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제 전투 영어: Battle of Baugé 프랑스어: Bataille de Baug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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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21년 3월 22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투르 인근 보제 평원 | |
원인 | 클라렌스 공작의 남진과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의 반격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잉글랜드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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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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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의 토머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길버트 5세 드 움프라빌†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로스 남작 존 로스† |
]][[틀:깃발| ]][[틀:깃발| ]] 클라렌스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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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 모티에 드라파예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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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4,000명. 이중 전투에 참여한 병사는 2,500명. | 5,000~6,000명 |
피해 | 1,054명 전사, 500명 포로 | 미미함. |
결과 |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헨리 5세의 남부 프랑스 공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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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1년 3월 22일,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던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킨 전투.2. 배경
1415년 프랑스를 침공한 이래 아쟁쿠르 전투,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등 연이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1419년 8월 프랑스의 수도 파리 성벽 앞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내전을 벌이고 있던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는 그제야 힘을 합쳐 잉글랜드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아르마냑파 수장인 샤를 도팽과 부르고뉴파 수장인 장 1세가 회담을 가졌을 때, 아르마냑파 기사들이 장 1세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파리에 있던 선량공 필리프는 파리 성문을 개방하여 잉글랜드군이 파리에 입성하게 했다.1420년 5월 21일, 헨리 5세와 필리프 2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헨리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이자 샤를 6세의 섭정이 되었으며,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리하여 헨리는 프랑스의 왕권 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프랑스 서부 도시 부르주에 본거지를 둔 샤를 도팽을 중심으로 한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갔지만, 병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프랑스의 동맹인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실권자였던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잉글랜드가 너무 강해지면 자국에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상당한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1419년 10월, 6,000명의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라 로셸에 상륙했다. 올버니 공작의 아들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군대를 지휘했으며, 전체 병력 중 2/3이 궁수병이었다. 그들은 앙주, 메인, 투르 및 일드 프랑스 일대의 아르마냑파 요새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이 온 뒤에도 1420년 3월 3일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프레네를 구하려 했다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에게 격파당하는 등,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군에게 계속 밀렸다.
샤를 도팽과 측근들은 패전 원인을 따져본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을 여러 요새에 분산시켰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스코틀랜드군을 집결시킨 뒤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리한 조건으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기회를 모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여러 요새에서 소환된 스코틀랜드인들은 후방에서 출격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던 1421년 1월, 헨리 5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들을 분쇄하고 본국에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카트린 왕비와 함께 잉글랜드로 떠났다. 클라렌스 공작이자 헨리 5세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토머스는 헨리를 대신해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아쟁쿠르 전투의 영웅인 형을 동경한 토머스는 자신 역시 역사에 길이남을 전공을 세우길 갈망했다. 그는 루아르 강 하류의 앙주 지방을 목표로 삼기로 마음먹고, 4,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1421년 3월 중순 파리 서쪽 베르네에서 출발해 앙주의 수도 앙제를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에는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 헌팅던 백작 존 홀랜드, 멘츠와 샤토 가이야흐의 수비대장인 존 로스, 월터 피츠월터, 탱커빌 백작 존 그레이, 리즈데일 남작 길버트 5세 드 움프라빌 등 유수의 기사들이 참여했으며,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존 보퍼트의 형제인 토머스 보퍼트도 참여했다. 이들은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앙제를 향해 천천히 행진했다.
3월 21일. 잉글랜드군이 목적지인 앙제에 도착했다. 하지만 토머스는 그곳이 높은 벽과 많은 타워를 갖추고 있어서 쉽사리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보퍼트앵발레 마을로 철수시킨 뒤 그곳에 진을 쳤다. 한편 샤를 도팽은 적의 기세가 대단하니 섣불리 싸우지 말고 농성에 전념하기로 했지만, 전투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조속히 승부를 내길 희망했다. 스코틀랜드 지휘관인 뷰컨 백작은 앙주에 적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투렌에 주둔하고 있던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질베르 모티에 드라파예트가 지휘하는 소규모 프랑스군과 함께 루아르 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군해 3월 21일 밤 보제 마을 인근에 숙영했다.
3월 22일, 적이 어디에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정찰을 나갔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어 토머스 앞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심문 끝에 아군이 보제 마을에 진을 치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토머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길버트 5세와 존 홀랜드 등은 대부분의 장궁병들이 식량을 수집하기 위해 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며, 잉글랜드군의 핵심 전력인 장궁병이 모두 모일 때까지 출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방어 상태가 어떤지 등의 정보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지금 즉시 기습을 가하면 적이 전의를 잃고 도망칠 거라며 반대 의견을 일축하고 진영에 남아있던 2,5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면서 솔즈베리 백작에게 장궁병들을 소집한 뒤 아군을 뒤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보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잉글랜드군이 토머스의 지휘하에 보제 마을로 진격하고 있을 무렵, 스코틀랜드 궁수병 100명은 보제 마을 앞을 흐르는 쿠아스논 강의 다리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적 부대가 다리 인근에 도착했을 때 축구를 하고 있던 이들은 적이 나타난 것을 보자 즉시 활을 들어 적을 향해 쏴 다리를 건너는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그러다가 잉글랜드 기사들이 말에서 내린 뒤 도보로 다리를 건너자, 프랑스 맨앳암즈가 출격해 적군의 도강을 저지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스코틀랜드 궁수병과 프랑스 분견대는 인근 교회로 피신했다. 잉글랜드군은 교회를 포위해 공격을 퍼부었지만 쉽사리 공략되지 않자 스코틀랜드 본진으로 방향을 돌렸다.
뷰컨 백작은 잉글랜드군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마을 외곽의 묘지 바깥에 전군을 집결시켰다. 양측은 말을 타고 전진한 후 하마한 뒤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에서, 수적으로 2대 1로 밀리는 데다 핵심 전력인 장궁병이 거의 없었던 잉글랜드군이 적 궁수들의 측면 사격에 시달린 끝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알프레드 드 드뤽스 작, <클라렌스 공작의 죽음>.
당시 값비싼 갑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된 금관을 그의 바시넷 위에 올려놓은 토머스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고, 전투 초반에 집중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뒤이어 토머스와 함께 갔던 존 로스, 길버트 5세 등도 전사했고,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와 보퍼트 형제는 사로잡혔다.
지휘관들이 잇따라 죽거나 사로잡히자, 전의를 상실한 잉글랜드군은 다리 건너 본진으로 도망치다가 적군의 거센 추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장궁병들을 소집한 뒤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이동하던 솔즈베리 백작은 참패 소식을 접하자 패잔병들을 모은 뒤 다음날 새벽에 서둘러 철수했다. 그러다가 르망에서 온 주민들이 휘스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중앙 부분을 철거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자, 흰색 십자가가 달린 프랑스식 휘장을 착용한 잉글랜드 궁수병들이 다가와서 "우리는 프랑스 군인들이니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주민들은 그 말에 속아 다리를 수리해줬다가, 본색을 드러낸 잉글랜드군에게 학살당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4. 결과
잉글랜드군은 보제 전투에서 1,054명이 전사하고 500명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반면 스코틀랜드-프랑스 연합군의 손실은 미미했다. 샤를 도팽은 대승 소식에 기뻐하며 스코틀랜드 장군들을 영주로 만들어줬다. 존 스튜어트는 오비니쉬르네르 등지의 영지를 받고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되었고,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롱그빌 백작에 선임되었고 던 쉬르 오롱을 추가로 하사받았다. 여기에 24명의 스코틀랜드 궁수병을 "왕의 경호원"으로 삼았다. 다만 샤를은 잉글랜드군이 회복하기 전에 노르망디를 침공해야 한다는 뷰컨 백작의 조언에 병력이 아직 부족해서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방어에 전념했다.한편,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카트린의 왕비 대관식을 거행한 뒤 잉글랜드 북부를 순시하고 있던 헨리 5세는 아군이 보제에서 참패했고 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복수를 결심하고, 4,000 ~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와서 모 공방전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