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브르타뉴어: Brezel hêrezh dugelezh Breiz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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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341년 ~ 1365년 | |
장소 | 브르타뉴 공국 | |
원인 | 브르타뉴 공작 장 3세 사후 공작위를 놓고 몽포르 가문과 팡티에브르-블루아 가문의 대립 | |
교전국 |
브르타뉴 공국(몽포르 가문) 잉글랜드 왕국 |
브르타뉴 공국(블루아 가문)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장 드 몽포르 잔 드 플란데런 장 4세 드 브르타뉴 에드워드 3세 존 챈더스 월터 매니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로버트 놀스 토머스 다그워스 윌리엄 드 보훈 |
샤를 드 블루아 잔 드 팡티에브르 필리프 6세 장 2세 베르트랑 뒤 게클랭 장 드 보마누아르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 기 2세 드 네슬 조프루아 드 샤르니 라울 드 카우르 |
결과 | 몽포르 가문의 승리, 게랑드 조약 체결. | |
영향 | 브르타뉴 공국의 잉글랜드 예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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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41년 ~ 1365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 사후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은 몽포르 가문과 프랑스 왕국과 손잡은 블루아-팡티에브르 가문이 맞붙은 내전. 24년간 이어진 기나긴 내전 끝에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은 몽포르 가문의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승리했다. 백년전쟁의 일부로 간주되는 전쟁이며,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잔 드 플란데런이 양 진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잔 두명의 전쟁"( 프랑스어: guerre des deux Jeannes, 영어: War of the Two Jeannes)으로도 일컬어진다.2. 배경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인 발루아의 이자벨(1292 ~ 1309),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산초 4세의 딸인 카스티야의 이사벨(1283 ~ 1328), 사보이아 백작 에도아르도의 딸인 사보이아의 조반나(1310 ~ 1344)와 잇따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에 장 3세의 친형제인 기 7세 드 리모주의 딸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가 경합했다. 그는 자신과 유산 상속을 놓고 오래도록 대립했던 장 드 몽포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잔 드 팡티에브르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정작 임종을 맞이할 때 후계자를 누구로 삼을지 정해달라는 가신들의 요청에 냉담하게 답했다."그런 일로 괴롭히지 말고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장 3세가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브르타뉴 공국의 주권자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누구를 선임할 지 정해야 했다.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는 자신이 장 3세와 가장 가까운 친족과 결혼한 사실을 근거로 브르타뉴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브르타뉴는 1297년 이래로 프랑스 왕국의 일부였으므로 종주국의 법률이 브르타뉴에 적용해야 하니 잔 드 팡티에브르는 브르타뉴 여공작이 될 수 없고, 장 3세의 이복 형제인 자신이 브르타뉴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리에서 이 문제를 놓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장 드 몽포르는 필리프 6세가 조카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잔 드 팡티에브르와 샤를 드 블루아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러 파리로 간 틈을 타 브르타뉴를 선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인 낭트를 장악한 뒤 6~7월 동안 렌, 말레스트로이트, 반, 퐁티비, 엔봉, 캥페를레, 프리지악, 킹페르, 브레스트, 생브리외, 디낭, 모롱 등지를 돌며 지지를 호소했다. 프랑스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길 희망했던 브르타뉴인들이 대거 호응하면서, 그는 약 20곳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다만 장 3세를 모셨던 대귀족 대부분은 그에게 협조했다간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는 영지를 몰수당할 우려가 있다고 여기고, 장 드 몽포르에게 가담하지 않았다. 여기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경의를 표하고, 그로부터 리치먼드 백작위 및 영지를 수여받았다.
1341년 9월, 파리 법원은 샤를 드 블루아와 잔 드 팡티에브르 부부의 손을 들어줬다. 또한 필리프 6세는 자기의 허락 없이 브르타뉴 공작을 칭하고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을 보낸 장 드 몽포르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그의 영지인 몽포르 백국과 리모주 자작령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내전이 발발했다.
3. 경과
3.1. 장 드 몽포르의 몰락과 잉글랜드 왕국의 개입
1341년 10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가 이끄는 군대가 샹토소에 도착한 뒤 공성전에 착수했다. 장 드 몽포르는 처음엔 잉글랜드의 지원이 올 때까지 낭트에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샤를의 뒤에 필리프 6세가 파견한 또다른 프랑스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점점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저버리고 적에게 투항하려 했다. 이에 장은 지금 당장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16일 낭트에서 출진해 샹토소 구원에 착수했다.당시 샤를 드 블루아는 장성들에게 공성전을 맡기고 자신은 샹토소에서 3마일 떨어진 로모(l'Humeau) 농장에 머물렀다. 몽포르의 부하들은 이곳을 급습해 샤를의 경호원들을 거의 압도했다. 그러나 샤를이 농가의 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항전하는 바람에 제때에 잡는 데 실패했고, 그 사이에 프랑스군이 샤를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로모 농장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장은 낭트로 도주했고, 많은 부하들이 프랑스 기병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죽거나 사로잡혔다.
낭트에 도착한 장은 시민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한 달 안에 잉글랜드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할 테니 그 때까지 항전하자"라고 설득해 겨우 자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샤를의 군대가 도시를 에워싸서 공세를 퍼붓자, 낭트 시내에서 장을 넘기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이에 장은 10월 말에 용병과 민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급습했지만, 용병들이 전투 도중에 적군에 귀순하는 바람에 민병대가 몰살당하는 와중에 홀로 성안으로 도주했다.
그 후 샤를이 시신의 머리를 베어서 투석기를 통해 성내로 발사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시 의회가 장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결국 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11월 2일 샤를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이 엔봉 공방전에서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를 상대로 분전하면서 쉽사리 끝내지 못하다가,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엔봉에 상륙하자, 샤를 드 블루아는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342년 8월,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또다른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브레스트 항구에 상륙한 뒤 브르타뉴 서부 일대를 신속하게 공략했다.
그 해 10월, 아르투아 백작을 자칭하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으로서 활동하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10,0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반으로 진군했다. 플란데런의 잔과 월터 매니도 엔봉에서 100명의 기병과 100명의 궁수와 함께 로베르에 합류했다. 이들은 반 성을 향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지만, 반 성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브르타뉴 마르쉐 영주이자 기사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결사적으로 항전해서 실패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계략을 통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로베르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반 성문 앞에 불을 피워서 수비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동안 월터 매니가 이끄는 소규모 장병들이 수비대가 비워두고 있던 성벽을 기어올라간 뒤 성이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이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매니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 여전히 싸우려 하는 적병들을 압도했다. 플란데런의 잔은 다음날 반에 도착한 뒤 닷새 동안 머물다가 로베르에게 반 성의 권리를 넘기고 월터 매니와 함께 엔봉으로 돌아갔다.
한편, 올리비에 4세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해 12,600명의 병력을 모아서 반으로 향했다. 그 해 11월 올리비에 4세가 들이닥쳤을 때, 이전 공성전 때 파괴되었던 성벽은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잉글랜드군은 렌으로 가버렸기에 조기에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로베르는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뒤 런던으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반은 철저하게 약탈당한 뒤 올리비에에게 재귀속되었다.
이 무렵 잉글랜드 본군을 이끌고 브레스트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는 반이 재차 함락되었으며 로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르투아 백작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반으로 진격했다. 1342년 12월 5일 반을 포위한 에드워드 3세는 주변 마을을 모조리 약탈했고 성을 수시로 공격했다. 올리비에 4세는 이에 맞서 종종 출격해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생포되었다. 하지만 수비대는 지휘관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스태퍼드 백작 랄프를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수만 병력을 규합하여 브르타뉴로 진군해 플로에르멜 마을 인근에 주둔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수비하기 좋은 지형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터라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고, 갈수록 쌓여가는 재정 적자에 큰 부담을 느꼈다. 에드워드 3세 역시 안토니오 도리아가 이끄는 프랑스-카스티야 함대가 무기와 보급품을 수송하는 모든 잉글랜드 선박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곤경에 처했다.
3.2.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과 전쟁 재개
1343년 1월 19일, 교착 상태에 처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휴전 촉구에 따르기로 하고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그들은 3년간 휴전을 준수하기로 했고, 반은 클레멘스 6세의 추기경이 임시로 관리하기로 했다. 또한 루브르 감옥에 갇혀 있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는 잔 드 팡티에브르가 물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 주민과 지역 성직자들은 장 드 몽포르에게 충성했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몇 달 후인 1343년 9월 추기경을 몰아낸 뒤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였다.반 수비를 맡다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던 올리비에 4세는 잉글랜드로 끌려갔다가 얼마 안가서 반 수비대가 사로잡았던 스태퍼드 백작 랄프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우 낮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로 인해 그가 반 수비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이 프랑스 왕실에서 피어올랐고, 샤를 드 블루아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당장 잡아들이라고 요청했다. 필리프 6세 역시 올리비에 4세를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후, 올리비에 4세와 15명의 브르타뉴 영주들은 프랑스 땅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파리로 이송되었다. 올리비에 4세의 아내 잔 드 벨빌은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올리비에 4세는 1343년 8월 2일 레 알르(Les Halles)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수급을 낭트의 소베투 성문에 내걸고 나머지 시신을 파리 성문에 내거는 조치가 내려졌기에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이후 올리비에 4세의 미망인 잔 드 벨빌은 왕의 하사관에게 뇌물을 주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추방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이에 분노한 그녀는 두 아들 올리비에와 기욤을 거느리고 2척의 배에 탑승한 뒤 프랑스 선박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이고 전 재산을 털어 군대를 양성하면서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9개월 후 프랑스 국왕의 일부 군함이 이들의 배를 나포해버렸고, 잔 드 벨빌은 두 아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탈출했지만 5일간 표류하면서 아들 기욤을 잃었다. 이후 잔과 남은 아들 올리비에는 몽포르 가문 지지자들에게 구조된 뒤 모를레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44년 3월, 샤를 드 블루아는 반 주민들이 추기경을 몰아내고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인 것을 빌미로 삼아 평화 협약이 깨졌다고 주장하며 공새를 개시해 몽포르 파벌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1344년 3월, 샤를은 캉페르를 포위해 5월 1일에 함락시킨 뒤 1,400 ~ 2,000명 가량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몽포르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생포된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따로 구금되었지만, 파리로 이송된 뒤 반역죄가 적용되어 처형되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로 비밀리에 이동해 세력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45년 3월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고 브르타뉴에 귀환했지만 중병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했다. 여기에 엔봉 공방전에서 맹활약했던 잔 드 플란데런은 정신병에 걸려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틱힐 성에 감금되었고,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인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6살 소년에 불과했다. 이제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잔 여백작과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이리하여 전쟁은 잔 드 팡티에브르와 샤를 드 블루아 부부의 승리로 종결되는 듯 했지만, 1346년 여름 에드워드 3세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에게 정예병 수백 명을 맡겨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로 파견하면서 재개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브르타뉴 해안지대의 몇 개 마을과 요새를 공략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1346년 6월 9일, 노샘프턴 백작의 부관 토머스 다그워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 180명은 생폴드레옹에서 샤를의 군대와 조우했다.
다그워스는 근처 언덕을 향해 빠르게 이동한 뒤 그곳에 참호를 파고 농성을 준비했다. 샤를은 지금까지의 전투를 통해 기병대를 언덕 경사면을 통해 진군시켰다가는 적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로 인해 제압당할 거라고 보고, 이들을 제압할 유일한 방법은 보병대를 투입해 정면 공격을 가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모든 기병들에게 말에서 내린 뒤 잉글랜드군을 향해 3개 방향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화살비를 뚫고 언덕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했지만 잉글랜드군의 결사 항전과 서로 간의 협력 부족으로 인해 적을 압도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샤를은 마지막 공세를 몸소 이끌었지만 이마저도 격퇴되자 공격을 포기하고 브르타뉴 동부로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이날 전투에서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많은 잉글랜드인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손실은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잉글랜드군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샤를을 격파한 잉글랜드군은 여세를 몰아 7월 캉페르 탈환에 착수했다가 샤를에게 격퇴된 뒤 엔봉으로 철수했다.
3.3. 라 로슈데리앙 전투와 지리멸렬한 소모전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완패하자. 민심은 또다시 요동쳤고,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잉글랜드군과 은밀히 접촉했다. 1347년 5월, 중장병 1,800명, 궁수 600명, 석궁병 2,000명, 다수의 농민병을 모은 샤를은 브르타뉴의 민심을 수습하고 잉글랜드군을 브르타뉴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재개하기로 했다. 그의 첫번째 목표는 라 로슈데리앙이었다. 그는 이곳을 포위 공격하면서 잉글랜드 구원군이 근처에 이르면 즉시 요격해 궤멸시키기로 했다.1347년 5월 20일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마을을 에워싸고 북쪽, 동쪽, 남쪽에 3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한 뒤 다양한 크기의 투석기 9개로 포격을 가했다. 가장 큰 투석기는 무게가 300파운드에 달하는 돌을 던졌고, 이로 인해 마을 주지사의 집이 부분적으로 파괴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라 로슈 데리앙의 잉글랜드 주지사 리처드 토스햄은 그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인사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을 거부했다.
라 로슈데리앙 마을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토머스 다그워스는 라 로슈데리앙에서 남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카하익스에서 기마병 300명, 궁수 400명을 모은 뒤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행진했고, 6월 중순에 마을에서 9마일 떨어진 베강의 대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후 야밤에 조우디(Jaudi)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접근하기로 하고, 일부 부대는 조우디 강 서쪽 기슭의 도로를 따라 행군하며 소음을 일으켜서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잡아끌게 했다.
6월 20일 새벽에 도로변에서 소음이 일자, 샤를은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군에 가만히 서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다그워스의 잉글랜드군은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뒤 마을 동쪽에 있는 숙영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사전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곧바로 반격했고, 잉글랜드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는 적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지휘관 다그워스는 부상을 입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테지만, 날이 밝을 무렵 아군이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 토스햄은 성벽을 지키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마을 밖으로 출격해 샤를의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이를 예상치 못했고, 많은 병사가 겁에 질러 달아났다. 진영을 떠나지 않은 다른 두 진영의 브르타뉴-프랑스군은 차례로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무너졌다. 다그워스는 구출되었고, 샤를은 치열한 격투를 벌이다가 17개의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프랑스군이의 사상자는 600명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었지만, 상당한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샤를 드 블루아는 생포된 후 치료를 받은 뒤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수년 동안 투옥되었다. 이렇듯 몽포르 파벌과 블루아 파벌 모두 지휘관이 사라지면서 지리멸렬해졌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노르망디-플란데런-가스코뉴 등 다른 전선에 전념했지만 이곳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브르타뉴 내전은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그 와중에 기사도의 상징으로 간주된 30인의 결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전황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352년,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브르타뉴를 석권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원수 기 2세 드 네슬에게 브르타뉴 원정을 맡겼다. 기 2세 드 네슬은 왕명을 받들어 브르타뉴의 도시 렌에 병력을 소집한 뒤 플로에르멜, 푸쥬헤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포위를 이어가게 한 뒤 렌으로 가서 병력을 더 끌어모으려 했다. 한편 브르타뉴 주둔 영국 사령관 월터 벤틀리는 잉글랜드에서 데려온 1,500명의 중장병 및 장궁병을 이끌고 두 곳을 구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는 포위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플로에르멜에 있던 브르타뉴의 대리 수비대장 로버트 놀스와 합세했다.
기 2세는 벤틀리가 포위망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쳐부수기 위해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벤틀리는 이에 대응해 1352년 8월 14일 렌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모롱 마을 동쪽 언덕 꼭대기 가장자리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각 측면에 기병과 궁수병을 배치했으며, 중앙에 중장병을 배치했다. 이후 벌어진 모롱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했고, 프랑스 사령관 기 드 네슬과 프랑스 기사 500명이 전사했다. 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지만,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 방면 잉글랜드군의 전력 손실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보내줘야 했던 것을 보면 역시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롱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1353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당국은 샤를 드 블루아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하되, 샤를 드 블루아는 300,000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하고, 브르타뉴는 잉글랜드와 영구적으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나바라 왕국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의 훼방으로 깨졌다. 1356년 8월 10일, 샤를 드 블루아는 700,000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하기로 약속한 후 런던 탑에서 9년만에 풀려나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 후 샤를은 몽포르 가문과의 전쟁을 재개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브르타뉴 전선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데다 몽포르 가문과 샤를 모두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어서 승부를 가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1356년 9월 19일,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궤멸되고 장 2세가 생포되었다. 이 일로 민심은 요동쳤고, 브르타뉴의 많은 도시와 마을이 잉글랜드군에 귀순했다. 1356년 10월 3일,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내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브르타뉴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며 여전히 잔 드 팡티에브르와 샤를 드 블루아에 충성하는 도시인 렌을 포위했다. 그러나 렌 수비대의 항전에 고전하다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역공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357년 7월 5일에 철수했다.
3.4. 최후의 결전
1363년, 장 드 몽포르와 잔 드 플란데런의 아들로 잉글랜드 궁정에서 교육받던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22세의 나이에 추종자들과 용병을 끌어모아 군대를 편성한 뒤 브르타뉴에 상륙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에 맞서기 위해 진군했고, 양자는 베서렐에서 대치했다. 그 해 7월, 양자는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합의를 이루었다. 이에 따르면, 블루아는 낭트 시를 포함한 북동부를 가지고, 몽포르는 남부와 서부를 가질 예정이었다. 공작 칭호를 사용할 권리에 대해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잔 드 팡티에브르가 자신이 온전한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한다며 합의를 거부해, 협정은 무효로 돌아갔다. 이 일은 전쟁에 지친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샤를 드 블루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1364년 2월 2일, 샤를 드 블루아와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아키텐 공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브르타뉴 내전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364년 7월, 잉글랜드에서 용병대를 모집한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들 중 블루아 가문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오레를 포위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진군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외곽 북동쪽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포위군은 마을 북쪽에 있는 호수를 옆에 낀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익을 맡았고, 장 4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으며, 로버트 놀스의 또다른 잉글랜드군은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휴 칼블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 역시 3개 대열을 결성했다. 샤를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고, 게클랭은 중앙을 이끌었으며, 오세르 백작 장 3세는 좌익을 이끌었다. 누가 프랑스군 예비대를 이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 4세와 샤를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랜 내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브르타뉴를 나눠 가지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군들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샤를이 추가 제안을 하려 한다면 그가 보낸 사절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잉글랜드 군과 동맹한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아버지의 원수인 샤를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게클랭을 비롯한 블루아 지지자들 역시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이 잘 돼서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랐던 양측의 많은 브르타뉴인들은 이에 실망해 탈영했다.
그 후 양측은 서로를 향해 진군했고, 잉글랜드 장궁병과 프랑스 석궁병간의 사격전이 펼쳐졌다. 이후 양측 맨앳암즈들과 창병들이 정면 충돌했다. 양자 모두 길고 잔혹한 전쟁을 이번 전투에서 끝내고 싶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반나절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끝에, 존 챈더스의 잉글랜드 우익 부대가 오세르 백작의 좌익 부대를 압도했다. 오세르 백작은 눈 하나를 잃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게클랭이 이끄는 중앙 부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중앙 부대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챈더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적 중앙 부대 측면을 요격했다.
아군이 위급한 것을 본 샤를 휘하 우익 부대 상당수가 도주했고, 후방에 있던 예비대 역시 패주했다. 장 4세와 로버트 녹스는 존 챈더스와 함께 중앙의 게클랭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 예비대를 이끌던 휴 칼블리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블루아군은 패주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게클랭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날 전투에서 블루아 가문의 브르타뉴-프랑스 동맹군은 800명이 죽고 1,2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몽포르 가문의 브르타뉴-잉글랜드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지만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4. 결과
오레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상당량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24년 만에 종식되었다.오랜 내전에서 승리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된 장 4세는 자기를 옹립하는 데 기여한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365년, 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메리 공주는 결혼식 직후 사망했지만, 장 4세는 에드워드 3세의 허락 없이는 재혼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1366년,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의붓딸인 조앤 홀랜드와 재혼했다. 1362년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지만, 이 공국은 이후로도 수년간 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브레스트 등 해안 지대의 여러 요새와 주변 지역의 통제권을 여러 잉글랜드 대장과 영주에게 위임하거나 확인해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실과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베르트랑 뒤 게클랭, 올리비에 드 모니 등 친 프랑스파 브르타뉴 인사들은 그를 불신했다.
장 4세는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돕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그가 잉글랜드와 연합할 가능성이 높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게클랭과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을 비롯한 샤를 5세의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브르타뉴 인사들은 장 4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 샤를 드 블루아가 죽은 후에도 브르타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잔 드 팡티에브르 역시 장 4세와 대립했다. 1372년 10월,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렌을 포위했다. 렌에 있었던 브르타뉴 공작부인은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부르봉 공작의 병사들은 공작부인의 짐을 수색해 브르타뉴 공작이 에드워드 3세와 체결한 비밀 조약의 사본을 발견했다. 이에 장 4세는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잉글랜드군을 끌어들인 것은 인정하지만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등 반항적인 귀족들에 맞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협상 끝에 브르타뉴 공작은 공국에서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은 렌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를 맺었다.
그러던 1373년 3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생말로 항구에 상륙해 카스티야 선박 7척을 격파하고 2,000명의 맨앳암즈와 2,000명의 궁수병을 육지에 내려보내 브레스트를 구원했다. 샤를 5세는 장 4세가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동의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하고, 게클랭에게 브르타뉴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게클랭은 기다렸다는 듯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2달 만에 브르타뉴 대부분이 프랑스에 넘어갔고, 브르타뉴 서부 해안 요새들인 브레스트, 오레, 베세렐, 데르발만이 프랑스군에 넘어가지 않았다. 장 4세는 4월 28일 브르타뉴를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73년 8월 ~ 12월, 장 4세는 곤트의 존이 칼레에서 출발해 보르도까지 진군하면서 단행한 약탈 행렬에 참여했다.
1378년경, 잉글랜드군은 칼레, 보르도, 바욘 등 몇몇 항구만을 확고하게 통제했다. 반면, 그들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브레스트 등 여러 요새를 장악했고, 생 말로 항구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에서 새로운 항구를 확보하기 전에 브르타뉴를 확실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1378년 12월 18일 잉글랜드에 망명하고 있던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모든 영지를 몰수하고 브르타뉴를 왕실의 직할지로 삼겠으며,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브르타뉴의 총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지난날 장 4세와 오랜 세월 내전을 치러가며 대립했던 잔 드 팡티에브르는 프랑스 왕실이 브르타뉴 전역을 직할지로 삼아 자치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다수 브르타뉴 영주들 역시 여기에 동감했다. 그들은 1379년 4월 25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장 4세를 브르타뉴에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 대적하기로 결의했다. 임시 정부는 4명의 원수와 4명의 민정 수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국을 방어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구당 1프랑의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장 4세는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1379년 8월 3일 셍쎄흐벙에 상륙해 브르타뉴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때 프랑스 무관장 게클랭은 장 4세를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브르타뉴인인 그가 브르타뉴 영주들의 뜻에 동조하고 자신에게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게클랭은 왕이 자신에게 그런 의혹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격분해 무관장의 검을 왕에게 반환하고 카스티야로 가려 했다. 그러다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개입으로 샤를 5세의 신임을 되찾았다. 이후 샤를 5세는 브르타뉴 민심이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에서 무력을 앞세워 그곳을 평정한들 장기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장 4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샤를 5세는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망했고, 새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섭정단이 협상을 이어간 끝에 1381년 5월 2일에 제1차 게랑드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장 4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 공인되었다.
5.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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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 전투에서 전사한
샤를 드 블루아의 유해는 갱강에 묻혔다. 브르타뉴 주민들은 그의 무덤을 자주 방문했고, 그를 추종했던 브르타뉴 주교들은 그를 순교자로 홍보하면서, 그의 무덤에 기도하러 오는 순례자들에게 샤를의 모습이 담긴 납 조각상을 배포했다. 1368년 2월 1일,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파견한 부하들이 디낭에 있는 코르들리에 교회 예배당에 걸려 있던, 샤를 드 블루아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을 파괴했다. 그런데 2월 3일, 그 예배당에 찾아온 신자 수백명은 그림의 잔해에서 가슴과 목 주위로 두 줄기의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이 잔해물을 유물로 수집했다. 생 말로의 주교 기욤 폴라는 예배당의 수호자에게 그림을 복원하라고 명령했다.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는 오랫동안 내전을 치른 상대였던 샤를이 순교자로 추앙받는 걸 막으려고 무덤에 순례하는 자들을 막으려 애썼지만, 순례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찾아갔다. 1371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샤를 드 블루아의 시성 조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장 4세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러나 시성 절차는 교황청의 로마 이전과 뒤이은 서방교회 대분열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끝내 집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샤를 드 블루아를 사실상 성인으로 여겼고, 교황청의 승인 없이 19세기까지 그의 축일을 기렸다. 그러던 1894년 시복 절차가 재개되었고, 1904년 12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는 ' 복자 블루아의 샤를(Blessed Charles of Blois)'로 시복되었다. 축일은 9월 30일이다. - 샤를 드 블루아와 잔 드 팡티에브르의 아들인 장 1세 드 샤티옹은 팡티에브르 백작, 리모주 자작, 아보구르 남작, 아베네스 영주를 역임하면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장 1세와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딸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의 사이에서 태어난 올리비에 드 샤티옹은 조부모 대에 잃어버린 브르타뉴 공작위를 탈환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장 4세의 아들로서 브르타뉴 공작에 취임한 장 5세를 타도할 음모를 꾸몄다. 1420년, 장 5세는 샹토소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갔다가, 팡티에브르 백작부인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과 올리비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를 매일 새로운 감옥으로 옮기며 공작에서 사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위를 올리비에에게 넘기라고 협박했다. 이에 장 5세의 아내인 잔 드 발루아는 브르타뉴의 모든 남작들에게 공작을 구출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이에 호응해 팡티에브르 가문의 모든 성을 하나씩 포위했다. 얼마 후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이 잔의 군대에 사로잡히자, 올리비에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그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갇혔던 샹토소 성채를 완전히 파괴했고, 올리비에의 모든 영지를 압수하고 올리비에를 추방했다. 또한 게랑드 조약을 파기해, 몽포르 가문이 끊어진 뒤에도 팡티에브르 가문이 공작위를 잇지 못하게 했다.
- 1450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가 임종을 눈앞에 뒀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1세의 딸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두 딸 마르그리트와 마리를 뒀지만, 두 딸 중 하나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세우지 않고 형제 피에르 2세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이에 처가인 스코틀랜드 정부는 그의 장녀인 마르그리트가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피에르 2세도 슬하에 자식이 없자, 제2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막기 위해 친사촌인 에탕프 백작 프랑수아와 조카 마르그르리트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에탕프 가문을 포섭했다. 피에르 2세가 1457년 9월 22일 사망한 뒤 피에르 2세와 에탕프 백작 프랑수아의 삼촌이자 프랑스 무관장을 맡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아르튀르 3세로서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지만 1년 3개월 후인 1458년 12월 26일에 사망했고, 프랑수아가 '프랑수아 2세'로서 브르타뉴 공작에 등극했다.
6. 주요 전투 목록
- 샹토소 전투(1341년 10월 14~16일)
- 엔봉 공방전(1342년 5~6월)
- 반 공방전(1342년 초 ~ 1343년 1월)
- 브레스트 해전(1342년 8월 18일)
- 모를레 전투(1342년 9월 30일)
- 생폴드레옹 전투(1346년 6월 9일)
- 라 로슈데리앙 전투(1347년 6월 20일)
- 30인의 결투(1351년 3월 28일)
- 모롱 전투(1352년 8월 14일)
- 렌 공방전(1356년 10월 3일 ~ 1357년 7월 5일)
- 오레 전투(1364년 9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