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