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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1세(하바이에른 공작)

파일:알브레히트 1세(하바이에른 공작).jpg
이름 알브레히트 1세 폰 바이에른
Albrecht I. von Bayern
출생 1336년 7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 뮌헨
사망 1404년 12월 16일 (향년 68세)
에노 백국 헤이그
아버지 루트비히 4세
어머니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
형제 마르가레테, 안나, 엘리자베트, 루트비히 6세, 빌헬름 1세, 오토 5세, 베아트릭스, 아그네스, 루트비히
아내 마르가레테 폰 브제크, 마르가레테 폰 클레베
자녀 카타리나, 요한나, 마르가레테, 빌헬름 2세, 알브레히트 2세, 요한 3세, 요한나 소피, 빌헬름( 사생아), 에두아르드(사생아), 루트비히(사생아), 요한나(사생아), 마르가레테(사생아), 나탈리아(사생아), 더크(사생아), 아드리안(사생아)
직위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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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

2. 생애

1336년 7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 뮌헨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 공작이었고, 1314년부터 로마 왕, 1328년부터 신성 로마 황제를 칭했다. 어머니인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는 에노 백작 기욤 1세 드 에노의 딸이었다. 형제로 마르가레테[1], 안나[2], 루트비히 6세[3], 엘리자베트[4], 빌헬름 1세, 아그네스[5], 오토 5세[6], 베아트릭스[7], 루트비히[8]가 있었다.

1345년 9월 26일, 에노 백작 기욤 2세 드 에노가 프리슬란트 원정을 떠났다가 워렌스 전투에서 프리지아인들에게 참패해 자녀를 낳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이후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1346년 9월 7일, 루트비히 4세는 마르그리트의 둘째 아들 빌헬름이 어머니가 사망할 경우 어머니를 계승해야 하며, 빌헬름이 자식 없이 죽으면 마르그리트의 셋째 아들 알브레히트가 어머니의 뒤를 잇게 했다. 그 대신 장남 루트비히는 저지대 국가 상속을 포기하게 했다. 1347년 10월 루트비히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알브레히트와 그의 형제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노렸지만, 대다수 제후들이 카를 4세를 지지하자 1350년 2월 카를 4세를 새로운 로마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제국 예복을 넘겨줬다.

알브레히트는 1347년부터 1349년까지 다섯 형제와 함께 바이에른과 다른 지역의 비텔스바흐 영지를 통치했다. 1349년 란츠베르크 조약으로 비텔스바흐 영토가 분할된 후, 그는 슈테판 2세, 빌헬르 1세와 함께 하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1353년 레겐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된 후, 알브레히트는 빌헬름 1세와 함께 슈트라우빙-홀란트 부분 공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이 공국은 하바이에른, 홀란트, 질란트, 에노 및 프리슬란트의 슈트라우빙거 렌첸으로 구성되었다. 빌헬름은 북부 지역을 관리했고 알브레히트는 슈트라우빙거를 다스렸다.

1357년 가을, 잉글랜드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형 빌헬르 1세가 심각한 정신질환을 보인 끝에 그의 기사 중 한 명인 제러드 반 웥터린지(Gerard van Wateringe)를 살해했다. 이 정신 질환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알브레히트 1세가 섭정으로서 그의 영지를 대신 맡았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한 슈트라우빙 장관 페터 예거를 추방해 권력을 강화했고, 슈트라우빙에 공작 궁전을 지었다. 하지만 1358년부터 주로 헤이그의 비넨호프에 거주했다. 1359년 델프트와 1361년 미델부르크에서 자신에게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대구파를 진압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왕비 에노의 필리파의 상속권을 이유로 에노 백국을 비롯한 저지대 국가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는 대구파 반란을 은밀히 후원했으며, 1364년 초 저지대 국가에 사절을 보내 에노의 필리파를 새 영주로 받들라고 권고했다. 1364년 5월 18일, 알브레히트 1세는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및 프리슬란트 주 총독에게 에드워드 3세의 주장에 대한 의견을 밝히라고 요청했다. 총독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역의 관습은 장자 상속에 의한 남성 상속을 우선시한다고 답했다. 이에 알브레히트는 4개 주 대표의 의견을 잉글랜드 사절단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이 정도로 승복하지 않았고, 1365년 12월 알브레히트 1세를 궁정에 초대해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알브레히트는 추종자 120명과 에노, 홀란트, 질란트, 프리슬란트 주의 구성원들과 동행한다는 조건으로 이에 응했고, 런던에서 에드워드 3세와 회담했다. 그 결과 에드워드 3세는 그가 잉글랜드에 우호적인 자세를 보이는 조건하에 그의 계승을 인정하기로 했다. 얼마 후, 헬러 공작 에두아르가 영지를 침공했지만, 알브레히트가 이를 격퇴하고 헬러 공국 일부를 황폐화시켰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고, 알브레히트는 자기 딸을 에두아르의 조카이자 상속인인 빌헬름 7세 폰 율리히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가신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인기를 잃었다. 일부 가신은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과 동맹을 맺고 그에게 대항했고, 그는 진압에 실패한 뒤 평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이후 네덜란드 귀족 여성 알레이드 반 포엘게스트를 정부로 두고 총애했는데, 대구파 인사들이 알레이드의 후원에 힘입어 알브레히트의 궁정에서 잇따라 임명되자, 후크파는 이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1389년 4월, 형 빌헬름 1세가 케누아 성에 갇혀 지내다가 사망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비로소 정식으로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1392년 9월 22일, 알레이드와 궁정 관리 빌럼 쿠세르가 헤이그에서 후크파의 일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알브레히트는 후크파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공세를 개시해 성을 하나씩 공략하고 후크파 인사들을 박해했다. 그의 아들이자 상속인로서 에노 총독을 맡고 있던 빌헬름 2세는 후크파와 친분이 있었기에, 자기 입지가 불안하다고 여기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94년 초, 알브레히트 1세와 빌헬름 2세는 화해했고 빌헬름 2세는 에노 총독의 권리를 회복했다.

1397년, 알브레히트 1세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로부터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1404년 12월 16일에 사망했고, 장남 빌헬름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3. 가족

  • 마르가레테 폰 브제크(1342 ~ 1386): 브제크 공작 루트비히 1세의 딸.
    • 카타리나(1361 ~ 1401): 율리히 공작이자 헬러 공작 빌헬름 7세 폰 율리히의 부인.
    • 요한나(1362 ~ 1386):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바츨라프 4세의 황후.
    • 마르가레테(1363 ~ 1423):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부인.
    • 빌헬름 2세(1365 ~ 1417):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
    • 알브레히트 2세(1369 ~ 1397): 바이에른-슈트라우빙 공동 공작
    • 요한나 소피(1373 ~ 1410):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의 부인.
    • 요한 3세(1375 ~ 1425): 리에주 주교,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
  • 마르가레테 폰 클레베(1375 ~ 1411): 클레베 공작 아돌프 3세의 딸.
  • 사생아
    • 샤겐의 바이에른 공 빌럼(1389 ~ 1473): 일명 '홀란트의 사생아'. 홀란트 제독을 역임함. 그의 남성 후손은 18세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네덜란드에서 활약했다.
    • 에두아르드 반 베이렌-후그우데르반-아르트스우드(1400 ~ 1458): 호그우드와 에르츠우드의 영주, 헤이그 집행관 및 홀란트 법원 판사.
    • 마르가레테 폰 바이에른: 더크 반 산토르스트의 부인.
    • 나탈리아 폰 바이에른: 베르톨트 2세 반 아센델프트의 부인.
    • 더크 반 바이어렌: 헤이그 학장.
    • 아드리안 반 바이에른(1385 ~ 1418): 도르도흐트 치안판사. 1418년 도르도흐트 공방전 중 전사.


[1] 1325 ~ 1374, 슬라보이나 공작 슈테판과 초혼, 호헬로헤의 게를라흐와 재혼. [2] 1326 ~ 1361, 하바이에른 공작 요한 1세의 부인 [3] 1328 ~ 1365, 상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4] 1329 ~ 1402, 베로나 영주 칸그란데 2세 델라 스칼라와 초혼, 뷔르템베르크 백작 울리히와 재혼. [5] 1335 ~ 1352, 건강이 좋지 않아 수녀가 되었다 [6] 1340 ~ 1379, 상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7] 1344 ~ 1359, 스웨덴 공작 에리크 12세의 부인 [8] 1347 ~ 1348,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