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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000080><colcolor=#00386a,#fefd48> ▲ 청프 전쟁 전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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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884년 (덕종 10년) 8월 ~ 1885년 (덕종 11년) 4월 | |
장소 | 청나라 화남(華南), 대남국 북부, 타이완 섬 | |
교전 세력 |
<rowcolor=black> 프랑스 (공세) 승
|
청-흑기군-대남국 연합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쥘 그레비 아메데 쿠르베 세바스티앵 레스페 루이 드 리즐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자크 뒤센 로랑 조바니넬리 |
청군 지휘관 광서제 (청 황제) 애신각라 혁흔 좌종당 당경숭 유명전 장패륜 반정신 풍자재 손개화 |
흑기군 지휘관 유영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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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국 지휘관 함의제 황계염 (호앙께비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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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프랑스군: 15,000명~20,000명 | 연합군: 25,000명~35,000명 |
피해 | 사상자: 2,100명 | 사상자: 10,000명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프랑스의 전략적 승리 - 청-흑기군-대남국의 전술적 승리 -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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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에 있었던 대남국의 종주권을 두고 1884년 8월에서 1885년 4월까지 청나라와 프랑스가 맞붙은 전쟁.베트남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전통적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그런 베트남이 외세 프랑스 때문에 위기에 처한 이상 중국은 베트남을 도와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2차 아편전쟁까지 일어난 마당에 유럽 열강의 영향권이 확장되는 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청나라가 전략적으로 패배했고, 결국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가 가속화되었다.[1]
2. 전개
2.1.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
1858년, 프랑스는 알짜배기 식민지인 인도를 두고 쟁탈전에서 영국에게 밀려난 후 다른 먹잇감을 찾는 과정에서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라는 구실이 있던 베트남의 홍강 삼각주, 오늘날의 하노이 지역을 침공하였다. 프랑스는 홍강 수로를 이용해 청의 윈난성 방향 교역로를 장악하려 했다. 당시 베트남의 수도는 베트남 중부의 후에였지만, 하노이 지방도 당연히 베트남의 핵심 곡창지대이므로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프랑스군이 침범해 오자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태평천국의 분파를 이끌던 유영복(劉永福)이라는 인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유영복이 이끄는 부대를 흑기군(黑旗軍)이라고 했는데 흑기군은 1873년 12월 무렵, 6백 명의 병력으로 하노이에서 18명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에 프랑스는 550명의 해군 수병과 해병대를 파견했고 이듬해 5월 하노이 서쪽 외곽에서 3천 명의 베트남-흑기군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에 밀려 패배했고(프랑스군 35명 전사 52명 부상, 흑기군 50명 전사 56명 부상) 당시 사령관이었던 리비에르는 전사했다.
2.2. 간명 조약
12월, 프랑스 의회는 군비 추가와 함께 15,000명의 증원군 파병을 승인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메데 쿠르베 제독은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아 등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손코이 강 삼각주를 제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베트남 쪽에서도 별 수 없이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고, 청나라는 이 제안을 받고 군대를 파견했다.[2]그러나 이 무렵 청나라는 신강에서의 전쟁이 막 끝나기도 했고, 이홍장은 베트남에 힘을 쏟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되도록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를 원했기에 1884년 4월,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함께 천진에서 만나, 이른바 간명(簡明) 조약을 체결했다.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의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2.3. 프랑스의 기습 공격
그런데 프랑스는 간명 조약에 조인하고 난 뒤, 바로 청군을 공격했다. 청군이 국경선까지 철수한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간명 조약에는 맹점이 있었다. 조약에서는 분명히 청군의 철수를 약속했지만 언제까지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이 없었다. 만일 조약 내용에 청군이 특정 시한 내에 철수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면 그 전까지는 프랑스가 공격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간명 조약에는 철수 기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니 프랑스가 지금 청군을 공격해놓고 '왜 먼저 청군이 물러나지 않았느냐.'고 논리를 펼 수 있는 셈이었다. 이에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는 전쟁 비용 2억 5천만 프랑의 배상과 청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1개월 이내에 다 철수시킬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푸저우(福州)의 마미 군항(馬尾 軍港)을 공격했다. 이것이 마미 해전이다. 당시 선정대신을 맡으며 복주에 체류 중이던 하여장(何如璋)은, 나름대로 사태를 더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덕분에 프랑스 함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복건함대를 전멸시켰다. 무엇보다 마미 조선소는 무려 은 2천만 냥을 들여 만든 양무파의 기대 그 자체였지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2.4. 개전
이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복건함대가 전멸한지 3일 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해전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선 의외로 청군이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통킹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교환비는 1 : 10을 넘겼다. 다만 압도적인 인명피해에도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아 프랑스군 지휘관마저 역관광시키고 교착상태를 만든 점에선 청군의 전술적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프랑스군은 심각한 아노미 상태에 빠지며 물자까지 다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고 본토에 패전 가능성이 있다는 전보를 보내, 이 여파로 쥘 페리 총리는 불신임안을 받고 내각까지 총사퇴를 하게 된다.[3] 비록 청군은 교환비에서 압도적으로 피해를 많이 봤고 전황에서 확실하게 유리하다고는 볼 수 없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전투 경과로는 협정에서 프랑스가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었으나...
2.5. 종전
청나라 조정은 프랑스에게 타협하여 화친을 구하고 1885년 4월 7일 전선에 정전하고 철병하라는 윤지를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화의가 시작되었는데 이전에 맺은 간명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쪽은 프랑스였다. 간명 조약을 맺을 당시의 프랑스는 중국에 대해 우위에 있던 입장인데, 정작 청나라가 프랑스를 상대로 여러 차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조건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4]결국 청나라의 실세였던 이홍장은, 군사력을 베트남에 끊임없이 투사하는 프랑스보다는 근대화된 지 얼마 안 된 일본이 더 약하고 쉬운 상대라 생각했기에 베트남을 버리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프랑스에게 베트남을 통째로 갖다 바쳤다. 이홍장의 이 선택은 결국 9년 후에 큰 후환으로 되돌아온다.
3. 결과
1:5 라는 압도적인 교전비를 내며 프랑스가 청나라에 압승한다. 청나라와 프랑스는 1885년 톈진조약을 체결한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은 10억 냥 이상을 지출했고 2억 냥 가량의 빚을 지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조공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이 사라졌다.[5] 프랑스의 경우에는 드디어 청나라 세력을 완벽하게 일소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여 본격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지화에 착수하게 된다.이와 같이 중화제국-조공국의 관계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끼어들어 중국을 압도하고 조공국을 자기 식민지로 빼앗는 구도는 후일 청일전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쑨원 같은 경우는 중화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가 해체되는 이같은 사태를 보고, 자신이 청나라 정부 전복에 뜻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청나라의 후진적인 체제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만주가 전략적인 요충지로 청프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의 쟁탈목표가 되었다.
4. 여담
청프전쟁은 조선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갑신정변은 조선 주재 청군 병력의 절반인 1,500여 명이 청프전쟁에 투입된 것을 기회로 발생했다. 그러나 정변 세력의 보유 병력은 그 절반만 남은 청군과 싸우기에도 너무 적었고, 다케조에 공사가 직접 데려온 휘하의 일본군 수비병력도 약속을 어기고 급히 인천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남은 청군의 규모로도 충분히 반격이 가능했다. 결국 갑신정변은 청군의 신속한 투입으로 말미암아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또한 청나라 조정도 베트남에서 물러나서라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지키려 했기에 후속조치도 강경했다.5. 창작물
2017년, 중국에서 청프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용의 전쟁>이 개봉했다. 본문에 언급한 풍자재가 주연으로 등장하며 진남관 전투가 중요 소재로 등장한다.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청국이 끝까지 버틴덕분에 무승부로 끝나고 베트남은 청국과 프랑스의 공동 보호국이 된다. 청나라는 처음으로 서구 열강을 이겼다고 좋아하지만 얼마 안가 청일전쟁이 터지고 그 사이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다시 침공해서 결국 역사대로 베트남을 빼앗긴다.
[1]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가 가속화된 것과 같다. 다만, 청일전쟁 직후에는
삼국간섭이 일어나 러시아가 일본의 야욕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
[2]
당시 베트남과 청나라의 관계는 과거 한반도의 국가와 중화제국이 맺었던 조공 책봉 관계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3]
키루아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네그리에 장군을 대신해 프랑스군 지휘권을 받은 에그리제는 청군이 랑선을 포위해 보급로를 끊을 준비를 했다고 판단하고 퇴각결정을 내렸다.
[4]
물론 이것이 청나라의 승전 가능성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 해군은 프랑스 함대에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였고, 청 육군은 청나라 본토에 프랑스군이 진입하는 것까지는 막아냈으나 그렇다고 베트남으로 다시 밀고 내려감으로써 반격을 가할 형편 또한 되지 못하였다.
[5]
조공-책봉 질서는 비록 형식적이긴 했지만, 바로 그 형식이 전근대 중화제국에게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아이덴티티였다.