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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드 뒤누아

파일:장 드 뒤누아.png
성명 장 드 뒤누아
Jean de Dunois
생몰년도 1403년 2월 ~ 1468년 11월 24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오를레앙
사망지 프랑스 왕국 르 에이 르 로제
아버지 루이 1세 도를레앙
어머니 마리에트 덩기앙
아내 마리 루베, 마리 다쿠르
자녀 마리, 장, 프랑수아 1세, 카트린
직위 뒤누아 백작, 롱그빌 백작, 프랑스 대위원, 프랑스 중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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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2. 생애

1403년 2월 오를레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고, 어머니는 마리에트 덩기앙이었다. 마리에트는 카니의 영주이자 프랑스 국왕의 시종인 오베르 르 플라멩의 부인이면서도 루이 1세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그는 루이 1세와 마리에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기에, '오를레앙의 사생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아버지의 합법적인 가족과 함께 자랐으며, 루이 1세의 정실 부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보살핌을 받았다. 5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1년 후 발렌티나 비스콘티가 사망한 뒤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면서 미래의 국왕 샤를 7세가 될 도팽 샤를과 친분을 다졌다.

1422년부터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잃고 부르주에서 잉글랜드에 항전하던 도팽 샤를을 따랐다. 1425년 몽생미셸 요새를 잉글랜드군의 공세로부터 지켜내는 데 기여했으며, 1427년 몽타르지 공방전에서 몽타르지 요새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급습해 몽타르지를 구원하고 적병 500명을 사살하고 600명 이상을 생포했다. 1428~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오를레앙을 구원하기 위해 도팽 샤를이 파견한 무장병 수백 명의 지휘를 맡았고, 오를레앙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뒤 수비대 지휘를 총괄했다.

1429년 2월 11일,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가던 클레르몽 백작 샤를 1세와 스코틀랜드 장군 존 스튜어트 드 단리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 4,000명이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기마 궁수 및 기사 1,000명과 마주치면서 루브레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이 전투에 참여했으나 프랑스군이 패패하는 걸 막지 못하고 부상을 입은 뒤 오를레앙으로 가까스로 돌아왔다. 이후 구원군이 격파된 것에 낙담해 적 진영에 저명한 시민 대표단을 보내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 넘기고, 잉글랜드인과 부르고뉴인들이 루아르 강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도시의 세금 중 절반을 잉글랜드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오를레앙 공작의 몸값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이 제안에 혹해 파리로 달려가서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이 곧 함락될 거라 확신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은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게 넘기기 싫었기에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필리프는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한 부르고뉴군에 철수를 명령했고, 부르고뉴군은 1429년 4월 17일에 전장을 떠났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부족했던 포위 병력은 더욱 부족해졌고, 오를레앙 북쪽 도로를 막기 위해 설치될 예정이었던 북쪽 초소는 취소되었다.

1429년 4월 28일, 잔 다르크가 군인 200명을 이끌고 오를레앙에 입성했다. 뒤누아는 그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성녀라고 믿지 않았고, 시도때도 없이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반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녀를 거슬리는 존재로 여겼다. 5월 4일, 뒤누아는 잔에게 출격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생 루 요새를 공격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잔은 급히 달려가서 공격 부대에 합류했고, 생 루 요새는 함락되어 잉글랜드 병사 140명이 전사하고 40명이 생포되었다. 그 후 뒤누아는 더 큰 전과를 노리기 위해 공세를 이어갔다가 패배하면 수비대의 사기가 급락할 것이라 여기고 생 루 요새를 파괴한 뒤 오를레앙으로 돌아갔다.

5월 6일, 잔은 뒤누아를 비롯한 장군들에게 포위를 풀기 위한 결정적인 공격을 시작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특히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를 군인과 민병대의 합동 공격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누아는 그녀의 주장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일단 잉글랜드군이 수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한 오를레앙 남쪽 제방의 작은 요새인 생장르블랑을 접수했다. 얼마 후, 오를레앙에 존 파스톨프가 포위군을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파리에서 출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헛소문이었지만, 수비대 지휘관 내부에서 그들이 오기 전에 포위망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뒤누아와 오를레앙 시장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신중론을 제기했지만, 잔은 대다수 군인 및 민간인들의 호응을 받으며 적극적인 공세를 벌이자고 주장했다.

이후 군인과 민병대가 잉글랜드군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동쪽 성문에 집결했다. 라울이 이들이 무단 출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잔이 "내가 앞장서겠다"라고 외치고 모두가 열띤 호응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었다. 뒤누아는 자신의 허락 없이 출격한 잔에게 화를 냈지만,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다른 장교들과 함께 공격에 가담했다. 프랑스군은 루아르 강을 건너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를 공격했다. 잔은 최전선에 나아가 병사들을 독려했고, 프랑스군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맹렬히 공격한 끝에 요새를 점령하고 그곳에 갇혀 있던 동포들을 석방했다.

5월 7일, 아침 일찍 일어난 잔은 아침 미사를 드린 뒤 병사들을 깨웠다. 주민들은 다가올 전투에 열광했고 군대에 큰 지원을 제공했다. 뒤누아 등은 병사들을 좀더 쉬게 한 뒤 투렐 요새를 공격하려 했는데 잔이 투렐 요새 공격을 단독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이자 불만을 터트렸지만, 그녀에게 이미 매료된 장군들이 잔을 옹호하자 어쩔 수 없이 투렐 요새 공격을 승인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잔의 독려에 힘입어 투렐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을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그 후 뒤누아는 잔을 따라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1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했다. 잔이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된 뒤 이단 혐의로 화형된 후에도, 그는 프랑스군에서 계속 활약했다. 1432년 샤르트르 시를 탈환한 뒤 이곳을 군사기지로 삼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던 파리를 상대로 습격 작전을 벌였고,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서 베드퍼드 공작 존을 물리쳤다. 1436년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함께 2차 파리 공방전을 치른 끝에 파리를 탈환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1439년 7월 21일 프랑스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샤를 7세가 자신의 이복형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를 석방시키는 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자 반감을 품고, 1440년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브르타뉴의 장 5세, 알랑송의 장 2세, 샤를 1세 드 부르봉, 도팽 루이 등과 함께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정부군에게 진압되었지만, 그는 왕에게 용서받았다.

1442년 디에프 공방전에 참여해 존 탈보트의 잉글랜드군을 격퇴하는 데 일조했고, 1444년 프랑스 중장에 선임되었으며, 1449년 피에르 드 브르제와 함께 일드프랑스에서 북상해 하류 노르망디 일대를 휩쓸고 1450년 포미니 전투에 참여해 잉글랜드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르는 데 기여한 뒤 캉을 공략해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냈다. 이후 1450년 8월 가스코뉴 정복 작전에 투입되어 생통주의 코냐크와 생메그랭을 점거했고, 그해 겨울 가스코뉴의 중심지인 보르도를 포위해 1451년 6월 30일에 함락했으며,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1452년 10월 23일에 현지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보르도를 탈환하자 재차 공세를 개시해 1453년 10월 19일 보르도를 재차 함락하면서 가스코뉴가 프랑스의 영토로 완전히 굳어지는 데 일조했다.

샤를 7세 사후 프랑스 국왕으로 등극한 루이 11세의 권위주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뒤누아는 1465년 공익 연맹에 가담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파리를 포위하고 보테 성에서 수도의 유명 인사들을 맞이해 항복을 강요했지만, 파리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루이 11세와 공익 연맹간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고, 콩플랑 협약이 체결된 뒤 개혁 위원회의 의장을 맡아 공익 연맹의 이익을 챙기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나중에 루이 11세와 화해한 뒤 개혁위원회를 왕권의 충실한 도구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1468년 11월 24일 르 에이 르 로제에서 사망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리 루베(1407 ~ 1426): 메린돌의 영주이자 엑상프로방스의 회계부장인 장 루베의 딸.
  • 마리 다르쿠르(? ~ 1464): 바렝게벡 영주이자 노르망디 보안관인 장 7세 다르쿠르의 딸.
    • 마리(1440 ~ ?): 모르타니 영주 루이 드 라 헤이의 부인.
    • 장(1443 ~ 1453): 요절.
    • 프랑수아 1세 드 오를레앙-롱그빌(1447 ~ 1491): 뒤누아 백작, 탕카르빌 백작, 바렝게백과 멜룬 자작, 프랑스 대의원, 노르망디 보안관.
    • 카트린(1449 ~ 1501): 루시 백작 장 7세 드 자르브뤼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